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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무슈 강이 타겟이 되겠지.
물과 기름은 죽어라 흔들어 놓아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간다.
지금의 강찬과 로망처럼 말이다.
어쩌면 종족이 다른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른 탓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아무튼,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강찬은 로망과 제대로 말을 섞지 않았다.
강찬은 그 짬을 이용해 몽골 기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자네 어쩐 일이야?”]
“대표님. 그쪽 기지로 러시아의 바실리가 200명, 중국의 양범이 150명가량의 인원과 함께 이동중 입니다. 일단 그 사람들에게 협조 좀 부탁드려요.”
바실리란 이름을 들은 로망이 빠르게 시선을 주었다.
새벽에 느닷없이 전화해서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했음에도 김태진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알았다고 답을 했다.
[“이쪽에서도 기본적인 보도는 봤어. 그리고 김형정 그 친구가 상황을 알려주고 있고. 최대한 협조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
“고맙습니다. 두 분은 잘 계시죠?”
[“두 분 모두 건강해지셔서 자네가 보면 놀랄걸?”]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릴게요.”
[“그러지.”]
전화를 끊고 잠시 더 달린 후에 대사관에 도착했다.
606대원들이 정문에서부터 승합차를 에워싸는 것처럼 지켜주는 틈에서 강찬과 로망이 내렸다.
“당분간 606의 지시를 받는 게 좋아.”
“경호는 정보총국에 부탁할 생각입니다.”
허가를 요청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어서 강찬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지간해야 아침이라도 함께 먹고 헤어지지.
아직은 눈에 모래가 담긴 것처럼 서먹거리는 사이에 뭐 속 불편하게 함께 밥을 먹겠나.
치사한 게 아니라, 로망의 눈 어딘가에 솔직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어서 그렇다.
강찬도 알고 로망도 알지만, 이건 전적으로 로망이 먼저 주둥이를 열어야 할 일이었다. 아니라면 라노크와 대화가 가능할 때 알아보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강찬은 그 길로 사무실로 이동했다.
아직 출근 시간 직전이다.
차들이 길을 완전히 막아서기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고, 간단하게 씻은 다음, 다 함께 아침을 먹었다.
게으른 태양이 아침 햇살을 창으로 뿌릴 때 강찬은 바로 창 앞에 있었다.
“커피요.”
석강호가 머그잔을 앞에 놓아주었다.
“제라르는?”
“위성 사진 분석한다고 들어갔소.”
석강호가 강찬의 맞은 편에서 창을 바라보는 자세로 걸터앉았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는 이 정도의 여유가 말이다.
“다예. 애들이 많이 지쳤다.”
강찬의 시선을 따라 석강호가 책상에 앉아 있는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를 바라보았다.
“쟤들뿐 아니라 아래 경호 맡은 애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차피 지브릴인가 하는 놈, 그리고 뤽상부르의 눈알 노랗다는 놈을 잡으러 갈 때도 너, 나, 제라르,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일 생각이니까, 애들 쉬게 하고 시간 있을 때 한숨 자 둬.”
“알았소. 대장은 어쩔 거요?”
“나도 저 안에 들어갈 거다.”
강찬은 남은 커피를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종일. 오후에 병원에 들르는 것 말고는 다른 일 없으니까 돌아가면서 좀 쉬어. 나랑
다예도 좀 잘 거고.”
“알겠습니다.”
강찬은 응접실로 움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에도 소파가 아니라 침대를 놓아둘걸.
전투에 뛰어든 것과 다름없는 삶이다.
기회 있을 때 토막잠이라도 자두는 게 좋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개운하질 않지?
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누운 강찬은 찜찜한 생각을 털어냈다.
우선 좀 자는 게 좋은 거다.
***
김태진은 정신이 홀랑 날아갈 지경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바실리와 200명의 인원은 가장 먼저 미사일을 설치한다고 요란을 떨어댔다.
미사일이다.
그것도 국지전에서 사용하는 아담하고 작은 사이즈가 아니라 대형 컨테이너 트럭에 실어도 몸통의 절반이 삐죽 빠져나올 엄청난 크기의 미사일.
그것뿐이 아니다.
미사일의 설치, 컨테이너 트럭이 싣고 온 숙소형 컨테이너를 내려놓느라 시끌시끌할 때, 연달아 양범과 150명가량의 무장 군인이 몰려들었다.
그나마 양범이 능숙하게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것과 그가 강대국의 정보책임자답지 않게 점잖고 겸손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저 엄청난 숫자의 인원들이 알아서 숙식을 해결한다는 점이었다.
쉬지 않고 들이닥친 컨테이너가 위치를 잡더니 곧바로 비슷한 크기의 기지 하나가 더 생긴 꼴이 되었다.
양범은 김태진과 함께 바실리가 사용하는 컨테이너로 움직였다.
끼이익.
기가 찰 일이다.
어지간한 호텔 방이나 특급 병실처럼 훌륭하게 꾸며진 컨테이너를 본 김태진의 심정은 그랬다.
강대국의 힘? 아니면 바실리의 능력?
안쪽에 놓인 침대에서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의 바실리가 거만한 눈으로 김태진과 양범을 바라보았다.
“이쪽이 바실리, 이 분이 이곳 몽골 기지 한국 책임자 김태진이란 분입니다.”
양범이 능숙한 한국말과 프랑스어로 김태진과 바실리를 인사시켰다.
등을 세운 침대에 기대앉은 바실리가 손을 뻗어서 김태진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무슈 강에게 말을 전했듯이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됐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바실리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김태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에 질 김태진은 아니었다.
5초쯤 침묵이 흐른 뒤에 바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는 건 소주……? 소주요.”
“지금 말입니까?”
상체를 둘둘 감은 붕대를 보며 던진 김태진의 질문에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럼 일단 소주를 건네드리겠습니다.”
김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고, 그 자리에 양범이 대신 앉았다.
“강찬 씨가 많이 힘들겠군요.”
양범의 프랑스 어를 들은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유도와 반군, 테러 세력를 이용하는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를 노린 것일 텐데, 이것마저 이렇게 되었으니 마지막은…….”
바실리가 고개를 돌려 컨테이너 창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무슈 강이 타겟이 되겠지.”
창이 담아낸 하늘을 바라본 바실리가 곧바로 냉정한 얼굴로 양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 울프에서 퇴역한 군인들을 언제 저렇게 긁어모아 놓은 거지?”
“블랙 울프는 원래부터 있었던 조직입니다. 저들이 자꾸만 삼합회 따위에 몸을 파는 게 싫어서 따로 도움을 준 적은 있지만, 조직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흥!”
바실리가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양범을 보았다.
“결국, 우리 바닥도 사람이 우선이라는 건가?”
“강찬 씨의 가장 큰 매력과 장점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입술을 심술궂게 위로 들어 올린 바실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타고난 주인공이 원래 있다고 믿나?”
“글쎄요? 강찬 씨를 보면서 놀랄 때는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공은 너무 감상적이고, 단순하고, 무식해.”
“그래서 냉정한 바실리 국장과 이성적인 라노크 위원장님이 뒤를 지켜주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해. 나는 늘 우리의 단순한 주인공과 라노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기대하는 사람이니까.”
양범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눈에 달았다.
쫄쫄이 티를 입은 것처럼 붕대를 감고서 몽골 기지로 달려온 바실리다.
그가 가진 KGB의 통제력과 기지 앞에 세우고 있는 미사일, 그리고 알렉세이 대통령을 제거할 정도의 힘.
당장 러시아의 대통령을 하겠다고 해도 얼마든지 가능한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미사일을 끌고 이곳에 온 이유가…….
“내가 무슈 강 때문에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나?”
양범의 웃음을 확인한 바실리의 질문이었다.
“어쩐지 그렇게 보입니다.”
바실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인상을 버럭 썼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5년 전에 맞았던 곳을 또 맞았어! 이 상처가 가장 지랄 같은 건, 화장실에 가서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한다는 거지.”
양범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바실리가 마치 다른 사람이 한 농담에 웃는 것처럼 따라 웃었다.
“라노크, 이 무서운 인간이 무슈 강을 부총국장에 앉힐 때,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했었지. 절대로 다윗의 별을 괴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100년쯤 힘을 못 쓰게는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양범은 아직 정보국장에 올라선 경력이 길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성격에 진중한 면도 있었고, 라노크나 바실리를 존중하는 마음도 있어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윗의 별이 계획한 것을 우리도 전부 알지는 못해. 다만, 그들이 지구에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알지. 놈들은 인류를 정리해야 한다고 믿고 그걸 계획하고 있다.”
“터무니없군요.”
“만약 라노크가 강입자 충돌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우린 이런 기회조차 없었을 거다.”
여태껏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서 양범은 설명을 더 원하는 얼굴로 바실리를 바라보았다.
“간단하지. 이전에 블랙헤드는 그냥 값어치 비싼 보석?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에너지가 있음을 알아챈 거지. 다윗의 별은 대륙을 없앨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중국과 인도를 아예 주저앉혀서 세계 인구의 30%를 줄이고.”
양범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실리의 말에 집중했다.
“탄저균으로 아프리카를 인간이 살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 계획이었던 것 같다. 자연 그대로의 정원. 그들은 그렇게 단계적으로 브라질까지 인간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게 가능합니까?”
“중국과 인도가 무너져내리고, 아프리카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 다음은 미국과 우리의 핵전쟁이 시작되지.”
“그들도 위험할 텐데요?”
바실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청정한 아프리카, 브라질을 노렸던 이유, 그리고 발리와 빈탄 섬을 개발한 이유가 그게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유럽은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별이 그들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 오해하면 안 돼. 그들의 목표는 우수한 유럽 인종이 쾌적한 지구의 환경에서 오래도록 풍요롭게 사는 거다.”
양범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보국들이 왜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막지 못하는지 궁금하겠지. 지금 나나 양 국장, 그리고 라노크의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바실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상체를 감은 붕대를 보았다.
“우리는 저들과 상대하면서 각국의 이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그걸 그나마 유일하게 조율한 사람이 유럽정보위원회를 만든 라노크다.”
“흠.”
“그가 한국에 대사로 간 것도 결국 피격과 적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했던 건데, 그곳에서 엉뚱하고, 무식하고, 단순한 주인공을 만나게 된 거지. 하필이면 라노크가 완전히 주저앉을 수 있는 공트 자동차의 마약 밀매를 무슈 강이 막아주었지. 그것만 아니었다면…….”
양범이 상체를 세우다시피 들며 숨을 커다랗게 쉬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요.”
“100년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평화는. 그런데 무슈 강이 차세대 에너지를 움켜쥐면서 그 꿈을 500년 이상 가능하게 만들었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야 빌어먹을 조연이니까 주인공께서 지시할 때까지 미사일을 닦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실리가 말을 마친 직후에 소총을 어깨에 건 정장 차림의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바실리의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떨군 채 다가와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남자가 상체를 세운 다음이었다.
“우리 주인공께서 조쉬의 목을 돌려주었을뿐 아니라, 프랑스 정보총국장의 권한을 위임받았다는군.”
양범이 의아하게 생각할 만큼 바실리는 언짢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라노크, 이 구렁이의 계산이 어디까지인지! 구렁이와 단순이가 손을 잡고 설치니까 당최 앞을 살피기가 어렵구만.”
바실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투덜거린 다음, 고개를 돌렸다.
“유리 세브첸코는?”
“미사일에 묶어 두었습니다.”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네가 몸뚱이를 파먹게 하는 법이 있었지?”
“산 채로 묻어두면 됩니다. 그렇게 합니까?”
“사흘 뒤에 내가 놈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소총을 멘 남자가 만족한 얼굴로 바실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
안전을, 그리고 이어질 전투에서 살짝 멀어진 채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사람은 자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까?
잠을 안 자고 사는 약을 개발한다면?
전기세 엄청 걷힐 거다.
강찬은 수건을 들어 응접실을 나서 벽에 있는 식수대로 향했다.
대낮이다.
그런데 석강호부터 제라르, 심지어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까지 더운 날 던져놓은 시루떡처럼 잠이 들어 있었다.
밤을 새웠을 게 분명한 최종일이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강찬은 물병을 들고 조용하게 샤워실로 향했다.
힐끔 시선을 돌린 곳에서 제라르가 기다란 다리 하나를 간이침대 바깥으로 내놓고 자고 있었다.
샤워실에 들어간 강찬은 정신이 번쩍들 정도로 시원한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오른손을 물 밖으로 들어야 해서 모양은 좀 우습다.
아직 죽여야 할 놈이 많다.
내 사람을, 그리고 이제는 사명처럼 떨어진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거해야 할 놈들.
우리 대통령을 노려?
네놈들은 아무도 손 못 댈 것 같지?
그래서 평생 무사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지?
남을 죽이려면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는 거라니까.
“푸후!”
강찬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뱉어냈다.
이렇게 시원하게 씻고 있는데도 개운함이 부족했다.
***
“한국의 퇴역 군인조차 몽골로 향하지 않았다면 이번 계획에서 유일하게 건진 것이 반트 하나인 거냐?”
당나귀 눈 색깔을 한 싸이로가 입을 다물고 지그펠트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빈탄 섬의 빈탄 라군 리조트를 바라보는 해변의 개인 별장이었다.
“그래서 오지도 않는 헬리콥터를 격추하겠답시고 대기하고 있던 멍청이들은?”
“철수시켰습니다.”
지그펠트가 무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싸이로를 노려보았다.
“그 늙은이들이 출발 안 한 이유가 뭐냐?”
“그중 한 명의 딸이 직전에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지그펠트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한국이란 나라를 내가 잘 모른다고 해도, 그 정도 되는 군인, 그것도 한국의 정보국에 속한 인물들이 몽골 기지를 버려두고 출국하지 않은 이유가 고작 딸의 죽음 때문이라고?”
“바실리와 양범이 몽골 기지에 도착한 것을 알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지그펠트가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대왕 개미를 잡을 방법은?”
“한국의 국가정보원장에게 정보를 흘릴 계획입니다. 강찬이 프랑스 정보총국의 권한을 위임받은 것, 그리고 셔먼에게 했던 약속들, 몽골 기지에 설치한 미사일 정도입니다.”
답을 들은 지그펠트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싸이로.”
“예.”
강렬한 태양이 대지와 눈 앞에 펼쳐진 파란색 바다를 여과없이 비추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너무 쉽게 일을 진행하다가 당황한 모양인데,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우선이다.”
“예.”
“대왕 개미인 줄 알았던 놈이 사실은 전갈이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답이 되겠지. 나는 보고만 듣고 그놈이 대왕 개미인 줄 알았다만, 직접 상대해야 하는 너는 놈이 전갈이었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하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지그펠트가 시선을 바다로 돌린 채 또다시 침묵을 뿜어냈다.
바다 위 흰색 구름을 한참이나 끌어댄 바람이 뜨거운 열기를 두 사람과 화려한 건물 주변에 뿌리고 달아났다.
“느낌이 좋지 않아.”
잠에서 깬 것처럼 지그펠트가 시선을 다시 가져왔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감정을 완전히 털어낸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실리와 양범이 살아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한국의 퇴역 군인들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일이 너무 공교로워.”
그가 넌지시 고개를 저었다.
“놈이 전갈 정도는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 가브리엘은?”
“강찬과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가브리엘을 이용해서 그를 제거하도록.”
“알겠습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정보를 흘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대로 시행해. 결과를 바로 가져오고.”
“예.”
지그펠트가 손을 들어 보이자 싸이로가 바로 몸을 돌렸다.
호리병 형태의 잔은 중간의 공간에 얼음을 두어서 지그펠트가 마시는 차를 항상 시원하게 보관한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옆에 두었던 하얀 냅킨에 손을 닦았다.
“전갈이라…….”
지그펠트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주었다.
막연하게 피어나는 불안함.
가슴에서 시작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이 기묘한 불길함.
지그펠트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