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스웨이든은 훅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느라 눈이 번들거렸다.
“정보위원회의 감시를 피해 목숨 걸고 구해 낸 블랙헤드다. 값어치를 따질 수도 없어. 그런데 그걸 이용해 만들어 낸 게 저런 멍청이들이라니!”
대꾸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수석 연구원은 유리 안으로 시선을 준 다음, 입을 열지 못했다.
“좋아. 하나씩 짚자. 블랙헤드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에너지는 지니고 있습니다.”
스웨이든은 찌푸린 눈으로 수석 연구원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습니다.”
“계속해 봐.”
수석 연구원이 유리 너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의 손짓을 따라 스웨이든이 유리 너머로 시선을 돌린 직후였다.
딱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20명의 팔뚝을 연구원 한 명이 메스로 쭉쭉 긋고 지나갔다.
10센티미터쯤 깊게 베었다.
쭉 올라왔던 피가 팔뚝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설마 피가 붉은색이라거나, 칼에 베인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수석 연구원은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두 번째 손짓을 했다.
유리 너머의 연구원이 거즈를 이용해 팔뚝의 상처를 닦아 나갔다. 그때까지도 앉은 남자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회복력이 엄청납니다. 보시다시피 적당한 수준에서 출혈이 멈추고, 저 상태로 20분이면 상처가 아물고, 2시간이면 흔적만 남습니다.”
“놀라운 발견이군. 간단한 치료로 충분한 상처를 블랙헤드를 이용해 치료하다니! 이제 주방마다 블랙헤드를 하나씩 놓으라고 광고할 생각인가? 칼에 베인 상처에는 블랙헤드와 에너지 발생기를 이용하세요! 가격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만 더 봐주십시오.”
“이봐, 로널드.”
“보시면 분명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당장에라도 총을 뽑아서 쏴 버릴 것처럼 눈이 번들거리는 스웨이든의 앞에서 수석 연구원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고, 메스로 목을 가르면 죽을 거라는 놀라운 발견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지.”
수석 연구원은 신용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얼굴로 꿋꿋하게 유리 안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가는지 보겠다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던 스웨이든의 볼이 씰룩였다.
유리 너머 연구원이 들고 있는 도구 때문이었다.
권총의 끝에 한 뼘 크기의 온열기를 달아 놓은 모양새였다. 거기에 뒤편의 엄청난 장비와 권총의 손잡이를 케이블로 연결해 놓았다. 다른 말할 필요 없이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공상 만화에서 문어 대가리를 한 외계인이 들고 있는 무기, 딱 그런 형태였다.
고글까지 쓴 연구원이 양손으로 가장 왼쪽에 앉은 남자를 겨눴다.
뭔가 있나?
유리 너머에서 연구원이 방아쇠를 당겼다.
당장 무기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만화에서 보았던 빛도, ‘비비비비’ 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웨이든은 놀란 눈으로 유리에 달라붙듯이 다가섰다.
“끄으으!”
무기에 겨냥된 왼쪽 남자가 곧바로 몸을 뒤틀다가 의자 밑으로 떨어졌고, 바닥에서도 고통을 이기지 못한 표정과 몸짓으로 버둥대고 있었다.
스웨이든이 놀란 눈으로 수석 연구원을 돌아보았다.
“블랙헤드의 에너지와 연결되면 저런 현상이 나옵니다.”
창문 너머 연구원이 들고 있는 무기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심지어 스웨이든은 ‘이것들이 단체로 쇼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끄아아!”
그리고 그때쯤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의 코와 눈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아직 확인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3분이 넘어가면 사망할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 원리는?”
수석 연구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리 너머를 노려보는 스웨이든의 차가운 눈빛과 말투 때문이었다.
“로널드, 원리는?”
안쪽의 연구원이 계속하느냐는 투로 시선을 들었다가 스웨이든의 표정을 보고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돌렸다.
“로널드?”
“블랙헤드 에너지는 강한 것이 약한 에너지를 빨아들입니다. 평상시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지만, 에너지를 자극하면 곧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가 바닥을 벅벅 긁어 댔다.
“멈춰야 합니다!”
“계속해, 로널드. 적어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게 아닌가.”
쾅! 쾅! 쾅!
죽음을 예상했던지 남자는 악착같은 몸짓으로 유리에 매달리려 애썼다.
터억!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유리창에 뻗었던 남자의 손이 바닥으로 서서히 떨어졌다.
털썩.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방아쇠를 당기는 연구원은 아직 남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수석 연구원이 노크처럼 유리창을 두드리고서야 안쪽의 연구원이 놀란 얼굴로 유치하게 생긴 무기를 내렸다.
“로널드, 저 무기를 사용하려면 에너지 발생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해결책은?”
“몇 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유리 너머에서는 죽은 남자를 끌어내고 있었다.
“우선 위성을 이용해서 그가 있는 곳을 노리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독일, 중국의 눈을 피해 위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
“다음은 우리가 함정을 만들어 놓고 그가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덫을 놓자?”
“그렇습니다. 에너지 발생 장치는 시설물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통 사람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는 데다 지금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흠.”
스웨이든이 해부용 개구리를 노려보는 아이처럼 음흉한 신음을 뱉어 냈다.
***
휘감아 도는 북한강 안에서 남이섬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강찬은 높다랗게 올라선 나무 틈으로 난 흙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여기도 요원 분들이 지키는 거야?”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고개를 돌려 본 김미영이 강찬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괜히 무리한 요구했나 싶어서.”
강찬은 픽 하고 웃고 말았다.
몸을 감춘 채 김미영을 전담하는 요원들의 수고를 제대로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거다.
“그래도 함께 와서 좋아!”
햇살 아래에서 김미영이 5월처럼 웃었다.
“엠티는 어땠어?”
“별로야. 술 마시고, 1년 선배인 데도 몇십 년 더 산 사람들처럼 구는 것도 여전하고.”
“2학년이 되면 좀 나아지는 거 아냐?”
“복학한 선배들이 있거든. 이상해. 몇 살 차이도 아닌데 복학한 선배들은 정말 아저씨 같아. 그러면서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도 싫어.”
입을 삐죽 내민 김미영이 재잘재잘 학교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산책로는 남이섬의 외곽을 돌아 계속 이어졌다.
오른쪽으로 동물들의 우리가 있었고, 저 앞으로 강이 보이는 곳에 벤치가 있었다.
“제라르 아저씨는 바빠?”
“뭐?”
“제라르 아저씨.”
“아! 잘 지내지. 갑자기 제라르는 왜?”
제라르가 들으면 펄쩍 뛸 소리지만, 김미영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하겠구나 싶었다.
“학교에 왔었을 때 봤던 애들이 아저씨 안부 엄청 물어봐. 소개해 달라는 애들도 있고.”
강찬은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언젠가 한국의 대학교는 어떤 느낌인지 볼 겸해서 김미영을 데리러 가고 싶다더니 공연히 애들만 설레게 한 모양이었다.
“공부는 어때?”
“별로야.”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젓는 김미영을 보면서도 강찬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김미영의 곁에 있으면 어쩐지 몸에 덕지덕지 묻은 더러움이 조금은 닦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뭐 마실래?”
“응!”
이런 식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둘이서 매점으로 가서 생수를 샀고, 소프트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샀다.
“수진이 있잖아. 인터넷에서 굉장히 유명해졌어.”
매점 앞 벤치에 앉아서 김미영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30분쯤 앉아 있다가 남은 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보트 타는 곳을 본 김미영이 애써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탈래?”
“아니. 그럼 함께 움직이시는 분들이 힘들잖아.”
“그것도 알아?”
김미영이 입을 쭉 내밀었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김관식이 가르쳐 준 게 분명했다.
“또 바빠져?”
“왜?”
“바빠지기 전에 꼭 시간 냈었잖아.”
“그랬나?”
“그렇게 말할 땐 꼭 아저씨 같아.”
강찬은 또 웃고 말았다.
너무 김미영만 떠들게 했다. 그러니 지금쯤은 뭔가 한마디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배 안 고파? 밥 먹자.”
강찬을 바라본 김미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남이섬을 나와서 가평 쪽에 있는 쌈밥집으로 향했다.
돌솥 밥에 가정식 상차림이었는데 무엇보다 쌈채소가 푸짐하게 나왔다.
한 시간쯤 밥을 함께 먹었고, 다음으로는 상천의 호명산 근처 카페로 향했다.
절벽 끝에 지어 놓은 것처럼 앞이 탁 트였고, 뒤편 도로 건너는 바로 산이어서 풍경도 좋았다.
강찬은 테라스에 놓인 야외 테이블 안쪽에 앉았다.
저격이 어려운 곳이라 이렇게 앉아 있으면 무엇보다 경호하는 요원들이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김미영은 커피를 주문했다.
떡볶이, 라면 먹던 고등어가 이제는 커피를 즐길 줄 아는 대학교 2학년이다.
커피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담배 생각이 났다.
희한하게 김미영과 있으면 작전에 나선 것처럼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미영아, 나 아무래도 외국에 좀 나가 있을 거 같아.”
“얼마나?”
곱게 생긴 커피 잔을 입에서 뗀 김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던진 질문이었다.
“일정은 나가 봐야 알 것 같은데?”
“응.”
그래서 이렇게 시간 낸 거구나 하는 얼굴로 김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거야?”
“그런 거보다는 아무래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거 같아서.”
“회의 같은 거?”
“그런 거지.”
목을 돌릴지 모를 회의란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거다.
“증평 아빠한테 전화드렸었어. 출장 가기 전에 꼭 전화드려.”
“그래.”
어쩐지 유혜숙의 말에 강대경이 대답하는 느낌이었는데 나쁜 건 아니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앞쪽으로 노을이 지면 정말 보기 좋았을 것 같은데, 애새끼가 산 너머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늘이 어둠처럼 늘어졌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였다.
아쉬움이 짙어 가는 어둠처럼 강찬과 김미영의 주변을 덮었다.
라노크나 바실리처럼 살아간다면 앞으로의 미래도 고작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게 전부일 거다. 조금만 방심하면 부인을 잃은 라노크처럼 김미영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정리가 필요했다.
물러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마무리가 말이다.
눈빛이 번들거리는 것 같아서 얼른 커피 잔에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전화기가 조금 밀어 놨던 현실을 테이블 앞에 홱 펼쳐 주었다.
“여보세요?”
[디지털 분석실 기수호입니다.]
“말씀하세요.”
[보내 주신 위성 수신기는 영국의 위성을 이용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역시! 이 개새끼들이!
4만 명이 넘는 죄 없는 이들을 죽여서라도 너희만 잘 살면 된다는 거냐?
강찬은 김미영이 볼 수 없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호 방식이 일본 것과 또 달라서 이건 하루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분함과 미안함이 함께 담겨 있는 기수호의 보고였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결과가 나오면 또 알려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김미영은 일어날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일어나. 이제 갈 시간이잖아.”
평일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미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안았다.
전장으로 나가기 전에 위로받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김미영의 온기와 그 맑음이.
“조심해서 다녀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강찬을 안아 주는 김미영의 손이 그랬다.
김미영의 어깨 너머로 가평의 산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적들은 저 산을 무너트리고, 죄 없는 이 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계획을 짤 거다.
아직 반항할 기운이 남은 일진이나 반군들처럼.
김미영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바라보아서 강찬은 얼른 눈빛을 감췄다.
지켜 주고 싶다. 이 맑은 눈을.
누군가 진창에 빠져서 싸워야 한다면 그거?
강찬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