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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어머니, 미안해.
도움을 청하는 듯 시선을 돌렸던 셔먼이 다시 강찬을 보았다.
“무슈 강. 내가 내건 조건에는 이미 로망의 제거와 라노크의 구출이 포함되어 있소. 그 점을 감안해 주는 게 공평하지 않겠소?”
“셔먼.”
셔먼은 불만을 그대로 드러낸 눈빛이었다.
“UIS 이천 명이다. 그들을 특수팀만 가지고 상대하기는 어려워. 그러니 내가 내건 조건이 불편하다면 미국에서 전투기를 보내.”
“흠.”
셔먼이 손익을 계산하는 것처럼 출입구를 보았다.
강찬은 그가 생각하는 동안 한 가지 문제를 더 해결하고 싶었다.
“양범 씨. 몽골 기지의 병력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이 작전 동안 몽골 기지 주변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러시아 쪽만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답을 한 양범과 강찬이 동시에 바실리를 보았다.
“러시아 쪽은 내가 책임지지.”
바실리가 뾰족한 얼굴로 답을 했다.
남은 것은 셔먼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 네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알았소. 중국을 거쳐 들어가는 것으로 하면 아프가니스탄 주변국과 UN은 내가 책임지겠소.”
셔먼이 결심한 듯 답을 건넸고, 그것으로 중요한 협상이 끝났다.
강찬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로망을 끌어낼 방법은?”
“FBI가 프랑인 출신 IMF 총재의 성매매 혐의를 수사하겠다고 나섰소. 협상을 위해서라도 로망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요.”
무서운 새끼들!
역시 이 바닥에 오래 굴러먹은 놈들의 야비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사님을 구출할 계획도 알려주지?”
강찬의 질문을 들은 셔먼이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슈 강.”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우리 특수팀 지젠느가 아프리카로 움직일 거요. 콩고 지역의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고.”
짤막하게 답을 한 루드비히가 다시 바실리를 보았다.
“우리 무기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들어갈 거다. 물론 공식적인 건 아니고, 무기상을 통해서 들어갈 텐데 정보총국 정도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알 거다.”
바실리가 이번엔 양범을 보았다.
독일과 러시아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중국이 힘을 쓸 일이 있나?
강찬의 시선을 확인한 양범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조쉬가 제거되면 중국은 프랑스와 체결한 모든 경제 협력을 영국으로 돌릴 계획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횡단 고속철도 TGV는 물론이고, 강입자 충돌기의 구동에 필요한 원료의 구입이 완전히 막힙니다.”
“하나 더 있소, 무슈 강.”
양범의 말을 물고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스위스에 예치된 프랑스의 정보 자금이 전부 공개되고 압류될 거요.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 정권 자체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강찬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이런 방법이 있는데 왜 대사님이 로리암에 들어가시는 걸 그냥 지켜본 거지?”
“말했잖나. 다윗의 별이 움직이게 하고 싶어 했다고.”
강찬의 시선을 받은 바실리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 라노크가 후임자로 선정한 인물이 무슈 강이었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따를 뿐이다. 이 이후에 벌어질 일이 모두 무슈 강과 한국의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새끼는 말을 해도 꼭!
좋은 표현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강찬을 후계자로 삼은 걸 굳이 불행하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강찬은 잠시 앉은 이들을 둘러보고는 담배를 하나 들어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놓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바실리.”
바실리의 표정이 “뭐? 왜?” 하는 듯 도전적이었는데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라서 그걸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정보국의 생리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 내가 대사님의 뒤를 따라서 지금처럼 이 모임을 주도하는 동안…….”
네 사람이 꼼짝도 않고 강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기 있는 누구라도 위험에 빠지면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이 된다.”
“주연께서 너무 감상적인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강찬은 먼저 짧게 답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차세대 에너지 시설이 완성된다면, 이후에 러시아, 중국, 독일, 스위스에 하나씩 더 지을 생각인 거 아닌가?”
욕심이 올라온 것처럼 셔먼이 빠르게 눈치를 살폈는데 누구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세계 경제의 판도를 결정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함께 가야 할 운명이라면…….”
강찬은 연기를 뿜어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 정도 믿음은 있어야지. 대한민국에 차세대 발전 시설을 완성하고도, 내가 여기 있는 나라들에 다음 발전 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정도의 믿음.”
“감동적이군.”
바실리의 대꾸에 몰려오던 감동이 홱 달아나 버렸다.
개새끼.
바실리는 홍차 잔을 들었고, 양범과 루드비히는 담배와 시가를 집었다.
“이번 작전도 무슈 강이 직접 지휘하나?”
“그러려고.”
“이건 원 위태위태해서 지켜볼 수가 있나?”
잔을 내려놓으며 바실리가 투덜거렸다.
“안드레이와 스페츠나츠 30명을 지원하겠다. UIS와 같은 테러 세력과 맞선 한국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이고, 작전이 끝나면 러시아 정부가 지금 말한 대로 발표할 거다.”
“장강린을 기억하시죠?”
프랑스에서 함께 교육받던 동기를 잊을 리야 있겠나.
양범의 질문에 강찬은 “예.”라고 답을 했다.
“장강린과 스노우 울프 30명을 지원하겠습니다.”
강찬이 피식 웃은 다음이었다.
“레온과 지젠느 30명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루드비히가 말을 보탰다.
이러면 인원수가 너무 많아지는데?
강찬보다 셔먼이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건 약속이 달라.”
“미국은 한국의 특수팀, 스페츠나츠, 화이트울프, 지젠느 틈에서 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공을 세운다. 그게 어째서 불만인 거지?”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지도 않은 셔먼의 항의를 바실리가 단숨에 잡아서 뚝 잘라 버리는 바람에, 그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작전에 성공하면 다윗의 별도 더는 꼬리만 흔들기는 어려울 거다. 그러니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무슈 강의 지시대로 조쉬와 로망을 제거하고, 라노크를 데려다 놓겠다.”
이어서 몇 가지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이 흘렀다. 짬짬이 셔먼이 차세대 발전 시설에 대해 끼어들려고 했는데 바실리가 잔인하게 잘도 잘라댔다.
***
이슬람 국가에 파견된 국가정보원 요원들은 목숨을 내놓다시피 뛰고 또 뛰었다.
UIS가 이천 명 가까이 아프가니스탄에 집결한 이유, 수뇌부의 정확한 위치, 그리고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국가정보원 이집트 분실.
“너무 위험해.”
이집트 분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기존의 요원들 모두 지난번 위성 좌표를 얻는 작전에서 총상을 입었다.
멀쩡한 요원은 달랑 신입 요원 둘밖에 없는 거다.
“실장님. 이대로 지켜보다가 저놈이 제거되면 정말 끈이 끊깁니다. 그리고 좌표를 어떻게 얻었는지 알아보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는 그만큼 중요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여기 신입 두 명과 움직이겠습니다.”
분실장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른쪽 팔뚝과 정강이를 붕대로 감싼 엄지환에게 신입 두 명을 붙여서 내보내?
아무리 중요한 정보원을 얻는 일이라 해도 너무 위험한 계획이었다.
“저놈은 그냥 떠도는 정보원이 아니라 A급입니다. 그리스군 정보국과 바로 통하는 놈이 도움을 청한 겁니다.”
“엄지환. 너도 아직 제대로 적응 못 한 거야. 너는 그렇다고 치자. 여기 신입 두 명은 지리도 몰라. 그리고 상황을 몰라? 다들 부상이 심해서 지원도 불가능해.”
엄지환에게 실장은 직급을 떠나 하늘 같은 선배인 데다 이집트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에 틀린 구석도 없다.
엄지환은 고개를 떨궜다.
답답했다.
정보원이 도움을 요청한 일이다.
어떻게 위성 좌표를 구했는지, 그 실마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분실장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요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원이 없냐고?
특수 요원의 숫자를 갑자기 불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너 이집트어는 어느 정도냐?”
그때 분실장이 신입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지간한 비속어는 모두 알아듣습니다.”
“훈련은?”
“606 거쳐서 대테러 팀에 2년 있었습니다.”
분실장이 또 다른 신입에게 시선을 주었다.
“영어에 자신 있고, 이집트어는 주문 정도 합니다. 3공수와 606을 거쳤습니다.”
“커피 좀 타와라.”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3공수와 606이 바리스타 교육 기관인 줄 알았을 거다.
분실장의 지시에 신입 둘이 구석으로 움직였다.
커피라 봐야 종이컵에 봉지 커피 털어 넣고, 뜨거운 물 붓는 게 전부인 거다.
봉지 커피의 향이 사무실에 퍼지고, 잠시 후에 신입이 각각 양손에 커피를 들고 와서 분실장과 임지환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후 접촉은?”
“정 선배가 뒤를 쫓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챌 수 있습니다.”
엄지환의 답에 분실장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임지환이 말한 정 선배는 가슴에 총상을 입어서 걷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정보원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반대일 수도 있어. 저쪽과 손을 잡고 우리를 끌어내려는 함정일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위험해져. 나, 너, 그리고 신입 둘이…….”
분실장이 종이컵을 든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시선을 돌리던 분실장과 신입 요원의 눈이 마주쳤다.
“한 말씀 드려도 됩니까?”
“얘기해 봐. 뭔데?”
“우리나라에서 테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제 빌딩에서 동기 한 명을 잃었습니다. 제가 움직여서 그런 희생을 막을 수 있다면, 새로 와서 모든 것이 낯설지만, 제 안위보다는 어느 것이 나라를 위한 결정인지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이집트 말에 자신 있다던 신입 요원의 말이었다.
“야 인마.”
“죄송합니다.”
“거기 담배나 줘봐.”
분실장은 신입이 건네주는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다들 담배 피우지?”
“예.”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분실장이 담배를 주르륵 돌렸다.
찰칵.
그리고 라이터를 켜서 내밀었다.
송구한 일이다.
군 경력도, 그리고 국가정보원 특수 요원으로도, 하늘 같은 선배가 담뱃불을 붙여주는 건.
엄지환과 신입 두 명이 손으로 가려가며 불을 붙였다.
“후우. 생각을 바꿔. 무조건 목숨을 거는 게 중요한 게 아냐. 너희가 국가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걸 잊지 마.”
“알겠습니다.”
신입 두 명이 조심스럽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담배 연기를 뿜는 것처럼 분실장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목덜미에 피가 번진 거즈가 붙었고, 허리에도 두툼하게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우리 넷이서 정보원을 잡아챈다 이거지?”
엄지환을 힐끔 바라본 분실장이 윗입술을 빨아들이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남자의 눈매는 무섭다.
“후우.”
분실장은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위험하다.
정보원이 저렇게 먼저 살려달라고 연락한 일은.
그런데 어떻게 위성 좌표를 얻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리고 UIS가 왜 저렇게 모였는지를 알 수 있다면 함께 담배를 피우는 네 사람의 목숨을 걸만한 일이기도 했다.
지원을 요청해?
분실장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프리카와 이집트, 중동 지역은 어느 한 곳 인원이 부족하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까지 이토록 활발하게 활동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첩보 얻으러 다녔고, 충돌이 있을라치면, 총격전이 벌어질라치면, 뒷수습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도망 다니기 바빴었다.
리비아에서 벌어진 전투가 그래서 고맙고, 자랑스럽다.
조국이, 대한민국이, 파견한 요원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지를 전 세계 정보국에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분실장이 다 피운 담배를 종이컵에 넣었다.
***
성남 공항에서 바실리 일행을 배웅한 강찬은 곧바로 삼성동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회의 내용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김형정을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문재현과 황기현을 직접 만나자고 해볼까 했는데 김형정을 무시하는 모양이 될까 봐 그러지는 못했다.
상황은 분명했다.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UIS가 저렇게 집결해 있느냐는 건데 그 답을 바실리나 양범, 셔먼, 그리고 루드비히까지 명쾌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 참!
덩어리가 커지니까 그 안에 별의별 음모와 욕심이 뒤엉킨다.
삼성동에 도착한 강찬은 곧바로 5층으로 올라갔다.
“고생하셨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김형정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간 강찬은 점심을 먹으며 있었던 말들을 전부 전해주었다.
함께한 시간이 이 정도면 적응할 만도 한데 김형정은 역시나 커다랗게 놀란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정말 전투기를 동원할 생각이십니까?”
“적의 숫자를 감안하면 폭격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요.”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김형정의 심정이 그의 답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럼 전 사무실에 가 있을게요.”
“예. 보고 마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김형정과 헤어진 강찬은 다시 사무실로 움직였다.
***
“어서 오쇼.”
석강호가 궁금한 얼굴로 강찬을 맞았다.
“커피 한잔 드릴까?”
“세수하고.”
강찬은 재킷을 걸어두고 샤워실로 가서 양치와 함께 간단하게 얼굴을 씻었다.
“푸우!”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는 강찬이 보였다.
지금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얼굴이었다.
물이 떨어져서 셔츠의 앞을 적셨는데 상관없었다.
‘자신 있냐?’
강찬은 거울 속에 서 있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적 이천 명.
적지는 아프가니스탄.
러시아, 중국, 독일의 특수팀이 가세하고, 미국이 꼬리에 매달린다.
전투기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작전이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다시 태어나서 김형정이 몸서리를 칠만한 작전도 뛰었다.
당장 아프리카에서도 600명의 쿠드스를 상대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차원이 다르다.
달려드는 쿠드스 600명과의 전투와 아프가니스탄의 한 지역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UIS 이천 명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규모 전투의 지휘?
2.5톤 트럭을 멋지게, 능숙하게 운전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25톤 덤프를, 트레일러를 마음대로 끌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전투에서 지휘관의 실수는 소중한 대원과 요원들의 목숨을 삼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강찬이다.
자꾸만 일이 커진다.
지휘부를 제거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놈들이 꾸역꾸역 아프가니스탄에 모여 있는 거다.
이상하게 찜찜한 무언가가 어깨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강찬은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피식.
이제 와 물릴 것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일단 때려놓고 보자고 달려들 거면서!
강찬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한 놈 남김없이 죽음의 신을 만나게 해주면 되는 거다. 그래서 다시는 이쪽으로 총구를 들이대지 못하게! 알았지?’
거울 속의 강찬이 피식 웃었다.
샤워실을 나오자 석강호가 머그잔 두 개를 놓고 강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갔던 일이 잘 안 됐소?”
“아니. 왜?”
“대장 표정이 어째 심상치 않아서 그렇소.”
강찬은 털썩 테이블 앞에 앉아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적의 숫자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 막상 붙는다고 생각하니까 이 정도를 지휘해 본 적이 없구나 싶기도 하고.”
석강호가 히죽 웃으며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제라르 새끼가 대원들 희생을 염려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거요?”
강찬은 힐끔 석강호를 보았다.
이놈이 제라르와 그 정도로 복잡한 대화를 나눴다고?
어떻게?
의문은 바로 풀렸다.
안쪽에 있는 사무실에서 제라르와 함께 나온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고 나서였다.
통역 대원이었다. 손가락을 두 개나 잃은.
고개 숙여 인사하는 대원을 보며 강찬은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저 녀석 국가정보원에 취직된 거요.”
“언제?”
“어? 아침부터 나왔소. 김 팀장이 말 안 합디까? 지난번에 왔을 때 내가 불편하다고 툴툴거렸더니 안쪽 위성 요원들 통역도 할 겸 해서 고용한 거요.”
그 양반도 일이 많아서 그런지 이걸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필요한 때 적절한 인물이 나타난 것만은 분명했다. 파병을 함께했던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제라르, 위성 사진 좀 확보했어?”
“의심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확실하다 싶은 건 아직입니다.”
통역 대원이 강찬과 제라르의 대화를 석강호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이건 정말 편하다.
“계속 감시해.”
“지시해놨고, 제가 옆에서 챙기겠습니다.”
제라르의 답을 들은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정이 고건우와 면담이 끝나면 작전이다.
강찬은 빌딩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
강대경과 유혜숙은 잘 있을까?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립다. 그리고 보고 싶다.
눈물 많은 유혜숙이 울고 있지는 않을지…….
그때 사무실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강찬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벌써?
뜻밖에도 김형정이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