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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오브블랙필드(2부)-16화 (435/520)

제8장.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김미영을 내려 준 강찬은 최종일, 우희승, 이두희와 함께 움직였다.

결심이 섰으니 망설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기를 들어서 가장 먼저 고건우의 번호를 찾았다.

[여보세요?]

“강찬입니다, 원장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고건우는 무슨 일이냐는 질문 따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사무실로 가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대통령님을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바로 갈 테니 사무실에서 보지요. 나도 그곳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고건우의 뜻이 워낙 확실해서 더는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강찬은 곧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모처럼 외출을 나간 모양인지 석강호와 제라르는 보이지 않았다.

숨도 쉬어야 할 거다. 두 놈 모두.

제라르야 미쉘이 있다고 쳐도 가족 모두 캐나다로 날아간 기러기는 어디 간 거지?

강찬은 재킷을 벗고 창가에 앉았다.

중국이 양범을 구금한 이유, 미국, 영국, 이스라엘, 일본이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눈에 걸리지 않은 이유를 알아내는 게 급했다.

차세대 발전 시설을 짓기 전과 가동 테스트를 하고 난 다음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발전 시설을 깨부술 수만 있다면 전쟁쯤 얼마든지 감당하겠다는 의지로 적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

도이슨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알아내는군. 확실히 무서운 인간이야.”

“위성 발신기 신호를 분석하면 우리가 사용했던 위성까지는 발각됩니다.”

“그렇겠지. 별 볼일 없던 국가정보원의 능력이 지금은 우리와 맞먹을 정도니까. 이렇게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인가?”

“한반도를 직접 노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CIA가 먼저다. 그가 날뛰는 동안 그런 일을 벌였다가 뒤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 도대체 협상이나 물러나는 법이 없는 인간이니까.”

도이슨은 책상 앞에 선 요원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셔먼부터 로망, 심지어 이스라엘은 정보국 수장과 다윗의 별을 동시에 잃었어. 그를 가볍게 계산한 대가가 그렇다. 한반도에 지진을 일으키는 순간, 우리에게 핵폭탄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각오쯤 필요하다.”

“한국은 핵무기가 없습니다.”

요원의 대꾸를 도이슨은 한심하다는 투의 시선으로 치워 버렸다.

“자네는 농구를 좋아하나?”

“저는 축구가 더 좋습니다.”

“슛을 날리기 전에 계속 공을 돌리지. 지진으로 양범이 힘을 잃었고, 프랑스에서는 라노크가 밀려난다. 이제부터 CIA가 활약하고 나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골대가 보일 거다.”

도이슨이 미소를 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완벽한 슛을 날릴 기회다. 그때 한반도에 지진이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난다. 위성 신호에 대한 질문이 오면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해라.”

“알겠습니다.”

도이슨이 손짓했고, 요원이 몸을 돌렸다.

***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Clermont Ferrand) 근교, 리드 라 폴르(Ned de la Poule) 지역의 별장이었다.

산에 틀어 앉은 별장은 앞으로 맑은 호수를 펼치고 있어서 풍광이 기가 막혔다.

라노크는 2층에 만들어 놓은 테라스에 앉아 원형 탁자에 놓인 홍차 잔을 들었다.

“파파스.”

안느의 걱정스러운 표정에도 잔을 내려놓은 라노크는 태연한 얼굴로 시가를 집어 들었다.

시가의 끝을 잘라 낸 그가 보조 탁자에서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였다.

“후.”

산의 맑은 공기, 홍차, 그리고 시가의 향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블랙헤드를 이용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까지가 나의 역할이었다. 그때까지 나와 바실리, 루드비히, 그리고 우리의 영웅은 완벽하게 베일에 싸인 채 움직였고.”

안느가 탁자에 있던 담배를 집고서 불을 붙였다.

“상황이 뒤집혀서 이제는 저들이 어둠에 몸을 숨겼고, 우리는 이렇게 테라스에 앉아 있는 모습까지 훤히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지.”

“아빠의 능력이라면 정보총국을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그에게는 당장 힘을 실어 줄 사람과 조직이 필요해요.”

라노크는 고개를 저었다.

“바실리와 루드비히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라. 정권의 최고 권력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낮과 밤이 뒤엉키면 늘 어둠이 손해를 보고, 그래서 지금은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타깃이 되지.”

말을 마친 라노크가 고개를 돌린 뒤에 ‘차를 한 잔 더 주겠나?’ 하고 물었다.

늘 곁에 서 있던 라파엘이 반가운 얼굴로 주전자를 들고 다가왔다.

“자네도 이제는 앉아서 기다리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지 않나?”

“아직은 다리에 힘이 남았습니다.”

그의 답을 들은 라노크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라노크는 차를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을 때는 정보위원장의 얼굴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움직여라. 너의 존재를 저들이 쫓게 만들어. 지금은 그것이 무슈 강을 돕는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 방법이다. 가능하다면 최고 권력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와 러시아, 중국, 독일, 스위스의 협력이 없다면 그도 방법이 없을 거예요. 숨겨진 적을 상대로 무슈 강 혼자서 버텨 낼 수 있을까요?”

라노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슈 강과 한국은 안팎으로 시련에 놓였다. 내부에서는 무슈 강에게 쏠리는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이 생겼고, 외부에서는 적이 노리고 있지.”

무언가를 말하려던 안느가 라노크의 표정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은 내게도, 바실리에게도, 양범에게도 늘 있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좀 더 강한 적들이 무슈 강을 노리게 될 거다.”

안느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담배를 눌러 껐다.

“그 고비를 넘기고 우뚝 서면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고 매달리는 시간이 돌아온다. 진정한 무슈 강의 시대는 그때부터겠지.”

“어려운 일이에요.”

안느의 혼잣말 같은 대꾸를 라노크가 서양 가면 같은 미소로 받았다.

***

고건우는 피곤이 촉촉하게 배인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원장이다.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가 긴장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예상과는 좀 다르군요.”

창가에 테이블, 안쪽에 차를 탈 수 있는 탁자, 그리고 몇 개의 책상과 TV, 냉장고가 전부다.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린 고건우가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다.

“저곳이 우리 부원장의 자리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고건우의 요청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찬과 함께 움직인 고건우가 자리에 앉았고, 최종일이 차를 준비해 가져다주었다.

건물들의 야경이 제법 좋아 보였다.

강찬은 커피를, 고건우는 둥굴레 차를 앞에 두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위기가 계속된 이후였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리를 감춘 적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원장님, 전에 우리도 프랑스처럼 정보총국의 일을 해도 좋다는 허락하신 것 기억하십니까?”

고건우의 또렷한 시선이 답과 같았다.

“적의 윤곽은 대강 알겠습니다. 일본과 영국의 정보국이 움직인 것이 분명하고 그 증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진 증거만으로는 정보위원회에서 압력을 넣기 어렵습니다.”

“그렇겠지요.”

“잠수함을 준비했고, 지진도 일으킬 수 있는 적입니다. 이대로라면 최악의 경우에 우리나라에도 지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국의 발전 시설도 그렇고, 그 때문에 지진이 일어난 것도 고건우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직 지진이 적의 도발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장 우리나라에 지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후환이 두려워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부원장은 이미 결심을 세운 거군요.”

“영국과 일본의 정보국 수장들을 제거할 계획입니다.”

둥굴레가 반쯤 남은 찻잔을 바라보던 고건우가 굳은 것처럼 시선을 들지 않았다. 정보국 수장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습관이 굳은 것처럼 보였다.

저 다음 단계가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유지하는 일일 거다.

“또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고건우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들었다.

“양범이 구금되었습니다. 정권이 그를 밀어낸 것으로 보이는데 프랑스의 반응도 비슷합니다. 무엇보다 중국과 프랑스의 정보가 이전과 다르게 걸러서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정권이 정보국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선을 정한다고 보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차세대 발전 시설에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나라의 통치자가 마음을 바꿀 정도로 매력적인 조건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에너지겠군요.”

“아프리카에서 일본의 위성 신호 발신기가 나왔다는 것으로 봐서 저들 역시 블랙헤드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흐음.”

고건우는 먼저 답답한 신음을 흘려 냈다.

“그들이 새롭게 선보인 에너지가 차세대 발전 시설보다 매력적이라면 굳이 우리나라에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전쟁이나 지진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강찬은 잠시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가져왔다.

바깥보다는 테이블에 앉은 강찬과 고건우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저를 제거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고건우가 나직한 신음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원장.”

그리고 그는 강찬을 불렀다.

계속해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음 통치권자가 될지 모르지만, 분명 나를 교체할 거고, 때에 따라서는 부원장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을 겁니다.”

오래 생각했던 것처럼 고건우의 말은 술술 나왔다.

“유라시아 철도, 차세대 발전 시설, 그리고 해저터널까지. 다음번에 누가 되든 가득 찬 곡간을 넘겨받게 될 거고, 분명 욕심이 달라붙게 될 것입니다.”

단숨에 말을 쏟아 낸 고건우가 마지막 말을 정리하는 듯 잠시 찻잔을 바라보았다.

“부원장, 욕심 많은 이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이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세요.”

어쩐지 살길을 찾으란 소리처럼 들렸다.

“외부의 적을 제거하면서 내부의 적을 경계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국가정보원은 규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국가정보원 정보총국을 만든 이유를 누구보다 부원장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강찬은 고건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내부의 적을 제거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양진우와 허하수 이후로 잠잠하던 세력이 기지개를 켜는 느낌입니다. 분명 외부 세력이 그들을 자극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친일 쪽이 문제입니다.”

강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상태에서 전하는 말이 어쩐지 고건우가 전하는 마지막 당부처럼 들렸다.

“국가정보원은 정치권 사찰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적 행위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활동하기도 어렵습니다. 국가정보원 정보총국이 그런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리라 기대합니다.”

무언가를 각오한 게 틀림없었다.

“부원장에게는 늘 어려운 청만 합니다. 우리 세대는 겪어 보지 못했던 환경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지만, 미안한 것은 또 미안한 것입니다.”

고건우가 그의 눈에 감정을 담았다.

자식만큼이나 아끼는 조카를 보는 아저씨의 눈이었다.

“부탁합니다. 부원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또 잠수함이라는 증거를 잡아 놓고도 흔들렸을 겁니다. 그날 회의에서 부원장이 보여 준 강단이 대통령님의 결단을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없어도 잘하셨을 겁니다.”

고건우가 웃었다. 조용하게, 그러나 처음 보았을 정도로 포근한 웃음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강찬의 시선을 본 고건우가 답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국가정보원 정보총국은 앞으로 어떤 작전을 계획하든, 사전 보고의 의무가 없습니다. 대통령님이 직접 지시한 내용입니다.”

강찬이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막말로 누구든 암살해 놓고 나중에 알려만 달라는 말과 같은 거여서 그렇다.

“차세대 발전 시설을 지키고, 대한민국을 위해 애써 줄 것이라는 믿음과 부원장이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입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엮인 느낌이어서 강찬은 픽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웃음의 의미를 알겠다는 것처럼 고건우 역시 비슷하게 웃었다.

“원장님, 저는 이번 일을 마무리하고 부원장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이번엔 고건우가 소리 내서 웃었다.

보통 사람으로 치자면 아마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것쯤 될 거다.

“20년 전부터 나의 가장 큰 바람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원장도 그 정도는 애써 주어야겠지요.”

기껏 웃고 난 고건우가 끔찍한 말을 쏟아 냈다.

“부원장.”

“예.”

“물러갈 세대를 대표해 부탁합니다.”

뭘, 어떻게인지 모를 부탁 하나를 던져 놓은 고건우가 할 말을 다 했다는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밤이 좀 더 깊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강찬과 고건우의 모습이 아까보다 분명하게 유리에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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