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2)
강찬이 보기에 정보 세계는 경험하면 할수록 냄새나는 바닥이었다. 한편이라고 여긴 이들이 끝없이 정보원을 심고, 늘 뒤에 숨어 일을 꾸미는 꼴들이 그랬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강찬은 가장 먼저 바실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바실리다.]
“테스트를 마쳤다. 이상이 없더군.”
전화가 끊기는 듯한 짧은 침묵이 흐른 뒤에 바실리의 건조한 음성이 건너왔다.
[결과는?]
“회수한 위성 신호기를 가지고 가는 길이다.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 주지.”
이 정도면 강찬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할 인물이었다.
[2차 테스트 성공을 축하한다.]
“바실리.”
모른 척 넘어가려는 그를 강찬이 불렀고, 바실리는 침묵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알려 주겠다.”
[고맙군.]
자존심이 상했는지 뻑뻑한 음성의 통보가 있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강찬은 창밖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고 싶다.
그런데 이미 진창에 무릎까지 빠진 꼴이라 당장은 그럴 방법이 없어 보였다.
“다예.”
“예.”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운전에 집중하던 석강호다. 그가 분명하게 답을 했다.
“숨은 놈들을 상대로 마무리를 깔끔하게 할 수 있을까?”
석강호가 힐끔 강찬을 보았다.
“잠수함을 보냈던 놈들만큼이라도 응징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뒤에 있는 놈들은?”
“대장, 우리가 그렇게 애썼어도 아프리카의 반군을 모두 없애지는 못했소. 그래도 대장 닉네임을 모르는 반군은 없었던 거 아뇨?”
운전석 앞을 노려보는 얼굴로 석강호가 말을 이었다.
“정보 세계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우선 때릴 놈들부터 때려 줍시다.”
석강호의 말이 어쩐지 무척 현명하게 들렸다.
생각이 깊어지는 건가?
강찬이 힐끔 석강호를 바라본 직후였다.
그가 창문을 살짝 내렸고, 속도가 빠른 만큼이나 거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담배 피우려고?”
“머리 복잡할 때는 그게 최고요.”
“야! 불을 붙인 뒤에 창문을 내려! 몇 번을 얘기해?”
“푸흐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요.”
석강호가 얼른 창문을 올렸고, 강찬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석강호에게 담배를 건네주고, 둘이서 하나씩 입에 물었다.
다시 창문을 내리자 기회를 노리던 바람이 좁은 틈을 타고 세차게 달려들었다.
“후우, 우린 이거 때문에라도 오래 못 살 거다.”
“배 안 고파요?”
확실히 이놈은 한결같은 맛이 있다.
“휴게소에서 김밥이라도 먹고 출발하자.”
“그럽시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석강호를 생각해서였다.
강찬이 전화를 걸었고, 최종일 일행이 탄 차가 10분 쯤 뒤에 나타난 고속도로 휴게실로 들어섰다.
우희승과 이두희가 김밥과 커피를 사러 움직였고, 강찬은 석강호와 함께 벤치로 움직였다.
“여기는 공기가 다르네!”
석강호와 함께 벤치에서 쉬고 있을 때 아이스커피와 김밥을 잔뜩 든 우희승과 이두희가 다가왔다.
“대원들 저녁은?”
“사복 요원이 챙기는 모양입니다.”
일정하게 세워 놓은 둥그런 등이 덮치는 어둠을 밀어냈고, 두툼한 배때기를 한 나방이 연신 등을 향해 달려드는 밤이었다.
멀리서 작은 날벌레들이 나이트에 들어가려고 기웃대는 고등어처럼 어수선하게 날았다.
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다 함께 먹었다.
잠수함을 이용한 음모가 있었고, 지진으로 끔찍한 숫자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정보원을 잡아냈다.
한가하게 고속도로 휴게실 벤치에 앉아서 김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쯤 강찬도 충분히 안다.
그런데 말이다.
적의 실체도 모른 상태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게 가장 위험한 짓이 아닐까 싶었다.
강대국들은 절대 단 한 번의 패배로 머리를 계속 조아리지 않을 거다.
하다못해 위에서 드럼통 던지는 고릴라를 깨부숴도, 다음 판에는 더 큰 고릴라가 나타나 미친 것처럼 드럼통을 던져 대는 게 세상 이치인 거다.
진흙탕처럼 지저분한 싸움이 시작된 게 분명했다.
일단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둔다.
강찬은 김밥을 집어 들었다. 맛은 별로였다.
벤치로 왔던 사람들이 얼른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최종일이나 우희승, 이두희의 강렬한 인상과 번들거리는 눈빛 때문처럼 보였다.
김밥 한 줄 먹었고, 커피도 다 마셨다.
강찬이 그랬던 거고,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는 김밥을 세 줄씩 먹었다. 석강호는 어쩐 일인지 다섯 줄에서 끝냈다.
커피도 다 마셔서 일어설까 싶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벤치 위에 놔두었던 전화기가 신경질적으로 울어 댔다.
바실리인가?
전화기를 들었던 강찬은 픽 하고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실리다.]
진동 소리만 듣고도 그런 줄 알았었다.
[양범이 안전 가옥에 구금되었다.]
그런데 건너온 말을 듣자 올라왔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
강찬은 다 마셔 버린 아이스커피 잔을 들었다가 내용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최종일의 눈짓을 받은 이두희가 얼른 매점을 향해 움직였다.
“안전은?”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중국 특수부대 전체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당장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다.]
“처벌할 명분을 만들거나 풀어 주거나 둘 중 하나겠군.”
[이봐, 주연. 양범의 희생 따위 이 바닥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바실리는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란 듯 냉정한 말투였다.
[그보다는 왜 우리가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일본의 움직임을 모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지.]
“자꾸 그러면 거치적거리는 놈들의 모가지를 죄 돌려 버리고 싶어져.”
바실리의 웃음이 훅 날아들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것보단 훨씬 좋군.]
이두희가 새로 가져온 아이스커피를 강찬의 옆에 놓아주었다.
[명심해. 미국과 영국은 다른 정보국에 늘 스파이를 심어 놓지. 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쭉.]
“러시아와 프랑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바실리의 웃음이 또다시 건너왔다.
[내가 대통령에 나서지 않았다면 나 역시 양범과 비슷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평소의 바실리답지 않게 오늘은 말이 길었다.
[중국은 양범을 구금한 것으로 분명하게 등을 돌렸다. 그러니 그 빌어먹을 통치자들이 양범을 밀어낼 정도로 혹할 만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야 해. 블랙헤드가 생산하는 에너지를 외면할 정도로 매력적인 것.]
“바실리.”
바실리는 침묵으로 강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사무실에 앉아서 전화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더군. 정보 세계의 최고자라는 완장을 차고.”
강찬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악착같이 달려온 끝에 남은 게 우리나라를 전쟁의 위협에 빠트리고, 죄 없는 중국 사람들 수만 명을 죽게 만든 거라니. 이게 잘하는 짓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후후후.]
확실히 바실리는 이런 웃음, 정말 잘 어울린다.
[주연 역할이 싫다면 언제고 내게 넘겨. 그렇게 되면 각국의 정보국이 갓 오브 블랙필드의 목을 얻으려고 무섭게 달려들겠지. 다음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까?]
“후우-!”
강찬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바실리도 담배를 입에 문 모양이었다. 그의 말 대신 찰칵하는 라이터 소리가 먼저 넘어왔다.
[라노크가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막강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이동시켜서 강대국의 전쟁 산업을 억제하자는 것. 그걸 우리 주연께서 나타나서 멋지게 이뤄 주었지.]
말끝을 붙잡고 바실리가 담배 연기를 뱉어 내는 소리가 따라왔다. 그리고,
[양범이 내일 사형당하면 어떻게 할 거지?]
담배 연기가 목에 턱 걸릴 만큼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라노크가 당할 수도 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마피아와 다를 바 없지. 탐나는 것은 총질, 칼질을 해서라도 뺏고, 기운 빠진 보스의 조직은 어떻게든 무너트린다.]
신기한 일이었다.
보드카를 마시나 싶었는데 곧바로 ‘탁’ 하고 보드카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힘들면 CIA든, 모사드든, 언제고 전화해. 그래서 말해 줘. 한국과 갓 오브 블랙필드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강찬이 나직하게 숨을 내쉰 다음이었다.
[그리고 가서 변명해라. 그동안 피를 흘리며 죽어 간 군인들과 요원들에게. 지쳐서 그랬다고. 무섭고 두려워서 더는 싸울 힘을 잃었다고. 그런 다음 지금껏 모은 돈을 펑펑 써 가며 휴양지에서 사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나?]
강찬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바실리.”
[듣고 있다.]
“스바시바!”
[어쩐지 좋게 들리지는 않는군.]
바실리가 먼저 웃었고, 강찬이 따라 웃었다.
[갓 오브 블랙필드가 돌아온 모양이군.]
“모가지를 돌려 주러 갈 생각이다.”
[하!]
어쩐지 기합처럼 들리는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바실리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강찬은 팔을 뒤로 해서 벤치를 짚은 다음,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염병할! 잊고 있었다.
저 별들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아들을 먼저 보낸 늙은 어머니의 울음과 아버지를 잃은 어린 딸의 눈물을 두고 이러고 앉아 있다니.
“후-!”
휴게소의 불빛이 위로 솟구치려 기를 썼지만, 하늘에 매달린 초롱초롱한 별들을 가리지는 못했다.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아.”
석강호가 궁금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고, 최종일이 다부진 눈빛으로 우희승과 이두희를 돌아본 다음이었다.
“개새끼들! 모가지를 죄 돌려 줘야지!”
“푸흐흐.”
강찬의 혼잣말과 석강호의 잔인한 웃음이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흘렀다.
얼마나 더 많은 별들이 저 하늘을 밝힐지 모른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노모의 서글픈 울음과 어린 딸의 눈물을 외면해야 할 일이 얼마나 더 생길지는 모르지만, 먼저 간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어서 저 별들을 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좀 내가 아는 분 같네요.’
왜 그랬을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양동식의 음성이 들린 것만 같았다.
***
풀 냄새는 새벽에 진해졌다가 한낮에는 길바닥에 깔려 있으며, 저녁이 되면 어둠의 권유를 받고 다시 올라온다.
남일규는 소주 냄새가 묻어나는 숨을 커다랗게 뱉었다.
하늘에 뜬 손톱만 한 달이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비춰 주는 칙칙한 밤이었다.
택시를 불러 준다는 것을 거절하고 느긋하게 걷는 길이다.
비상사태를 빗겨 난 돌잔치는 좋았다.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해서 짧게 끝내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렇게 모여서 축하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강철규의 이름으로 된 봉투만 아니었다면 남일규도 후배들의 모임 자리를 방해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강철규가 직접 남일규를 보냈다.
후배들만큼은 양동식, 양소미와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싶었다.
남일규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부스럭.
그는 담배 2개를 꺼내 입에 문 다음, 잠시 멈춰 서서 불을 붙였다.
“후우.”
2개라고 해서 연기가 2배로 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잘 지내냐? 거기 담배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남들이 다들 이렇게 하더라.”
남일규는 가드레일 바깥으로 삐죽 나온 아스팔트의 끝자락에 담배 하나를 가로로 놓았다. 그런 다음 몸을 일으켜 가드레일에 기대 멀리 펼쳐진 산을 바라보았다.
“양동식이라고 다리 부러졌던 후배가 다시 왔다. 양동식이란 이름 쓰는 놈들은 다 비슷한 모양이더라구.”
연기를 뿜어낸 남일규는 가드레일 바깥의 좁은 길을 따라 부대로 걸음을 옮겼다.
“선배님은 잘 계신다.”
한숨처럼 연기를 뱉어 낸 남일규가 피우던 담배의 불똥을 탁 튕겨 내고는 남은 부분을 중지로 멀리 날려 버렸다.
바쁠 것 없는 걸음이었다.
건물들의 불빛이 사라지고, 가로등이 없어졌지만,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지금 커다랗게 돌아가는 도로의 끝에서 산으로 들어가면 부대 앞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다. 술기운 털어 내고 강철규 얼굴 보기 딱 적당한 시간인 거였다.
어둠, 좌우로 난 숲, 이따금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다른 이들에게는 공포로 느껴지는 것들이 남일규에게는 친숙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