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303화 (30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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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모두 불러서.

한경미는 오전부터 바빴다.

여섯 살과 네 살.

두 살 터울인 형제를 키운다.

결혼 전에는 여리여리하기만 했던 한경미가 “이 새끼가!” 하는 욕을 달고 살 게 된 것은 순전히 극성맞은 두 아들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보며 사랑으로 키우리라 다짐한 것만 골백번일 거다. 그러나 아들이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느 날인가는 거실에 엎지른 물을 닦는데 “날아라, 뽀로로!” 하는 큰아들 차승호의 외침과 함께 ‘콰자작’하는 식탁의 슬픈 비명이 들린 적이 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승호가 어느새 싱크대에 올라가 식탁으로 몸을 날린 거였다. 물론 아들은 한쪽으로 주저앉은 식탁을 타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승호야!”

어떤 엄마가 그 상황에서 놀라지 않겠나.

다친 건 아닐까?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차승호는 머리와 엉덩이들 몇 차례 문댄 다음, 방으로 걸었다.

울컥!

걱정했던 것에 화가 났고, 다음으로 빤한 살림에 아끼고 아껴서 윤이 번들거리도록 닦아대던 식탁이 부서진 게 속상했다.

짜악!

한경미는 정말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고, 차승호의 등에서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다.

이렇게 세게 때리려던 건 정말 아니었다.

덜컥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한참 에너지 넘치는 아이를 방에만 가둬 두었으니 오죽이나 갑갑했을까.

한경미가 애처롭고, 미안하고, 안쓰러운 눈으로 차승호를 보았을 때였다.

“안 아프지롱! 하나도 안 아프지롱!”

차승호가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면서 두 손을 연신 뒤집어 보였다.

이 개새끼!

아차차! 이렇게 되면 남편은 개가 되고 한경미는 개와 살면서 개를 낳은 여자가 되는 거다.

이런 식이다.

두 살 터울인 차성호가 형인 차승호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한경미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차라리 비글 열 마리를 키우는 게 훨씬 조용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야! 차승호! 너 정말 죽을래!”

저녁 시간이다.

한경미는 악을 바락바락 써댔다.

어지간한 고함에는 꼼짝도 않는 차승호가 움찔한 다음, 얌전히 옷을 갈아입었다. 뱀처럼 몸을 털어서 벗은 옷을 발로 휙 차버렸지만 말이다.

차성호는 형이 하는 걸 곧잘 따라하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한경미의 눈치를 좀 더 살핀다.

아무튼, 그렇게 전쟁 같은 준비를 마친 한경미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군인 아파트를 나섰다.

차는 친정아버지가 타던 것을 물려받아서 12년째 타고 있었다.

끼이익.

승용차의 문짝이 이제 그만 나를 버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저축 한 푼 하지 못한다.

“와!”

뒤에서 지랄 맞게 뛰는 차승호와 차성호에게 악을 서너 번 쓰고 나자 증평 시내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 도착했다.

어둠이 주변을 삼키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끼이익.

한경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 문을 열면서 눈시울이 울컥 붉어졌다.

남편이 커피전문점 앞에 있었다.

핼쑥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분명 또 어딘가를 다쳐서 온 걸 거다.

1년이면 절반 이상을 부대에서 자는 남편이 열흘 만에 불쑥 커피 전문점 앞에 있었다.

“아빠! 아빠-아!”

차승호와 차성호가 정신없이 달려갔다.

웃는 낯으로 아들 둘을 양팔에 얹는 차동균의 얼굴에 고통을 이기려는 안간힘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 왔어요?”

“지금. 철호도 와 있어.”

한경미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군인을 남편으로, 그것도 특수팀을 남편으로 둔 아내들은 강해져야 한다.

“형수님.”

그때 안에서 곽철호가 나왔다.

왼쪽 어깨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틀림없이 피가 시커멓게 배어있는 붕대가 감겨 있을 거다.

한경미는 입을 막았다.

울음이 나온다.

이렇게 살아온 것이 고맙고, 다음으로 저 상처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뚫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처절한 전투를 TV에서 본 뒤로 더욱 그랬다.

물론 그 훨씬 전부터 증평의 특수팀 대원 부인들은 전쟁 영화를 못 봤다. 그 안에서 총을 쏘고,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군인들을 보게 되면 숨이 턱턱 막히기 때문이었다.

“언니!”

곽철호의 부인이 뒤따라 나왔다.

역시 붉게 물든 눈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반응을 눈치챈 말썽꾸러기 두 아들이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상황이었다.

“너희 내려와.”

한경미의 매서운 눈초리에 차동균이 조심스럽게 아이 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전에 한 번 부상에도 아들을 내려놓지 않았다가 호되게 혼난 뒤로는 차동균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그때 중형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8년은 훨씬 넘은 구형이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최창훈과 박양자가 내렸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한경미와 곽철호의 아내가 먼저 인사했고,

“안녕하세요?”

최창훈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벌써들 왔네? 중위님과 소위님이 여길 왜 왔어요?”

박양자가 꾸짖는 것처럼 차동균과 곽철호를 보았다. 부상이 있는 것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대원들이 나타난 것을 확실히 꾸짖는 음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차승호와 차성호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박양자에게 까불었을 때 유일하게 아빠인 차동균이 화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박양자가 아이들에게 몸을 숙이고, 잘 지냈냐며 인사를 나눴다.

“들어가요.”

그리곤 몸을 일으키자마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저 마음을 왜 모를까?

약해지지 않으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독하게 붙잡는 저 마음을 말이다.

차동균의 둘째 차성호의 이름에 든 ‘성’ 자가 최성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박양자다.

커피전문점에 부스가 하나 있다.

매달 이 날 만은 커피 전문점 사장이 아예 다른 손님을 받지 않는다.

박양자가 자리에 앉자 따라 들어온 차동균과 곽철호, 그리고 부인들이 주르륵 앉았으며, 최창훈이 주문을 확인해서 카운터로 향했다.

남편 계급이 부인의 계급이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박양자 앞에서 그런 내색을 했다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언젠가 명절에 최성곤의 집에서 어설픈 중사 부인 한 명이 찻잔을 씻으려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최창훈은 최성곤의 둘째 아들이다.

늘 이 모임에 나오고 차 심부름, 그 외에 아이들과 놀아주는 역할을 한다.

“사모님. 저희 모두 1계급 진급했습니다.”

박양자뿐만 아니다.

한경미와 곽철호의 아내도 지금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려오는 버스에서 들었습니다.”

“축하해요.”

박양자가 역시나 표정을 감추며 축하 인사를 전할 때 최창훈이 커피와 차를 가지고 왔다.

“사모님.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차를 내려놓은 최창훈이 차승호와 차성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아이들은 삼촌이 놀아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차 중위님. 아니 차 대위님.”

“예.”

박양자가 차동균을 바라보았다.

“내가 우리 그이 싫어하는 거 알고 있지요?”

차동균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지독한 인간이 죽기 전에 내게 편지를 써 놨더라구요. 살아서 한 번도 안 썼던 편지를 왜 그랬는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썼더라구요.”

차동균이 자꾸만 침을 삼켰다.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 한경미와 곽철호의 부인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닦아냈다.

“나쁜 인간이…….”

박양자는 잠시 숨을 내쉬는 것으로 표정을 지켜냈다.

“그렇게 될 걸 알았는지, 우린 나라의 배려로 먹고살았으니 그걸 갚을 의무가 있는 거라고……. 그런데 장군이 아니면 살림이 어려울 거라고.”

“죄송합니다.”

차동균이 하는 턱없는 사과를 들으며 박양자가 미소 지었다.

“나 요즘 처음으로 죽은 그이가 자랑스러워요. 이렇게 그이를 기억해주는 분들을 보면서 그 양반이 헛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창밖에서 최창훈이 아이 둘과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난 아이들 다 키웠어요. 그러니 우리 그이의 미련한 바람을 조금이나마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차동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위님.”

“예.”

“앞으로 이 모임에 나오지 마세요.”

차동균이 붉어진 눈으로 박양자를 보았다.

“우리끼리 있어야 대위님이나 중위님 흉도 보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차동균이 답을 하지 못할 때였다.

커피전문점 문이 열리고 특수팀의 안식구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가장을 잃은 이유슬의 엄마도 들어섰다.

다 같이 5천 원짜리 밥을 먹는다.

우리는 국가의 덕에 먹고 사는 군인의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다짐을 나누면서 말이다.

아직도 박양자는 식당에서 번 돈으로 희생된 대원의 가족을 돕고 있었다.

***

“아이구! 내 새끼!”

노모가 현관으로 달려 나오며 엄지환을 맞았다.

작전을 나간 것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노모다. 그런데도 눈물을 달고 달려들어서 엄지환의 위와 아래를 연신 살폈다.

“왜요?”

“괜찮냐? 어디 다친 거 아니냐?”

“보세요. 멀쩡해요. 왜 그러시는데요?”

노모는 다리가 풀리는 모양이었다.

“꿈자리가 얼마나 사납던지 밥도 잘 안 넘어갔다.”

엄지환은 속이 뜨끔했지만 뻔뻔스러운 눈을 만들어 노모를 보았다.

“노인네가 이제 정말 늙었나 보네.”

“그런갑다. 밥 안 먹었지?”

“배고파요.”

“오야. 내 얼른 차릴란다.”

노모가 바쁘게 주방으로 향했다.

18평 빌라다.

남편을 일찍 잃은 노모가 악착같이 만들어낸 빌라, 이제는 엄지환이 돈을 벌어서 조금씩 저축도 한다.

엄지환이 방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손바닥만 한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아야. 이거 입가심으로 먹음서 시장기 감추고 있어라.”

노모가 고구마를 깎아서 작은 접시에 담아주었다.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많다.

하지만 노모의 유일한 희망이고, 가족인 엄지환이다.

이런 노모의 성의를 어떻게 모른 척할까?

“빨래가 좀 많아요.”

“암만 집에서 펑펑 노는 에미가 그깟 빨래 못허것냐?”

“집안일 다하는 노인네가 뭘 논다고 그래?”

“아들이 뼈 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이리 놀고 먹음사 호강하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아는 사람들은 모다 나 부러워하는구만.”

대꾸 한마디 빠지지 않으면서 노모는 연신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냥 먹어.”

“그라믄 못 쓴다. 일하는 사람은 따끈한 국물을 먹어야제.”

대강 반찬을 꺼낸 노모가 부리나케 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이불장의 틈에서 밥그릇을 가져왔다.

아무리 말려도 저건 못 고쳤다.

아침에 정성스럽게 퍼서 이불 속에 보관하던 밥그릇, 큼직한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김치찌개, 급하게 구운 고등어 한 조각, 무생채, 그리고 김치 두 가지가 식탁에 놓였다.

“얼른 와요.”

“시장할 틴디 먼저 떠야.”

“같이 먹어야 맛있지.”

노모가 물을 떠 주고는 엄지환의 앞에 앉았다.

“이번에 회사에서 멋진 형님이 생겼어요.”

“성님?”

서울 생활이 길어지면서 노모는 종잡기 어려운 사투리를 썼다. 급하거나 당황하면 좀 더 많은 사투리가 나왔다.

“예. 저보다 나이는 훨씬 많은데 정말 잘해주세요.”

“고마워서 어쩌끄나? 잘해 주신다고 함부로 하지 말고.”

“그럼요.”

뭉턱뭉턱 밥을 떠 넣어서 엄지환의 밥그릇이 곧바로 바닥을 드러냈다.

“밥 좀 더 할래?”

“있어요?”

아마 노모 이름으로 돈이 든 통장을 건네줘도 저렇게 기쁜 얼굴을 하지는 않을 거다.

노모가 냉장고에 있던 투명한 그릇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그 성님이란 분께 참한 여자 있음 소개해 달라고 청을 쪼까 해보믄 어쩔까?”

“노인네가 또 그런다.”

“너도 이제 짝을 찾아야제.”

삐삐삐삐. 달칵.

전자레인지에서 그릇을 꺼낸 노모가 김이 펄펄 나는 그릇을 맨손으로 냉큼 들어다가 엄지환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 집이 옹삭혀도 두 식구는 충분히 비비제?”

“아, 참!”

“참이 아니라 너 결혼하믄 나는 장성 외삼촌네로 내려가면 돼야.”

“쓸데없는 소릴 해! 노인네 보내놓고 내가 어떻게 속 편히 살라고?”

“그런다고 평생 나랑 살래?”

엄지환은 대꾸도 않고 밥그릇에 김치찌개에 들어있는 고기와 김치를 떴다.

“아야.”

달칵.

엄지환은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어머니.”

노모가 엄지환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시장판에서 나 키웠잖아? 그래서? 이제 내 손으로 돈 버니까 노인네 시골 보내놓고 나보고 여기서 여자 얻어서 살라고?”

짧은 침묵 동안 노모는 자꾸만 눈을 끔벅였다.

“알았다. 알았어. 내 잘못했다. 얼른 수저 들어라.”

“그러지 좀 마!”

“알았쓰야.”

엄지환이 숟가락을 들 때 노모는 얼른 눈물을 훔쳤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언제고 어머니랑 셋이서 재미있게 살 여자 만나면 내가 소개할게.”

밥을 듬뿍 뜬 엄지환이 노모를 보았다.

“알았다니까.”

볼에 가득 밥을 넣은 엄지환의 앞으로 노모는 자꾸만 찌개며 반찬 그릇을 밀어댔다.

“이번 현장은 잘 끝났냐?”

“예. 잘 끝났어요.”

밥을 욱여넣으며 엄지환이 빠르게 답을 했다.

노모는 엄지환이 건설회사에 다니는 줄 안다.

석강호가 아니었다면 노모는 이 작은 빌라에서 엄지환의 사망통지서를 받았을 거다.

우걱우걱.

입 한가득 넣은 밥을 씹으면서 엄지환은 갑자기 울컥했다. 이번 작전에서 희생된 선배들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떠올라서였다.

“으짜까? 목이 메였냐? 물 마셔라.”

“흐으으.”

“왜 그러냐? 에미가 잘못했다니까.”

“흐으. 흐으으. 흐으으.”

“나 시골 안 간다. 그러니까 얼른 밥 떠야.”

아무것도 모르는 노모가 연신 눈물을 닦으며 엄지환을 달랬는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눈물이 더 쏟아졌다.

***

이희숙은 무너지는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틀 뒤면 이사다.

남편 한재국을 따라 증평의 군인 아파트로 이사 갈 예정이었다.

“나 미칠 것처럼 좋아.”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팀이 되었다고 들떠있던 남편의 모습이 살아생전 보았던 마지막 모습이라니…….

이희숙은 그제야 한재국의 전화가 떠올랐다.

“힘든 훈련이야?”

[“나한테 힘든 훈련이 어디 있냐? 그냥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난리라서 빠질 수가 없는 거지. 당신 남편 어디 가도 빠지지 않잖냐?”]

“건강 조심해.”

[“알았다. 당신도 건강 잘 챙기고. 저기…….”]

“왜?”

빨래 개키는 게 뭐 급한 일이라고 한재국의 전화를 그렇게 받았었을까?

[“군인 만나서 고생 많다고. 고맙다.”]

“쓸데없는 소릴 해? 부대 앞에 다방 같은데 가다 걸리면 알지? 죽는다?”

[“당신 보기도 바쁘다.”]

“끊어. 빨래 개야 돼.”

[“알았다. 훈련 끝나고 전화할게.”]

왜 그렇게 전화를 받았지?

빨래가 찢어지든, 바람에 몽땅 날아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고 한재국 소위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영결식은 사흘 뒤에 있을 예정이며, 국립묘지에 안장할 예정입니다.”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알아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희숙은 멍한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번쩍이는 구두, 주름이 완벽하게 잡힌 바지, 손을 가린 하얀 장갑, 그 위로 단정한 예복과 하얀 모자가 보였다.

이희숙은 천천히 군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붉게 충혈된 눈을 한 군인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

둘이서 사우나에 앉아있는 느낌.

식사를 마치고 호텔까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강찬의 심정이 꼭 그랬다.

호텔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요원이 건네주는 양복 커버와 쇼핑백을 받은 강철규가 어색한 표정으로 호텔의 로비에 섰다.

“오늘은 쉬고 내일 오후쯤 이후 일정 의논하러 올게.”

“알았다.”

옷이 날개기는 하다.

마음 같으면 다시 끌고 가서 저 촌스러운 머리 모양을 손봐주고 싶었는데 오늘만 날이 아닌 거다.

“올라가.”

강철규가 어색하게 웃고는 호텔로 들어갔다.

한숨이 나직하게 나왔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는데 요원들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에서 커피 마실까 하는데 같이 마실래?”

“저희는 대기하는 게 편합니다.”

보기 좋은 얼굴로 답을 한 요원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얼추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강찬은 로비로 걸었다.

뜨겁고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차니. 다 끝났어.”]

이렇게까지 진이 빠진 미쉘의 음성은 처음 들었다.

“어디야?”

[“압구정동. 차니는 지금 어디야?”]

“호텔에 막 도착했어. 어디서 저녁 먹을까?”

[“우리 담배 피울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지난번에 식사했던 방배동 어때?”]

“그래. 거기 예약해야 하지 않냐?”

[“내가 전화해 보고 다시 전화할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만날 거니까 그때 들어도 되겠다.

커피를 마시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멍하니 기다리기도 그렇고.

사람 참 간사하다.

몽골에 있는 주철범이 아쉬울 때가 있을 줄은 몰랐다. 놈이 있었다면 직원 사무실에 앉아서 담배도 하나 피우고……, 하긴 아무리 아쉬워도 구십 도로 인사하며 나타나는 놈을 보면 분명 짜증을 냈을 거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로비에서 하릴없이 서 있을 때 전화가 다시 울렸다.

[“차니. 예약했어. 찾아올 수 있겠어?”]

“미안한데 주소를 좀 찍어주라.”

[“알았어. 우리 바로 출발할게.”]

전화를 끊고 현관으로 움직일 때 ‘웅웅웅’ 하며 문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입구에 서 있자, 거짓말처럼 대기한다던 요원이 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호텔 현관은 대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스치듯 보면 스물 중반쯤이나 되어 보일까?

비싼 명품 양복과 구두도 눈에 띄는 판이다.

그런데 검은색 승용차가 와서 단단하게 생긴 남자가 뒷문을 열어주기까지 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눈에 달려왔다.

강찬은 얼른 차에 올랐다.

“이리로 좀 가 줘.”

주소가 찍힌 문자를 운전석의 요원에게 보여주었다.

차는 얼마 걸리지 않아 방배동에 도착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불편하니까 들어가서 쉬지?”

“이곳에 요원 20명이 배치되었습니다.”

“뭐?”

“부원장님 경호 등급이 격상돼서 경호 인원이 보강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유비캅의 2선 경호가 추가됩니다.”

완전히 자다 봉창 뚫는 소릴 듣는 느낌이었다.

“그걸 누가 지시했어?”

“지정은 원장님이 하셨고, 경호 책임은 국가정보원에서 담당합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답이었다.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다.

이런 건 내일쯤 김형정과 의논하는 게 맞다.

강찬이 알았다고 하고 식당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미쉘의 차가 강찬이 타고 온 차 뒤로 들어섰다.

제라르가 독이 잔뜩 오른 얼굴로 조수석에서 내렸고, 미쉘은 1박 2일을 한숨 못 자고 운전한 것처럼 지친 얼굴이었다.

요원이 차를 움직이는 동안 차에서 내린 제라르가 강찬에게 다가왔다.

세미 모히칸 스타일이라고 하나?

멋지게 세운 갈색 머리에 깔끔한 양복, 그리고 면 셔츠에 폭이 좁은 넥타이, 마지막으로 밤색 가죽 구두를 신었다.

“무슨 일이야?”

보기는 죽여준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아예 대놓고 시선을 돌릴 정도니까 말이다.

가뜩이나 짙은 눈썹과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초록이 살짝 들어간 눈동자를 가져서 얼핏 외로움에 찌든 놈처럼 보인다. 그런 놈을 이렇게 꾸며 놓으니 볼의 상처까지 놈을 돋보이게 하는 느낌이었다.

“저 여자 뭡니까?”

그런데 유명한 영국의 축구 선수를 찜 쪄 먹게 변신한 제라르가 차를 움직이는 미쉘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왜? 보기는 좋은데?”

“이 옷 사는데 갈아입은 옷만 20벌쯤 됩니다.”

“그거야 뭐…….”

“한 군데 매장에서 그런 게 아니라, 매장만 6곳을 넘게 돌았습니다. 그다음은 셔츠, 다음은 구두!”

말을 하다가 울컥 화가 치민 것처럼 제라르가 다시 미쉘을 노려보았다.

제라르 말대로라면 매장 18곳을 돌며 양복과 셔츠, 구두를 20번씩 다른 것으로 갈아입었다는 이야기다.

으히!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고, 놈에게 총이 없었던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니.”

그때 차를 세운 미쉘이 제라르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얼굴로 강찬에게 다가왔다.

“고생했다. 일단 밥 먹자.”

지나가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고개를 돌려 제라르를 보았다. 물론 남자들의 다음 시선이 확실히 미쉘에게 돌아갔지만 말이다.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 강찬에게 같은 조건을 내민다면 무조건 거절이다.

모델을 할 것도 아니고, 매장 여섯 군데를 돌면서 옷을 20번을 갈아입는다고?

식당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제라르를 본 직원이 멈칫했고, 안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거기에 미쉘까지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기 다른 느낌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미쉘이 ‘이래도?’ 하는 시선으로 제라르를 보았는데 강찬이 보기에 제라르는 필사의 노력으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미쉘이 예약된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식당 뒤편에 있는 작은 마당으로 안내했다.

아직은 밤에 서늘하다.

우산처럼 생긴 가스난로에 불을 켜준 직원이 주문을 받았다.

“이 시간에도 식사가 되나요?”

“오더는 11시까지고, 1시까지 계실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됐다.

강찬은 밥을 먹었고, 두 사람은 식욕이 전혀 없어 보였으나 일단 프랑스 코스 요리 셋과 와인을 주문했다.

미쉘이 담배를 꺼냈다.

세 사람 모두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로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를 뿜어내자 오늘 하루의 피곤함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직원이 와인, 그리고 비스킷과 치즈를 먼저 가져왔다.

쪼르륵.

강찬이 병을 들어서 셋의 잔에 채웠을 때였다.

“저것들은 왜 자꾸 힐끔거립니까?”

제라르가 유리 안에 있는 테이블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요?”

미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라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미쉘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을 해요? 백화점에서도 직원들이 못 알아들었으니까 다행이지, 입장을 바꿔놓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 좋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건데?”

“사람을 멍청이로 아냐고 그랬잖아요? 기껏 옷 골라준 나도 그렇지만, 직원들은 무슨 죄가 있어요?”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만 합시다. 사지도 않을 옷을 왜 입어보라는 거요?”

“비교를 해봐야 살 거 아니에요? 입어보지도 않은 옷을 어떻게 사요? 그리고 다른 매장에 더 좋은 옷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결국, 처음에 입었던 옷을 산 거 아뇨?”

“다 비교해 봤는데 이 옷이 제일 잘 어울렸으니까요!”

울화통이 치민 남자와 억울한 여자의 싸움처럼 보였다.

땡땡땡.

강찬은 스푼을 들어서 와인잔을 두드렸다.

“여기까지만 하자.”

누가 옳거나 틀린 게 아니라 이건 그냥 종족이 달라서 생긴 문제인 거다.

만약 작전에 나섰는데 미쉘이 버벅거렸다면 틀림없이 상황이 뒤집혔을 것처럼 말이다.

“내가 부탁한 거야. 그만해.”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을 하는 제라르를 미쉘이 힐끔 보았다.

“미쉘, 고마워. 제라르가 모델이나 연기자 지망생은 아닌 거잖아. 그냥 그렇게 이해해주라.”

“알았어.”

이번엔 제라르가 볼의 상처를 꿈틀거리며 미쉘을 흘깃 보았다.

“셋이 만난 거다.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라 서로 만나게 하고 싶었어. 자! 이걸로 쇼핑에서 있었던 일은 잊자.”

강찬이 잔을 들자 제라르와 미쉘이 잔을 가져왔다.

째-앵.

경쾌한 소리가 울렸고, 셋이서 적당히 마신 다음 잔을 내려놓았다.

“대장. 이거 양복만 두 벌에 다른 옷과 운동화, 구두도 사서 비용이 꽤 나왔습니다. 내가 카드로 사겠다고 했는데…….”

제라르가 말을 꺼내며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물었다.

“차니. 이 비용은 임대료 받은 것에서 지불했어. 그리고 제발 통장 정리 좀 해 주라.”

“왜? 그냥 놔두면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모인 돈이 제법 돼.”

“놔둬. 나는 그냥 필요할 때마다 카드 쓰면 되지. 참! 오늘 돈을 제법 썼다. 나도 이 양복이랑 다른 옷들 좀 샀거든.”

“많이 썼다고? 얼마나?”

“글쎄? 얼추 천만 원 이상 쓴 거 같은데?”

미쉘이 눈을 흘기는 것처럼 강찬을 보았다.

“너무 쓴 거냐? 그럼 세실한테 말해서 통장에 돈을 더 넣든가 하지 뭐.”

미쉘이 담배를 하나 더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드라마 판권 수익 배당한 것만 7억이 넘어. 거기에 매달 디아이와 건물 관리 법인에서 월급 들어가고.”

“그럼 돈 더 안 넣어도 되는 거지?”

미쉘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는데 제라르는 관심 없다는 투로 담배를 재떨이에 껐다.

식사가 나왔다.

셋이서 와인을 곁들이며 함께 하는 식사다.

배가 불렀지만, 적당히 먹는 데는 지장 없어서 강찬도 그럭저럭 보조를 맞췄다.

미쉘은 현명했다.

강찬과 제라르의 관계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대신 드라마 제작과 관련한 이야기들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끌고 갔다.

프랑스 어로 떠들어도 통역해 줄 필요가 없는 자리다.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와인을 마시는 동안 쇼핑에서의 앙금이 조금씩 털려 나갔다.

“언제 출국해요?”

“휴가는 19일 남았소.”

“휴가요?”

“직장에서 준 휴가요. 그건 왜 묻는 거요?”

“세실이란 친구랑 넷이서 한 번 더 모였으면 싶어서요.”

제라르가 볼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그냥 원래 웃는 게 이런 거요. 그리고 내가 웃는 것까지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신경 써야 하는 거요?”

강찬은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설명한다고 해도 미쉘이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의 웃음인 거다.

누군가와 짝을 맞추는 것이 주는 불편함.

작전에 나갈 때 마음에 남는 게 싫은, 그래서 그럴 소지를 완전히 없애고 싶어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미소였다.

그런 이유로 전에 휴가 나왔을 때 강찬 역시 다예와 함께 지내다가 들어가곤 했었다.

미쉘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셋이서 와인 두 병을 마셨을 때 얼추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직원이 와서 마감을 알렸고, 강찬이 카드로 계산했다.

“차니. 우리 요 앞에 곱창집 가서 소주 한잔 더 하면 어때?”

이것들 둘하고 술을 더?

강찬은 제라르를 보았다.

“피곤하진 않습니다.”

살면서 언제 제라르와 또 이런 자리를 할지 모른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곱창집은 바로 근처라서 미쉘의 차를 좀 더 주차장에 둔다고 알리고 셋이서 걸었다.

아직 밤에는 추운 날씨고,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인데 방배동의 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 남녀가 시선을 잡아당기는 것만 아니면 좀 더 편안하게 걸었을 거다.

힐끔 둘러본 주위에서 간혹 요원들이 보였다.

죄 불러서 함께 곱창 먹으며 소주를 나눠 마셔도 좋을 텐데.

“어서…….”

곱창집 직원인 듯한 아주머니가 미쉘과 제라르를 보고 인사를 멈칫했다가 강찬을 보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주머니. 여기 모둠 3인분하고,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 주세요.”

미쉘이 능숙하게 주문을 하자 반쯤 찬 테이블에서 신기한 눈빛들이 달려왔다.

치이익.

곱창이 익는 사이에 미쉘이 맥주와 소주를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앞에 놓아주었다.

“자! 우리 건배!”

뭘 위해서인지 모른다.

제라르가 재미있다는 듯 볼을 꿈틀거리며 잔을 들었다.

티익!

이런 건 또 와인하고 달라서 단숨에 비워주는 맛이 있다.

반쯤 마셨던 제라르가 강찬과 미쉘을 힐끔 보고는 남은 술을 홀랑 털어 넣었다.

제라르가 가스 때문인지 주먹으로 입을 가리자, 이번엔 미쉘이 아까의 제라르를 흉내 내는 것처럼 웃었다.

“재미있네요.”

제라르가 말을 던지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아프리카가 아닌 거다.

그렇다고 프랑스도 아니다.

강찬이 살고 있는 한국에서 함께 앉아 술을 마시는 거다.

놈의 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재미있으면 한잔 더 해요.”

“그럽시다.”

이것들이?

강찬은 꼼짝없이 연거푸 폭탄주를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빈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이제 드셔도 돼요.”

익은 곱창을 한쪽으로 몰아준 아주머니가 신기한 눈으로 제라르와 미쉘을 보고는 돌아섰다.

“먹어봐.”

“예.”

제라르가 서툰 젓가락질로 곱창을 잡았다.

“포크를 달라고 할까요?”

“괜찮소.”

움켜쥔 것처럼 젓가락을 움직인 제라르가 아슬아슬하게 곱창을 입에 넣었다.

“먹을 만합니다.”

“많이 먹어.”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마시는 자리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 휴가가 끝나면 다시 아프리카로 날아가 전투를 치러야 하는 제라르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프리카의 현실이 자꾸만 가슴 한쪽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강찬의 눈을 본 제라르가 미쉘이 만들어 준 폭탄주 잔을 내밀었다.

“메르시, 캐피떼노(Merci, capitaine).”

알아본 걸 거다.

아프리카에서 잃은 병아리를 가슴에 담고 있는 놈이라서 강찬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은 걸 거다.

강찬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티익.

그리고 둘이서 잔을 비웠다.

미쉘이 말없이 잔을 채워주었다.

“메르시, 제라르.”

이번엔 강찬이 잔을 들었다.

고맙다.

의미 없는 아프리카에서 다예와 함께 삶의 의미를 만들어 준 것, 이런 모습인데도 알아봐 준 것,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모두 다…….“

티익.

볼을 꿈틀거리며 잔을 든 제라르와 둘이 또다시 잔을 비웠다.

미쉘이 맥주와 소주를 더 주문했다.

“한국은 정말 재미있군요.”

“마셔.”

강찬이 웃으며 잔을 들었고, 미쉘과 셋이서 또 술을 마셨다.

정말 기분 좋게, 그리고 재미있게 마셨다.

“대장이 말했던 한국 음식이 이겁니까?”

“아니.”

“차니. 그게 뭔데?”

“분식집에서 파는 돈가스하고 불고기.”

셋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시간 되면 불고기는 내가 살게요.”

술이 어느 정도 올라온 눈을 껌벅이며 제라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럽시다.”

그리고는 순순히 답을 했다.

새벽 4시쯤 되었다.

소주 세 병과 맥주 여덟 병을 마신 정도여서 기분이 딱 좋았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강찬은 빠르게 전화를 꺼냈다.

이 시간에 오는 전화는 정말 급하거나 잘못 걸렸거나 둘 중 하난 거다.

“여보세요?”

[“야! 강찬! 어디냐!”]

독이 잔뜩 오른 오광택이었다.

이 새끼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왜 그러는데?”

강찬은 일단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야! 지금 내가 CCTV 녹화본 찾아서 보고 있거든! 그 새끼 맞아! 확실해! 너 지금 어딨어?”]

강찬은 반사적으로 제라르를 보았다.

[“야! 지금 호텔로 갈게! 30분이면 도착한다! 그 개새끼! 내가 죽여버릴 거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오광택이 악을 쓰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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