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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하루가 다르게
한 달쯤 못 봤나?
그런데 마치 서너 살은 더 먹은 것처럼 성숙해진 김미영을 보고 있자니 멍한 느낌이었다.
“왜?”
“아니. 아니야.”
김미영이 웃는 것을 보며 강찬은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백설공주처럼 눈썹에 맞춰 자른 앞머리도 바뀌어 있었다.
“앞머리 잘랐네?”
“응! 싫어? 바꿀까?”
“아냐!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김미영이 손으로 이마를 만지는 바람에 강찬은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설공주 헤어 스타일보다야 지금이 백번 낫다.
“졸업식에는 올 수 있어?”
“졸업식?”
“다음 주야.”
“갈 수 있으면 가야지.”
“그렇게 바빠?”
이런 건 답을 하기 어렵다.
강대경과 유헤숙을 생각해서라도 가야 하겠지만, 당장 졸업식에 깔려야 할 요원들과 UIS의 위협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안느와 루이까지 들어온다.
그래서 더욱 앞으로의 일정을 함부로 정하기는 어려웠다.
“우리, 졸업하면 여행 가?”
“뭐?”
“약속했잖아. 졸업하면 같이 여행가기로. 편지 봤다면서?”
“아!”
그랬나?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을 빤히 보는 거지?
김미영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자니까 유치한 표현 그대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아직 졸업을 안 한 고등어다.
강찬은 고개를 짧게 흔들고 남은 커피를 홀랑 마셨다.
“가는 거지?”
“일정 봐서.”
“히잉. 나쁘다.”
이럴 땐 또 확실히 고등어.
강찬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삑삑삑삑. 뚜르르.
현관문이 열렸다.
“아들!”
강찬과 김미영이 동시에 일어섰고, 유혜숙이 현관에 들어섰다.
“어머니!”
“아들!”
“안녕하세요?”
“그래. 미영이 왔구나.”
눈치를 살피는 유혜숙을 강찬이 안아주었다.
“어이구, 우리 아들.”
정말 좋다. 엄마의 품은.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도.
“배고프지?”
“예.”
“잠깐만 기다려. 엄마가 얼른 해줄게.”
“도와드릴게요.”
주방에 들어선 유혜숙이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강찬과 김미영은 거실에 앉았다.
“미영아. 아버님, 어머님은 편안하시지?”
“예!”
“요즘은 뭐 하고 지냈니?”
“그냥 프랑스어 공부하고, 책 좀 읽고 했어요.”
“그렇구나.”
어색한 분위기가 그나마 좀 나아졌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밥 될 때까지 방에 가 있어. 뒤에 그러고 있으니까 엄마 부담스러워. 과일 좀 줄까?”
“금방 밥 먹을 건데요. 차 타 놓은 거 있어요.”
강찬은 녹차 잔을 들고 고개로 방을 가리켰다.
“방에 있을게요.”
“그래, 아들.”
둘이서 방에 들어갔다.
김미영은 신기한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앉아.”
김미영이 책상 의자에, 강찬은 맞은 편 침대에 앉았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김미영이 책상 서랍을 열까 조마조마했다. 무전기야 그렇다고 쳐도 권총과 탄창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찬이 방은 이렇구나.”
“왜?”
“그냥. 어떤 방에서 지내는지 궁금했거든.”
난 네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건지 그게 더 궁금하다.
강찬은 김미영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냥.”
“흐흐흐.”
그래! 그러니까 이제 좀 김미영 같다.
확실히 사람은 좀 자주 만나고 할 필요가 있는 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강찬은 어색함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정말은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나?”
“응! 아버지가 절대 귀찮게 하지 말라고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안 알려 주셔.”
김미영이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것처럼 강찬을 보았다.
“아무래도 대사님과 친분이 있어서 중재하는 역할 같은 거?”
“멋지다.”
꿈을 꾸는 것처럼 김미영이 강찬을 보았다.
아직 고등학생이어서 강찬의 말에 환상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했던 그 숱한 총질과 칼질을 보고 난다면 절대로 이런 표정을 짓지는 못할 거다.
“왜 그래?”
“그냥. 내가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인가 싶어서.”
“멋진 일이잖아. 나도 얼른 외교관 돼서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
“그래.”
강찬은 갑자기 김미영과의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생겨버린 느낌이었다.
피와 죽음, 그리고 처절한 살육의 현장이라는 장벽.
“아들! 밥 먹자!”
그때 유혜숙이 불러서 강찬과 김미영은 주방으로 갔다.
셋이서 하는 식사다.
유혜숙이 강찬의 손을 보고 놀랐고, 김미영이 자기도 놀랐다는 말을 하며 하는 식사.
몽골의 환경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강 좀 괜찮은 정도로 표현했고, 노천 광산에 관해 설명했으며, 데나다이트와 세티늄이라는 광석도 알려주었다.
적당하게 식사가 끝났다.
“뭐하니? 저쪽에 가서 찬이랑 있어.”
김미영이 밥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담았을 때였다. 유혜숙이 달려들어 김미영을 말렸다.
“같이 하세요.”
“어쩜! 됐어. 처음이니까 오늘은 그냥 두고 다음번에 도와줘. 아니다. 미영아. 냉장고에 과일 좀 꺼내줄래?”
“예.”
이게 어쩐지 끼어들기가 좀 애매해서 강찬은 반찬 그릇만 옮겨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쉘이 왔었을 때와는 다르게 어색한 긴장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역시 과일은 멜론이었다.
이런 건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손질하기 어렵다.
강찬은 빠르게 멜론을 잘라 접시에 올렸다.
“잘하네?”
“우리 아들, 오믈렛도 기가 막히게 만든다.”
10년 용병 생활에서 익힌 요리가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장난스럽게 떠올린 생각 끝에 강찬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상처 난 손에 들린 칼을 보아서였다.
설거지가 끝났고, 방에 들어가 둘이 먹으라는 유혜숙을 붙들고 셋이 앉아서 과일을 먹었다.
“아들! 나가서 미영이랑 바람 쐬고 와.”
김미영이 강찬을 보았다.
이게 잘못하면 일이 커질 텐데……?
그렇지만 모처럼 만나서 이렇게 가라고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럴래?”
눈치를 살핀 김미영이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어머니. 그럼 요 앞에서 차 한 잔만 마시고 올게요. 잠깐만.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강찬은 방에 들어가 편한 바지에 두툼한 티, 그리고 겨울 재킷을 걸쳤다.
드르륵.
그리고 권총을 꺼내 발목에 걸었고, 무전기를 허리에 달았다.
치잇. “앞에 커피 전문점에 갈 테니까 근접 경호는 하지 않았으면 싶다.”
혹시 밖에 들릴까 봐 소곤소곤하는 소리다.
치잇. “알았습니다.”
요원들의 답이 있었다.
귀에 거는 이어셋을 재킷 안주머니에 건 다음 강찬은 방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그래, 아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또 놀러 와.”
유혜숙의 배웅을 받으며 강찬은 김미영과 함께 아파트를 나섰다.
“많이 먹었어.”
“그래?”
고작 밥 한 공기 먹고 많이 먹었다고 하는 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김미영의 얼굴에서 익숙한 표정과 웃음이 보였다.
언젠가 강대경이 했던 말,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가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강찬을 한 달 만에 보는 강대경과 유혜숙 역시 이런 느낌을 받는 건지 모른다.
때앵.
1층에 도착해서 아파트 건물 현관을 나서자, 사방에서 날카로운 눈길이 달려들었다.
“요즘 아파트에 이상하게 저런 사람들이 많아졌어.”
김미영이 강찬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했다. 그리고는 행여라도 시선이 부딪칠까 봐 아예 바닥을 보듯이 걸었다.
저 사람들의 부두목급이랑 함께 걸으면서.
길을 건넜고,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서 모카라떼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좋다.”
“뭐가?”
“얼굴 보고 같이 있는 거. 흐흐흐.”
김미영이 웃은 다음에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젠 외국에는 안 갔으면 좋겠어.”
“당분간은 그럴 거야.”
“우리 여행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건 일정 볼게.”
김미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억울해.”
“뭐가?”
“맨날 나이 든 사람처럼 그러잖아. 나는 철부지 같이 조르는 거 같고. 원래는 남자가 여행 가자고 해야 하는 건데…….”
강찬은 피식 웃으며 듣기만 했다.
몸뚱이는 고등어고, 정신은 서른을 넘었다는 사실을 지금 김미영이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는 거지?
강대경과 유혜숙의 아들로 살 건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할 때처럼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지금 같은 때는 무슨 생각하는 거야?”
“뭐?”
“가끔 지금처럼 나 볼 때 있거든.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했었어.”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강찬의 대꾸에 김미영이 또 입을 삐죽였다.
“미영아.”
“응?”
“너 정말 외교관 될 거야?”
“그러기로 했잖아.”
“정말 하고 싶은 건 뭔데?”
김미영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뭔데 그래?”
“외교관. 그래서 멋지게 인터뷰할 거야.”
뭔가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김미영이 변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강찬의 마음가짐이었다.
좋아한다. 그런데 강찬이 느끼는 세월의 차이, 그리고 앞으로 마주쳐야 하는 잔인한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아직 안 서서 이러는 거다.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늘 보고 싶다고 여기고, 실제로도 보고 싶어 했으면서, 솔직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이러는 게 말이다.
빌어먹을!
어디서 어디까지 말하고, 어떤 모습까지 보여줘야 하는 거지?
강찬은 문득 강철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도 아내가 목매달고, 어린 아들이 삶에 지쳐 용병으로 가길 바라서 결혼한 건 아닐 거다.
김미영이라는 하얀 종이에, 시커먼 때와 검붉은 핏물을 묻히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이렇게 순진하고, 똑똑하고,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는 여자아이에게?
강찬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카페에 벌써 다섯 명이 넘는 요원들이 들어와 주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김미영이 힐끔거리다가 겁먹은 얼굴로 강찬을 보았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강찬처럼 밀리는 법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생 이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다.
라노크도 그런 삶이다.
사랑하던 부인이 대신 차에서 총을 맞아 죽었고, 딸은 평생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쓴다.
그가 현재를 짐작했다면 과연 결혼했을까?
“나쁘다.”
“뭐?”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강찬은 웃는 얼굴로 김미영을 보았다.
“우리 여행 가자-아!”
가고 싶다.
“성인식 끝나면.”
“치이.”
“우리 성인 되면 당당하게 여행 가자.”
“또 어길 거면서?”
“이번엔 아냐.”
“정말이지?”
“그래.”
김미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요원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앞이다.
강찬은 손가락을 내밀어서 김미영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때까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흐흐흐.”
저 웃음을 계속 들을지, 아니면 이제는 그만 놓아버려야 할지를 말이다.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후에 둘이서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해가 가장 긴 시간이었다.
“이젠 문자 할 거야.”
“그래.”
“들어갈게.”
강찬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김미영이 손을 흔들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을 둘러싼 요원들을 보자니 갑자기 최종일, 우희승, 그리고 이두희가 생각났다.
이두희는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경찰 병원에 가보고 싶고, 아니라도 벤치에 좀 앉아 있고 싶었는데 강찬은 그냥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뭐라고 해도 이런 날 유혜숙이 강찬을 기다리게 하는 건 좀 그렇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유혜숙은 아직 주방에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뭐 하세요?”
“응, 아들. 일찍 왔네? 돼지 불고기 만들고 있었어.”
“냄새가 정말 좋은데요?”
아닌 게 아니라, 매콤함과 고소함이 뒤엉킨 냄새가 거실까지 가득했다.
“미영이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고기를 주무르며 유혜숙이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갔어요.”
“너 미영이 좋아하니?”
탁자에 앉은 강찬을 향해 유혜숙이 질문을 던졌다.
“아직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래도 여자 친구는 있는 거잖아?”
친구라면 문제 될 게 없지요.
“어머니는 아버지 보셨을 때 한눈에 좋았었어요?”
“응.”
강찬이 고개를 돌려 볼 정도로 확신에 찬 답이었다.
양념이 끝난 고기를 능숙하게 네모난 통에 담으며 유혜숙이 강찬을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엄마는 아빠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커다란 눈도 그렇고, 남자다운 입술도 좋았고.”
“아버지가 눈이 크시진 않잖아요?”
“왜? 아빠 눈 커.”
강찬이 웃는 것을 본 유혜숙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씻었다.
“아빠 학교 때 인기 많았어. 형편이 안 좋아서 그랬지, 만약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면 엄마 혼자 냉가슴 앓았을 거야. 거기에 아빠가 얼마나 엄마를 많이 이해해주는데.”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가 도와주신 걸 평생 못 잊는다고 하시던데요? 국비 유학 포기하신 거랑 눈 오는 날 면회 가셨던 거 하고.”
“아빠가 그런 말을 다 했어?”
“어? 같이 있을 때 했던 말 아니에요?”
아닌가?
유혜숙이 장갑을 벗고 강찬의 옆에 앉았다.
“우리 아들, 고민 있지? 엄마가 보기에 미영이가 우리 아들 좋아하는 거 같던데?”
뭐라고 할까?
아무리 편해도 지하주차장에서처럼 총질하는 일이 생길 때 김미영이 옆에 있을까 겁난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다. 유혜숙에게도 아픈 기억일 게 분명해서 그렇다.
강찬의 표정을 본 유혜숙이 애잔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네. 혹시 아들이 하는 일 때문에 미영이든, 누구든 힘들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니?”
뭐야? 속이 보이는 거야?
강찬이 놀란 얼굴을 했을 때였다.
“엄마는 늘 위태위태해. 너를 낳을 때처럼 또 피가 쏟아지면 돌이킬 방법이 없어서 매번 검사도 받고. 그런데도 아빠는 그걸 불평해본 적 한 번도 없어.”
이 말을 하려고 먼저 애잔하게 웃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늘 고마워. 투정부려도, 아플 때도, 늘 엄마를 감싸주니까.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아빠는 엄마가 가끔 잠 못 잘 때 깨어있으면서 자는 척한다. 부담 주지 않으려고 그러시나 봐. 엄마가 방에 들어가면 눈이 떨리는데.”
“아버지가 거짓말은 좀 서투시죠.”
둘이서 강대경을 떠올리며 웃은 다음이었다.
“중요한 건 변하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닐까?”
유혜숙이 어려운 숙제를 툭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