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59화 (15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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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강해질 거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강찬은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건 비겁하다.

당장 힘이 없다고 해서, 자신이 없다고 해서 일진에게 고개 숙이는 꼴과 다르지 않은 거다.

라노크와 의논하는 것이 일진 문제를 선생님과 의논하는 것 같다고 여기는 건가? 그래서 허극이 앞에서는 “선생님, 주의하겠습니다.” 한 다음에, 뒤에서 주먹질할 것을 두려워하는 꼴이다.

황기현의 입장이 있고, 고건우의 희생이 있다면, 강찬의 판단도 있는 거다.

사과를 하라고?

안 그러면 경제조치에 누구를 바꿔?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의 특수팀이 출발했을 때 어쩌지 못하고 전화를 했던 놈이 뒷구멍에서 비겁한 놈과 손을 잡고 주접을 떠는데 그런 놈에게 사과하란다면?

‘내 방식대로 간다.’

처음 학교에 나가서 이호준을 만나러 갈 때의 심정이었다. 말리던 선생 앞에서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사과?

마음을 굳힌 강찬이 숨을 조절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렸다.

“스미든인데?”

석강호가 힐끔 보는 앞에서 강찬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장. 저녁 먹어요.”]

오늘 저녁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어수선한데 이 새끼랑 저녁을…….

[“오늘 일부러 시간 낸 거예요.”]

“어디냐?”

[“홍대 앞이에요.”]

말투를 바꿔 줄 필요가 있었다.

강찬은 석강호에게 어떻게 할 건지를 물어본 다음, 약속 장소를 정했다.

석강호는 내일 일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어떤 결정도 따르겠다는 태도, 이놈은 이런 게 정말 좋다.

***

“압박이 통한 것 같습니다.”

허하수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위치라는 게 있어. 지난 세월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거든. 도대체 중국에 대항하고 미국에 맞서서 뭘 어쩌자는 건지, 쯧쯧쯧. 이제 그것도 끝난 모양이다만, 방심은 금물이다. 문재현에 혹해서 충성하는 놈들이 적지 않아.”

“필요한 조치는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가 한평생을 바쳐 봉사한 나라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결국 위험에 빠지는 꼴을 보다니,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심지어 양진우 같은 소중한 인물을 티끌 같은 흠집을 핑계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죽였다! 기가 찰 노릇이지.”

“유라시아 철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허흠. 그런 거겠지. 그런 것도 경험이 없는 놈들은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해. 연륜 있는 이들을 다 제외시켜 놓고 무슨? 그래, 그 아이를 직접 본 느낌은 어땠나?”

답도 하기 전에 허창선이 인상을 찌푸렸다.

“눈빛에 남다른 구석은 있었지만, 그냥 어린놈이었습니다. 라노크나 러시아에서 온 놈을 제가 만날까 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꼴도 그렇고.”

“공을 탐하는 놈이다?”

“어린 녀석의 한계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될 거다. 숨죽이고 있다가 단번에 국가정보원을 장악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허창선이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어느 분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 사람아. 그래도 피붙이가 가 있어야 믿기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소파에 앉았던 허창선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로 상체를 꾸벅 숙였다.

“어린놈의 반응이 궁금하군. 사과를 했는데도 원장이 바뀌면 뭐라고 할 건지. 혹시 우리가 모르거나 빠트린 구석이 있는지 경계를 늦춰선 안 돼. 어떻게 고등학생 놈이 단숨에 라노크라는 거물과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급하고. 우리도 배울 건 배워야지.”

허창선이 답을 대신해 짧게 고개를 숙인 다음이었다.

“원장이 우리 사람이 되면 그 어린놈의 자료를 볼 수 있겠지. 라노크도 유라시아철도를 위해 우리와 손을 잡게 될 거다. 이럴 때 든든하게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

허하수가 버릇처럼 부족한 머리칼을 쓸었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는! 문재현이 준비했다고 보기에도 그렇고. 도대체 정체가 뭔지!”

짜증 섞인 눈초리로 고개를 저어댄 허하수가 고갯짓을 했다.

“그럼, 저는 물러가 있겠습니다.”

“내일이다. 내일 오후에 발표가 있을 거야. 비상조치가 발표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날을 바짝 세우고 있어야 한다. 따르는 사람들 단도리 잘하고.”

“염려 놓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허창선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섰다.

***

모처럼 스미든과 밥을 먹으러 움직인 길이다.

놈도 외롭게 지낼 거라는 석강호의 말과 모처럼 시간을 냈다는 스미든의 말에 홍대까지 갔으나 강찬은 입맛을 다시며 화를 누르고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곳이니까 당연하게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 건 알겠다. 하지만 강찬과 약속한 장소에 그것도 여자들만 넷을 끌고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후! 저걸?”

“빨리 밥 먹고 가자.”

불끈거리는 석강호를 달랜 강찬은 스미든이 가자는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식을 이태리식으로 만들어 파는 식당이었다.

“인사하세요! 여기는…….”

네 명의 이름을 쭉 들었는데 관심도 없었고, 기억할 이유도 없어서 강찬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체면만 세워 줄 참이다.

눈 잃고, 근력 잃은 놈에게 저런 재미도 없으면 남은 인생이 너무 불쌍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여자들 끌고 왔으니, 그냥 용 한번 해라.

속없는 놈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한 잘못도 있는 거니까 얼른 밥만 먹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뭘 시킬까요?”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스미든과 네 명의 여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래. 그냥 재미있게나 살아라.’

와인을 시켜서 한 잔씩 따랐고 음식이 나왔다.

스미든을 중심으로 네 명의 여자가 어딘가 부족한 듯한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가 지랄이라 그렇지,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끝까지 스미든이 왜 이 자리에 강찬을 불렀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식사가 끝났다.

“스미든. 다예랑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 테니까 천천히 먹고 가라. 지금 건 내가 계산하고 간다.”

“바빴어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요!”

강찬은 확 치밀어 오른 화를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원래 저렇게 속이 없던 놈 맞다!

허극을 두들기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얼굴 한번 보려던 것도 있으니까.

“대장. 사실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조금 뒤에 올 건데 정말 시간이 안 돼요?”

“스미든. 오늘은 여기까지.”

“그래요.”

여자들이 강찬과 스미든의 눈치를 살폈다.

적당하게 눈인사를 마친 강찬은 석강호와 함께 식당을 나섰다.

“그 새끼, 전혀 변함이 없소.”

“원래 저랬던 놈이잖냐.”

웬만하면 커피나 마시고 들어가겠지만, 저녁을 먹었을 뿐인데 지치는 느낌이었다.

“내일은 1시까지 아파트 앞에 차 대겠소. 같이 가는 걸로 합시다. 종일이랑 로비 라운지에 있을 거요.”

“알았다.”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아파트에 도착하는데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쉬쇼. 너무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어요.”

강찬은 차에서 내려 지붕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골치 아픈 거 없다.

이미 결정한 일이다.

뒤처리가 문제이긴 한데, 그거야 닥쳐서 걱정할 문제인 거지, 미리부터 고민할 일은 아닌 거다.

집으로 들어온 강찬은 간단하게 씻고, 거실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거짓말처럼 전화 한 통 없었는데 대신 유혜숙의 전화가 참 많이 울렸다.

***

변함없이 운동, 식사, 배웅을 마친 강찬은 거실에 있었다. 뭐라고 해도 하루하루가 훌쩍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좋아!”

어제 왜 그렇게 맥이 빠졌던 건가 싶을 만큼 기운이 올라왔다.

그런데 1시까지 뭘 하지?

딱히 인터넷 검색할 것도 없고, TV의 보도 뉴스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럴 땐 역시 석강호다.

같이 차 한잔 마시고 점심 먹은 다음에 남산호텔로 가면 시간도 딱 맞는다.

강찬이 전화기를 가지러 방으로 향할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려서 웃음이 풀썩 나왔다.

심심하겠지!

그런데 막상 전화를 들었을 때 라노크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여보세요?”

[“강찬 씨. 통화 괜찮습니까?”]

“그럼요. 무슨 일이세요?”

[“오늘 일이 일찍 끝났습니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함께 점심 하는 건 어떤가 해서 전화했습니다.”]

“좋지요. 어디로 갈까요?”

[“대사관이 좋겠습니다. 안전하게 먹고 싶으니까요.”]

이런 농담을 다 하나?

[“괜찮다면 지금 와 주겠습니까?”]

“그러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찬은 옷을 갈아입고, 아파트를 빠져나오며 석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텔로 바로 오라는 내용을 알려주는 사이, 택시가 앞에 섰다.

아직 김형정의 전화는 없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속이 시끄럽긴 할 거다.

물론 결과를 알게 되면 정신이 훌쩍 빠질 거고.

그나마 한가한 시간이라 그리 막히지 않고 대사관에 도착했다.

라파엘이 세련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라노크가 곧바로 다가와 강찬을 맞았다.

“강찬 씨.”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강찬을 보고 있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양판(Yang Fan), 이쪽이 양판 씨가 만나고 싶었던 강찬 씨입니다.”

“양판입니다.”

“강찬입니다.”

딱딱하지도, 능숙하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의 불어였다.

30대 중후반? 속을 알 수 없는 눈빛과 좁은 볼이 인상적이었다.

강찬은 우선 라노크의 권유대로 탁자에 앉았다.

“강찬 씨. 양판은 중국정보국 소속입니다.”

라노크가 차를 따라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자, 그럼 점심을 먹기 전에 일을 처리해 볼까요?”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낸 라노크가 담배를 권했다.

양판은 강찬에게 먼저 담배를 권한 다음,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강찬 씨. 쉬커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한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뜻밖의 말에 강찬은 불을 붙이다 말고 양판을 날카롭게 보았다.

“대사님께서 이해를 해주신 덕분에 다행히 쉬커가 두 번째 실수를 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강찬 씨는 오늘 쉬커를 만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라노크도, 양판도 허극이 요구한 사항을 모두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숨길 것도 없었다.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강찬의 답을 듣는 순간에 라노크가 서양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고, 양판은 겨우 알아볼 만큼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쉬커는 대사님의 뜻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사람을 앉혀놓고 바보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강찬의 눈빛이 변하자 곧바로 라노크가 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강찬 씨. 쉬커가 보고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작전을 감행한 점, 그리고도 정보국의 특성을 무시한 채, 한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양판과 논의했습니다. 앞으로 사과와 보상 문제는 양판이 담당하게 될 것이고, 쉬커의 처리는 강찬 씨가 하려던 방법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신이 얼떨떨한 말이었다.

물론 별로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지만, 어제 끙끙대며 결론을 낸 것이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폴짝거린 원숭이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구렁이는 무섭다.

한편으로 한국 국가정보원은 아직 구렁이의 진짜 능력을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찬 씨. 중국 정보국은 라노크 대사의 중재를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혹시 언짢은 일이 생긴다면, 대사님이나 혹은 제게 직접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우리 둘이 통화할 때는 한국말을 써도 좋습니다.”

“한국말을 할 줄 아시나요?”

“제 이름이 한국식으로 양범이란 것도 압니다.”

라노크가 “양범?” 하고 발음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식사를 할까요?”

강찬과 양범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곧바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제는 평범했다.

언젠가 로리암의 기지에서 루드비히와 반트 등이 모여서 식사할 때처럼 요즘 재미있는 영화, 그리고 가족 이야기 등을 나눴다.

스스럼없이 대하기는 하지만, 양판은 라노크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세계는 뭔가 오묘한 맛이 있다.

그저 마주앉아 차 마시고, 밥 먹고, 전화로 일을 해결한다. 마치 깡패들이 살아가는 밤의 세계처럼 뒤편에서 모든 것을 조절하지만, 기사에 나오거나 알려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와인 한 잔씩을 곁들인 식사가 2시간에 걸쳐 끝났다.

양범은 라노크와 함께 한 식사에 크게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직원들이 서둘러서 그릇들을 치우고, 커피와 재떨이를 준비해 준 다음이다.

“강찬 씨. 호텔에 굳이 갈 것은 없습니다. 다만, 쉬커의 최후를 직접 보겠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살벌한 제안을 양범은 커피에 설탕을 넣겠냐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대사님께서 중재해 주신 일에 제가 확인하겠다면 도리가 아닙니다. 다만, 한국에 압박을 가하려던 비겁한 모습이 있으니 제 대신 다른 직원이 가서 확인했으면 싶습니다.”

양범이 기대했던 대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속담에 독을 먹으면 접시까지 먹어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샨 까오, 황디  위엔(shan gao, huang di yuan, 山高, 皇帝遠)이란 말도 있지요.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까지! 그리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는 뜻입니다. 중국 정보국은 라노크 대사의 중재로 강찬 씨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직원을 중국 대사관으로 보내주십시오. 양판을 찾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양범은 곧바로 표정을 바꿔서 강찬의 뜻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뭔가 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묻기는 어렵다.

이런 건 나중에 라노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이다.

“지금 보내면 되겠습니까?”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강찬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기를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강찬 씨. 김형정입니다.”]

풀이 죽은 음성이었다.

“팀장님. 지금 중국 대사관으로 가셔서 양판 씨를 찾으세요. 나머지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있고, 곧바로 김형정이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하는 답이 있었다.

“국가정보원의 직원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신뢰하는 분입니다.”

양범이 알겠다는 투로 담배를 들어 강찬에게 권했다.

이 새끼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막말로 부잣집 다른 아들이 나와서 제 형을 죽이겠다고 약속하고, 기분까지 풀어주려 하는 거다.

강찬은 두말하지 않고 담배를 받았고, 함께 불을 붙였다.

“대사님. 강찬 씨. 그럼 전 이만 손님을 맞으러 가봐야겠습니다. 깨끗하게 마무리를 할 테니, 프랑스와 중국, 그리고 한국의 관계도 그만큼 원만하게 흐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꽂아 넣은 후에 양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함께 나온 후, 양범이 먼저 출발했고, 강찬은 라노크와 함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은 라노크는 강찬의 시선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쉬커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강찬 씨도 대단합니다.”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기대앉은 라노크가 신기하다는 투로 강찬을 보며 건넨 말이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기회에 강찬 씨가 프랑스로 귀화하지는 않을까 기대도 했었습니다.”

“쉬커가 비밀리에 압력을 행사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강찬은 정말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을 먼저 물었다.

“정보국은 몇 가지 철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실리와 나는 서로 암살을 계획할지언정, 납치를 하지는 않습니다. 또 사과와 배상을 하기로 했으면 해당 과정이 끝나기 전에 다른 수를 쓰지는 않지요.”

라노크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린 후 말을 이었다.

“쉬커의 행동에 바실리와 루드비히가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쉽게 바뀌지 않지요. 제가 중국에 요구한 조건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쉬커군요.”

라노크가 고개를 까닥이며 강찬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쳐도 중국이 너무 많이 양보하는 거 같은데요?”

“정적을 제거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지요. 그리고 강찬 씨의 능력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찬은 고개를 갸웃하며 라노크를 보았다.

특수팀을 이끌고 중국을 쳐들어갈 것도 아니고, 또 그런다고 겁낼 놈들도 아닌 거다.

“강찬 씨. 당분간은 내가 공식적으로 강찬 씨의 후견인으로 자처하겠습니다. 아직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만간 모든 것이 밝혀질 겁니다. 내가 후견인으로 나서도 되겠습니까?”

라노크가 처음 보는 눈빛을 강찬에게 보이고 있었다.

믿음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빙그레.

입과 눈을 길게 늘이며 라노크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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