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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미안합니다.
석강호가 햄버거를 다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난 다음이었다.
김형정이 전화를 걸었고, 폭탄 테러라는 상상도 못 했던 내용을 전해주었다.
[“청와대 경호실과 수방사, 기무사에도 연락했고, 증평 특수팀과 606 특임대대 출동시켰습니다. 그 외에 병원과 김관식 위원장님 댁으로 요원들 보강했습니다.”]
김형정의 다급한 음성이 넘어오는 사이 상황만큼이나 심각한 얼굴로 최종일이 들어섰다.
“팀장님. 제가 삼성동으로 움직일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찬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경호는?”
“입구를 아예 막았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석강호와 제라르는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원장님과 송 청장님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니까 일단 삼성동에 가서 상황 봐야겠다. 최종일. 권총 있으면 석 선생 하나 줘.”
최종일이 허리에 걸었던 권총을 풀어서 탄창 하나와 함께 석강호에게 건네주었다.
제라르는 아직 무슨 일인지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만, 석강호에게 권총을 건네는 것과 강찬의 표정을 보며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챈 눈치였다.
강찬은 짧게 제라르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오늘은 병원에 있어라. 나머지는 상황 봐서 움직이기로 하고.”
제라르가 알았다고 답을 했다.
강찬은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곧바로 현관으로 나서서 이두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삼성동으로 향했다.
염병!
어쩐지 심장이 유난스레 뛰더라니!
“권총하고 무전기 있어?”
우희승이 조수석 서랍에서 권총과 탄창, 그리고 무전기를 건네주었다.
강찬은 무전기를 허리에 걸고, 이어셋을 귀에 꽂았다.
철컥! 철커덕!
권총은 아예 장전을 끝내서 방아쇠만 당기만 된다.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었다.
강찬은 라노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찬 씨.”]
그는 대낮처럼 멀쩡한 음성이었다.
“대사님. 폭탄 테러입니다. 대사관 입구 통제하시면 최대한 빨리 군 병력 보내겠습니다.”
[“그렇군요. 대사관은 이미 폐쇄했기 때문에 아침까지는 안전합니다.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하길 바랍니다.”]
강찬을 달래는 듯한 라노크의 음성이 들렸다.
“알겠습니다. 또 전화 드리겠습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길이 뻥 뚫린 데다, 이두희가 무리할 정도로 속도를 낸 덕분에 전화를 끊을 때쯤엔 삼성동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자 김형정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폭탄 테러인 건 안다. 그런데 그렇다손 치더라도 김형정의 침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강찬은 말없이 김형정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원장님과 송 청장님이…….”
김형정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조금 전에 사망하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참담한 소식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덤덤하게 느껴져서 놀랍기도 했다.
“폭탄 테러는 두 곳뿐이었나요?”
“예.”
김형정이 그렇다면 그런 걸 거다.
“송 청장님이야 그렇다 쳐도 원장님의 동선을 적이 알고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사태가 진정되면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밝혀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밤이 새벽을 당기는 시간이었다.
교통 통제 같은 사소한 일부터 사후 처리를 하는 동안 날이 밝았다.
***
한 마디로 난리가 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국내의 방송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황기현과 송창욱의 테러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프랑스 대사관에 606 특임대대를 배치하는 등, 후속조치를 취한 김형정은 진한 커피를 두 잔 가져와 한 잔을 강찬 앞에 놓아주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응징이고 지랄이고 적이 분명해야 뭘 해도 하는 거다. 당장 확실한 것은 리비아 민병대가 왔다는 거고, 주워들은 말로 아비부란 놈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강찬이 커피를 마신 후, 머그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삼성동 분실은 기본 업무만 남겨놓고 폐쇄하겠습니다.”
김형정이 확실하게 각오한 듯한 음성으로 말을 던졌다.
“이런 경우가 생기면 원장님께서 삼성동 사무실을 폐쇄하라고 하셨었습니다.”
강찬은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평소 같으면 눈을 파랗게 뜨고 응징을 외쳐도 모자를 강찬이 얌전히 커피를 마신다.
김형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찬을 보았다.
“팀장님.”
“예.”
“제가 사용하는 사무실에 4개국에서 지원 나온 인원 옮겨주실 수 있나요?”
김형정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태연한 강찬의 반응이 오히려 두려운 눈치였다.
“국가정보원 원장은 누가 임명하나요?”
“대통령님이 임명하십니다.”
강찬은 물끄러미 김형정을 바라보았다.
앞에 요구했던 것에 대한 답을 달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원장님이 당부하셨었던 일입니다. 이틀 안으로 지원 요원들을 사무실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았다.
정신은 멀쩡한데 눈이 레몬을 문댄 것처럼 시렸다.
“가겠습니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찬 씨.”
김형정이 강찬의 시선을 붙들었다.
이상한 침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를 누그러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달라고 매달리는 게 맞는 거다. 그런데 지금 김형정은 오히려 강찬이 조금은 분통을 터트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피식.
“팀장님도 좀 쉬세요.”
강찬은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으로 말을 건네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최종일이 곧바로 다가왔다.
출근 시간이다.
어설프게 도로에 나서면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야 한다.
어떻게 하지?
황기현과 송창욱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느닷없이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믿고 죽으라 달렸더니 느닷없이 대천에 도착해서 바다가 보이는 아침 같았다.
최종일이 강찬의 옆에 서 있는데도 강찬은 지하주차장의 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때 전화가 걸려와서 강찬은 전화기를 꺼내 발신번호를 보았다.
“알루?”
[“만나자고 했다던데?”]
여유로운 로망의 음성이 수화기를 건너왔다.
귀찮았다.
“시간이 되면 말하고 아니면 끊어.”
로망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장소를 정해서 알려주지. 그리고 한 가지만 명심해 주게.”]
강찬은 잠자코 있었다.
[“앞으로는 내게 좀 더 공손한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
강찬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어딜 가지?
병원? 한남동 집? 사무실?
강찬이 한숨을 내쉴 때 최종일이 담배를 건네주었다.
찰칵.
“후우.”
이 빌어먹을 차세대 에너지 일을 시작하고 참 많은 사람을 잃었는데,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맥이 쭉 빠진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아침부터 더럽게 바쁘다.
전화기를 들어서 보니 석강호였다.
“여보세요?”
“대장, 어디요?”
“삼성동에서 막 출발할 참이다. 왜?”
석강호의 음성이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졌다.
“빨리 사무실로 가서 텔레비전 좀 보쇼.”
“무슨 일인데?”
또 폭탄 테러가 생겼나?
강찬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는 순간이었다.
“라노크 대사님이 불법과 월권행위를 했다는 보도요. 프랑스에서 먼저 나온 뉴스라는데 지금 테러와 엮이는 분위기요.”
“알았다.”
당장 누가 죽었다는 것도 아니어서 강찬은 느긋하게 답을 했다.
“대장, 괜찮소?”
“일단 사무실로 가 있을게.”
강찬이 전화를 끊은 다음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연속해서 전화기가 울어댔다.
귀찮다. 전화기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여보세요?”
“강찬 씨. 보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만 사무실에 계시면 한 시간쯤 뒤에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러세요. 일단 사무실에 있을게요.”
강찬은 전화를 끊고 최종일을 보았다.
“사무실로 가야 한다는데?”
“알겠습니다.”
당연하게 승용차를 타고 삼성동 분실을 빠져나왔다.
출근 시간답게 길이 꽉 막혔다.
강찬은 갑자기 온몸에 진이 전부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냥 지친다.
이 지랄을 왜 하는지,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아등바등 싸웠는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기현이나 송창욱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가슴에 담겼던 대원들이 죽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실감이 강찬을 덮쳤다.
왜 이러는 거지?
신호가 바뀌어서 차가 멈출 때마다 최종일과 우희승이 눈을 번득이며 주변을 살폈다.
피식.
무슨 지랄을 떨어도 안 되는 게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잘난 척해도 기껏 특수전에서 설치는 게 전부인 거지, 이 정도 규모는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닐까?
강찬은 뒷자리에 몸을 푹 파묻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에 올라가서 회의실에 놓인 TV를 켰다.
테러 현장과 함께 상황을 그래픽으로 보여주었고, 황기현이 사망한 병원의 모습이 나왔다.
강찬은 리모컨을 돌려 뉴스를 찾았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오늘 발표에서 라노크 대사가 공트 자동차의 한국 진출과 관련해서 불법을 자행했으며, 그 외에도 한국의 내정에 개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눈에 익은 프랑스 대사관의 모습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특히 라노크 대사는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특혜를 주었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발표했는데 그 증거를 차례대로 내놓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띠루룩.
강찬은 아예 TV를 꺼버렸다.
“최종일.”
“예.”
“나 소파에서 한숨 잘 테니까 특별한 일 아니면 깨우지 마.”
“알겠습니다.”
강찬은 전화기를 최종일에게 넘겨주고 재킷을 벗었다.
거짓말처럼 소파에 눕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던지 퍼뜩 깼을 때 몸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았다.
기분은 좀 풀렸다.
회의실에서 나간 강찬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석강호, 제라르, 김형정, 그 뒤로 최종일과 우희승이 있었다.
“세수 좀 하고 올게요.”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자 잠에서 깼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아졌다.
사무실로 간 강찬은 테이블에 앉았다.
“뭐야?”
“퇴원한 거요.”
“쓸데없이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 있어.”
강찬의 앞으로 최종일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강찬이 머그잔을 잡는 순간이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김형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프랑스 일간지에서 라노크 대사를 압박하는 것과 동시에 몇 군데 방송과 신문사에서 강찬 씨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강찬이 힐끔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아직 라노크 대사와 관련된 학생이라고만 나왔지만, 발표회장의 일이 있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정보총국의 작업인가?
그깟 거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고 죽는 것도 아닐 거고.
“내일까지 지원 팀을 저 안쪽 사무실로 옮기고 나머지 상황들은 지켜보시면서 대응하겠습니다.”
“예.”
강찬이 답을 하자 김형정이 “잠시만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하고는 방이 있는 안쪽으로 움직였다.
“제라르.”
“Oui.”
강찬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가져왔다.
“우리가 정보전에서 이길 수 있을까?”
제라르는 강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특수전에서야 해볼 만한데 정보전에서 우리는 죄다 병아리인 거잖아. 저격은 할 수 있지만, 폭탄 테러는 하지 못하는 거고.”
제라르가 입술 한쪽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왜?”
“대장. 폭탄 테러는 정보국이 하는 게 아니라 테러 단체가 하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강찬은 픽 하고 웃으면서 탁자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제대로 해보실 생각인 겁니까?”
“글쎄. 그냥 좀 퍼지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거잖냐.”
찰칵.
“후우.”
강찬이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이었다.
“외인부대에서 세 놈을 부르겠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틀어 제라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격수 출신이니까 제법 할 겁니다.”
“너도 눈에 띄어서 숨을 곳이 없는 판인데 거기에 프랑스 놈 셋을 더해 봐라. 저격은커녕 화장실 가는 것도 모두 알 거다.”
“미쉘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미쉘?”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드라마 제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특수분장은 구분이 어렵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에서 그 얼굴에 맞는 신분증만 만들어주면 나머지는 크게 문제 될 거 없습니다.”
이 새끼가 똑똑한 건지, 아니면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현혹된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침묵이 흐르자 눈치를 보던 석강호가 포기한 얼굴로 담배를 집어 들었다.
제라르의 말대로라면 다예를 알제리 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강찬은 피식 웃는 동안 제라르가 손을 뻗어 담배를 집었고, 석강호와 둘이 불을 붙였다.
“일단 외인부대 애들은 놔둬. 저격수라면 이쪽에서도 꽤 하는 대원들이 있으니까.”
“한국 군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장 답을 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 새끼가 정말 다예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나은가?
강찬은 담배를 끄면서 조금 전 제라르와 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푸흐흐.”
“왜?”
“이왕이면 옛날 내 얼굴로 파주쇼.”
이놈한테서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한 게 잘못인 거다.
강찬은 일단 커피를 마셨다.
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안쪽에서 김형정이 최종일과 함께 나왔다.
“공간은 충분합니다. 내일 시설물과 요원들을 이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예. 고생해 주세요.”
“그럼 저는 삼성동으로 가 있겠습니다. 오후에 몽골에서 부상자가 옵니다. 그 외의 상황은 그때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찬의 표정을 본 김형정이 조금은 안심된 얼굴로 말을 건네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뭔가는 하는 것 같은데 막막한 건 여전했다.
그렇다고 발전 시설을 가져가라고 내놓을 수도 없고, 사우디아라비아나 리비아를 때리러 간다고 나설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두 대 때릴 생각을 안 하쇼?”
잠시 이리저리 떠오르던 강찬의 생각을 석강호가 창밖으로 홱 던져버렸다.
“평소 같으면 벌써 죽일 놈 명단 주르륵 늘어놓고 차동균에게 연락하라고 했을 거 아뇨?”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뭐요? 뭐가 문제인 거요?”
“누굴 죽일지 몰라서 그런다.”
“정보총국장과 조쉬라는 놈이라면서요.”
“그놈들 죽인다고 해결 되겠냐?”
석강호가 히죽 웃었다.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아직은 얼굴이 창백했다.
“한번 때릴 때 고개 숙이면 앞으로 계속 맞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 건 대장이요. 아무렴 황 원장과 송 청장을 죽인 놈들을 그냥 두는 건 아닌 거잖소?”
석강호가 눈을 번들거리며 강찬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