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71화 (17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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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우리는 괜찮아.

치킨 한 마리 시켜먹으려던 토요일이 엉망으로 지났다.

밤이 깊었다.

김형정이 퇴근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계속 사무실에 있기도 애매했다.

“호텔로 가볼게요.”

“그러시죠. 상황이 바뀌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무기는 어떻게 할까요?”

김형정은 잠시 멈칫한 후에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가정보원 신분도 있고. 필요하시면 가슴에 거는 가죽 띠를 드리겠습니다.”

강찬은 석강호를 보며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당연하게 알게 되고, 자칫 잘못하면 커피전문점에서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다.

총기가 자연스럽지 않은 한국에서 충분히 문제 될 소지가 많고, 다음으로 인터넷에 말이라도 돌면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허리는 눈에 띌 확률이 높습니다. 차라리 발목에 차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게 좋겠어요.”

김형정이 책상으로 움직여서 발목에 거는 권총 지갑을 가져왔다.

석강호와 둘이 허리에 걸었던 권총을 빼서 발목에 찼다. 총이 걸리는 반대쪽에 예비탄창을 두 개 걸었고, 소음기는 아예 반납했다.

“당분간 부모님은 호텔에서 묵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일주일가량은 출근도 위험합니다. 꼭 외출을 하셔야 한다면 저희가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딸내미 학교는 어떻게 하지요?”

“석 선생 사모님과 따님은 외국에 일주일가량 다녀오시면 어떻겠습니까? 현장학습으로 처리하고, 석 선생은 그동안 이 사무실로 나와서 일도 도와주시구요.”

석강호가 사무실의 일을 도와줄 게 뭐가 있겠나?

그래도 김형정의 배려가 나쁘지는 않았다.

“외국에서 경호는 괜찮을까요?”

“위민국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이곳보다야 나을 겁니다. CCTV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일주일이면 적당합니다.”

“여권이 없습니다.”

김형정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보자. 나도 두 분께 말씀드려 볼게. 호텔에서 저렇게 계신 것보다 차라리 외국에 계시는 게 나도 마음 편할 것 같다. 재단이나 아버지 회사에도 요원들이 있으니까 당장 운영에 지장도 없을 거고.”

“그럽시다. 그런데 워낙 놀라서 둘이서만 가겠다고 할지 그건 모르겠소.”

“일단 얘기나 해보지, 뭐.”

“담배 하나만 피우고 일어납시다.”

석강호가 담배를 집는 바람에 결국 셋 모두 담배를 입에 물었다.

“퇴근 못 하시는 거죠?”

“간이침대가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식은 커피와 담배가 긴 하루를 다독여 주는 느낌이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샌드위치 하나 먹었습니다.”

“아니, 그 맛있는 짬뽕을 놔두고 왜 그런 걸 잡숴요?”

석강호가 느닷없이 툴툴거렸다.

“정신도 없었고, 뭐 그래서요. 그나마 반쯤 먹다가 치웠는데, 석 선생, 짬뽕 하나 시켜드릴까요?”

“지금도 됩니까?”

저녁을 거르다시피 한 김형정과 늘 배고픈 석강호의 대화다. 강찬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답이 있었다.

“시키세요. 모처럼 야식 한 번 먹지요.”

강찬의 대답에 김형정이 전화를 들었다.

아파트 지하에서 요원이 둘이나 죽었는데 이쪽은 짬뽕을 시킨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와 대한민국의 서울이 당장은 다를 것이 없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는 게 맞다.

그래야 다음 전투에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위급한 순간에 생명을 좌지우지할 때가 많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짬뽕이 도착했다.

언제고 이놈의 중국집을 꼭 한 번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며 짬뽕을 먹었다.

“어후! 이건 정말 맛이 죽여!”

저놈은 내일 아침 호텔에서 밥을 먹을 때도 분명 저런 소릴 할 거다.

적당히 먹었고, 또 커피와 담배를 피웠다.

“이제 갈게요.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아니면 호텔에 같이 가시든지요?”

“상황을 봐야 하니까 여기가 편합니다.”

김형정을 남겨두고 강찬과 석강호는 삼성동 사무실을 나왔다.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요원들이 제공하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이건 방탄인가?”

자리에 앉은 석강호가 유리를 두들기자 조수석에 탄 요원이 “예.”하고 답을 했다.

“이거 아무래도 허하수 짓인 거 같지 않소?”

“나도 그래. 중국에서 허상수 체포되었다니까 뵈는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대신 위민국이 허하수의 말을 따를 이유는 없으니까 함부로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렇긴 하우.”

“잘 달래. 딸내미가 많이 놀랐을 텐데.”

“에이. 한창 공부에 재미 붙이고 있었는데.”

석강호의 이런 모습이 아직은 낯설어서 강찬은 픽 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남산 호텔이었다.

하기야 맞은 편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남산호텔만큼 요격에서 안전한 곳도 없다.

새벽이라 빠르게 호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고, 요원들이 건네준 카드키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왜 나만 방이 두 개야?”

“함께 주무시기 불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긴, 호텔이라 함께 자기는 좀 그렇다.

“잘 됐소. 딸 애랑 같이 자기 그랬는데 좀 있다가 나도 거기서 잡시다. 부모님 계신 방이 몇 호요?”

“1903호에 계십니다.”

요원이 얼른 대신 답을 했다.

“그럼 내가 1905호로 가면 되는 거네.”

석강호는 17층, 강찬은 19층이었다.

“좀 이따가 봅시다.”

함께 탔던 요원 두 명이 석강호를 따라 내렸다.

다시 19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앞의 공간에 정장 차림의 요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맞은 편 방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강찬은 키를 대고 1903호 방을 열었다.

“아들!”

뜻밖에도 강대경과 유혜숙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오네.”

유혜숙은 다가서는 강찬의 발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죠?”

“그래도 엄마 많이 좋아지지 않았냐?”

“이이는, 꼭!”

강대경도 많이 놀랐을 거다. 그런데도 강찬의 버팀목이 되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차 한잔 하실래요?”

“그러자. 엄마가 하도 떨어서 아까 녹차 한잔 마시긴 했는데 잠도 안 오고 하니까.”

“놔두세요. 제가 타면 되지요.”

강찬이 만류했으나 강대경이 굳이 일어났고, 유혜숙이 덩달아 따라 나서는 바람에 셋이서 차를 탔다.

셋이서 다같이 움직여 소파에 앉았다.

“어? 어머니는 잠이 오시는 모양인데요?”

“아들 보니까 마음이 놓이나 봐.”

“그럼 주무세요. 저는 바로 옆 방에서 잘 거예요.”

“방을 하나 더 얻었니?”

“혼자 쓰는 건 아니구요, 요원 한 명과 같이 있어야 한대요.”

이 상태에서 석강호와 마주쳐 봐라, 뭐라고 설명을 하겠나. 강찬은 혹시라도 강대경이 올까 봐 아예 요원이 있다고 답을 했다.

“구내 번호 누르시면 바로 옆 방에서 받아요. 날 밝으면 아침 같이 먹고, 저는 프랑스 대사관에 다녀올게요. 전화기도 찾아와야 하구요.”

강찬과 앉아있자 두 사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눈치였다.

“아버지.”

강대경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강찬을 보았다.

“아무래도 일주일가량은 호텔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대로 경호도 받아야 하구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러실 바엔 어머니와 두 분이서 프랑스 공트 자동차 방문 겸, 프랑스 여행 다녀오시면 어떠세요?”

“여행?”

“예. 일주일 정도 걸린다나 봐요. 좀 더 일찍 끝날 수도 있지만, 더 걸릴 수도 있다네요.”

강대경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유혜숙을 보았다.

“아들은?”

“저는 못 갈 것 같아요.”

유혜숙의 질문에 강찬이 답을 한 다음이었다.

“이번 일이 너를 노려서 그런 거냐?”

“꼭 그런 건 아닌가 봐요. 국가정보원 원장님과 간부들도 노렸다는 걸 보면 아마 유라시아철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요.”

강대경이 질문을 던졌고, 다시 강찬이 답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총을 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지 지난번 일보다는 실감이…….”

강대경이 힐끔 유혜숙의 눈치를 살폈다.

칼부림을 목격했던 용인 일을 유혜숙이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 모양이었다.

“지난번 일? 당신 이거 말고 뭐가 또 있었어?”

“왜 그 재단 사무실하고 우리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그때 당신, 지금보다 훨씬 놀랐었잖아?”

“으응. 그땐 눈앞에서 아들이 달려든 데다, 처음이니까 그랬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처럼 유혜숙이 몸서리를 쳤다.

“이제 좀 주무세요. 남은 이야기는 아침 먹으면서 하면 되죠.”

“그래! 피곤할 테니까 얼른 가서 자라. 그런데 여긴 안전한 거냐?”

“맞은 편 방에 경호 요원들이 있어요.”

“아까 총소리 났을 때 다친 분들은 없고?”

강찬은 찻잔을 옮기며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가벼운 부상을 당한 직원이 둘 있는데 다들 괜찮다네요.”

“다행이다.”

“예. 주무세요.‘

강찬은 답을 하고 방을 나왔다.

복도 끝에 있던 요원과 눈을 마주친 후, 옆방으로 들어섰다.

염병!

석강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하게 씻은 강찬은 침실로 들어가 빈 침대의 베개와 이불을 들고 나와 소파에 누웠다.

뭔 놈의 사건이 번호표를 받아서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터진다.

무언가 뒷덜미를 잡고 있는 것 같은 찜찜함이 없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침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창에 달린 물방울들이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품 한번 해주고, 몸을 일으켜 기지개 켜주고, 다음으로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거실 구석에 있는 책상의 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대경과 유혜숙은 좀 더 자게 두는 게 좋다.

강찬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마시고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다.

“어? 왜 거실에서 잤소?”

“그냥 여기가 편해서 그랬어.”

“내가 코 많이 골았소?”

“딱 안 죽일 만큼.”

석강호가 털털하게 웃고는 물을 마시고 역시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딸린 화장실도 있는데.

“커피나 시켜 먹읍시다.”

“그러자.”

석강호가 주문을 했고, 둘이서 바지와 셔츠차림에 이어 셋을 걸고서 소파에 앉았다.

“마누라랑 딸은 호주에 다녀와 보고 싶답디다. 지난번 일로 나라에서 보상여행을 보내주는 거라고 했소. 안 믿는 눈친데 확인할 길도 없고, 일단 돈 안 들고 외국 간다니까 모른 척합디다. 대장 부모님은 뭐라고 그러쇼?”

“어제 급하게 말씀드려서 아직 몰라. 마침 일요일이니까 그나마 여유가 좀 있잖냐. ”

띵동.

벨이 울렸다.

치잇. “커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무전이 함께 들렸다.

석강호가 유리 구멍으로 확인한 다음 문을 열었다.

스테인리스 병과 커피잔이다.

서빙 직원이 나가자 석강호가 커피를 따랐다.

치잇. “밖에 커피 마실 사람 있어?”

치잇. “여기 잔뜩 있습니다.”

치잇. “그럼 괜히 시켰다!”

강찬과의 대화를 호텔에 있는 모든 요원이 듣는다. 강찬의 마지막 말에 웃음소리가 묻어 있었다.

커피에 담배로 정신을 차리고 7시 30분쯤 각자 방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자 강대경이 문을 열어주었다.

“편히 주무셨어요?”

“어휴. 못 잘 것 같더니 그래도 푹 잤다. 엄마는 샤워 중이야. 넌 좀 잤니?”

“예.”

역시나 보도 TV를 틀어놓은 강대경과 둘이 소파에 앉았다.

“엄마는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 너도 남아 있다고 하고, 이거저거 걸리는 모양이다.”

“그러시면 함께 계시는 걸로 해요. 호텔 생활이 불편해서 그렇지, 어머니가 안 내키시는 여행을 억지로 가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되겠니?”

강대경과 이야기를 나눌 때 유혜숙이 꺼칠한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

“좀 주무셨어요?”

“응, 아들. 자긴 잤는데 몸이 무거워.”

“비가 와서 그럴 거예요. 아침 맛있는 거 먹고, 하루쯤 푹 쉬세요.”

“여기서?”

“셋이서 외국 호텔에 왔다고 생각하세요.”

유혜숙은 강찬의 넉살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 아침으로 맛있는 거 시켜 먹어요. 그리고 제가 프랑스 대사 만나고 오는 동안 사우나 다녀오세요. 피트니스 클럽이 잘 되어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래! 그거 괜찮다! 아빠도 슬슬 운동해볼까 했었는데.”

강대경이 방에 비치된 안내서를 들었다.

“여보! 우리 아침은 모처럼 아메리칸 스타일로 해볼까? 토스트에 주스, 커피, 어때?”

“아침 뷔페도 있어요. 내려가시면 돼요.”

“비도 오는데 방에서 한번 시켜 먹자. 아빠 전에 출장 다니면서 혼자 호텔에서 토스트 먹을 때마다 엄마나 너도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적 많았거든.”

강대경의 강력한 바람에 따라 결국 방에서 아메리칸 스타일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잠시 후, 주문한 식사가 도착했다.

거실 창으로 가을비를 느끼면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유혜숙도 마음이 풀리는 눈치였다. 게다가 강대경은 정말 휴가를 받은 사람처럼 피트니스 센터와 사우나를 함께 가자고 졸랐다.

놀란 유혜숙을 위로하는 한편, 강찬을 편하게 해주려는 노력이었다.

“너는 프랑스대사님 만나고 온다고 했지?”

“예.”

“그럼 얼른 가봐라. 아빠랑 엄마는 TV 좀 보다가 운동하러 가마.”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강대경이 재촉해서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걱정하는 유혜숙을 몇 차례나 다독인 다음이었다.

달칵.

강찬이 나간 다음이다.

소파에 앉은 유혜숙을 위해 강대경은 녹차를 타서 가져다주었다.

“많이 걱정돼?”

“그럼, 여보. 어제 봤잖아. 절룩이면서 차 옆을 달리는 걸 보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았어.”

“그래서 그렇게 밤새 뒤척였구나?”

“당신도 못 잤어?”

“나도 마찬가지야.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편하게 잠이 오겠냐?”

유혜숙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강대경을 보았다.

“지난번에 약속했잖아? 아들이 커가는 걸 지켜보기로,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을 인정하기로 했잖아.”

강대경이 유혜숙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억지로라도 재밌게 지내자. 우리가 그래야 저녁에 돌아온 찬이 마음이 좀 더 편할 거야. 응?”

“고마워, 여보.”

“뭐가?”

“조바심내는 나 이해해 주고, 평범하지 않은 아들 이해해 줘서. 당신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 내가 너무 투정부리나 봐. 미안하고, 고마워, 여보.”

강대경은 유혜숙의 손을 꼭 쥔 채로 어깨를 감싸 주었다.

***

석강호는 항상 빨랐다.

강찬이 옆 방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커피를 따라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서 오쇼. 내가 커피 따끈하게 데워놨소.”

오전이 너무 평화롭게 느껴져서 이 정도면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커피를 마신 강찬은 요원에게 무전으로 전화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호텔의 유선 전화로 라노크를 부르기 껄끄러워서였다.

전화를 걸자 라노크는 곧바로 남산 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 시간은 벌었다.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방의 전화가 울려서 강찬이 받았다.

[“대사님이 도착하셨습니다. 1810호로 오시면 됩니다.”]

“바로 갈게.”

강찬이 전화기를 놓고 몸을 일으키자 석강호가 말을 건넸다.

“전화기 좀 꼭 찾아오쇼.”

“안 되면 하나 사고 말자.”

둘 다 전화가 없어서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18층으로 한 층 내려가자 엘리베이터 앞에 기다리던 프랑스 요원이 강찬을 안내했다.

이게 호텔에 있는 건지, 정보국 건물에 들어와 있는 건지 헛갈릴 정도다.

“강찬 씨.”

그러고 보니 중국 작전 이후로 라노크와 처음 만나는 거다. 프랑스식 인사를 마친 라노크는 강찬을 소파로 안내했다.

처음 보는 보좌관이 차와 담배, 시가를 준비해 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강찬 씨. 우리 정보국은 이제 겨우 정리가 되었습니다. 중국은 지난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싸웠던 만큼 정보 쪽이 무척이나 발달해 있지요.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도 적지 않은 숫자가 활동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있었습니다.”

차를 따라주며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건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범이 정보국의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아직 위태롭고 기반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완벽하게 권력을 잡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연한 말이어서 강찬은 라노크가 권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라노크는 시가를 들었고, 강찬은 담배를 물었다.

아군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완벽하게 믿을 수 있고, 강력한 힘을 가진 아군.

“강찬 씨. 이번 사건에서 한 걸음 빠지는 건 어떻습니까?”

담배에 불을 붙인 강찬은 잠자코 라노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정도 위협은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잘 해결할 것입니다. 이럴 때 강찬 씨는 한 걸음 물러나서 연수를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연수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각국의 정보국을 돌아보십시오. 독일, 스위스,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앞으로 강찬 씨가 살아갈 미래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 기간에 만나는 이들 또한 가벼운 사람이 없지요.”

이런 게 필요할까?

강찬은 아무런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을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입니다.”

국가정보원을 위해서 일하라는 건가?

두 번째 제안도 그다지 마음에 담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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