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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각오의 무게
송창욱과의 면담을 마친 강찬은 곧바로 내곡동 국가정보원으로 움직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현관 앞의 엘리베이터를 지나쳐서 지하로 내려갔다.
회의실에는 문재현과 황기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부원장.”
문재현과 황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찬을 맞았다.
“앉읍시다.”
어디 아픈가?
문재현은 피곤이 가득 찬 항아리에 푹 담갔다가 갓 꺼낸 얼굴이었다.
“부원장. 내용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또 우리 김 팀장에게 요구했던 사항도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문재현이 입을 열었다.
“직접 보자고 한 이유는 알고 싶은 것 한 가지와 염려스러운 한 가지를 의논하고 싶어서입니다.”
말을 마친 문재현이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전쟁에 관한 흐름은 눈치챘습니다. 다음 주에 차세대 에너지 협의를 개최하고, 일본과 손을 잡은 것 모두가 최악의 상황을 막아보겠다는 발버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나 원장은 능력이 부족합니다.”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약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황기현을 잠시 보았던 문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담보한 것처럼 무책임한 말 같지만……. 나는 우리가 잡은 이 기회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강찬에게 전쟁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문재현은 말을 쏟아냈다.
“부원장.”
“예.”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자리에 앉고 나서 숨돌릴 틈도 없이 날아온 질문이었다.
“대통령님.”
“말씀하세요.”
황기현과 김형정이 긴장한 얼굴로 강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라노크 대사를 만났었습니다.”
문재현이 말없이 강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선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묶어볼 생각입니다. 러시아의 바실리, 중국의 양범, 독일의 루드비히, 스위스의 반트를 차례대로 만나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협조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황기현의 눈 끝이 꿈틀했다.
국가정보원이 감당조차 못 하는 엄청난 인물들을 강찬은 동네 친한 형 나열하듯 늘어놓고 있었다.
“현재 이 일과 관련해 적대적인 입장이 확실한 정보국 인물 두 명이 있습니다. 한 명은 프랑스 정보총국장 로망, 다른 한 명은 영국 정보국 부국장 조쉬입니다.”
역시나!
엄청난 거물들이 전쟁을 만들려고 하는 거구나!
프랑스 정보총국장? 영국 정보국 부국장?
문재현과 황기현의 얼굴에 덜컥 흑색이 올라온 순간이었다.
“그들을 제거할 생각입니다.”
강찬이 단단한 음성으로 뜻을 밝혔다.
황기현은 딱딱하게 얼굴이 굳었고, 문재현은 고개가 쑥 나왔으며, 김형정은 황기현을 바라보았다.
“매번 보고 드리고 결재받을 여유가 없습니다. 보안도 문제가 됩니다. 만약 차세대 에너지 사업을 포기하실 게 아니라면 제가 부탁드렸던 권한을 주십시오.”
“흐흠.”
문재현이 신음처럼 숨을 내쉬었다.
“혹시 언질을 받았거나 들은 이야기가 더 있나요?”
“이제부터 암살이 난무하는 혼돈이 정보국 세계에 펼쳐질 거라고 들었습니다.”
문재현이 손가락을 비비다가 다시 물을 마셨다.
“부원장. 혹시 중국 정보국의 양범 국장에게 부탁해서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만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우리 황 원장이 은밀하게 방북하게 해 줄 수 있어도 됩니다.”
그렇구나!
그런 방법도 있는 거구나!
“북한이 그동안 이용하던 비선을 모두 차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북한과 이견을 조율해 볼 생각입니다.”
강찬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당사자들끼리 만나는 게 나쁠 것은 없었다.
“지금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문재현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황기현을 보았다.
“부원장. 그래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대답은 황기현이 했다.
강찬은 전화기를 꺼낸 뒤에 김형정을 보았다.
전에도 한번 했던 일이다.
김형정이 테이블에서 연결선을 당겨 건네주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오랜만입니다, 강찬 씨.”]
능숙한 한국말 인사가 회의실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잘 지내셨나요?”
[“우리 모두 그럴 형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웃음이 묻은 답이었다.
[“어쩐 일입니까?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김형정이 마른 침을 삼킨 다음이었다.
“미안하지만,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우리 대통령님께서 만나시거나, 아니라면 황기현 국가정보원장이 비밀리에 방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강찬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긴장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과연 어떤 답이 나올까?
황기현과 김형정이 시선을 마주쳤다.
그저 힘써 보겠다는 말만 들을 수 있어도…….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황기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몽골로 가는 비행편을 열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런데 중국 정보국 수장이 나서서 그 일을 약속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럴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국가정보원이 지금처럼 강대국과 직접 협상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얼마나 소원했던가?
국가정보원 입구에 떠오른 이름없는 별을 볼 때마다 수백 번 다짐하고 다짐했던 일이다.
김형정이 두 손을 활짝 펴 보였다.
“열흘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흠…….”]
황기현과 김형정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열흘 정도 여유를 달라는 거였는데.
[“강찬 씨. 제가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예. 기다릴게요.”
강찬이 통화를 종료하자 숨소리와 함께 조용한 흥분이 회의실을 감돌았다.
“부원장. 솔직하게 부원장의 독자적인 조직이 생기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이가 희생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누군가의 의도가 가미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문재현이 분위기를 수습하며 앞에서 말했던 염려스러운 점을 꺼내 들었다.
이 남자도 흔들린다.
긴장하고 애타 하는 것을 보인다.
그러나 확실히 빠르게 중심을 잡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열정이 가득한 눈과 강대국에 밀리지 않는 배포도.
“대통령님. 원하시면 중간보고는 하겠습니다. 다만, 구두로 대통령님과 원장님. 여기 김 팀장에게 하기로 하고, 언제고 조직을 해체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재현이 강찬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네 사람의 시선이 전화기로 달려들었다.
이건 아닌데?
걸려온 전화를 끊을까 했던 강찬은 가슴이 두근거렸던 경고가 떠올랐다.
일단 받고 본다.
“여보세요?”
[“어디요?”]
말리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점심때 보쌈 먹읍시다.”]
이 식충이 새끼!
문재현과 황기현이 웃음을 삼키고 있었고, 김형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녁때 들릴게.”
강찬은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런데 손을 떼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세 사람이 궁금하고 기대에 찬 시선으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양범입니다.”]
“예.”
[“닷새 후, 국가정보원장이 중국을 거쳐 기차로 들어와 달랍니다. 수행원은 두 명까지, 최고지도자가 비공식 면담을 하겠답니다. 그 대가로 비밀 계좌로 한화 100억을 송금해 달랍니다.”]
이 새끼가?
연예인 팬 미팅도 아닌데 무슨 돈을?
그런데 황기현이 입술만 움직여 강찬에게 뜻을 전했다.
원래 이렇게 했던 모양이었다.
“달러로 지불하고 싶은데요?”
제대로 전달했다는 의미로 황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이 넘어왔다.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예?”
[“강찬 씨의 다음 계획 말입니다.”]
강찬은 잠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바실리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라노크가 소개한 사람을 먼저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가능하다면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게도 잠시 들러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그럼 나중에 뵙지요.”]
전화가 끊겼다.
짧은 시간에 조직에 대한 의논, 양범과의 통화, 북한 방북이 뒤엉켜서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부원장.”
“예.”
문재현이 나직하게 불렀고, 강찬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기회를 준 것도 부원장이고, 이 일을 수습해 달라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부원장밖에 없습니다.”
문재현의 의지가 피곤함을 뚫고 그의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국가정보원 대테러 팀을 대통령 직보 기관으로 조치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강찬 부원장에게 사전 보고 없는 작전 권한을 부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문재현의 모든 것을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통보처럼 들렸다.
***
세 번에 걸친 훈련이 끝나고 기지로 돌아왔을 때, 강철규를 제외한 모든 대원은 글자 그대로 흙밭을 구르다 온 모습이었다.
철컥. 철커덕. 철커덕.
여기저기 주저앉는 대원들을 따라 소총과 무기들이 함께 소리를 냈다.
세 번이다.
한 번도 죽을 맛인데 오전에 두 번, 그리고 점심 먹은 게 꺼지기도 전에 바로 한 번, 그렇게 세 번이나 훈련을 한 거다.
“수고했다.”
오광택은 진이 다 빠진 몰골로 바닥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세 번의 훈련이 의미하는 바는 소총은 물론이고, 탄창과 권총, 대검을 매단 채로 1킬로미터를 세 번 전력 질주했다는 의미였다.
“양동식.”
“예! 양동식!”
쩔걱.
양동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커다랗게 답을 했다.
“오늘 밤부터 매복에 들어간다. 구대 하나를 만들어서 지휘하고, 명단을 제출해라.”
“알겠습니다!”
강철규의 카리스마는 정말 죽이고 죽인다.
그의 말 한마디에 지금까지 퍼져있던 대원들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흘렀다.
“남일규.”
“예! 남일규!”
쩔걱.
남일규가 단단하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구대를 짜서 동식이를 지원해라. 역시 명단을 작성해서 태진이에게 넘긴다.”
“알겠습니다.”
강철규가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 이후로 저격수 넷은 두 명씩 6시간 맞교대다.”
“알겠습니다!”
네 명이 일제히 외쳤다.
“차 대위.”
“예!”
“대원들을 세 개조로 나눠서 지원해 주었으면 싶다.”
“알겠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대원들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 보였다.
“오 대표.”
“예.”
쩔걱.
어디서 힘이 솟았을까?
오광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 대위 팀에서 함께 뛰었으면 싶은데 괜찮겠나?”
“알겠습니다!”
차동균이 든든한 아군을 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 바나나!’
그래! 사 갈게.
산더미같이 사 갈게.
왜 그런지 오광택은 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집에 바나나가 두 다발이나 있어. 그런데 얘가 당신이 사온 바나나만 맛있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을 꼭 안아줄 때의 감동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보는 아빠라 쭈뼛거릴 수도 있는데 “아빠-아! 아빠-아!” 하며 조르르 달려와 품을 파고드는 아이가 주는 감동을?
태극기를 달고 달릴 때, 있는 힘껏 달릴 때 나오는 힘은 그런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감사함이었다.
“구대를 짜는 동안 쉬고, 저녁 먹기 전에 적응 훈련을 한 번 더 하겠다.”
씨발!
오광택의 감동과 감사함이 산산이 부서져 바람을 타고 달려나갔다.
***
석강호는 김치까지 얹은 주먹만 한 고기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야! 너랑 나랑 딱 둘이야. 천천히 좀 먹어.”
“천천힝 먹능 거요.”
“에이, 더러운 새끼!”
강찬이 상자에서 화장지를 꺼내는 사이 석강호가 손바닥으로 입을 쓱 닦았다.
국가정보원을 나와서 전화를 걸었을 때도 석강호는 여전히 보쌈 타령을 했었다.
어쩌겠나?
아픈 놈이 ‘보쌈! 보쌈!’ 하는데.
30분 만에 3인분의 보쌈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 살 것 같다.”
강찬이 커피를 타는 동안, 석강호가 포장지들을 종이봉투에 쓸어 넣었다.
“자!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어후! 좋다! 요런 땐 후식으로 설탕 싹 씌운 꽈배기나 도넛이랑 먹어줘야 하는데.”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셨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제라르 이 새끼는 저녁이나 먹었나?”
“미쉘이랑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애새끼가 한국말을 하루에 배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요란을 떨지? 그렇지 않소?”
웃긴다.
석강호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강찬은 송창욱과 김관식을 만났던 이야기와 국가정보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석강호에게 들려주었다.
“뭐요? 그럼 미영이 아버님이 일을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니요?”
“그렇지.”
“햐! 그 양반……! 무서운 구석이 있었네. 이건 뭐! 대장을 사윗감을 딱 찍어뒀다는 거 아니오?”
석강호가 김관식의 애국심을 말 한마디로 변질시켰다.
그 사이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자동차, 건물, 상점, 간판의 불빛이 버티고 있었지만, 어둠은 이미 완벽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왜 그러쇼? 뭐 안 좋은 느낌이라도 있는 거요?”
석강호가 진지한 얼굴로 강찬과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
해가 지는가 싶더니 바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몽골의 밤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하늘에 가득한 별.
은은한 달빛을 타고 윤곽을 드러내는 능선과 지평선.
흙먼지를 뿌리고 달려가는 바람.
강철규는 막사의 위에 서 있었다.
남일규와 양동식이 대원들을 이끌고 잠복해 있었고, 그 뒤를 증평의 특수팀과 오광택이 지킨다.
비무장 지대에서 쓰던, 가장 몸에 익은 작전이었다.
아직 강찬이 예상했던 날까지 여유는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경계를 강화하고, 돌아가며 대원들에게 휴식을 주는 게 맞는 거다.
하지만 본능이 그러지 말라고, 방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신기한 일이다.
강찬도 그런 걸 느낀다는 것이.
‘알고 있다.’라고 덤덤하게 답을 했지만 내심 놀랐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고기를 사줄 생각이었다.
강찬이 사 준 것처럼 고급은 아니더라도 편한 점퍼 하나쯤은 사주고 싶었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이런 건가?
강철규의 입 끝이 슬쩍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치잇.
무전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장한 적입니다.”
번득!
강철규가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숫자가…….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당황한 남일규의 음성이 연달아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