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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보고 배운다.
전화 몇 통 하면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 건물을 언제 보러 갈 건지를 확인하기 위한 미쉘의 전화가 있었는데 강찬은 일단 뒤로 미뤘다.
시계를 보았을 때 11시 20분이었다.
이 정도면 반응이 있어야 한다.
웃기는 것은 안느와 라파엘이다.
두 사람은 강찬의 모습을 보며 완벽하게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서울호텔을 뒤질 걸 그랬나?
김형정에게 부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섣부른 행동이 라노크의 생사를 결정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똑똑똑.
강찬이 책상에 올린 손으로 이마를 짚어가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노크가 들렸다.
시선을 드는 순간 자비에의 모습이 보였고, 뒤따라 최종일과 우희승, 이두희가 들어왔다.
피식.
최종일은 몰라도 우희승은 분명 왼쪽 볼이 부어 있었다.
대신 자비에는 얼굴과 셔츠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의자 좀.”
라파엘이 책상 앞으로 의자를 놓아주었다.
자비에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강찬의 맞은 편에 자리했다.
“이렇게 나오는 건 우리 조직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조직 전체가 나서면 적어도 당신 주변은 무사하지 못할 거란 말입니다!”
“자비에. 그 잘난 조직 이야기는 그만하자.”
강찬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자비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네가 미국의 요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허하수에게서 군사 기밀을 얻으려 한다는 것도.”
“흥! 영화를 너무 보셨군.”
강찬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자비에. 내가 부탁할 건 꼭 한 가지다. 허하수와 연결된 중국 쪽이든, 미국정보국이든, 상관없으니까 라노크 대사를 찾아오는 일.”
“나는 라노크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찾아내.”
강찬이 나직하게 건넨 말에 자비에가 피식 웃었다.
“이런 건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정보전은 함부로 끌어다가 협박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겁니다.”
“지금껏 어떻게 했는지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라노크 대사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 집무실로 돌아오는 것, 그것뿐이다.”
강찬은 매서운 눈빛으로 자비에를 노려보았다.
“내가 가장 못 견디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점잖게 협조를 요청할 때 들어줬으면 좋겠다, 자비에. 이 시간이 지나서 내 인내심이 무너지면 작전을 시작할 거다. 중국? 미국? 영국? 어디든 이 일에 끼어든 놈들은 모조리 응징을 가해주마.”
“당신은 아직 그럴 힘이 없습니다.”
강찬은 갑자기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려서 강찬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알로?”
[“중국의 여섯 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암호로 변환해서 대사관에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찬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갓 오브 블랙필드. 만약 러시아와 독일의 특수군을 중국으로 파견하면 누구도 막지 못할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나직한 음성에 걸맞는 경고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정보총국에서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갓 오브 블랙필드의 판단이 특수팀을 파견해야 라노크 대사를 구할 수 있다면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결정되면 전화 드리죠.”
전화를 내려놓은 강찬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더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하다.
때린다고 했으면 때리는 게 맞는 거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책상에 올려두었던 강찬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강찬 씨. 북한이 전군 전투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일본 자위대는 1급 경계령이 내려졌구요. 원장님께서 강찬 씨의 의사를 알고 싶어 합니다.”]
“팀장님.”
[“말씀하십시오, 강찬 씨.”]
“한번 얻어맞을 때 참으면, 상대는 반드시 또 주먹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때리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그걸 당연하게 여기죠. 저는 그런 일을 없애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그게 제 뜻입니다.”
김형정과 전화 통화를 끝냈을 때 요원 한 명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중국 지도 위에 붉은색 점 여섯 개가 표시되었고, 각 지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강찬이 자비에를 향해 눈만 위로 치켜떴다.
“중국의 대사와 허하수가 참석한 조찬을 마친 이후에 대사님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허하수는 너에게 군사기밀을 전하려 했던 놈이고.”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말을 하던 강찬은 전화기를 들었다.
“알로?”
[“갓 오브 블랙필드와 통화를 요청합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영국의 이튼입니다.”]
영국이라?
그렇지 않아도 내내 신경이 거슬렸던 놈들이다.
[“갓 오브 블랙필드입니까?”]
“맞아.”
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나직한 한숨이 들려왔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라노크에게 중재를 요청했었지요. 당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도 절박합니다. 우리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선제공격하려던 영국이고, 아직 정식 인사가 있기 전이어서 함부로 손을 내밀기는 곤란했다.
[“우선 SAS와 SBS의 전원 비상령을 내리고, 그 지휘권을 갓 오브 블랙필드에게 드리겠습니다.”]
“부담스러워. 그건 나중에 의논하기로 하지.”
[“일단 준비는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정보를 얻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락드리지요.”]
강찬과 통화가 이루어진 것에 만족한 느낌을 전하며 통화가 끝났다.
거만하게 피를 닦던 자비에가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는 더 망설일 것이 없는 거다.
강찬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시선을 돌려 라파엘을 시작으로 최종일, 석강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느를 보았다.
이 결정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들겨 맞으며 지낼 수는 없다.
골프장에서의 테러, 발표회장의 테러가 있은지 불과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 라노크가 납치됐다.
강찬은 단호한 표정으로 라파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실리를 연결해 줘.”
라파엘이 빠르게 단축 번호를 눌러주었다.
두루루루.
[“강찬. 바실리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는 밤을 꼴딱 새운 거다.
“바실리. 정보국을 통해 알려줄 곳에 중국의 SW가 있다. 전원 사살 부탁한다.”
[“후-우.”]
크고 기다란 숨소리가 들렸다.
[“이건 곤란해.”]
“그렇다면 영국과 의논하지. 이튼은 바로 출발하겠다고 하던데?”
[“이튼? 그 더러운 영국놈과 통화했었나? 그놈의 조건을 함부로 받아들여선 안 돼!”]
“결정은 내가 해, 바실리. 그러니 답을 먼저 줘.”
[“하아! 알았다. 바로 움직이겠다.”]
“결과를 기다리지.”
전화의 연결 버튼을 누른 강찬은 다시 라파엘에게 루드비히의 연결을 부탁했다.
두루루루.
[“루드비히요, 강찬 씨.”]
“제가 보내드릴 중국 지역에 SW가 대기 중입니다. 전원 사살을 부탁합니다.”
[“흐-으음.”]
반응은 비슷했다.
루드비히가 마지막에 침을 삼키는 소리를 붙인 것만 달랐다.
[“강찬 씨, 따른다고는 했지만, 이 부분은 정말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맞습니다.”]
루드비히의 마음이 변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염려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러시아가 동의했고, 영국도 참가의사를 밝혔습니다. 루드비히. 이 상황에서 물러나면 내가 망신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대사님을 영영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이 연락을 했습니까?”]
“이튼이라고 하더군요.”
[“교활한 인간이 또 잔꾀를 부리려는 거군요. 후우! 알겠습니다. 강찬 씨의 뜻을 받아드리지요. 부디 신의 가호가 이번 작전에 함께하기를 빌겠습니다.”]
강찬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누를 때 자비에는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김형정입니다.”]
“팀장님. 국가정보원으로 중국의 지역을 보내드릴 겁니다. 프랑스, 러시아, 독일과 합동작전입니다. 특수팀을 그곳으로 보내주세요. 목표는 중국 특수팀 SW 전원 사살입니다.”
한숨이 아니라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프랑스 특수팀이 도착할 시간을 알려드릴 테니 합류해서 이동하는 걸로 하지요.”
[“우선 보고하겠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러시아, 독일과 합동작전이 맞습니까?”]
“예. 이미 출발한 나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요청만 한다면 바로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감정을 억지로 자제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린 후에 전화가 끊겼다.
강찬은 라파엘을 보았다.
“정보총국.”
안느의 긴장한 표정 앞에서 라파엘이 전화를 연결했다.
[“말씀하십시오.”]
“러시아, 독일에 SW가 있는 지역의 정보를 나눠서 보내주세요. 그리고 나머지 한곳을 정해 외인 특수팀이 공격합니다. 출발해서 오산 공항에 도착할 때 대한민국의 특수팀과 합류하면 됩니다.”
[“승인 신청을 하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강찬이 전화를 끊은 다음 등받이에 의자를 기댔다.
내 사람을 건드리면 그 상대방이 누구든, 넌덜머리가 나고, 소름이 끼쳐서라도 절대로 강찬의 주변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줄 결심이었다.
강찬은 팔을 뻗어 담배를 집었다.
찰칵.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일 때 안느가 일어나 불편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뭐지? 왜 그러지?
책상으로 다가온 안느는 얌전한 소녀처럼 차를 따랐다.
강찬은 그녀의 눈에 담긴 신뢰를 보았다.
‘잘 될 거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안느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전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강찬이 담배 연기를 뿜을 때 자비에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늦었어, 자비에. 이미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네가 은어를 이용해 내용을 전하면 애꿎은 아군만 희생돼. 다시 말하지만, 이 작전에도 불구하고, 라노크 대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영국과 손을 잡아서라도 미국을 응징할 거다. 그러니 얌전히 대사님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려.”
“그렇다면 날 왜 이 자리에 계속 두는 겁니까?”
강찬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비에를 보았다.
“넌 대한민국의 군사 정보를 빼돌리려던 스파이로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체포한 놈이야.”
자비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미국의 스파이를 대한민국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거냐? 까불지 마.”
“특수부대를 움직이는 것과 국제 정세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넌 군사기밀을 빼내려던 스파이야.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건 변함이 없어.”
강찬은 책상에 팔을 걸친 채로 자비에를 보았다.
“마음 놓고 테러를 해도 얌전히 당하기만 하고, 너 같은 놈이 군사기밀을 빼가도 체포하지 못할 거라고? 자비에. 헛된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강찬이 담배를 재떨이에 끈 후,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강찬은 자비에를 노려본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외인부대 특수팀 출발했습니다. 12시간 후에 오산에 도착합니다. 그 외에 독일, 러시아의 특수팀이 출발했습니다. 갓 오브 블랙필드. 참고로 중국은 전군 비상령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하실 셈입니까?”]
강찬은 자비에를 보고 피식 웃었다.
“프랑스의 요인이 납치된 거다. 프랑스가 빠지고 싶다면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왜 내 말에 독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특수팀이 움직이는지 정도는 계산해 두는 것이 좋겠다. 오늘의 정보총국은 약간 실망스러워.”
[“참고 자료를 말씀드렸을 뿐, 특수팀은 출발했습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고마워.”
말투를 바꾼 강찬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하게 해주시오!”
“시끄러워.”
“이대로 나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은 불바다가 된다구요!”
강찬이 고개를 비틀며 노려보자 자비에가 움찔했다.
“불바다? 그런데 이 개새끼가?”
권총으로 이마를 쏴 버리고 싶은 것을 강찬이 억지로 참고 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와서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보세요?”
[“강찬 씨. 정보총국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원장님의 재가도 떨어졌구요. 오산에서 합류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돌이킬 수도, 돌이켜서도 안 되는 일이 돼 버렸다.
때릴 때는 그냥 때리고 보는 거다.
뒤 계산하고, 나중 생각하면 계속 얻어맞으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 ‘저 새끼는 건드리면 손해다.’라는 생각이 박히면 절대로 함부로 손을 뻗지 못한다.
자비에는 당황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저게 중국과 미국의 심정일 거다.
그런데도 놈들은 책상위에 놓인 전화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국가기밀을 빼가려던 요원을 풀어주고 중국에 대들지 말라고 협박하는 꼴이다.
개새끼들.
끝까지 버티면서 결국은 강찬, 아니 대한민국이 전처럼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길 바라는 거다.
왜 얌전히 얻어맞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겠지.
일진 새끼들처럼 말이다.
***
“각하! 전화는 받으시는 것이 맞습니다.”
돔 형태의 천장에 띠를 두른 것처럼 조명이 있는 회의실이다.
마이크를 켜지 않은 채로 부원장이 입을 열었다.
“이건 대한민국의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일개 학생입니다. 그런 아이에게 국가의 거의 모든 권한이 넘어가 있습니다. 이번 작전의 승인은 두고두고 짐이 될 것입니다. 각하!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문재현은 대꾸하지 않은 채 마이크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전화를 확인한 국가정보원 4차장이 조심스럽게 문재현을 보았다.
“중국과 미국이 계속 각하와 통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벌써 세 번째 요청입니다.”
문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 전화를 받으면 우리 특수팀을 보내지 말라고 할 게 아닙니까?”
“각하. 고등학생입니다. 지금 어린아이가 게임을 하는 것처럼 특수군을 중국에 뿌리고 있는 겁니다. 만약 전쟁으로 비화하면 컴퓨터처럼 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재현의 질문을 부원장이 받았다. 그럼에도 문재현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부원장을 대했다.
“전쟁으로 비화할 확률은 얼마나 되지요?”
“국방부 시뮬레이션 결과는 47대 53, 국가정보원 시뮬레이션 결과는 52대 48의 확률입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통화를 하셔야 합니다. 미국, 중국이 독하게 마음먹으면 우리나라는 경제 기반부터 완전하게 무너집니다.”
“유라시아 철도 때문에 함부로 그러긴 어렵지요.”
“만약 라노크가 이미 죽었다면 유라시아 철도도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라노크 대사를 살리는데 힘을 합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일단 조금 더 지켜봅시다.”
문재현의 답변에 부원장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
[“루드비히?”]
“바실리가 전화를 다 하고, 일이 크긴 큰가 보군.”
루드비히는 피곤이 가득한 눈을 엄지와 검지로 누르면서 방금 걸려온 전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리의 새로운 영웅께서 워낙 흥분한 상태여서 말이지. 거절하자니 영국과 손을 잡을 거고, 뜻대로 하자니 결과가 엄청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설명하는군. 중국이 라노크만 내놓으면 끝날 일을 지금까지 침묵하면서 키우고 있는 거지. 흥분한 건 우리가 아니라 중국인 거야, 바실리.”
루드비히가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입에 물었다.
[“중국은 한국정부를 압박하려는 모양인데?”]
급하게 머그잔을 뗀 루드비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실리. 강찬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대충 알 것 같은데? 그에게 라노크가 어떤 의미인지도? 내가 중국 담당이라면 빨리 라노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강찬과 한국 정부에 사과와 보상을 할 거다.”
[“그 수가 최고겠지?”]
“중국은 벌써 세 번째 한국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바실리 자네라면 벌써 응징을 했겠지. 그동안 알고 있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달라. 문재현과 강찬의 호흡 또한 환상적이다. 그들을 상대로 이전처럼 대했다간 누구라도 후회하게 될 거야. 지금의 중국과 미국처럼 말이지.”
바실리의 깊은 한숨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직통전화가 울려서 강찬은 수화기를 들었다.
[“강찬 씨. 미국과 중국이 내게 연락을 해왔소. 중재를 부탁하는데 뭐라고 하면 좋겠소?”]
루드비히였다.
“내 조건은 간단합니다, 루드비히. 라노크 대사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리고 이번 사태에 대한 확실한 책임과 배상.”
[“알았습니다.”]
전화를 내려놓자 안느와 라파엘의 입이 잘게 떠는 것이 보였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알로?”
[“바실리다. 중국이야 그렇다 쳐도 왜 미국이 저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난리지?”]
“바실리. 내가 원하는 건 잘 알 텐데.”
[“언젠가 시간이 지난 다음, 지금을 되돌아보게 되면 뼈저리게 후회하거나 등골이 오싹할 거다.”]
“그건 나중 얘기야, 바실리.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하여간 등장부터 그렇더니 어떤 일이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 하나는 끝내주는군. 또 연락하지.”]
강찬은 전화를 내려놓고 석강호를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직통전화가 또 울렸다.
염병할!
수다쟁이들도 아니고, 작전을 시작했는데 뭔 놈의 전화질을 이렇게 해대는 거야!
강찬은 팔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알로?”
[“갓 오브 블랙필드요?”]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