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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가고 싶은 거지?
아삭.
강대경이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무는 소리에 유혜숙이 시선을 돌렸다.
“너는 가고 싶은 거지?”
“예, 아버지.”
강대경의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 유혜숙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의도처럼 들렸다. 그래서 강찬은 곧바로 답을 했다.
“그런다고 해도 대학에 못 가게 되거나 그런 건 아니고?”
“확실한 답은 못 들었는데 두 분께 허락받게 되면 그다음에 의논해볼 생각이었어요.”
강대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할 수 있고?”
“예. 특별한 순간을 빼고는 평소에 연락하는 건 아무 문제 없다고 했구요.”
솔직히 부모에게 이렇게 허락을 받는다는 거,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 그냥 학교 가라면 갔고, 돈 내는 일은 당연히 말 못하는 삶이었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 안 하고 졸업과 동시에 아프리카로 향했겠나? 갑갑하기보다는 무언가 찡한 감동이 가슴에 가득했다.
“당신은 아무래도 대학이 마음에 걸려?”
질문을 받은 유혜숙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강대경과 강찬을 교대로 보았다.
“찬아. 아버지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니?”
강찬은 얌전한 얼굴로 강대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학에 가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놓을 것,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은 반드시 엄마와 통화하겠다고 약속하고. 어? 말하고 보니까 두 가지다?”
강대경이 억지로 웃으며 건넨 말이었다.
“어머니?”
강찬이 시선을 돌렸을 때 유혜숙은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자주도 운다. 정말 잘 운다. 그런데 유혜숙의 울음은 늘 가슴에 닿는다.
언젠가 유혜숙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울지 못했다면 지금쯤 강찬은 또 아프리카를 헤매고 있었을 거다. 가족의 사랑이, 부모가 주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 채로 말이다.
“아빠가 허락하셨잖아.”
무언가에 끌린 것처럼 강찬은 유혜숙에게 다가갔다.
“잘 다녀올게요.”
“그럼. 그래야지.”
유혜숙이 강찬의 등을 쓸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강한 사랑을 받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강대경이 강찬의 머리를 쓸고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사과 먹어, 아들.”
눈물도 제대로 훔치지 못한 유혜숙이 강찬이 들고 있는 사과를 보며 꺼내 든 말이었다.
이런 건 거절하기 어렵다.
강찬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열흘이면 바쁘네? 짐은? 어디에서 묵는데?”
손등으로 눈을 훔치기 무섭게 질문이 쏟아졌다.
“반찬도 좀 가져가야지. 고추장하고 김하고, 아! 젓갈도 좀 챙기고.”
“어머니. 그냥 몸만 가면 돼요. 기숙사 같은 곳이라 그런 거 못 가지고 갈 거예요.”
당장에라도 짐을 쌀 기세라 강찬이 서둘러 말렸다.
“그래도! 입맛이 없어지면 어떡해?”
이런 엄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다시 태어나서 가장 감사할 일은 누가 뭐래도 유혜숙을 어머니로 만난 일이었다.
“잘하고 올게요. 그리고 가봐서 괜찮으면 말씀드릴 테니까 소포로 보내주시면 되죠.”
“그래? 정말 괜찮겠어? 그럼 옷이라도 좀 사러 갈까?”
강찬이 먼저 웃었고, 강대경이 따라 웃었다.
“너 교육 끝나면 엄마랑 가서 프랑스 구경하고 오면 좋겠다.”
“그러시면 되겠네요!”
“아휴! 우리 아들 덕분에 프랑스 구경도 할 수 있겠네!”
“여보! 나랑 가는 거야!”
“당신이 못 가면 난 아들한테 표 구해 달라고 해서 혼자라도 다녀올 거야!”
“야! 해도 너무한다!”
강대경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유혜숙이 자연스럽게 끌렸다.
“아들, 얼른 사과 먹어.”
강찬은 얼른 강대경을 보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강대경은 감정이 복받치는 눈빛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확실히 다르다.
백 마디 말을 들은 것보다 진한 감동이 강찬의 가슴을 흔들었다.
놀랄 소식을 알렸는데 이후로 분위기는 더 훈훈해졌다.
어쩌면 느닷없이 뛰어 나가서 상처를 안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느니 제대로 교육을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고기를 또 굽겠다는 유혜숙을 말렸더니 대뜸 잡채를 하겠다고 나서서 강대경과 강찬은 연신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편안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TV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책상에 올려놓은 전화기가 강찬을 찾았다.
“여보세요?”
[“김형정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예. 지금 집입니다.”
[“삼성동에서 차 한잔 하셔도 됩니까? 나오실 수 있으면 석 선생에게도 전화하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강찬은 거실로 나와 외출 다녀오겠다고 말을 했다.
“대학 이야기랑 아예 하고 오려구요. 그래야 마음 편하게 프랑스를 다녀오죠.”
“그래, 아들. 그런데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제가 부탁드려서 답 듣고 올게요.”
유혜숙과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이 자꾸 순해진다. 안 된다고 하면 프랑스로 연수 안 가면 그만인 건데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참이다.
아파트 입구에 나서자 석강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먹었냐?”
“돼지고기 수육을 잔뜩 먹어줬소.”
이놈을 빨리 병원에 한번 넣어봐야 하는데.
삼성동까지 15분 거리다.
퇴근 시간이라 길이 좀 막혔는데 그렇더라도 지루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때 김형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찬 씨.”
김형정이 내민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자 전대극과 김태진이 강찬을 맞았다.
“석 선생!”
전대극이 석강호를 살뜰하게 챙겼다.
“피곤은 좀 풀렸어?”
“예.”
전대극은 조카를 바라보는 외삼촌? 혹은 믿는 대원을 바라보는 지휘관의 얼굴이었다.
다섯이서 차 마시고 간단한 안부를 물은 다음이었다.
“영결식은 다음 주 월요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김형정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외부 보도 없이 조용하게 치를 예정인데 대통령 무공훈장과 1계급 승진이 내려졌고, 이번에 희생된 대원들에게도 무공훈장 화랑장과 1계급 특진이 내렸습니다.”
“남은 가족들에 대한 보상은요?”
“국가 유공자로 지정하고 이번 희생을 위로하는 수준에서 위로금이 전해집니다.”
무언가 서운한 느낌이지만, 이런 건 규정이 있는 거라서 강찬이 따지기는 어려웠다.
“저는 열흘 뒤쯤에 프랑스로 6개월 연수를 다녀올까 해요.”
말을 하고 나서 강찬은 전대극이나 김형정, 심지어 김태진까지 사실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정보총국에서 언질이 있었습니다. 강찬 씨의 발전이 곧 대한민국의 커다란 힘이 될 거란 기대도 있고, 구심점이 필요한 특수팀을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김형정의 말끝에 전대극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다면 석 선생이 당분간 특수팀을 살펴주었으면 싶은데 어떨까?”
석강호가? 강찬이 돌아보았을 때 석강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현재 국가정보원 특별요원으로 되어 있어서 신분상 문제도 없고, 차동균이 돌아올 때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 들여다봐 주는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전대극은 석강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석 선생?”
좋아하며 반길 줄 알았던 석강호가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찬은 석강호의 반응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그게 대장이 없으면 어차피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그렇소. 구심점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옮겨지는 건 아니잖소? 더구나 프랑스, 중국, 북한까지 다녀온 애들이 이제 와 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닐 것 같고.”
“석 선생. 우리가 부탁하는 게 바로 그거요. 어렵겠지만 대원들이 자부심을 확고하게 세울 때까지만 중심에 서주시오. 갑자기 전 세계의 시선이 달려오는데 최 장군과 차동균까지 없어지니까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이 오히려 부관이요. 그런 건 우리가 아니라 함께 뛰었던 누군가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요.”
강찬을 힐끔 본 석강호가 심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면 대장 올 때까지 제가 오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소, 석 선생.”
전대극이 석강호의 손을 덥석 쥐었다.
강찬은 확실히 아프리카 때의 다예루와 지금의 석강호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아까의 심오한 표정? 그런 건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바로 다예루다.
“프랑스 가기 전에 혹시 필요한 건 없어?”
석강호와 이야기를 마친 전대극이 걱정을 던 듯한 표정으로 강찬을 보았다.
“어머니께서 대학 진학을 1년 미뤄도 괜찮은지 걱정하시는데요? 그거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무언가 대단한 걸 예상했었나?
강찬의 답에 전대극이 기가 막힌 웃음을 지었고, 김형정과 김태진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총리실에 부탁해서 조치하겠습니다.”
이로써 유혜숙의 고민이 풀리게 되었다.
“그나저나 위민국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나요?”
“아직 뒤를 봐주는 조직이나 개인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예 머리를 감추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쯧!
그 개새끼 모가지를 돌려놔야 맘 편히 프랑스에 갈 텐데…….
함께 앉았던 이들의 표정이 강찬과 다르지 않았다.
“최 장군이나 자네에게 면목이 없다.”
“대표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그때 위민국을 그냥 보내자고 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김태진은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아! 뒤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전대극이 나서서 위로해 주었지만, 김태진은 마음이 편치 않은 얼굴이었다.
“유전 개발 상담을 위한 러시아 대통령 방한, 그리고 영국의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부에서 할 일들이 남았는데 통화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일이 진행될 때마다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가 있나요?”
“유라시아철도가 아직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강찬 씨와 계속 상황을 주고받을 필요는 있지요.”
일이 진행되는 것을 듣는 것뿐이다.
남은 위험은 위민국 정도여서 김형정이 나서도 충분히 해결될 부분이었다.
“팀장님. 허하수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증거가 워낙 확실해서 다른 말을 못할 겁니다. 그 외에 허하수에게 내부 정보를 건네준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추가로 나오는 상황이라 제대로 처리될 겁니다.”
개새끼 모가지를 돌려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러나 백정도 아니고 그걸 또 뭐 일일이 챙겨가면서 모가지를 비틀겠나.
갑자기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느낌이었으나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다.
“가서 프랑스 국적 받고 그러면 안 돼.”
묵직하던 분위기가 전대극의 한마디 말로 기가 막힌 분위기로 대뜸 바뀌었다.
“예쁜 여자, 돈 준다고, 그런 거에 홀랑 넘어가서 6개월 뒤에 프랑스인이 되었네, 어쩌네 하고 나타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짐짓 엄하게 눈을 부라리는 데 진심인가 싶을 정도로 표정은 진지했다.
강찬이 픽 하고 웃자 함께 있던 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약속하고 가.”
그러나 그 웃음 속에서도 전대극은 꿋꿋했다.
진지한 표정과 말이 더 웃겼는데 대놓고 웃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전대극이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프랑스 가기 전에 정말 하나만 묻자. 너도 그렇고, 석 선생도 그렇고,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경험을 쌓은 거냐? 질문을 받으면 나 역시 모르는 게 좋다라고 하긴 하는데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김태진도 김형정도 눈과 귀를 강찬에게 집중하느라 분위기가 또 확 바뀌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이건 답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믿어준다고 해도 굳이 말할 이유도 없다. 어쩌면 지금 뱉은 말이 강찬이나 석강호에게 어떤 위험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실장님. 그건 그냥 끝까지 비밀로 해주시죠. 대신 절대로 프랑스 국적은 안 받을 테니까요.”
석강호의 굳은 표정을 본 전대극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펜션은 가평 읍내에서도 1시간여를 더 들어간 곳에 있었다.
‘경호 요원들이 고생 좀 하겠는데?’
장소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구불구불한 국도와 구도로를 이어 달리는 터라 경호하는 입장에서는 피가 마를 일이었다.
강찬이 보기에 앞에 가는 승용차 두 대와 뒤에 따르는 승합차, 승용차가 모두 경호 요원들이었다.
솔직히 트럭이 마주쳐 지날 때마다 강찬 역시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혹시 몰라서 발목에 권총을 지녔고, 무전기를 허리에 걸었지만, 리시버는 빼놓은 상태였다.
“가을이네.”
호텔과 집에만 있다가 나온 유혜숙의 감탄처럼 산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길가에 낙엽들이 수북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꼭 2시간 만에 예약한 펜션에 도착했다.
위민국의 위협만 없다면, 정말 마음 편하게 쉬고 갈 수 있을 만큼 한적하고 주변 경치가 좋았다.
강대경이 예약을 확인하는 동안 강찬과 유혜숙이 짐을 내렸고, 다음으로 셋이 지정된 객실로 짐을 옮겼다.
독립구조로 된 펜션이 모두 다섯 채였는데 주인이 알려준 곳은 왼쪽에서 두 번째였다.
하얀 외관의 목조 건물로 통유리로 된 넓은 거실과 방,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유리가 뚫린 지붕 아래로 다락방에 침대가 있는 구조였다.
냉장고에 음식 넣고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났을 때가 오후 2시였다.
빌어먹을 거실의 통유리만 아니면 정말 아늑할 텐데.
산 너머에서 저격하기 정말 좋은 구조였다.
강찬은 결국 무전기의 리시버를 귀에 걸었다.
치잇. “거실 맞은편 산은 어떻게 하지?”
치잇. “어제부터 군을 배치했습니다. 두 번 수색했고, 내일까지 산 전체를 감싸고 매복 훈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희승의 음성이 바로 들렸다.
염병할! 펜션 하루 오는데 애꿎은 군인들이 고생한다. 마음 같으면 죄 불러다가 고기나 같이 구워 먹으련만.
행여나 유혜숙이 알면 마음 불편할 것 같아서 강찬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거실 커튼을 좀 쳐놓을까?”
“지금은 괜찮아요. 나중에 밤에는 안이 들여다보이니까 그때 치지요.”
유혜숙 몰래 질문을 던졌던 강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밤이 되면 옆에 놀러 온 이들의 시선을 피해서라도 커튼을 쳐야 할 판이다.
“여보! 뭐 해! 밖에 나가보자!”
달칵.
“화장실이랑 정말 깨끗하게 해 놨네.”
“당신 혹시 화장실 청소하려고 그랬냐?”
“그냥 둘러본 거네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하아! 공기가 정말 좋다!”
유혜숙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며 감탄을 뱉었다.
옆에 놀러 온 듯한 아이 둘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제외하면 소음조차 별로 없었다.
“밤 따러 가보자. 이거, 모자 꼭 쓰라고 했고, 선글라스 착용하라고 했고. 먹을 만큼만 따라고 부탁하던데?”
산책로를 따라 산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강찬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유혜숙의 곁을 걸었다.
아직까지 감은 나쁘지 않았다.
“들어가지 말까?”
유혜숙이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요, 어머니. 밤 있다면서요? 거기 가봐요.”
요원들과 군인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이왕 나온 길이다. 그냥 돌아가기는 너무 서운해서 강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길을 걸었다.
숲을 따라 난 작은 길을 걷자 약간 넓은 공터가 나왔다.
“와!”
유혜숙의 탄성처럼 강대경도 탄성을 질렀고, 강찬도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나무 숲이다.
그것도 오르막에 나타난 평지처럼 되어 있어서 아래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밤나무만 대략 30그루 이상이 퍼져 있어서 바닥에 밤송이들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저런 걸 준비해 놨네.”
강대경이 가리킨 곳에 매미채와 장대들이 있었다.
“제가 할게요.”
“이런 건 아빠가 해야지.”
강대경이 밤나무 가지를 때리자 밤이 후두둑 떨어졌다.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밟고 안의 밤을 꺼냈다.
알이 정말 실하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유혜숙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이런 걸 욕심낼 거 뭐 있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양이 되자 세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울도 있나 본데요?”
“그러게?”
밤나무 숲을 지나자 내리막에 개울이 있고, 군데군데 돌무더기를 쌓아놔서 물을 잡아놓았다.
“애들 있는 집은 여름에 오면 정말 좋겠다.”
강대경과 유혜숙이 멀쩡한 손을 씻으며 좋아했다.
계곡을 지나 산책로를 타고 크게 돌자 처음 차를 댄 입구가 나왔다.
얼추 한 시간 반을 걸었는데 맑은 공기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좋아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밤 좀 따셨어요? 어? 왜 그것밖에 안 따셨어? 밤이 제법 있을 건데?”
맘씨 좋게 생긴 주인 여자가 강찬이 들고 있는 밤 주머니를 보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먹을 만큼만 따면 되지요.”
“그게 뭐예요? 이따 고기 구워 드실 때 좀 구웠다가 올라가는 길에 드시고 하면 좋지. 다른 분들은 너무 따가서 걱정이더니 이런 분들도 계시네. 그런데 누구예요? 동생?”
이건 장삿속으로 하는 말이다.
“둘이 닮은 걸 보니까 아주머니 동생분인가 보네요?”
“우리 아들이에요.”
“어이구! 젊은 분이 어떻게 저런 아들이 있어?”
연기자를 했으면 대상을 허리춤에 꿰찼을 주인 여자의 능청에 10분쯤 시간을 뺏겼다.
설마하니 저런 빤한 수에 넘어갈까?
“여보! 내가 많이 어려 보이나 봐?”
강찬은 조용하게 웃고 말았다.
좋았다. 행복해하는 유혜숙을 보는 것이.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강대경이 만든 닭 요리를 중심으로 저녁을 먹었으며, 셋이 앉아 맥주도 마셨다.
시간이 흐르고, 어둠이 깔리자 유혜숙은 강찬이 떠나는 것이 실감 나는 모양이었다.
“아들, 프랑스 가서도 꼭 전화해줘야 돼.”
“그럴게요,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찬이 손을 잡아 주었을 때 유혜숙은 우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