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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그의 변치 않는 성품에 감사해라.
매운 고추를 한 움큼 털어 넣고 씹어서 혀를 마비시킨 다음, 코로만 소리 낸다고 생각하고 ‘몬트 세인트 마틴(Mont-Saint-Martin)’을 발음하면 대충 비슷하게 나오는 소리, 몽셍마흐땅.
프랑스와 뤽상부르의 국경에 위치한 몽셍마흐땅의 호텔에서 깨어난 강찬은 제라르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움직였다.
푹 잤다.
찜찜함이 떨쳐지지 않았지만, 싸이로의 대가리를 제라르가 시원하게 돌려주었고, 하얀 대가리 잉어까지 챙긴 다음 날 아침이다.
저놈에게서 그 빌어먹을 최면을 떨쳐내기 위해 심장 근처에 총알까지 맞았던 거 아닌가.
제라르의 눈에서 어릴 적의 애처로운 빛이 사라진 것과 강대경과의 통화 덕분에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앉은 강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염병!
객실에서 시켜먹기 뭐해서 움직인 건데 그게 화근이었다.
뭐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급은 넘는 호텔이다. 그런 호텔의 레스토랑에 손님이라고 달랑 강찬과 제라르만 앉았다.
레스토랑 전체를 통제한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앉은 사람이 둘이어서 그렇지, 서 있는 놈들은 열이 넘었다.
가뜩이나 불편한 거 싫어하는 강찬이다.
그런데 열이 넘는 프랑스 요원 놈들이 서 있는 앞에서 식사를 하라니 뭔들 목구멍으로 편하게 넘어가겠나.
성격상 이런 것을 싫어하는 데다, 대원들과 지내 버릇하며 몸에 밴 습관 탓도 있었다.
강찬은 고개를 돌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요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란 키에 뾰족한 코를 가진 전형적인 프랑스 남자, 선글라스를 낀 요원이 조용하게 강찬에게 다가왔다.
“아침은?”
“예?”
“여기 요원들 아침 식사는?”
“교대하면 먹습니다.”
얼추 둘러보아도 열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 열 명 넘는 요원들이 더 있다는 말이 된다.
“함께 앉아서 식사해.”
요원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강찬을 보았다.
“난 이런 경호가 불편하다. 그러니까 이 테이블 주변에 앉아. 그 정도면 경호에 문제없을 테니까 함께 식사하자고.”
요원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이런 일이 없었던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외인부대 특수팀 사령관을 앞에 두고 경호를 의심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먹을 땐 좀 편안하게 먹자. 아니라면 방으로 가서 식사하겠다.”
“명령을 내려주시겠습니까?”
별! 하여간 이 새끼들 융통성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
“알았다. 명령이다. 요원들을 이 테이블 주변에 앉게 하고 모두 맛. 있. 게. 식사한다.”
“Oui.”
놈이 물러나서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요원들이 강찬과 제라르 주변에 2인 1조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제 좀 분위기가……, 장례식을 마치고 모인 식사자리 같았다. 검은 양복을 죄 차려입은 서양놈들 틈에 앉은 탓이다.
오광택이랑 석강호, 최종일 조원이 같은 복장으로 저러고 앉았으면 조폭 모임 같았을 텐데.
“왜 그러십니까?”
강찬이 피식 웃자 제라르가 궁금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살아난 게 좋아서 그런다. 주문했냐?”
프랑스식 아침이라고 별거 없다.
대개 바게트, 크로와상, 삶은 달걀, 치즈, 요거트가 나오고 장소마다 다르게 시리얼 종류나 과일이 추가된다.
강찬은 손가락 길이만 하게 잘려 나온 바게트를 찢어 얇게 썬 삶은 달걀과 치즈를 넣어서 먹기 시작했다.
“언제 움직일 겁니까?”
“한 이틀 두고 보자. 아무래도 정보가 너무 없어서 그걸 좀 구해볼 생각이거든. 잠수함에, 미사일에, 대공포까지 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적의 숫자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제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게트를 찢어 입에 넣었다.
대략 30분에 걸쳐 식사를 마쳤다.
그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강찬과 제라르가 커피를 주문하자, 옆 테이블에서도 역시나 커피를 주문했다.
“담배를 피워도 되나?”
“창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중년의 지배인이 센스 있는 답과 함께 커피를 놓아주었다.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인 강찬이 연기를 뿜어낼 때였다.
입구로 키가 짤막한 남자가 들어섰다.
거 왜 있잖나?
이마부터 쭉 머리카락이 없어서 가운데가 반짝이는 머리, 들어선 남자는 요원들을 의아한 눈으로 둘러보고는 바로 강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쌍꺼풀 짙은 눈, 크고 둥그런 코, 살이 살짝 늘어진 볼, 그리고 셔츠 단추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배가 불룩 나온 남자가 강찬 앞에 섰다.
“뵙게 돼서 기쁩니다. 위고입니다.”
뭔가 좀 샤프하고 책임감 있게 생긴 놈인 줄 알았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짐작하던 모습과 너무 다르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반갑다. 인사부터 하지. 이쪽은 제라르, 제라르, 정보총국의 내 담당 요원 위고.”
“제라르요.”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정보총국 위고 입니다.”
두 놈은 성의가 전혀 담기지 않은 말과 짧은 악수로 인사를 마쳤다.
“앉아. 커피?”
“감사합니다. 제가 주문하겠습니다.”
“담배는?”
“안 피웁니다.”
그거야 뭐.
커피를 주문한 위고가 바로 강찬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우즈만과 셔먼이 부총국장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위고가 힐끔 제라르를 살폈다.
“앞으로도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떤 내용이든 제라르를 통해도 된다. 그러니 제라르 앞에서 말을 가리지는 마라.”
마침 커피가 나와서 잠시 말이 끊겼다.
달각.
지배인이 돌아가기 무섭게 위고가 바로 입을 열었다.
“셔먼이 다윗의 별과 함께 부총국장님을 뵙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지그펠트가? 나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강찬의 표정을 읽은 위고가 바로 설명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당대 다윗의 별이 이런 면담을 요청한 적은 없었습니다. 셔먼이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제안입니다.”
그깟 놈 하나 만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나?
“면담 이유가 뭐야?”
“면담 요청과 다윗의 별이 동행한다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부총국장님께서 동의하시면 장소와 경호 인원을 정해서 알려주겠답니다.”
강찬은 담배를 끄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장소와 경호 인원을 듣고 결정한다고 답해. 그리고 셔먼이 내 번호를 아는데 왜 정보총국을 통했는지도 물어보고.”
“부총국장님께서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어서 정보총국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하려는 것과 장소, 경호 인원에 대한 약속에 정보총국의 신용을 걸려는 계산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는 이유이기는 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상황을 분석해서 보고하는 걸 보면 위고란 이놈도 그저 그런 놈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도 하겠다. 그렇다면 질문은 취소하고, 앞에 말한 것만 전달하도록. 그리고 우즈만이 날 보겠다는 이유와 시간은?”
“이유는 받지 못했습니다. 역시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고 만나고 싶어서 정보총국을 통해 연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면담을 허락하시면 한국에서 바로 이리로 오겠답니다.”
강찬이 시선을 돌리자 제라르가 얼굴을 늘어트렸다.
‘알아서 판단하시죠!’하는 의미였다.
“적당한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우즈만에게 알려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마 바로 이리 올 예정이어서 오늘 저녁이면 도착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대화를 마친 위고가 커피잔에 각설탕을 세 개나 집어넣었다.
“위고. 그리고 버뮤다 호크 베이 앞에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섬이 있다던데?”
위고가 잔을 들다 말고 강찬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아직 커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마셨다.
“그곳에 다윗의 별이 숨어 있다고 들었다. 잠수함 두 정, 미사일, 대공포가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무기와 병력을 파악했으면 싶다. 필요하다면 내가 이 호텔에 데리고 온 파르탈이란 놈을 심문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위고가 간단한 답으로 강찬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어쩐지 그는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문 것처럼도 보였다.
하여간 의뭉스러운 놈들 참 많다.
띠루룩. 띠루룩. 띠루룩.
전화벨이 울리자 라파엘이 공손하게 라노크에게 가져갔다.
침대 옆 탁자에 현직 대사인 피에르와 정보총국장 로망이 앉아 있는 앞이다.
“강찬 씨.”
라노크의 응대에 피에르와 로망의 시선이 단숨에 전화기로 달려갔다.
[“대사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강찬 씨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쩍부쩍 좋아집니다.”
[“그렇다면 좀 더 자주 전화 드려야겠네요.”]
라노크의 입가에 스치는 것처럼 미소가 지나간 다음이었다.
강찬이 아침에 위고가 왔던 일과 주고받았던 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라노크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훌륭한 판단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다.”
[“예.”]
“지그펠트는 정보국 모두가 짐작했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다윗의 별이란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과 이렇게 면담이 이루어진 것은, 다윗의 별이란 명칭이 생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꼬리가 밟히면 바로 후임자에게 명칭을 넘겨버렸으니까요.”
라노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로망을 본 이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강찬 씨가 파르탈을 손에 넣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 지금부터는 좀 더 안전에 주의를 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의 별에게 가장 접근했던 미국을 제치고 프랑스가 차기 다윗의 별을 손에 넣은 격이니까요.”
라파엘과 달리 로망은 숨을 들이켜며 놀라움을 감추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 정도라면 지그펠트가 파르탈을 버리지 않을까요?”]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강찬 씨가 누구보다 잘 판단하겠지만, 면담 장소나 경호 인원에 좀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강찬의 답이 건너온 다음이었다.
“강찬 씨.”
라노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강찬을 불렀다.
“강찬 씨는 정보총국의 총국장 권한을 위임을 받았고, 제게서 분명하게 유럽 정보 운영 위원회의 위원장을 넘겨받은 분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전화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습게도 통화 내용을 듣는 세 사람 중 침대의 발끝에 선 라파엘이 가장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사님. 지그펠트를 제거하면 전 다시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 뒤로는 대사님과 안느를 졸라서 골프를 배워볼 생각입니다. 소개하고 싶은 여자도 생겼구요.”]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던 라노크가 가슴을 움켜쥐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피에르는 라노크가 저렇게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아서 놀란 얼굴이었고, 로망은 당황한 얼굴이었으며, 라파엘은 고개를 숙여 미소를 감췄다.
“그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또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피에르가 냉큼 가서 받아들었다.
“로망.”
“예, 위원장님.”
“그의 사망 소식에 내가 왜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나?”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라노크가 웃던 직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로망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너의 잘못된 판단을 고집했다면 프랑스는 돌이키지 못할 위험을 맞을 뻔했다. 너는 그의 변치 않는 성품에 감사해라. 그는 이미 정보 세계의 영향력에 있어서 나를 앞서고 있으니까.”
로망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문 직후였다.
“정보 총국의 총국장 권한 덕분이란 변명 따위를 꺼내려고 했다면 너는 자격 미달이다. 그가 눈빛 한 번 주는 것으로 당장 미국,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독일, 영국이 그의 손을 잡기 위해 다툴 거고, 중동의 산유국들이 힘을 합쳐 매달릴 거다.”
“좀 더 주의하겠습니다.”
피에르를 짧게 바라본 라노크가 다시 시선을 로망에게 주었다.
“정보총국은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가장 밑바닥에서 추한 일들을 해결하는 곳이다. 너의 알량한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고 싶다면 그에 맞는 일을 찾아. 그리고…….”
로망이 마른 침을 삼키며 라노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그의 표정이 그만큼 매섭고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또 한 번 그에게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인다면,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너를 제거하겠다. 이제 그는 너 따위가 어쩔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로망의 답이 떨어지고도 잠시 그를 지켜보던 라노크가 라파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홍차를 준비해 주겠나? 오늘은 시가를 즐겨야 할 것 같다.”
“준비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요청이었고, 공손한 응대였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르.
전화기를 들여다본 바실리가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들지도 않은 채로 버튼을 눌렀다.
“바실리다.”
[“강찬이다.”]
이 두 사람은 도대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양범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린 다음이었다.
“살다 보니 죽은 사람과도 통화를 하게 되는군.”
바실리의 대꾸에 강찬이 피식 웃는 소리가 분명하게 넘어왔다.
“양범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다.”
바실리가 양범을 소개하자, “강찬 씨. 반갑습니다. 몸은 괜찮습니까?”하고 양범이 안부를 전했고, [“바로 연락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하는 강찬의 답이 있었다.
“살아있어서 실망을 안겨 주었으니 반가운 소식 하나쯤은 줘야지? 몽골 기지에 있기가 지겨워서 말이야.”
안부 통화가 끝나는 뒤끝을 붙잡는 것처럼 바실리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피식하는 웃음이 먼저 건너왔다.
그런 뒤에 강찬은 라노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바실리에게 전해주었다.
“설마 그런 자리에 나가면서 셔먼이나 지그펠트의 약속을 믿을 정도로 단순한 건 아니겠지?”
[“장소와 인원이 나오면 따로 전화하겠다.”]
강찬의 답에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뮤다 지역은 미국 놈들이 껴안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가 몇 번 들어가려고 했을 때마다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막아서곤 했었지. 우리에게 특별하게 피해가 없어서 눈감아 주었던 거지, 놈들이 무서워서 돌아온 건 아니다.”
그는 양범을 바라본 후에 말을 이었다.
“적어도 버뮤다를 치려면 미국과의 협상이 전제 조건이 될 거고, 아니라면 실제 전쟁 상황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그동안 그 근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은폐한 것에 미국이 협조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놈들이 얼마나 곤란해질지를 예상하면 답이 될 거다.”
[“참고하겠다. 몸은 좀 어때?”]
“아무렴 이 바실리가 이깟 상처에 죽을 줄 알았나?”
강찬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을 때다. 양범은 바실리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분명하게 보았다.
[“양범 씨. 건강 조심하고, 몽골 기지 잘 부탁합니다.”]
“그런 건 미사일을 끌고 온 나한테 해야지!”
[“부탁한다. 바실리.”]
“강찬 씨.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뵙지요.”
양범의 말이 끝난 직후다.
바실리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양범의 웃는 얼굴을 힐끔 본 그는 저 멀리 펼쳐진 황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서운 인간. 결국, 지그펠트를 끌어내고 파르탈까지 손에 넣었군.”
“두 사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까?”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윗의 별은 신분이 노출된다 싶으면 바로 명칭을 넘겨버리지. 그래서 제거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어. 또 그들이 몸을 숨기면 전혀 찾을 방법이 없었지. 그곳이 버뮤다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앞에 말한 이유들 때문에 수색도 어려웠고.”
“공연히 민간 항공기와 선박이 떨어지거나 침몰한 게 아니었군요.”
바실리가 힐끔 양범을 보았다가 시선을 가져갔다.
“정보국의 책임자라면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되지. 그 근방을 지나다 당한 민간 항공기에 요원들이 탑승한 경우가 많았다. 다윗의 별이 그곳에 몸을 감췄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특수 장비로 아래를 촬영하려던 경우였다.”
“중국은 배워야 할 것이 참 많군요.”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바실리가 입을 열었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사자 아닌가? 자네 같은 친구가 정보국 수장을 맡은 것이 중국에는 축복이고, 다른 나라에는 불행이 되겠지.”
양범이 바실리의 시선을 따라 황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무슈 강.”
바실리가 혼잣말처럼 강찬을 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노크가 처음 이런 제안을 했을 때 나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었지.”
“강찬 씨를 지지하는 것 말씀인가요?”
“아니. 처음 그가 제안한 것은 정보국 간의 무조건 적인 협조였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국의 생리와 정반대되는 주장이어서 처음 들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
“그래서 유럽 정보 위원회가 만들어진 거군요.”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한 번도 내가 인정할 남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징그러운 인간! 이번에 죽어주었다면 내 인생이 훨씬 풍요로워졌을 텐데.”
말을 마친 바실리가 양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긴! 중국의 정보국 최고 책임자와 앉아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다 그 인간 덕이기는 하지.”
밉지 않은 눈빛이어서 양범은 그저 소리 나지 않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만약 무슈 강이 없었다면 자네처럼 발전할 소지가 있는 정보국 인물은 이미 제거 대상이 되었을 거다.”
그러나 진심이 담긴 듯한 바실리의 다음 말에 양범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