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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오브블랙필드-397화 (39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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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드러나는 비밀.

덜커덩!

밖으로는 라이트, 안에는 계기판의 불빛으로 어둠을 밀쳐내던 승합차가 커다랗게 튀었다.

염병!

상처가 울린 강찬이 인상을 버럭 쓰자 파르탈이 잽싸게 눈치를 살폈다.

이런 새끼가 다음 대 다윗의 별?

하얀 대가리 잉어의 목을 돌리기에 딱 좋은 시골 밤길에서 강찬은 번거로운 표정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죽이기조차 안쓰러운 적을 보는 기분이라니!

이 새끼 때문에 일이 묘하게 풀렸고, 그만큼 꼬였다.

원래 계획은 짜잔! 하고 등장한 동양 남자가 싸이로를 납치해 가는 거였다.

헛갈리는 다윗의 별!

혼선을 빚는 각국의 정보국, 그중 특히나 툭하면 양다리를 걸치는 미국의 셔먼을 노린 점도 있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가면을 벗고 혼자 들어갔던 건데……, 하얀 대가리를 한 멍청한 잉어가 냅다 미끼를 처물고 나와서는 주절주절 모든 걸 털어놓아 버렸다.

물론 적의 기지도 알았고, 약도 올렸으니까 잉어가 제값을 하긴 한 꼴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제라르의 말처럼 이걸 어항에 잘 키우면 사룟값은 충분히 뽑을 것 같다는 계산도 섰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라면!

“잠깐 차 좀 세워 봐.”

강찬은 결심을 굳혔다.

“이 새끼 잘 지키고 있어.”

그래서 차를 세우게 하고 어두운 시골 길로 혼자 내려섰다.

맑은 공기에 섞여 풍겨오는 새마을 냄새로 봐서 근처에 방목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넓은 초지 위로 달라붙은 하늘에 별들이 빼곡한 밤이다. 이런 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드라큘라 후손처럼 죽고 죽이는 싸움의 끝을 잡고 있다니.

강찬은 전화기를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이미 얼굴을 비쳤고, 적의 대가리를 알아낸 상황에서 굳이 정보국 사이에 혼선을 일으키겠다고 어려운 길을 갈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라노크에게 어느 정도 언질까지 주고 온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띠익. 띠루룩. 띠루룩. 띠루룩. 띠루룩. 띠루룩.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빛이 먼저 나온 다음, 엄청난 전화 기록이 쏟아졌다.

“후우.”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연속으로 떠오르는 발신자 이름을 지켜보았다. 강대경, 김형정, 박철수, 차동균, 곽철호를 시작으로 김관식, 김미영의 번호까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들에게 이런 고통을 안겼나 싶었지만, 지금은 계획했던 전화를 걸어야 할 때였다.

강찬은 먼저 라노크의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들리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래는 라노크가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신호음이 끊긴 다음이었다.

[“강찬 씨.”]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덤덤한 음성이 들렸다.

강찬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대사님. 강찬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멋진 일을 완수했더군요.”]

“그쪽 결과는 아직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조금 전에도 통화를 했었던 것처럼 대화가 진행되었다.

라노크가 강찬이 궁금해하던 두바이의 상황을 처음과 같은 음성으로 전해주었다.

[“나와 바실리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스만과 협상을 마쳤습니다. 강찬 씨의 전화기로 번호를 보낼 테니 그와 한번 통화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무서운 구렁이들!

우스만과의 협상을 마쳤다는 말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라노크와 바실리가 강찬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바실리도 제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처음부터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구렁이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

강찬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멋진 작전이었습니다. 다만, 사무실 위성 직원들의 보고 내용, 그리고 그 외에 몇 가지 힌트가 있어서 짐작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쩐지 위로해 주는 느낌이어서, 강찬은 전화기에 들리지 않게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대사님. 제가 지금…….”

강찬은 곧바로 현재 위치와 상황을 라노크에게 전해주었다.

[“지그펠트……!”]

알고 있었구나!

강찬의 짐작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라노크의 말이 이어졌다.

[“뤽상부르라면 정보총국이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합니다. 더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정보총국에 사건을 이대로 덮으라고 명령하세요. 그리고 이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받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우스만인가 하는 왕족과 전화하면 두바이 일은 처리가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사님.”

진심으로 고마워서 전한 인사였다.

[“바실리가 큰일을 해내는 강찬 씨에게 전하는 작은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강찬은 그저 “예.”하고 답을 했다.

“대사님. 그럼 저는 이대로 버뮤다로 움직이고, 그 일을 마친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러온 다음이었다.

[“적의 근거지를 알았고, 파르탈까지 손에 넣었으니 너무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안느의 안부를 챙긴 강찬은 전화를 끊고, 바로 정보총국의 번호를 눌렀다.

[“위고입니다.”]

“강찬이다.”

[“음성을 확인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죽었다던 사람이 전화했는데 당황하지 않고, 음성을 분석해?

이 새끼들은 확실히 하는 짓이 다르긴 하다.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모시게 돼서 반갑습니다. 부총국장님. 지시 사항을 주십시오.”]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할 수 있나?”

[“문자가 도착하거든 바로 승인 버튼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좋아. 뤽상부르 가흐니슈 근처다. 이쪽으로 요원들 보내고, 가흐니슈 카페에서 있었던 격투와 성인 남자 둘의 납치 건을 최대한 서둘러서 덮었으면 싶다. 가능한가?”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강찬이 승합차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우웅.

밤을 밝히는 전화기의 불빛과 함께 짧은 문자가 들어왔다.

[위치 확인을 요청합니다.]

강찬은 곧바로 승인이라는 글자를 손으로 찍었다.

우웅.

연달아 또다시 문자가 들어왔다.

라노크가 보낸 전화번호였다.

전화기를 붙잡자마자 더럽게 바빠졌다.

[“경찰의 수색을 중지시켰습니다. 그 외에 계신 곳으로 요원들이 도착하는데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프랑스랑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이런 거 하나 정말 좋다.

“수고했다, 위고.”

[“제 임무입니다.”]

이놈들과 인간적인 유대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강찬은 차 문을 열고 제라르에게 내용을 설명했다.

얼핏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하얀 대가리 잉어는 2열 좌석에 테이프로 꽁꽁 싸매져 있었다.

물을 좀 뿌려줘야 하나?

놈의 몰골을 보고 실없이 웃은 강찬은 제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와라. 담배나 하나 피우자.”

제라르가 나와 섰고, 강찬은 승합차의 게단에 앉았다.

찰칵.

“후우.”

바람이 없는 곳에서 뿜어낸 연기는 천천히 사라진다.

잠시 숨을 고른 강찬은 바로 라노크가 보내준 전화번호를 눌렀다.

단순한 신호음이 울린 다음이었다.

[“알로?”]

나이 든 남자의 아랍어 억양이 역력한 프랑스어였다.

“라노크 대사님께 번호를 받았다.”

기껏 신분을 밝혔더니 깊은 한숨이 넘어왔다.

[“바실리와 라노크의 연락을 받고 바로 두바이에 도착했소. 무슈 강, 깊은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기로 하고, 우리 쪽의 잘못으로 한국의 국제빌딩 테러와 두 분의 요인, 그리고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를 대신해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묘한 억양의 프랑스어로 전하는 고개가 갸웃할 정도의 공손한 사과였다.

[“아비부와 지브릴의 일을 이쯤에서 정리하고 싶소. 내가 직접 네 명의 한국인을 한국으로 데리고 가겠소. 이 일을 계기로 본국과 한국의 관계를 보다 더 우호적이고 발전적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무슈 강이 개인적으로 인정하고 더는 응징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주면 되는 거요. 남은 외교적 문제는 라노크, 바실리의 도움을 받아 내가 풀어가겠소.”]

강찬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없이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매듭을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다.

“좋아. 네 사람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다면, 그리고 이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어떤 도발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번 제안을 받아들이지.”

[“고맙소, 무슈 강. 이번 일이 정리되면 개인적으로 꼭 한 번 만납시다.”]

전화를 끊은 강찬은 앞에 선 제라르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콰다당!

발에 가슴을 얻어맞은 석강호가 의자와 함께 뒤로 처박힌 다음이었다.

달칵.

취조실의 문이 열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남자 넷이 들어섰다.

하얀색 타브와 검은색 구트라를 머리에 두른 노인과 수행원 둘, 그리고 취조관의 상관이었다.

연륜과 여유가 묻어나는 눈, 취조실을 둘러보는 자세, 마지막으로 그들 보필하는 두 명의 수행원과 상관의 공손한 태도.

취조관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스만 왕세자님이시다.”

“뵙게 된 것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우스만이 분명하게 자신을 향해 준 시선에 취조관은 사명감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가 원한다면 석강호의 온몸을 난도질해서라도 지브릴을 살해한 동기와 배후를 캐내고 말 거라는 사명감이었다.

“저 사람을 일으켜주겠나?”

“예?”

의아해하던 취조관이 우스만의 시선을 확인하고 빠르게 석강호를 앉혔다.

“몸을 풀어주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지.”

취조관은 상관을 보았다.

그러나 얼른 뜻을 따르라는 듯한 눈짓에 석강호를 묶었던 수갑과 포승을 풀고 문 앞으로 비켜섰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고 불러주십시오.”

더없이 공손한 태도를 보인 상관이 눈짓으로 취조관을 불러 함께 취조실을 나섰다.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석강호는 우스만을 보기 위해 피로 범벅인 콧구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랍의 정서상 이 정도로 고위급 인사가 나왔다면 상황 끝이다. 저 사람의 말 한마디면 심문이고 지랄이고, 그냥 공개사형으로 마무리되는 거였다.

“푸흐흐.”

석강호는 분명 웃었다.

강찬을 못 보고 죽는 게 좀 아쉬워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상하게 퉁퉁 부은 눈에서 핏물이 길게 늘어졌다.

강찬을 못 보고 죽는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순간, 그렇게 해서 강찬의 얼굴이 그려지는 그 순간에, 저도 모르게 피와 엉겨서 눈물이 흘러내린 거였다.

‘거! 씨!’

추한 꼴을 보인 것 같아서 석강호는 욕을 삼켰다.

절대로 죽는 게 무섭다거나, 이런 상황이 두려워서 흘린 눈물은 아니다. 오래전 아프리카에서는,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없을 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냥 덤덤했었다.

우스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수행원이 건네준 전화기를 받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슈 강.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그가 석강호에게 전화기를 디밀었다.

‘뭐하자는 수작이지?’

석강호는 우스만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자꾸만 머리를 뒤로 젖혔다.

퉁퉁 부은 눈, 틀어진 코, 찢어지고 갈라진 주둥이.

우스만은 그렇게 흉한 몰골의 석강호를 향해 나직하게 아랍어를 쏟아냈다.

“무슈 강이 자넬 찾는다. 우선 전화를 받아보고 그 뒤에 이야기를 나누면 될 거다.”

강찬이 전화를 했다고?

염병할 늙은이!

“그는 죽었소. 그래서 내가 복수를 하러 온 거요.”

우스만이 지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냐! 그렇다면 받아주마!

그래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마.

어디서 이런 얄팍한 수를!

석강호가 피투성이인 손을 내밀어 전화기를 받았다. 그리고는 우스만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것을 보며 전화기를 귀에 댔다.

“알로?”

한국말을 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이놈들이 혹시나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나온 프랑스 말이었다.

[“개새끼.”]

그런데 덜컥 들려온 한국말 욕이, 너무나 익숙한 음성에, 석강호는 목구멍이 탁 막히고 말았다.

설마 이게 속이는 건 아니겠지?

[“괜찮냐?”]

석강호는 마른 침만 삼켰다.

[“야! 대답 안 해!”]

이 정도면 믿을 만했다.

강찬 특유의 억양과 답답함을 이렇게까지 표시할 정도라면.

“대장이오?”

[“우냐?”]

“푸흐흐…….”

석강호의 웃음이 탁 막힌 목 때문인지 정말 우는 것처럼 들렸다.

[“우스만과 협상 끝났다. 그대로 애들 데리고 한국으로 움직여. 죽일 새끼 있으니까 엄살떨 생각하지 말고.”]

“알았소.”

석강호가 침을 삼키며 답을 한 다음이었다.

[“다예.”]

“예.”

강찬이 불렀고, 석강호가 답을 했다.

[“잘했다. 지브릴을 죽인 것과 마지막에 힘든 결정 한 거, 안 그랬으면 너 죽어서도 편치 않았을 거다.”]

“푸흐흐.”

[“몸 추스르고 나중에 보자.”]

이대로 전화를 끊기가 어딘지 아쉬웠다.

“대장.”

[“왜?”]

“몸조심하쇼.”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먼저 건너왔다.

이 웃음이 이렇게 든든하게 들릴 줄 몰랐다.

[“제라르가 너 잡혀가는 꼴이 그렇게 멍청해 보일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어지는 강찬의 말을 듣는 순간, 석강호는 지금까지 좋았던 감정이 싹 사라졌다.

“그 개새끼는 틀림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뒈졌을 거요!”

석강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강찬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우스만을 바꿔.”]

“알았소.”

석강호는 아랍어로 “바꾸랍니다.”하고 우스만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는 흰 손수건으로 피를 닦은 다음에서야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거요. 라노크와 바실리가 보증한 대로 무슈 강이 약속을 지켜줄 거라 믿겠소.”

뚝딱거리는 프랑스 어로 말을 건넨 우스만이 전화를 끊었다.

“움직일 수 있겠나?”

“물론이오.”

우스만이 뒤를 돌아보자 수행원 둘이 움직여 석강호를 일으켜 세웠다.

“이례적입니다!”

해외 보도 전문 방송의 속보다.

내용을 전하는 기자는 빠르고 높은 음성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심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을 살해한 범인을 두바이 정부가 곧바로 사형에 처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점에 대해 만족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화면에는 석강호, 최종일, 우희승, 이두희의 가면을 쓴 남자 넷이 죽은 채로 누워있는 장면이 뿌옇게 처리되어 나왔다.

“이게 도대체……?”

고건우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억지로 인상을 굳혔다.

정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상황이었고, 라노크를 만나보기도 전이다. 솔직히 이렇게나 서둘러서 네 사람을 사형에 처할 줄은 몰랐다.

고건우는 부족한 능력을 뼈저리게 실감했고, 그래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좀 더 강했더라면…….

국가정보원 삼성동 분실.

김형정은 멍한 얼굴로 TV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당장 고건우를 만나야 하지만 정말이지 딱 5분, 아니 잠깐이라도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아무렴 두바이 정부가 석강호나 최종일 팀이 가면을 쓴 것을 몰라서 저런 모습을 공개하지는 않았을 텐데……?

혹시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따로 공작을 펼친 건가?

띠루루루. 띠루루루. 띠루루루.

고건우의 전화일 거다.

김형정은 “흠흠.” 거리면서 목을 가다듬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사람이 느닷없이 얼이 빠질 때가 있다.

지금의 김형정처럼.

도대체 왜 이런 시간에, 아니 그냥 다 집어치우고, 어떻게 강찬의 발신번호가 뜰 수 있는 거지?

실제로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수습한 김형정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형정입니다.”

[“팀장님.”]

뭐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의심스러운 생각과 동시에 왜 그런지 모르는데 김형정은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그냥 속이 뜨거워지더니 느닷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만 거다.

실제 강찬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는데……, 다른 나라 정보국의 교란 작전일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증거를 잡으려고 이럴 수도…….

[“많이 놀라셨을 줄 압니다. 죄송합니다.”]

자꾸만 넘어오는 감정을 삼키느라 김형정은 마른 침만 삼켰다.

[“석강호와 최종일, 우희승, 이두희가 한국으로 출발할 겁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우스만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받아들이세요.”]

김형정은 마지막까지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맞는 거 같다!

이런 말을 할 사람은 강찬밖에 없다!

가면을 쓴 채로 사형에 처했다는 상황과도 딱 맞는다.

“부원장님……? 부원장님이 정말 맞으시는 겁니까?”

건너편에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예, 맞습니다. 몽골에서 구해드렸던 김 팀장님.”]

답을 들은 김형정은 이번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아직 희망을 쥐고 있는 거다.

이제부터 전처럼 막힘없이 달려갈 수 있는 거다.

[“자세한 설명은 석강호에게 들으시고, 지금은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어딘지, 몸은 괜찮은지도 묻지 못하고, 김형정은 메모지와 펜을 챙겼다.

[“증평의 특수팀이 필요합니다. 장소는 버뮤다 호크베이 200킬로미터 전방의 작은 섬입니다. 지대공 미사일, 잠수함 2정, 항공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고무보트로 접근한 다음, 해안으로 침투할 예정입니다.”]

역시!

대한민국의 특수팀을 데리고 이렇게 화끈한 작전을 하겠다고 할 사람이 강찬 말고 또 있겠나.

[“대통령님과 원장님께만 말씀드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병원에 있는 라노크 대사님을 만나시거나 러시아의 바실리에게 전화하시면 됩니다.”]

그래!

원래는 이렇게 라노크나 바실리와 통했었어!

“알겠습니다. 출발 시간은 어떻게 잡으면 됩니까?”

어느새 김형정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 석강호와 그쪽 세 명이 함께 온다고 설칠 테니까 그렇게 세 명과 함께 보내주시면 됩니다. 차동균과 곽철호는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그쪽에 요원들 파견해서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조치 부탁드려요.”]

“예. 그런데 이 정도면 대통령님이나 원장님께서 직접 통화를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 괜찮으니까 전화 주시면 됩니다. 사무실에 있는 병원 직원과 디아이 직원에게만 비밀이 유지되도록 주의해 주세요. 그리고 어려운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강찬이 무언가를 전하자 김형정이 “꼭 처리하겠습니다.”하고 답을 했다.

[“목소리 들으니까 참 좋은데요?”]

강찬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김형정은 몇 번이나 발신 번호를 확인했고, 메모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차!”

그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손으로는 고건우의 번호를 누르고, 오른손에는 재킷을 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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