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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놓칠 것 같아?
강찬은 석강호, 김형정과 함께 9시 50분경에 삼성동 파크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경호 요원들이 일행을 감쌌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김관식 청장님은 7층 라운지에서 기다리십니다. 그곳에서 먼저 뵙고 10시에 9층으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김형정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석강호를 바라보았다.
기가 막히기도 할 거다.
석강호가 아랍어 통역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때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곧바로 요원 세 명이 막아섰다가 신원을 확인하고서야 비켜섰다. 폭탄 테러 이후로 경호 요원들 전체가 독이 바짝 올라있는 모습이었다.
김관식은 안쪽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김관식은 강찬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청장님. 이쪽은 오늘 아랍어 통역을 담당할 석강호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김관식입니다.”
석강호가 공손하게 김관식과 인사를 나눴다.
김미영의 체육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김형정보다 더 놀랄 텐데.
“그럼 바로 올라갈까요?”
김관식의 제안에 다시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강찬, 석강호, 김관식, 김형정, 그리고 경호 요원 두 명이 함께 탔다.
때앵.
9층이다.
문이 열리자 역시나 요원들이 막아섰다가 신분을 확인한 후에 비켜섰다.
강찬은 김관식과 나란히 걸었고, 그 뒤를 석강호와 김형정이 뒤따랐다.
요원과 아비부의 수행 비서쯤 돼 보이는 아랍계 중년 남자가 눈인사를 하고는 손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삼성동 파크 호텔 9층의 VIP실에 딸린 회의실이다.
기다란 탁자의 한쪽에 김관식과 강찬이 앉았고, 석강호와 김형정이 그 뒤의 보조 의자에 앉았다.
강찬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쩌면 테러를 지시했을 수도 있는 놈이다.
이 개새끼가 사건의 발단인 리비아 요원 살해를 지시했던 놈이고, 응징 갔던 석강호를 죽일 뻔한 했던 것까지는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강찬은 호텔에 오는 도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리비아에서 활동하던 우리 요원들을 죽이라고 했을까?
오는 길에 물어봤을 때 김형정도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파견한 요원들이다.
잘 걸어가다가 어깨 부딪쳤다고, 눈을 피하지 않았다고 죽고 죽이지 않았을 테니, 반드시 그에 맞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김관식과 강찬의 앞에 아비부의 수행원인 듯한 남자가 차와 대추야자를 놓아주었다.
대화를 나누기도 어정쩡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니 어색한 장소다.
개새끼가 사람이 와 있는 걸 알면 빨리빨리 나타나던가!
강찬이 고개를 좌우로 비트는 순간이었다.
회의실로 흰색 원피스 차림의 깐두라(kandura)를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강찬과 김관식, 석강호와 김형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능숙한 영어였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랍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통역이 함께 왔습니다.”
김관식이 비슷한 수준의 영어로 답을 했다.
김미영이 공부를 잘하는 이유가 아버지를 닮은 거구나 싶었다.
“연료자원청의 김관식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국가정보원 강찬 부원장입니다.”
김관식이 곧바로 우리말로 소개했고, 석강호가 능숙하게 아랍어를 쏟아내며 김관식의 말을 전했다.
“반갑습니다. 아비부입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통역을 맡은 게 처음이라 그런지 석강호의 우리말이 책을 읽는 것처럼 들렸다. 강찬이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어쩌면 아랍어도 이따위로 어색하게 통역했을지 모른다.
테이블의 맞은편에 아비부가 앉자 수행원이 차를 그 앞에 놓아주었다.
“한국에 있었던 불행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아비부는 아랍 남자 특유의 커다란 눈과 짙은 눈썹, 살짝 휜 코를 가졌다.
“위로에 감사드립니다.”
김관식이 간단하게 답을 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바람에 어색한 침묵이 회의실을 덮쳤다.
아비부는 강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도 없이 말했지만, 사람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비부의 눈을 보는 순간, 강찬은 이번 테러 역시 놈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절대로 나를 어쩌지 못한다. 차세대 발전 시설도 마찬가지야.’
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찬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속이 후련했다.
저 개새끼가 범인인 거다.
리비아의 우리 요원들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원장과 초대 연료자원청 청장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놈.
강찬은 늘 꼿꼿하던 두 사람, 황기현과 송창욱을 떠올렸다.
황기현은 이름 없는 별이 되었고, 송창욱은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김관식이 강찬을 살폈고, 김형정이 마른 침을 삼키도록 강찬과 아비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눈매가 무척 좋군요.”
결국, 아비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관식만 없었다면 ‘헛소리 집어치우고 대가리 잘 보관하고 있어.’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대꾸해줬을 거다.
어쨌든 답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활약상이 대단한 분이라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답을 한 강찬은 대놓고 피식 웃었다.
‘개새끼야! 대가리 잘 보관하고 있어!’
아비부는 지지 않았다.
‘애송아! 적당히 설쳐라.’
강찬을 향해 비릿한 웃음으로 대꾸했으니 말이다.
김관식도 석강호도, 그리고 김형정까지 모두 알았다.
강찬과 아비부가 대놓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불편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도 아비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국은 한국이 계획한 차세대 에너지 시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김관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10분쯤 뻔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다.’와 ‘말씀하신 점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 따위의 요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관식과 악수를 나눈 아비부가 강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찬도 손을 내밀었다.
툭.
악수라기보다는 손이 잠시 닿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개새끼가 사람을 무슨 ‘불가촉천민’ 취급을 해?
불편하게 9층을 나선 강찬 일행은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비부를 만나 적이 있습니까?”
“이번이 처음입니다.”
김관식은 강찬의 답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는 다음 일정이 바빠서 바로 가겠습니다. 부원장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사무실에 갈 생각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이다.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때앵.
그리고 로비에 도착하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김관식이 강찬, 김형정, 석강호와 차례로 악수를 나눈 다음에 요원들과 함께 입구로 움직였다.
“팀장님. 시간 좀 되세요?”
“삼성동 분실로 가셔도 됩니까?”
“그러세요.”
어차피 파크 호텔과 삼성동 분실까지는 걸어서도 10분 거리다.
강찬은 석강호, 김형정과 함께 삼성동 분실로 향했다.
실제로도 김형정의 사무실에 도착하는 데까지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커피를 앞에 놓았고, 담배도 하나씩 물었다.
“팀장님. 리비아에서 우리 요원들 살해되었던 일과 이번에 원장님 테러 사이에 연관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
“아까 이상하던데 무슨 단서라도 얻으신 겁니까?”
“전에 바실리가 리비아 사건 최고 책임자가 아비부라고 했었거든요. 아비부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확실히 놈이 좀 수상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연관점이나 혹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살펴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김형정이 답을 하고는 옆의 메모지에 빠르게 필기했다.
황기현과 송창욱을 살해한 범인을 잡는 일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상황이라 굳이 안된다고 할 이유도 없었다.
“에이! 미친 새끼가 되지도 않게 대장을 노려봐서!”
“왜?”
“거 대추야자 정말 맛있게 생겼던데.”
“후우!”
강찬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하여간 이놈하고 제라르에게는 큰 걸 기대하면 절대 안 되는 거다.
삼성동 사무실을 나온 강찬은 라노크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바로 프랑스 대사관으로 향했다.
뭔가 있다.
분명히 숨겨진 뭔가가 있는 거다.
그걸 찾으면 아비부를 제대로 죽일 수 있다.
강찬의 가슴 속에 눌려있던 분노가 아비부를 보는 순간부터 슬슬 끓어오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테러가 있었고, 황기현과 송창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덤덤했었다.
너무 많이 잃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유슬의 아버지부터, 외인부대 병아리, 증평의 특수팀 대원들, 국가정보원 요원들, 마지막으로 황기현과 송창욱까지.
그 모든 이들의 희생이 꼭 강찬이 나선 바람에 일어난 것 같아서 맥이 쭉 빠졌는지도 모른다.
개새끼!
강찬의 눈에 독기가 서서히 피어났다.
그런 분들을, 국가를 위해 그토록 노력하던 사람들을, 단지 힘없는 나라라는 이유로,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토록 무참하게 죽여?
대사관에 도착하자 606 특임대 대원이 차를 정지시켰다.
강찬과 석강호, 그리고 최종일이 차에서 내렸다.
철컥. 철컥.
“오셨습니까?”
뒤쪽에 있던 지휘관이 강찬에게 다가와 경례했다.
“말씀하셨던 로망이란 분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대사관 건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뒤늦게 나온 라파엘과 마주쳤다.
“무슈 강. 대사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오늘도 라파엘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라파엘. 안느는 잘 있나?”
“물론입니다.”
반 보 앞을 걷던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며 답을 했다.
“대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안느의 전화번호를 알려줘. 루이까지.”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라노크에게 다른 일이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라파엘이 먼저 도와달라고 했을 거다.
이렇게 둘이 걷고 있는 동안에.
집무실로 들어가자 라노크는 책상에 있었고, 로망은 테이블에 앉아 얇은 시사 잡지를 읽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강찬 씨.”
라노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강찬을 맞아주었다.
사람이 얼굴을 봤는데 모른 척하기는 또 그러니까.
강찬은 로망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라노크가 테이블로 옮겨와 셋이서 함께 앉았다.
“아비부를 만나고 왔습니다.”
로망이 눈빛을 빛내며 강찬의 말에 집중했다.
“활약상이 대단하다고 해서 한번 보고 싶었다는 말을 나눈 게 전부였습니다.”
라노크가 눈 끝으로 묘한 미소를 만들었다.
강찬과 아비부의 만남이 어땠는지를 익히 짐작한다는 표정이었다.
“대사님. 이대로 바실리를 만나러 갈 계획입니다. 그전에 한 가지 대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문이 열렸고, 라파엘이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홍차가 나올 여유도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라노크가 직접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강찬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은 게 뭐냐는 의미였다.
“제가 임의로 러시아나 중국에 차세대 발전 시설을 제안해도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로망이 홍차만큼이나 뜨거운 눈으로 라노크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 문제라면 강찬 씨 혼자 결정하기도 어려울 텐데요? 한국 대통령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 건설하는 건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대신 러시아나 영국에 하나 더 짓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해볼 생각입니다.”
“한국에 집중되는 시선을 분산시키겠다는 생각입니까?”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쯤 될까?
라노크의 눈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강찬에게 전달되었다.
“그런 것도 있고…….”
강찬이 로망을 본 다음,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지층충격기를 만들 생각입니까?”
라노크가 던진 질문에 강찬은 순순히 “그렇습니다.”하고 답을 했다.
“강찬 씨. 차세대 발전 시설에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의 기술진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 의도라면 장소는 영국밖에 없습니다.”
“대사님!”
로망이 다급하게 라노크를 불렀다.
그런데 라노크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강찬을 보고 있었다.
“조쉬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에게 그런 무기를 쥐여주면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에 지층충격기를 만들고, 영국에 차세대 에너지 시설을 건설하는 건 어떻습니까?”
라노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기를 한국에 건설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국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공적이 됩니다.”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라노크의 답이 아니더라도 한 번만 생각했으면 바로 같은 답이 나올 정도로 멍청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와 차세대 발전시설을 한 개 더 설치하는 것으로 의논하겠습니다.”
로망이 집요한 시선으로 강찬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외에 테러를 지시한 적에게 응징을 가해 줄 생각입니다.”
라노크가 강찬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앞의 표정에서 분명히 라노크의 생각을 읽었었다.
그렇다면 하나 더 짓겠다는 건 괜찮은 계획이란 뜻이다. 그런데 지금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응징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인 건가?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시선을 돌린 곳에서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는 강찬에게 곧바로 다가와 쟁반을 내밀었다.
반으로 접힌 손바닥만 한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아! 제가 부탁한 겁니다. 고마워, 라파엘.”
라파엘이 세련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바로 방을 나섰다.
강찬이 메모지를 재킷의 주머니에 넣은 다음이었다.
“우선 홍차를 좀 들지요.”
라노크가 찻잔을 가리켰다.
강찬은 순순히 잔을 들었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강찬 씨가 말한 응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응징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잔을 내려놓는 순간에 라노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계획대로 바실리와 양범을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루드비히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계획된 일이었다.
강찬은 그래서 라노크의 조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수일 내로 본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강찬의 시선을 들게 만들었다.
강찬의 눈빛을 본 라노크가 입술을 늘이며 미소 지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난번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다 전했습니다.”
라노크가 한국에 없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강찬은 대꾸조차 못 했다.
지금 같은 순간에?
로망과 조쉬가 다윗의 별에 속한 인물이란 것이 밝혀진 이 마당에 본국에 간다고?
이 개새끼가 수를 쓴 건가?
강찬이 독기 오른 눈으로 로망을 노려볼 때였다.
“강찬 씨.”
라노크가 강찬의 시선을 붙들었다.
“강찬 씨가 내게 했던 말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실리를 우선 만나보세요. 그리고 그가 하는 이야기와 양범의 의견을 들어보고 판단하길 바랍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부탁이 있습니다.”
“예.”
“로망의 구금을 풀어주겠습니까?”
라노크의 부탁이었다.
지금은 순순히 보내달라고, 아무리 화가 나고 당황스럽더라도 이대로 가게 해달라고, 라노크가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강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망을 보았다.
다윗의 별인 것을 알면서도 참았고, 어제 만났을 때 건방 떤 것도 참았다. 하지만 이 개새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다.
“로망.”
로망은 답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구금은 풀겠다.”
로망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사님이 한국을 떠나시는 일에 너나 정보총국이 관련되어 있다면…….”
강찬의 눈이 전투의 한 중간에 있는 것처럼 살벌하게 번들거렸다.
“프랑스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무거운 침묵이 라노크의 집무실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