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413화 (41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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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늦은 거지? 그렇지?

“세계 전쟁이 우려될 정도로 긴박한 상황입니다.”

앵커의 긴장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러시아와 중국이 항공 모함을 이용해 버뮤다의 특정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미국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이 공격이 훈련 상황인지, 군사 시설을 파괴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앵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공중에서 찍은 항공모함 영상이 TV 화면을 가득 메웠다.

“미국이 보일 반응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러시아는 그에 그치지 않고 단독으로 전투기를 이용해 이란의 시설물을 폭격했습니다.”

멀리서 잡은 것처럼 흔들리는 화면에는 시커먼 연기가 길게 올라오고 있었다.

“미국과 아랍 전체가 침묵으로 이번 사태를 지켜보고 있어서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입니다.”

화면이 다시 앵커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군사적 행동으로 인해 세계 전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정작 우리나라 증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제부 민기준 기자가 보도합니다.”

화면이 붉은색 일색인 전광판 앞에 서 있는 기자를 비추었다.

“민 기자. 지금 우리 증시가 폭등하고 있다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기자가 잠시 멈칫한 다음, 입을 열었다.

“예. 현재 증권거래소는 서킷브레이크를 발동해서 현물 거래를 중지시켜 놓은 상태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증권 시장 개장 이후, 주가 상승으로 발동한 첫 번째 서킷 브레이크 조치입니다.”

“민 기자. 현재 세계정세가 전쟁을 우려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증시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오르는데요? 그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습니까?”

이어셋에 집중하던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주가가 상승하는 이유는 끝없이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주문 때문입니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매입 물량인데 전문가들도 현재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세계 전쟁에서 안전한 곳으로 우리나라를 선택한 걸까요?”

“워치콘 1단계, 데프콘 2단계의 상황이라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묻지마 투자라고 할 만큼 우리 주식 시장에 매수 주문을 넣는 것으로 봐서, 조만간 북한과 획기적인 발표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습니다.”

TV를 끈 문재현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쿠바에서 희생된 우리 대원 12명과 중상을 입은 7명의 성과가 가장 먼저 주식 시장에 반영되고 있었다.

“돈을 만지는 사람들은 정말 무섭군요.”

“셔먼이 격추된 직후부터 달러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환율 시장도 문제입니다. 이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원 달러 환율이 900원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문재현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고 말았다.

“수출 시장이 문제가 되겠군요.”

“일방적인 반응이라 어느 정도 헤지는 가능하지만, 이보다 심해지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입니다.”

총리를 지냈던 인물답게 고건우는 필요한 답을 주르륵 내놓고 있었다.

“부원장과의 연락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늘까지 쿠바에 있을 예정이랍니다. 이스라엘 부총리 겸 외무장관과 면담이 끝난 후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문재현은 조카의 합격 소식을 들은 삼촌의 얼굴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감췄다.

“이번에 희생된 대원들과 중상을 입은 대원들의 처우에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절대로 그들의 희생을 잊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희생자가 조만간 출발한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강찬 부원장이 뜻밖의 요청을 해와서 그 점에 대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뜻밖의 요청이요?”

“우리 규정에 정해진 보상금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면 부원장 사비를 동원해서라도 어느 정도 규모의 지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까지 그에게 짐을 지우고 있었나 봅니다.”

문재현이 안타까운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페루의 대통령과 일본, 이스라엘의 총리가 대통령님의 면담을 간곡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공식 요청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답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고건우가 질문을 던졌고,

“부원장이 연락하면 의논한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문재현의 단호한 답이 있었다.

***

미국의 그린베레가 제대로 구워 온 스테이크를 컵라면, 즉석밥, 그리고 김치와 함께 먹었다.

건물의 입구를 외인부대 특수팀이 지켰고, 2선을 외인부대 2개 연대가, 정보와 보급을 그린베레가 맡았다.

보급이라야 봉지 커피, 봉지 김치, 컵라면, 담배 정도인데 로버트는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만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게 아니었다면 이 황량한 쿠바 땅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거다.

“커피는 어디서 마실 거요?”

“옥상으로 가자.”

“그럽시다.”

식사를 마친 강찬은 대원들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강찬만 해도 목덜미에 거즈를 붙인 상태다.

석강호, 제라르, 곽철호, 윤상기를 비롯한 대원 모두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였다.

옥상 벽에 기대서 앉아 있는 동안, 윤상기가 대원 둘과 봉지 커피를 타 왔다.

당연하게 담배들 쭉 물고 함께 커피를 마셨다.

“크하!”

저 새끼는 꼭 저런 소리를 내며 마셔야 하나?

강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석강호는 꿋꿋한 얼굴이었다.

곽철호와 윤상기가 사망한 대원들의 이송을 위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강찬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살았다.

12명의 희생을 딛고.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살아 있으니까 전화를 받으란 것처럼 벨이 울렸다.

강찬은 번호를 확인한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로?”

[“무슈 강. 이란은 완전히 정리되었소. 오후에 차피 프레슬리와 좋은 결과를 도출하길 바라도 되겠지요?”]

언제 들어도 넉넉한 우즈만의 음성이 강찬을 달래듯 건너왔다.

“지그펠트의 문제만 처리된다면 저라고 전쟁을 굳이 우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늙은이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말해봐도 되겠소?”]

세상은 역시 공짜가 없는 거다.

“가능한 일이라면 노력하겠습니다.”

강찬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을 했다.

[“고맙소, 무슈 강. 내 바람은 무슈 강이 이번에 차피를 만날 때 가자지구의 평화 협정을 요구해주었으면 하는 거요.”]

이 정도 요구라면야.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무슈 강.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을 거고, 더불어 아랍 세계에 내 발언권이 좀 더 힘을 얻게 될 거요.”]

“씨앗을 뿌렸으니 열매도 있겠지요.”

[“하하하.”]

우즈만의 만족한 듯한 웃음이 기분 좋게 들렸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소.”]

전화를 끊은 강찬은 대원들과 제라르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지그펠트, 그 새끼를 이스라엘이 내놓겠소?”

“안 내놓으면 할 수 없지.”

강찬의 답에 석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이대로 물러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강찬은 이스라엘을 아예 탈탈 털어서라도 놈의 대가리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게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와 리비아를 돌아 쿠바까지 오게 된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고 이 뺑뺑이를 다시 돌아야 한다.

“이제 그 새끼 한 놈 남은 건가?”

강찬은 피식 웃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석강호의 말처럼 모두 끝나서 마지막만 남겨 놓은 느낌이었다.

그 길의 끝에 어떤 것이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잃으며 사는 것만은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햇살 좋고, 바람 시원하고.

쿠바의 하늘은 파란 바탕에 가닥가닥 찢어낸 솜사탕을 늘여놓은 모양이었다.

강찬은 김미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미안해서 차마 그 앞에 설 수 없을 정도였다.

살았다고 말하기 너무 늦어서.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면 지금처럼 대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저벅저벅. 저벅저벅.

그때 곽철호와 윤상기가 옥상으로 들어섰다.

“사망한 대원들을 이송하겠습니다.”

한국까지 갈 비행기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강찬이 타고 온 비행기는 오늘 밤이라도 움직일 것에 대비해 보낼 수가 없었다.

강찬을 시작으로 모두 일어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서 현관을 나섰을 때, 은색 철제 관 12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 비닐 주머니에 담긴 양동식과 어젯밤 함께 싸웠던 동료 11명이 누워 있는 거다.

1층과 계단을 지켜주던 대원, 2층에서 기관총을 맡았던 대원, 옥상에서 버텨주던 대원들이.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원들이 다가가 관 주변에 섰다.

“차렷.”

착!

“경례!”

처어억!

사망자에 대한 경례는 천천히 손을 올리고, 그만큼이나 천천히 내린다.

강찬은 물론이고, 외인 부대원들과 그린베레까지 함께 경례를 올렸다.

“바로!”

처어억!

여덟 명이 움직여 양동식의 관을 시작으로 희생된 대원들의 관을 순서대로 헬기에 실었다.

“이송하겠습니다.”

로버트가 말을 건네고는 몸을 돌렸다.

위이이이잉!

그의 손짓에 헬리콥터가 엔진음을 터트렸고,

두두두두두두두!

이어서 프로펠러를 돌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몇 명이나 저들의 희생을 기억할까?

대한민국의 발전이 저들의 남은 가족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강찬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캡틴.”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강찬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국에 도착한 부상자들이 모두 고비를 넘겼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NSA 국장이 통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라르와 외인부대 특수팀, 외인 부대원들이 모두 자랑스러운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버트. 그 통화를 거절하면 입장이 곤란해지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습니다.”

솔직한 답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전화를 연결해.”

로버트가 고맙다는 얼굴로 벽돌 크기의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도청 방지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바실리가 보았다면 또 러시아의 기술력이 어쩌고 하면서 큰소리를 쳤을 크기였다.

버튼을 누른 로버트가 영어로 빠르게 말을 건넨 후에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알로?”

[“무슈 강. NSA 국장 피터슨이요.”]

“강찬이다. 그린베레 팀과 특별히 지휘관으로 로버트를 지원해 준 것에 감사한다.”

강찬의 말에 로버트가 눈치를 살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미국은 셔먼의 계획을 몰랐었소. 그러나 그의 행동에 사과하는 의미로 미합중국 정부는 이미 한국의 방침에 지지성명을 발표했고, 또 셔먼의 격추를 승인했소. 우리는 무슈 강이 이 점을 고려해 주길 바랍니다.”]

프랑스어 교본에나 나옴 직한 말투였다.

뭐, 내용을 알아듣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좋아. 나는 그렇게 믿지.”

[“무슈 강의 답이면 충분하오. 부상자는 우리가 책임지겠소.”]

“그 점에 감사한다.”

강찬은 교본에 나오는 말투로 답을 했다.

[“통화 고맙소, 무슈 강.”]

전화가 끊겼다.

고작 이런 통화를 하려고 로버트를 부담스럽게 한 건가 싶을 만큼 단순한 통화였다.

“통화 끝났으면 들어갑시다.”

석강호가 한마디 말로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저녁까지 김형정, 라노크, 바실리, 루드비히와 계속해서 통화한 것 말고 특별한 일은 없었다.

버뮤다의 인공섬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란에 짓고 있다던 차세대 발전 시설 역시 흔적만 남았다고 들었다.

정말 하나씩, 순서대로 정리되고 있었다.

더럽게 크고 동그란 해가 지평선에 반쯤 걸쳐서 핏빛 노을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부총리가 도착한답니다.”

종일 바쁘게 움직이던 로버트가 옥상으로 올라와 시선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리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돌아서 내려가는 로버트가 어쩐지 제라르의 자리를 엿보는 느낌이어서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군복을 갈아입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만나는 게 좋아.”

제라르의 권유를 강찬은 덤덤한 음성으로 거절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지그펠트를 끝까지 감싸겠다고 나서면 지금 우리 모습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느끼게 해 줄 생각이고.”

제라르가 볼의 흉터를 길게 늘이며 웃을 때였다.

뒤섞인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양복 차림의 남자와 경호원인 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 넷이 들어섰다.

“무슈 강.”

그런데 정작 앞으로 나선 놈은 경호원인 듯한 사내 중 한 명이었다.

“그라펠트. 오랜만이다.”

“그렇습니다.”

악수를 나눈 그라펠트가 몸을 비켜서며 가장 앞서 들어온 남자를 가리켰다.

“무슈 강. 이분이 차피 프레슬리 이스라엘 부총리 겸 외무장관입니다. 부총리님, 무슈 강입니다.”

하얀 대가리와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남자였다.

강찬이 손을 내밀었고, 차피가 마주 잡았다.

차피가 강찬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어서 분위기가 뻑뻑했다.

“앉으시죠.”

외인 부대원들이 사용하는 간이 탁자와 의자다.

강찬을 따라 차피가 맞은 편에 앉았다.

석강호, 제라르, 곽철호, 윤상기가 완전무장한 상태로 강찬의 뒤를 지켰고, 그라펠트를 포함한 네 명의 요원이 차피의 뒤에 섰다.

대원 한 명이 움직여서 머그잔에 담긴 커피와 작은 생수병을 앞에 놓아주었는데 소총과 무기가 쩔걱거려서 글자 그대로 죽여주는 분위기였다.

머그잔을 들여다본 차피가 강찬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스라엘은 무력에 굴복할 마음이 없소.”

그리고는 날카로운 눈빛을 풀지 않은 채로 말을 건네왔다.

이런 자리 경험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서 눈에 힘을 딱 주고 있는 저 새끼의 의도쯤은 안다.

세게 나와서 얻을 것을 최대한 건져 보겠다는 거, 그리고 전쟁이란 말에 고개 숙이지 않고 해볼 때까지 해보겠다는 거.

이런 새끼는 셔먼과 다를 바 없다.

틈이 나면 언제고 칼을 들이대는 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입 아프게 주절주절 떠들 게 뭐 있겠나.

제 놈 주둥이로 굴복할 마음 없다고까지 한 마당에 말이다.

강찬은 입 끝만 움직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르.”

“Oui!”

“열을 센다. 그리고도 이 앞에 남아 있는 놈이 있다면 모조리 사살해라.”

철커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라르가 소총을 앞으로 겨눴고,

움찔!

총을 꺼내려던 그라펠트와 요원놈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제라르가 든 소총의 총구를 바라보았다.

철컥! 철커덕! 철컥!

이 새끼들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석강호나 곽철호, 윤상기는 전부 검은 띠 수준인 거다.

상황을 본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소총을 겨눴다.

권총을 꺼내는 것과 겨누고 있는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빠를까?

굳이 어느 쪽이 빠른지 확인해보겠다면 뭐, 말릴 방법은 없다.

강찬은 시선을 돌려 그라펠트를 보았다.

“함께 교육받았던 걸로 꼭 한 번 기회를 준다. 제라르가 열을 세기 전에 꺼져.”

강찬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찰칵.

“후우.”

“무슈 강!”

그라펠트가 강찬을 불렀을 때였다.

“디스(dix,열).”

제라르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이런 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소!”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남은 건 전쟁밖에 없어. 그러니 숫자를 다 세기 전에 꺼져.”

차피의 항의를 강찬은 단순에 잘라버렸다.

“노에프(neuf, 아홉).”

그러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그렇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그라펠트가 차피의 뒤통수를 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위트(huit, 여덟).”

제라르가 계속해서 숫자를 셌고, 이스라엘 요원들이 소총의 방아쇠 부분에 시선을 주었다.

석강호와 제라르는 말할 것도 없고, 곽철호와 윤상기도 이미 방아쇠에 손을 걸고 있었다.

이 네 사람이 국제 정세를 염려해서 방아쇠를 못 당길 거라고?

염병! 그런 계산을 할 놈들이 쿠바에 왔을 것 같냐?

아프가니스탄과 아프리카, 리비아는?

혹시라도 명단에서 제외될까 봐 대가리를 서로 디밀던 대원들이다.

너희는 아직도 대한민국 특수팀, 아니, 대한민국이란 이름에 속한 사람들의 근성을 모르는 거야.

“세트(sept, 일곱).”

“후우.”

강찬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번거롭다는 표정으로 차피를 보았다.

그럼 그렇지!

카운트를 하라고는 했지만, 너도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는 건 두려운 거지?

놈의 시선에 스친 감정이 분명하게 강찬에게 전달되었다.

피식.

“씨스(six), 쎙크(cinq}, 캬트흐(quatre), 트루아(trois), 두(duex).”

강찬은 단숨에 숫자를 둘까지 세어 버렸다.

“무슈 강!”

그라펠트가 놀란 눈으로 강찬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지그펠트를 내놓겠소!”

차피가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너무 늦은 거 같지 않아? 그럴 시간이 있으면 얼른 내려가는 게 좋아.”

강찬이 차피의 제안을 털어낸 직후였다.

“교육을 함께한 동기로 부탁합니다, 무슈 강!”

그라펠트의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강찬은 그라펠트와 차피를 번갈아 보았다.

이 새끼들은 언제고, 반드시 뒤를 노릴 놈들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예 지금 죽여버리는 게 두고두고 속이 편할 일이다.

셔먼에게 당한 꼴을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는 거다.

강찬이 마음을 굳히는 순간이었다.

“지그펠트는 현재 북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라펠트의 말에 다시금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강찬의 눈빛을 본 그라펠트가 연달아 입을 열었다.

“모사드가 북한까지 안내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새끼들이!

한 번 했으면 됐지, 두 번씩이나 같은 민족을 이용해?

강찬이 천천히 내린 시선을 받은 차피가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라펠트.”

강찬은 차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그라펠트를 찾았다.

“위, 무슈 강.”

“기회를 준다. 앞으로 4시간 안에 가자지구에 대한 평화 협상을 제안하고 그 제안을 진행하면 내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침공은 없다.”

그라펠트가 마른 침을 삼켰고, 차피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북한을 두 번씩이나 이용한 너희를 용서할 마음도 없다. 다시는 북한을 이용할 생각 하지 마라. 차피는 그 본보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차피의 눈이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제라르. 저 새끼 치워.”

“Oui!”

“무슈 강! 그는 모사드의……!”

푸슝! 퍼억!

차피가 이마를 뚫린 채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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