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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미안합니다.
강찬은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위고입니다.”]
“위고. 어째서 24시간이 지났는데 답이 없지?”]
[“승인이 보류되었습니다.”]
강찬은 입술 한쪽을 들며 웃었다.
“로망 총국장에게 내가 면담을 요청한다고 전해줄 수 있나?”
[“알겠습니다.”]
멈칫한 다음 건너온 답이었다.
“위고.”
[“예. 부총국장님”]
“나 때문에 곤란하다면 미안하다.”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찬이 전화통화를 막 끊었을 때였다.
드르륵.
제라르가 누런색 쇼핑백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어떻게 이리 바로 왔어?”
“무슨 일입니까?”
강찬의 질문을 제라르가 또 다른 질문으로 받았다.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런 겁니까?”
탁자에 앉은 제라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바스락.
그러면서도 쇼핑백에서 작은 종이 포장을 세 개 꺼냈다.
“다예 야식을 좀 사 왔습니다.”
강찬은 제라르의 말을 석강호에게 전해주었다.
“이 새끼가 가만 보면 잔정이 있다니까.”
제라르가 커피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대장?”
제라르가 세 번째로 던진 독촉이다.
강찬은 몽골 상황과 바실리, 위고와의 통화를 차례대로 알려주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제라르가 종이컵 세 개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얼른 먹고 출발합시다.”
“어딜?”
“원래 아비부인가 그놈 때문에 여기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일찍 쳐들어왔으니 시간에 구애받을 것 없는 겁니다. 빨리 먹고 기운차게 몽골 갑시다.”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이 새끼가 다예보다는 똑똑했던 건가?
부스럭. 부스럭.
제라르가 종이 포장을 벗겨 석강호의 얼굴만 한 햄버거를 탁자에 꺼내놓았다.
“드십시오.”
“이 새끼가 이거 비싼 거라고 생색내는 거요?”
석강호가 엉뚱한 해석을 내놓는 순간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전화기가 햄버거 틈에서 울렸다.
김태진이란 이름이 떠 있어서 강찬은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 강찬입니다.”
[“부원장.”]
강철규, 분명한 강철규의 음성이었다.
[“적은 아랍계 260명에 유럽계 41명이다. 아군 사망 1명, 경상 22명, 중상 4명, 중상자 중에 오 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강찬은 대답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다.
[“적 249명 사살, 52명 생포, 포로 중 6명이 위독하다.”]
“아군 사망자는?”
[“남일규의 팀원이었다. 국가정보원에서 순직으로 처리 부탁한다.”]
“알았어. 다친 곳은?”
[“괜찮다.”]
“다친 곳은?”
강철규의 멋쩍은 듯한 웃음이 옅게 들렸다.
[“허리를 조금 긁혔는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태진이가 국가정보원 김형정과 통화해서 중상자는 한국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알았어.”
이런 건가?
그동안 강찬이 작전에서 돌아올 때마다 황기현, 전대극, 김형정이 지었던 표정이 이런 심정에서 나온 거였던가?
[“포로는 우리 방식대로 처리해도 되겠나?”]
여기서 그러라고 하면 적들을 죽을 때까지 기지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것만 같았다.
“그건 김형정 팀장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알았다. 그럼 답이 올 때까지 보관하고 있겠다.”]
강찬의 표정을 본 석강호가 힐끔 제라르와 눈을 마주쳤다.
“고마워.”
강철규가 피식 웃는 것으로 통화가 끝났다.
“뭐요?”
“아군 사망 1명, 오광택 포함 중상 4명으로 다 끝났단다. 적 300명 중 50명 정도 생포했다는데?”
“이야!”
석강호가 감탄사를 터트렸다가 화들짝 놀라는 눈으로 강찬을 보았다.
“오광택이 중상이라고 그랬소?”
“그렇단다. 일단 서울로 이송한다니까 기다려보자.”
강찬은 다시 제라르에게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한국 특수팀이 원래 이렇게 강했습니까?”
이런 건 뭐라고 답을 하기 어렵다.
아무튼 강찬이 복잡한 심정으로 커피를 마실 때였다.
“광택이가 다쳤다는데 우리가 햄버거 먹기는 그렇고.”
석강호가 햄버거를 노려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럴 게 뭐 있냐? 제라르가 사온 거니까 일단 먹어. 아프리카에서도 늘 이렇게 살았는데.”
“미안해서 그렇지요.”
말과는 달리 석강호는 제 대가리만 한 햄버거를 집어서 강찬에게 디밀었다.
“난 조금 있다가 먹을 테니까 먼저 먹어.”
“뭐! 제라르가 서운해할까 봐 먹는 거요. 그나저나 귀찮게 포로를 왜 만들었지?”
질문을 던진 석강호가 양상추와 패티 속에 답이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그 새끼등이요.”
“야! 좀 삼키고 말해!”
“그 새끼들 말이요, 포로.”
“그거 뭐?”
“거기 공장 짓는데 써먹으면 어떻소? 월급 필요 없고, 말 안 듣는 놈은 근처에 적당히 끌고 가서…….”
말을 하던 석강호가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석강호의 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프리카의 부족 전쟁이 아닌 거다.
그래도 어딘가 써먹을 곳이 있을 것 같은데?
무언가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강찬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
커다란 사각 링처럼 밧줄로 경계를 만들었고, 포로들을 그곳에 몰아넣었다.
외곽을 지키는 막사의 바로 앞이니까, 정확하게는 기지 바깥에 그냥 꿇려놓은 거였다.
“이 씨발 것들이!”
“야!”
남일규가 부르지 않았다면 양동식은 분명 또 어깨에 매달린 대검을 꺼내 들었을 거다.
벌써 둘이나 두들겨서 거꾸로 매달았다.
대놓고 반항했던 놈들이라 남일규도 말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저 입 좀 벌렸던 거니까 뭐.
뭔가를 속삭이던 포로 하나가 화들짝 놀라 대가리를 처박았다.
포로들은 질린 얼굴이었다.
막사 위로 기관총, 미스트랄, 그리고 경계병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서 있고, 남일규와 양동식, 거기에 네 명의 비무장 팀 대원들이 소총을 세운 채로 포로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뒤로 돌린 손목을 타이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포로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에 “팔 좀 풀어달라고 해볼까?” 하는 아랍어를 지껄였던 포로가 양동식에게 끌려갈 뻔했던 것을 본 이후로 더 그랬다.
경험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뼈에 새기듯 알 수 있는 게 있다.
팔이 아픈 게 뒈지게 맞고 거꾸로 매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덜 고통스럽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저벅. 저벅.
그때 강철규와 김철규가 기지를 나와 포로들 앞으로 다가왔다.
포로들의 고개가 급하게 땅으로 처박혔다.
과장 조금 더하면 저러다 목 부러지는 거 아닌가 할 정도였다.
강철규가 막사에 거꾸로 매달린 포로 둘을 보았다.
“반항하던 놈들이었습니다. 풀어주겠습니다.”
양동식의 답을 들은 강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 둘이 거꾸로 매달린 놈들을 향해 움직였다.
강철규는 왼쪽 어깨와 양쪽 허벅지, 발목에 대검을 걸었고, 사선으로 멘 소총을 등 뒤로 돌렸다. 거기에 오른쪽 허리에 권총, 허리 뒤로 주르륵 탄창을 꽂았다.
그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포로들은 치를 떨며 바닥에 고개를 묻었다.
그가 왼손을 뻗으면 목이 완전히 돌아가 죽는 거고, 오른손을 뻗으면 목이 갈라져 죽는다.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을 강철규는 전력으로 달리는 도중에 해냈다.
그것뿐인가?
강철규가 소총 한 발을 갈기면 무조건 한 명은 머리가 터지거나 뚫린다.
여기까지도 징그러운 판에, 괴물과 다를 바 없는 남일규와 양동식이 공손한 표정으로 대하는 강철규다.
부르릉. 부으응.
그때 멀리서 트럭 두 대가 다가왔다.
“끝났나 봅니다.”
김태진의 보고에 강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무기와 장비를 거둬들인 트럭이다.
강철규가 먼 곳을 둘러 보았다가 다시 김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외곽에 선배님 여섯 분이 나가셨습니다. 1킬로미터 간격이라 최소 6킬로미터 바깥까지는 경계가 확실합니다.”
강철규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두운 밤이다.
포로들을 향해 켜진 감시 등이 조명의 전부인 밤.
김태진은 훌쩍 세월을 거슬러 비무장 지대에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이랬다.
강철규가 시선을 돌리면 김태진 같은 병아리들은 그냥 알아서 바짝 얼었다.
“저놈들 얼마나 꿇고 있었지?”
“2시간 정도 됐습니다.”
이번에는 남일규가 답을 했다.
“손목 풀어주고, 다리도 펴게 해.”
“알겠습니다.”
강철규가 양동식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에게 걸어갔다.
양동식에게 향한 걸음이 분명한데도 포로들 사이에 섬뜩한 공포가 감돌았다.
툭툭.
강철규는 양동식의 팔뚝을 두어 번 두드려 주고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포로들이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양동식의 눈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감격한 그의 얼굴이 포로들에게는 감정이 폭발한 살인마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스으응! 스응! 스응! 스응!
양동식이 어깨의 대검을 뽑았고, 비무장 팀 대원들이 연달아 대검을 꺼냈다.
“알라-아!”
포로 한 놈이 질린 얼굴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때였다.
“씨발 놈이 뭐라는 거야!”
툭!
양동식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포로의 손을 묶은 타이를 잘랐다.
***
황기현은 매일 악착같이 노력했다.
감정을 보이면 안 된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최고 책임자가 감정을 읽히는 일만은 있으면 안 되는 거다.
보고 알았다.
라노크, 바실리, 양범은 의도적으로 보일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생각을 읽히는 법이 없었다.
늦은 밤, 내곡동 국가정보원 건물을 나서면서도 황기현은 최선을 다해 표정을 감췄다.
미칠 것처럼 좋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밀실에 들어가 두 주먹을 허공에 뿌려대는 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몽골의 공장 건설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지켜야 하는 몽골 기지였다.
300명의 적이다.
고작 50여 명의 대원밖에 없었다.
그런데 완벽하게 승리를 거뒀다.
사망자 한 명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다.
과거의 대한민국에서 밀려났던 이름없는 영웅들이 국가정보원의 이름을 달고 이뤄낸 쾌거.
내곡동 국가정보원 건물을 나서서 삼성동 분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황기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요원이 열어주는 승합차의 뒤로 올랐다.
부으응.
정문 앞에 조성된 둥그런 녹지를 따라 경호 요원이 탄 승용차가 커다랗게 돌았고, 황기현이 탄 승합차가 그 뒤를 따랐다.
도로로 접어들었다.
새벽 1시.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까지 내려온 사람들 때문에 1차선까지 차가 막혔다.
빵빵! 빠앙!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 다음이었다.
치잇. “취객 잡아! V1. 달려! 달려!”
급한 무전이 울렸다.
황기현이 고개를 창으로 돌렸을 때 취객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황기현을 덮쳤다.
취객이다.
그런데 두툼한 점퍼를 목까지 채웠고, 시선을 똑바로 승합차에 두고 있었다.
앞의 승용차에서 내린 요원 둘이 빠르게 취객에게 달려들었고,
부으응!
승합차가 중앙선을 넘었다.
빠아앙! 번쩍! 번쩍!
맞은편의 차들이 클랙슨을 눌러댔고, 상향등을 번갈아 번쩍였다.
와다닥! 와락!
취객 둘이 승합차를 향해 뛰었고, 요원이 그들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번쩍!
눈부신 빛줄기가 황기현을 파고들었다.
***
송창욱은 퇴근이 늦었다.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다.
전 재산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조부는 일본군의 악랄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죽었다.
그 때문에 선친은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
조부 덕에 금수저 물고 태어났음에도, 그 흔한 일본 유학은 고사하고 독립군의 심부름을 하다 반병신이 되었다.
“할아버지 원망하면 안 돼.”
선친의 마지막 말은 그랬다.
중학생인 송창욱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말이다.
선친은 망가진 몸으로도 조부의 생가를 유지하는 일에 돈을 썼다.
백산 선생 생가라고 지정까지 했던 정부는 유지비를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했다. 독립유공자 생가는 그래서 선친이 망가진 몸으로 지켜냈다.
송창욱의 청장실 벽 한가운데 걸린 오래된 태극기는 조부께서 내려준 것이었다.
고성의 부지 선정, 매입, 토목 설계, 유라시아 철도와의 연계도로 계획까지.
“후우.”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송창욱은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경호 요원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들어가야 했다.
송창욱은 엄지와 검지로 눈 안쪽을 누른 다음 재킷을 입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요원 두 명이 양손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너무 늦었지?”
“아닙니다.”
싱그럽다.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는 젊은 사람들의 미소는 언제나 송창욱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준다.
셋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요원 한 명이 차량을 준비하란 무전을 보내는 것을 보며 송창욱은 문득 이들이 아직 젊은 나이란 것을 깨달았다.
서른 초반은 이 시간에 배고플 나이인 거다.
“우리 잔치 국수 하나씩 먹고 들어가도 되나?”
“시장하십니까?”
송창욱은 순간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잔치 국수를 먹으면 분명 잠자리 내내 속이 불편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송창욱은 그런 나이였다.
“청장님. 저희는 알아서 간식 먹습니다.”
이렇게 기특한 답이 있을까?
막내딸이 조금만 나이가 어렸어도 꽁꽁 묶어줬을 거다.
때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요원 한 명이 빠르게 현관으로 움직였다.
치잇. “이상 없음.”
무전을 받은 요원이 송창욱에게 바싹 붙어서 함께 걸었다.
요원들이 허리에 찬 권총은 위로 뽑는 게 아니라 밑으로 눌러서 뽑는다.
며칠 전, 느닷없이 나타난 취객을 상대할 때 송창욱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현관 앞에 바싹 붙인 승용차의 뒷문으로 송창욱이 들어가자 요원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치잇. “출발.”
앞에 두 명의 요원이 탄 승용차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송창욱이 탄 승용차가 따랐다.
미안한 일이다.
늙은이 하나를 위해 네 명이나 되는 소중한 젊은이들이 이 시간까지 애를 쓴다는 것이.
송창욱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취객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까지 내려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고맙다.
저 사람들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거다. 이렇게 애쓰는 젊은이들이 지키는 대한민국을 저들이 풍요롭게 만든다.
조부님이, 선친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송창욱이 입가에 미소를 다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차가 급하게 중앙선을 넘었다.
휘청!
송창욱은 오른쪽 문에 몸을 부딪쳤다.
움찔!
고개를 든 송창욱의 시선에 오른쪽 뒷문을 향해 손을 뻗친 사내가 보였다.
왜? 택시인 줄 안 건가?
번쩍!
놀란 송창욱의 얼굴을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