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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신사의 제안.
석강호를 만난 시간이 오전 9시 10분경이었다.
어차피 미사리 카페는 문을 열 시간이 아니어서 모처럼 양평 방향으로 달렸다.
석강호와 함께 있자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졌다.
강을 따라 오른편의 산에 올라앉은 전망 좋은 카페가 나왔다. 석강호가 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웠는데도 우희승과 이두희는 보이지 않았다.
“애들 부를 거요?”
“외곽 경계가 있어서 곤란할지 몰라. 이따가 닭집에 가서 부르면 되지. 아예 외곽 근무자까지 싹 불러서 다 같이 먹자.”
이상하게 별거 아닌 일이 웃긴다.
마당 앞쪽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둘 다 강을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생각해 보면 지난 반년 가까이 이런 게 다 호강이라고 느껴질 만큼 험하고 바쁘게 살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직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한 석강호가 담배를 꺼내 강찬에게 권했다.
찰칵.
불을 붙인 다음이다.
“눈빛이 또 이상한데 찜찜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또 그런 거요?”
석강호가 막 질문을 던졌을 때 직원이 커피를 가지고 내려왔다.
일단 둘이서 한 모금씩 마셨다.
냄새는 그럴싸했는데 아쉽게도 맛은 별로였다.
“그냥. 우리 늘 그랬잖냐? 뭐든 예상보다 꼬이고 힘겹고.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닐까 싶고, 그렇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게 감이 불안한 건지, 아니면 강대경과 유혜숙, 그리고 석강호를 두고 가서 마음이 불편해 그런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저녁 약속 이야기, 내일 영국 정보국 담당자 이튼을 만나기로 한 이야기 등을 나눈 다음에 다시 출발했다.
점심은 멋진 개울을 끼고 있는 오리 구이집으로 정했다. 전화로 요원들 모두 나오라고 설득했으나 결국 우희승과 이두희만 나타나서 넷이 실컷 먹었다.
중간에 미쉘에게서 강남의 식당 이름과 번호, 주소가 문자로 온 것을 제외하면 다른 연락도 없었다.
막걸리를 마신 강찬과 석강호가 개울가에서 담요까지 덮고 한숨 잤고, 일어나 커피까지 얻어 마신 다음, 서울로 돌아왔다.
석강호를 데려갈 수 있을까?
6개월을 떨어져 있는 것이 아쉽고 서운한 심정?
그런데 그걸 표현하자니 낯간지럽다.
“들어가라. 저녁에 뭐 할거냐?”
“저녁 먹을 거요.”
둘이서 실없이 웃은 다음 헤어졌다.
집으로 들어간 강찬은 샤워하고 잠시 쉬었다가 옷을 갈아입고 약속한 식당으로 움직였다.
***
강찬이 약속된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식당 한쪽에 드라마와 방송 관계자들이 모두 자리한 다음이었다.
“보스!”
미쉘이 가장 먼저 강찬을 알아봤고,
“대표님!”
직원들과 연기자, 그리고 스텝들이 줄줄이 다가와 인사했다. 기쁘고, 행복하고 들뜬 표정으로 강찬을 대하고 있어서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쉘이 옆에 서서 연출과 작가, 그리고 비중 있는 외부 연기자들을 소개해 주어서 잠시 시간이 끌렸다. 꽤 많은 인원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다.
‘고생했다.’라는 짤막한 인사말을 한 강찬은 미쉘과 임수성 사이에 앉아서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훈훈했다. 아마도 성적이 좋아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있어 보였다.
중견 연기자들이 권해주는 술을 서너 잔 마신 다음이었다.
“주목해 주세요!”
쨍쨍쨍쨍!
미쉘이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병을 숟가락으로 때렸다.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여자가 하는 짓이라 그런지 어딘지 어색하게 보이기도 했다.
“대표님께서 이번에 3회 이상 출연한 출연자 전원과 각 파트 조감독님 이상 되시는 분들을 태국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와-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후에도 연신 고기와 술이 나왔는데 한참 지나서 은소연이 강찬 앞으로 나왔다.
“술 한잔 드실 수 있어요?”
이런 건 거절하기 어렵다.
“고생했어.”
“대표님과 미쉘 이사님께 감사드려요.”
은소연은 그 사이 무척 세련된 느낌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과도 얻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잘 됐다. 회사를 차린 궁극적인 목적이 금전적 이득이라고 해도 이렇게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은소연이 지나가자 기회를 보던 연습생들이 쭉 달려들었다.
“대표님!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그 뒤를 따라서 코디나 메이크업, 그리고 로드 매니저들이 강찬에게 다가왔다.
“만족하는 거지?”
“그럼요!”
심지어는 경리 아가씨까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맥주를 들고 강찬에게 다가왔다.
“술 그만 마셔야 하는 거 아냐?”
“저 아직 괜찮아요!”
웃으면서 술을 받았고, 기분 좋게 따라 주었다.
디아이 직원이 아닌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강찬을 바라볼 정도로 공손하고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차니. 조금 있다가 나갈 거야.”
강찬의 표정을 살피던 미쉘이 조용하게 귀에 대고 말을 건넸다.
얘가 이런 쪽으로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20분쯤 지나자 미쉘이 눈짓을 했다.
이미 다들 술이 제법 들어간 상태다.
식당의 입구까지 임수성과 김재태가 따라 나왔다.
“부장님이 뒷정리 부탁해요.”
“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걱정 말고 들어가십시오.”
미쉘을 안심시킨 임수성이 인사를 마치고 김재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맥주 한잔 더 마셔도 돼?”
“그러자.”
아직 시간이 10시가 안 되었고, 그동안 고생했던 미쉘을 위로하는 느낌으로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술을 마셔서 택시로 압구정동의 바로 움직였다.
미쉘이 잘 아는 곳인지 바텐더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구석의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음악도 있고, 무엇보다 담배를 마음 놓고 피울 수 있어서 좋았다.
“고생했다.”
쨍!
미쉘이 환하게 웃으며 맥주병을 마주쳤는데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좀 더 여유가 생겼다. 하여간 소란스러운 것엔 적응이 잘 안 된다.
검은색 정장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미쉘이 강찬에게 담배를 권했다.
찰칵.
강찬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주었다.
“후우. 미쉘 할 얘기가 있어.”
미쉘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틀림없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눈치여서 강찬은 얼른 말을 이었다.
“프랑스에 6개월 정도 연수를 다녀올 생각이야.”
“연수?”
강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쉘이 고개를 갸웃한 다음이다.
“내가 따라가도 돼?”
“안 돼.”
“그럼 나랑 하루 자고 가는 건?”
“그것도 안 되지.”
“반나절 자는 건?”
남녀의 역할이 확실히 바뀌었다.
대꾸하기도 뭐해서 강찬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강찬이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미쉘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뜸 걸어서 강찬의 다리 위에 앉았다.
가뜩이나 시선을 많이 받는 미쉘이 다리를 벌린 채로 강찬에게 올라타자 가게의 모든 시선이 대놓고 달려들었다.
저것들은 돈도 안 내고 생쇼를 보는 기분일 거다.
“그러니까 차니가 나랑 자 주지도 않고, 애를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6개월을 혼자 프랑스에 가 있겠다는 거잖아?”
다리에 올라가 있어서 커다란 눈이 강찬의 시선보다 조금 높게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건 전과 같은데 오늘은 유독 진지한 눈빛이었다.
쪽.
미쉘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강찬을 들여다보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거네?”
“응.”
쪽.
두 번째 입을 맞췄다.
“안아 줘.”
강찬은 픽 하고 웃은 다음 미쉘을 안아주었다.
꽈악.
미쉘이 두 팔로 강찬의 목을 힘껏 안았다.
“이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지?”
이런 때 안 기다려도 된다고 말해 줘야 하는 건가?
고개를 든 미쉘이 강찬을 빤히 보았다.
“사랑한다는 여자한테는 말해 줬어?”
“아직.”
미쉘이 강찬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쓸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잠자리를 해도 괜찮다는데 왜 나를 거부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게 시간 내주기로 한 거 잊진 않았지?”
“다 같이 시간 내기로 한 걸로 안다. 그리고 이제 좀 내려오지?”
미쉘이 재미있다는 듯 웃은 다음 강찬에게 고개를 가져왔다.
“우오!”
구경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서운할 거다.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받아준 것도 아니어서 고개를 든 미쉘은 서운한 얼굴이었다.
“그만하자.”
“응.”
이년은 속이 없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찬에게서 내려온 미쉘이 맥주를 마셨다.
“프랑스에서는 어디서 지내?”
“아직 몰라. 라노크 대사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으니까 가봐야 알 것 같아.”
“전화는?”
“특별한 때를 빼고는 상관없다던데?”
미쉘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나는 바로 다음 드라마 제작 들어갈 거야. 은소연도 그렇고, 다른 연기자 애들도 그렇고 얼굴이 알려졌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거든. 참! 소연이 광고 섭외만 다 받아도 수입이 20억이 넘어.”
참 쉽게 잘도 번다.
이러니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그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견디고 있는 걸 거다.
“회사 키워놓고 건물 잘 지키고 있을게. 그러니까 차니도 조심해서 다녀와. 사랑한다는 여자애는 내가 아는 거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여자랑 들어오는 건 안 돼. 그리고 갑자기 여자 생각이 너무 나면 전화해 줘. 바로 갈게.”
하여간! 바비 인형같이 생긴 애가 대화내용은 늘 이렇다.
“그럼 세실이랑 신디 만날 시간이 없겠네?”
“내일이나 모레로 하루 잡아.”
미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는 건 미쉘의 금발이 출렁일 때마다 구경하는 놈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거였다.
***
늦게 들어왔다고 운동을 거를 건 아니다.
프랑스로 출발한다고 생각하자 시간이 부쩍부쩍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아들! 어제 연락 왔었는데 아들도 들었어?”
“무슨 연락이요?”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유헤숙은 흥분한 얼굴이었다.
“대학! 과를 정해주면 입학 후 바로 휴학 처리해줄 거고, 아니라면 5년 안에만 입학하면 된대.”
설명을 마친 유혜숙의 눈에 강찬은 모르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이럴 때는 강대경의 도움이 필요하다.
강찬이 시선을 돌리자 강대경이 입을 열었다.
“엄마는 네가 과를 정해주고 프랑스에 갔으면 싶은 거지. 대학 입학하고 프랑스 연수 간 거잖냐?”
강찬이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유혜숙이 계면쩍게 웃었다.
“아니, 엄마는 네가 군대 가는 것처럼 입학하고 가면 어떨까 해서…….”
“그러죠, 뭐.”
“정말?”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일까?
젓가락을 손에 끼운 채로 두 손을 모은 유혜숙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휴, 우리 어머니, 모르고 갔었으면 우실 뻔했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너 어떻게 설득할지 엄마 혼자서 고민 많았다.”
“내가 언제!”
“우리 같이 산 게 20년이 다 돼간다.”
수업을 못 따라가서, 혹은 다른 학생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미안해서 안 다니더라도 입학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아들? 과는? 뭘 전공해 보고 싶어?”
“원래는 체육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오늘 좀 생각해보고 저녁에 의논드릴게요.”
“그럴래?”
평소보다 10분쯤 식사가 늦어져서 아침이 바빴다.
반찬을 함께 정리하고 설거지는 강찬이 했다.
“다녀올게, 우리 아들도 오늘 하루 재미있게 보내.”
유혜숙이 팔을 뻗어서 강찬을 안아주었다.
“딸이다, 딸!”
강찬과 눈이 마주친 강대경의 농담이었다.
뭐래도 좋았다.
유혜숙이 안아주는 건 열심히, 악착같이 살아온 것에 대해 세상이 주는 칭찬 같은 느낌이었다.
“다녀오세요,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강찬의 머리나 어깨를 쓸어주는 강대경의 손길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럴 때면 꼭 눈을 바라본다.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확실히 다르다.
낮에 할 일이 따로 없었다.
어제 양평까지 다녀왔는데 석강호를 또 부르기도 그렇고.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기를 든 강찬은 웃으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거 뭐하쇼? 오후 4시라고 했으니까 점심 같이 먹읍시다.”]
거친 척, 투박한 척, 아닌 척했지만, 다예루도 강찬과 떨어져 있는 것이 서운한 거다.
“언제 나올래?”
[“아파트 입구요.”]
“바로 나갈게.”
매일 보는 놈이다. 매일같이 밥 같이 먹고, 차 함께 마시고, 심지어 작전에도 같이 가는 놈이다. 그런데도 오늘 또 만나는 것이 좋다.
강찬은 건물의 서류를 챙겨서 나갔다.
석강호와 둘이서 차 마시고, 깔끔한 일식집에 가서 무식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후식이 나왔을 때 강찬은 꼼짝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요?”
과일을 포크로 찍으며 석강호가 놀란 눈이었다.
“너처럼 먹으면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궁금해서 그랬다.”
“푸흐흐. 미련하기는!”
“확!”
이 새끼가 없었으면 정말 재미없는 세상이었을 거다.
뒤뚱거리며 일식집을 나와서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거 넣어둬라.”
강찬은 들고 갔던 서류를 조수석 앞의 사물함에 넣었다.
“그게 뭐요?”
“건물 서류야. 내가 없는 동안 가지고 있어.”
“알았소.”
석강호가 편하게 대답하고 난 다음이었다.
“혹시 몰라서 도장하고 인감, 관련 서류, 변호사 연락처까지 다 써놨어.”
“그게 뭔 소리요?”
“알아서 관리하란 소리다.”
“귀찮소. 그냥 그대로 둘 테니까 빨리 와서 가져가쇼.”
대사관 앞의 카페가 기억나서 그리로 향했다. 오후 2시 30분쯤이어서 한 시간을 넘게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들어갔다 올게.”
“기다리겠수.”
“왜?”
“어차피 라노크 대사가 저녁 약속이 있담서요? 그냥 둘이 저녁 먹읍시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 끝나면 내가 전화할게.”
“알았소.”
석강호는 두말하지 않고 뜻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사는 게 이런 식이었으니까 반대의 입장이라도 서운할 것은 없었을 거다.
강찬은 주변을 살피고 대사관으로 들어갔고, 요원의 안내를 받아 라노크의 집무실로 향했다.
달칵.
“강찬 씨.”
라노크는 강찬과 인사를 마친 다음, 팔을 뻗어 탁자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영국에서 온 이튼 입니다. 이튼, 이쪽이 강찬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튼입니다.”
“강찬입니다.”
둘이서 악수를 나눴다.
가운데가 반질거리는 대머리, 퉁퉁한 데다 키가 작은 이튼은 입과 눈에 고집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 바닥은 하여간 눈매 매서운 놈들 천지다.
“앉읍시다.”
라노크의 제안에 셋이 자리에 앉았다.
시가 케이스를 보여주자 이튼이 시가를 들었다.
찰칵.
시가는 불을 붙이기 전에 커터칼로 잘라야 하고, 불을 붙이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린다. 뻐금거리면서 불을 붙이는 동안 강찬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강찬 씨.”
이튼이 투박한 발음의 프랑스어로 강찬을 불렀다.
“우선 프랑스에서의 일은 사과합니다. 화해의 의미로 총리가 한국을 방한할 예정입니다. 경제와 문화 쪽에서 영국의 많은 양보가 있을 예정입니다.”
“대사님의 일로 신세 졌던 점은 저도 감사드립니다.”
강찬은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받았다.
이제 본론이 나올 차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튼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라노크도 재촉하지 않고 강찬도 급할 것이 없다.
긴 시간도 아니다.
1분쯤 분위기를 살피던 이튼이 시가를 돌려가며 재를 떨어낸 다음 입을 열었다.
“영국은 지충 충격기를 완성했습니다.”
덤덤한 음성이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노크가 신음처럼 한숨을 뱉어냈다.
“다 아는 이야기일 테니 돌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블랙헤드에서 빠진 두 개의 에너지를 세티늄과 데나다이트로 교체했고 두 번의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이게 뭐라는 거야?
정말 지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거야?
강찬은 전에 해저에서 일어났었다는 지진 보도를 떠올리고 잠시 라노크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러시아, 미국, 그리고 프랑스 정도가 이 사실에 대해 근접해서 알고 있고, 그 외의 나라들은 눈치만 챈 정도일 겁니다. 그런데 없어진 에너지 중 하나를 강찬 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어차피 이상한 이름을 가진 에너지로 교체했다는 거 아닌가?
강찬은 지루한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지층 충격기가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렵게 하고 돌리고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기계가 고장 났다는 말을 하는 거다.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본국, 미국의 동부, 러시아, 프랑스, 일본이 지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기가 막혀서 고개가 저어지는 설명이었다.
강찬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이 빠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그렇게 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거야?’ 하는 생각, ‘정말 많이 죽겠는데?’ 하는 생각이 순서대로 들었다.
강찬은 담배를 들며 슬쩍 준 시선 끝에서 라노크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