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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그리고…….
언젠가 호텔에서 샤흐란, 스미든과 마주쳤을 때도 이 정도로 기가 막히지는 않았다.
그냥 옛날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이런 개……같은 인간이 혈색까지 좋아진 상판대기로 서 있는 거다.
마누라가 벌어온 돈으로 술 처먹고, 그 술을 핑계로 마누라와 자식을 개 패듯 두들기던 인간이 멀쩡한 얼굴로 몽골에 처가겠다고 서 있어?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도리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명치와 목에 주먹을 꽂고 싶은 것을 강찬은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강찬……?”
오광택조차 놀랄 정도로 강찬의 눈이 전에 없이 번들거렸다.
강철규가 날카롭게 강찬을 노려보았을 뿐, 김태진과 오광택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준비는?”
“다 됐다.”
강찬이 이를 깨문 채로 뱉어낸 질문을 오광택이 당황한 상태에서 받았다.
“나를 아나?”
그때였다.
강철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질문을 던졌다.
번득.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살벌한 기운이 공항 라운지를 덮쳤다.
“내가 영감을 어떻게 알아?”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영감!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어? 죽고 싶어?”
피식. 피식.
두 사람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은 다음이었다.
“강찬!”
김태진이 보다 못해서 나섰는데 두 사람 모두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렸던 그 선배님이시다. 강철규 선배가 예전에 그 유명한…….”
“그만!”
강철규가 묵직하게 김태진의 말을 막아섰다.
비무장왕? 저 술주정뱅이가?
씨발! 그렇게 전설이 어쩌고 요란을 떨더니 결국 자기들끼리 만든 헛소리였던 거냐?
“자네가 여기 총 책임자라고 들었다. 싫다면 난 여기서 빠지면 된다.”
“영감 하나 빠지는 것까지 나더러 이래라저래라 하라는 거야?”
“강찬! 오늘 정말 왜 이래!”
“김태진. 난 여기서 빠지겠다. 그게 좋겠어.”
강철규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오늘 자네는 나도 이해가 안 돼. 이런 거라면 나도 빠지겠다. 내가 선택한 분을 못 믿겠다고 할 정도라면 나 역시 자네에게 도움이 안 될 거 같다.”
김태진이 이를 깨물며 가방을 집었다.
염병할!
이렇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닌데, 여기서 한 걸음 양보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짱한 얼굴로 서 있는 인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함께 가자고 하겠나?
“알겠습니다. 오늘 출국은 취소하는 것으로 하지요.”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상태, 솔직히 악만 남은 상태여서 강찬도 더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몽골에 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강찬은 곧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씨발! 씨발! 씨발!
아무리 속으로 욕을 외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야! 강찬!”
콱!
그때 오광택이 강찬의 팔을 잡았다가 움찔했다.
홱 돌아서는 강찬의 오른손이 퍼뜩 움직이려다 멈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강찬은 그만큼 독이 올라 있었고, 오광택은 그걸 보고 그만큼의 독기가 치솟아 오른 얼굴이었다.
“이 개새끼가! 빵에서 한번 꺼내줬다고 오광택이 꼬봉인 줄 아나? 이 씨발 놈이!”
“이거 안 놔?”
“놨다. 야, 이 씨발 놈아!”
“형님! 찬이 형님이 무슨 일이 있으시겠지요!”
“놔! 놔 봐, 이 개새끼들아!”
주철범과 몇 놈이 달려들어 매달리다시피 오광택을 싸안고 뒤로 물러났다.
“안 놔! 와악! 놔! 놓으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요원인 듯한 직원 서너 명이 강찬의 앞을 막아섰다.
“놔 봐! 이 씨발 놈들아! 야! 강찬! 이 개새끼야! 어딜 가!”
안쪽에서 오광택이 악을 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공항 직원들이 달려왔는데 감히 안쪽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겁먹은 얼굴로 눈치만 살폈다.
“부원장님. 잠시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 마디로 완벽하게 개판인 상황이었다.
“후우!”
강찬은 고개를 젓고 밖으로 나왔다.
강찬과 요원 셋이 밖으로 나오자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났고, 소리에 힐끔거리던 승객들이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
“쯧!”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은 아는데 지금은 웃고 있는 건지 우는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대로 몽골에 가는 것도 우습고, 이 꼴로 들어가서 화해를 하는 것은 더 우습게 느껴졌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요원 한 명이 중앙 로비를 가로질러 다른 쪽 복도를 향해 걸었다. 언젠가 들러본 적이 있는 국가정보원 공항분실이었다.
입구의 버튼을 누르자 확인도 없이 문이 열렸다.
“회의실 좀 사용한다.”
달칵.
요원 한 명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유리문을 강찬이 들어설 수 있도록 열고 기다렸다.
기다란 원형 탁자와 안쪽으로 보드가 서 있는 평범한 구조였는데 강찬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요원 둘이 재떨이와 봉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들어왔다.
찰칵.
“후우!”
강찬은 아무 말 않고 요원이 건네주는 담배를 받았고 또 불을 붙였다.
“김태진 대표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 양반하고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다.
강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를 피우자 가슴이 좀 가라앉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건가?
니미! 전생에 술주정하던 아버지가 있는데 저 양반이었다고 털어놓으라고?
살면서 가장 흥분한 순간이란 생각도 들었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이성이 날아간 순간이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작전에서 이렇게 흥분한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누가 뭐래도 적이 확실해서 죽이면 끝나는 흥분이었는데 지금은 주먹 한 방을 날릴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어쩌면 저렇게 눈빛까지 살아나서 지랄을 떨어댈 수 있냐는 거다.
나를 아느냐고?
염병! 나만큼 잘 아는 새끼 있으면 또 나와보라고 그래라!
개 씨발!
아프리카에서 목에 총알이 박혀 죽을 때까지 아버지란 기억은 술 처먹고 몽롱한 눈깔로 마누라를 두들기다가 말리는 자식까지 두들긴 인간이란 기억밖에 없다.
저런 쓰레기가 뭐? 비무장왕?
그때는 어떤 새끼가 술을 더 많이 처먹고 더 많이 지랄하는 걸로 싸우던 시절이냐?
강찬은 곧바로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김태진이 들어섰다.
화가 가득한 눈빛이었는데 그만큼 궁금한 눈빛이기도 했다.
답을 해야 했다.
솔직한 답, 그런데 정말 할 말이 없는 거다.
강찬은 우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배를 껐다.
“잠깐만 나가 있어 줄래?”
“알겠습니다.”
요원들이 눈짓을 나누고는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앉으십시오.”
“흐흠. 자네도 앉아.”
김태진은 그래도 연륜이 있었다.
화를 누르고 이곳에 나타난 것만 봐도 그랬다.
“무슨 일이야? 자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를 알아야 맞춰볼 거 아냐? 내가 아는 자네가 갑자기 이럴 이유가 없잖아?”
답답했던 속을 털어놓는 것처럼 김태진의 질문이 끝났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요원 한 명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놓아주고 나갔다.
“담배 피워. 화날 때는 그게 좋아. 나 때문이라고 참는 것도 지금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괜찮습니다. 좀 전에 피웠습니다.”
“그래,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건지나 한번 말해 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가?
“강 선배를 알고 있었어?”
김태진은 그 사이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이런 양반을 실망시키는 것도 우습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 비밀 지켜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강찬은 숨을 들이켠 다음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 양반에게 저랑 같은 이름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강찬의 시선 앞에서 김태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다음 말이 뭐야?”
“그 아들이 저 양반 술주정을 못 이겨서 아프리카에 가서 죽었다는 건 아십니까?”
잠시 굳은 것처럼 멍하던 김태진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개인적으로 죽은 아들을 압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감정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그따위로 죽게 한 사람이 멀쩡한 얼굴로 몽골에 가겠다고 서 있는 걸 보려니까 속이 뒤틀려서 그랬습니다.”
“세상에…….”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그 친구를 알 수가 있나?”
“그냥 충분히 알 정도 됩니다.”
김태진이 종이컵을 들어 담긴 커피의 절반쯤을 마셨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가는 길에 내가 설명하는 걸로 하고 우선 출발하자. 국가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이번만큼은 내 말을 들어라. 그래 주겠나?”
김태진의 굳은 입술을 보자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내가 가서 선배와 오광택을 먼저 태울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자네와 나는 일단 일등석으로 옮기자. 비행시간이 길지 않으니까 그리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일단 도착할 때까지 안 부딪치는 게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이번은 내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요원 한 명 데리고 갔다가 그 친구 통해서 연락할 테니까 바로 탑승하고.”
“예.”
김태진이 “후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강찬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유리문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기분이 더럽더라니!
강찬이 탁자를 노려보며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대극의 번호가 떠 있었다.
정말이지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여보세요?”
[“괜찮냐?”]
노인네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 비행기 타러 가기로 했어요.”
[“젊은 혈기도 좋다만 적당히 해라. 국가정보원 부원장이 공항에서 깡패랑 싸워서 되겠냐?”]
이게 욕을 하는 것보다 더 아프게 들려서 강찬은 픽 하고 웃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고생하자.”]
궁금할 거다. 이 양반 성격에 당장 내용을 묻고 싶어 온몸이 비틀릴 건데 비행기 시간을 계산해서 끊는 걸 거다. 아니면 나중에 김태진이 전화기 붙들고 꼬치꼬치 묻는 말에 답을 하던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김형정의 번호가 뜨며 전화기가 울렸다.
“지금 비행기 타기로 했어요.”
[“괜찮으신 겁니까?”]
“예.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다른 도움 필요하신 건 없나요?”]
“예. 다녀와서 연락드릴게요.”
[“고생하십시오.”]
전화를 끊자 요원 한 명이 들어와서 탑승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염병! 조금 참을걸.
다시 라운지를 향해 걷는데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 빌어먹을 인간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오광택과 킬킬거리면서 비행기 타고 있었을 텐데.
공항의 라운지를 지날 때는 괜히 이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게 모두 그 인간이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인 거다.
개 같은 인간!
자식이 죽었다는데 유품도 수령하지 않아서 제라르가 들고 다니게 했으면서 저런 얼굴로 돌아다녀?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에서 걷어차 떨어트리고 싶었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돌자 간이 CIQ 심사대가 있었고, 그곳을 통과하자 곧바로 탑승 게이트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서 와.”
이륙 시간이 코앞이다. 탑승 게이트 앞에 서너 명의 승객이 바삐 움직이고, 그 앞에 김태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찬은 일단 김태진과 함께 비행기로 올랐다.
일등석은 입구에서 왼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늘 시커먼 사내놈들끼리만 타던 비행기를 세련된 승무원들이 안내해주는 것이 좋기는 한데 앉아라, 벨트 매라, 안전 교육 시청하라는 것은 좀 불편했다.
아무튼, 부드럽게 비행기가 출발했다.
슬리퍼, 블랭킷, 안대가 준비되었고, 간단하게 와인과 땅콩도 받았다.
“우선 내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할 테니 들어봐.”
김태진은 와인으로 입을 축여가며 대략 30분에 걸쳐 강철규를 찾게 된 배경부터 오늘 오전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부 설명했다.
“그래서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돈도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강유재단에 전부 기부했다. 이 정도면 저 선배의 진심을 믿어줄 만하잖아?”
강찬은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믿음?
솔직하게 김태진의 말 한마디에는 전대극, 김형정의 신뢰가 얹어진다.
하지만 강철규는 아닌 거다.
막말로 그래! 고통을 이기려고 그랬다고 치자!
그런다고 마누라와 자식을 두들긴 것이 없어지고, 목이 뚫려 죽은 자식과 목을 매단 마누라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닌 거다.
“이번 일에 나선 것도 아프리카에서 죽은 아들의 유골이나 유품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나선 거였다. 그러니 자네가 좀 이해해다오.”
이럴 때 보면 전대극과 김태진, 김형정은 마치 강찬을 설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강찬!”
김태진이 나직하게 불렀는데 강찬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가슴이 용납하지 못하는 거다.
싫은 거다.
그냥 뱀을 옆구리에 끼고 살라면 살았지, 저 빌어먹을 상판을 보고는,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나?
“후우.”
빌어먹을 수송기가 적성에 맞다.
봉지 커피와 담배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다면 훨씬 견디기 쉬울 거다.
“대표님.”
“그래.”
“일단 전 모른 척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게 해주세요. 저도 굳이 나서서 건드리진 않을게요.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김태진의 서운한 얼굴을 보자 문득 미안해지긴 했는데 이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일 시간이요.”
“후유. 알았다.”
김태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 승무원이 다가왔다.
점심 메뉴가 건너왔는데 강찬은 라면을 부탁했다.
***
오광택과 강철규는 소고기 메뉴를 선택했고, 나란히 앉아 식사를 마쳤다.
“형님, 맥주……? 아! 술을 못 하시지. 그럼 나 혼자 한잔 마실랍니다.”
오광택은 승무원에게 맥주 한 캔을 부탁해서 받았다.
치이익!
그리고는 곧바로 서너 모금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쇼. 저 새끼가 저런 놈이 절대 아니거든요. 아마 좋아하는 여자한테 덤벼들었다가 싸다기를 맞고 왔거나, 아님 오늘 생리라서 그냥 돌아왔거나 둘 중 하날 거요. 봐서 또 지랄하면 그땐 나도 다 때려치우고 돌아설라니까 그때 가서 나 하고 업장이나 관리하며 삽시다.”
“날 언제 봤다고?”
“허어! 거 눈빛 보면 다 아는 거요. 그냥 외롭게 사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삽시다. 그런데 말이요, 강찬이 저 새끼, 진짜로 저런 놈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아까 김태진 대표가 난처해 하는 것 보셨잖소?”
“두고 보면 알겠지.”
“아이, 형님, 거 속 좁게 뭘 두고 봐요? 하여간 내리면 사과할 거 같으니까 모른 척 받아두세요.”
강철규가 피식 웃으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머릿속이 깨져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가슴 속이 뻑뻑할 정도로 메여왔다.
비무장지대에서 왕으로 살았다.
국가를 위해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살았고, 그 흔한 건빵 한 개 함부로 집으로 가져가 본 적 없이 살았다.
뭘 잘못해서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 거지?
차라리 죽은 자식이 저렇게 멸시한 거라면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늙어버린 자신을 선배라고 깎듯이 챙겨주는 김태진 앞에서, 강남의 유명한 깡패라는 놈 앞에서, 이제 스물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멸시를 받을 줄은 몰랐다.
새삼 현재의 모습이 어떤지를 깨달았고, 숨을 쉴 때마다 울컥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늙었다. 늙은 거다.
젊었을 때라면, 비무장왕으로 설치고 다녔을 때라면 벌써 누가 죽어도 죽었을 거고, 확실히 쓰러진 놈은 저 애송이였을 게 분명했다.
‘어떤 수모를 받더라도 아들놈 유골과 유품은 찾는다.’
강철규는 창밖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