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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여기서 뭐 하세요?
최성곤은 사무실 탁자에 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저도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젊은 친구가 교만하게 굴다가 대원들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돌아간 것 같습니다.”
[“최성곤. 너 혹시 코드 에이 때렸어?”]
“선배님. 그것과 상관없이 특수팀을 이끌려면 먼저 실력을 입증해야 하는 게 이 바닥 아닙니까?”
수화기 건너편에 커다랗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최성곤 준장.”]
“선배님?”
[“별을 달더니 내 안목에 대해 충고를 할 정도로 성장한 줄 몰랐다. 국가기밀이라 더 말하지 못하지만 강찬, 그 친구를 다시 부를 수만 있다면 나하고 김태진이, 그리고 김형정이는 무릎이라도 꿇을 거다.”]
최성곤이 의아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부관을 보았다.
[“이 시간 이후로 최성곤은 내 후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장군이 한낱 자존심 때문에 대사를 망치다니. 너 같은 사람을 후배라고 자신 있게 추천한 내가 부끄럽다.”]
“선배님! 지금 대기하고 있는 애들은 그 어떤 적과 붙어도 뒤지지 않는 강인한 군인들입니다.”
[“멍청아. 강찬, 그 친구가 마음먹었다면 거기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었다. 한 가지만 말해주마. 나하고 김태진이, 그리고 김형정이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 친구를 어쩌지 못한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최종일이가 마음으로 굴복했다. 거기 있는 놈들 중에 최종일보다 뛰어난 놈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
“그럴 리가?”
인내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린 후로 전화가 끊겼다.
최성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튼을 눌러 방금 통화한 사람이 전대극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최성곤은 번호를 뒤져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가 연결되자 이번에도 참기 위해 애쓰는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선배님. 최성곤입니다. 강찬이, 얘가 도대체 뭐길래 전 실장님께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선배님! 여기 있는 애들 실력이…….”
[“최성곤.”]
“예! 선배님.”
[“국가 기밀이라 내 입으로 떠들진 못한다. 이거 하나만 알아둬라. 강찬 씨가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프랑스 외인부대, 러시아의 스페츠나츠가 최정예 팀을 보낸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걸, 네가 되먹지 않은 자부심으로 되돌려 보낸 거다.”]
“아직 어린앱니다.”
[“넌 별을 달더니 전 실장님과 나의 판단을 그 정도로 평가하고 있었구나. 최성곤 준장. 만약 네가 코드 에이를 묵인한 게 밝혀지면 넌 커다란 실수를 한 거다.”]
“그런 거라면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요!”
[“넌 정말 썩어빠진 군인이 됐구나. 전대극 실장님의 말 한마디를 목숨 걸고 믿던 최성곤은 어디 간 거냐? 별 하나 달고 3공수 끌어안고 있으니까 세상이 만만한가 본데.”]
나직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도대체 강찬이 이 새……, 이 친구가 뭐길래 국가기밀이라는 거야!”
최성곤이 화가 난 눈으로 부관을 노려보았다.
“현재 알 수 있는 건 유라시아발표회장에서 초대 설립위원장과 함께 있었다는 것 외에는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전 실장님이나 김 선배가 대통령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저럴 리는 없는 사람이고. 휴우. 이거 미치겠네.”
이를 꽉 깨문 최성곤이 창가에 다가섰다.
‘빌어먹을!’
최성곤은 이제야 강찬의 눈빛이 떠올랐다.
***
“복장이 이래서 휴게실도 못 들르겠소.”
석강호가 툴툴거리는 바람에 강찬은 웃음이 풀썩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시커먼 군복에 군화까지 신었는데 표식은 왼팔 상단에 태극기 하나가 전부다.
“전화라도 받지 그러쇼?”
“관둬. 차라리 잘 됐다. 누군가는 죽을지 모르는 길에 가는 건데 내키지 않는 놈들을 선발해서 가는 건 싫다. 우린 자원해서 죽을 길을 찾아다녔던 거잖냐? 그런 놈들이 죽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뭣도 모르는 놈들 끌고 가서 희생되면 정말 힘들 것 같다.”
“에이, 쟤들이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달라질 거요.”
강찬은 피식 웃으며 군복을 보았다.
“사람을 죽여보지 못한 놈이 반이 넘어. 저런 걸 끌고 가서 뭐하게?”
“대답을 안 할 때는 몇 놈 팔 부러지나 싶었소.”
“그래서 뭐 하냐? 그런다고 달라질 거 같지도 않은데.”
석강호가 힐끔 강찬을 보았다.
“되먹지 않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놈들은 외인부대 병아리만큼도 쓸모가 없어. 실전에 나가면 제 실력 믿고 좌충우돌하다가 다 죽일 거다. 물러서지 않는다고 의지가 강한 게 아냐. 명령을 따르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석강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들먹거리는 신병이 왔다가 강찬에게 두들겨 맞을 때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끔찍하게 얻어맞은 게……,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왜 그렇게 두들겨가며 챙긴 거요?”
강찬이 픽 하고 웃으며 석강호를 보았다.
“나처럼 외로운 놈이었으니까.”
“하긴, 대장이 끌어주지 않았으면 벌써 뒷골목에서 죽어 나자빠졌겠지.”
말을 하는 동안 전화가 쉼없이 울렸다.
“어디 세워봐라. 옷이나 갈아입자.”
“알았소.”
5분쯤 더 가자 도로 한쪽에 쉼터가 나왔다.
차를 세우자 최종일의 차가 바로 뒤에 섰다.
“옷 갈아입어. 가는 길에 어디 가서 닭이나 한 마리 삶아 먹고 가자.”
무언가를 말하려던 최종일이 얼른 차에서 옷을 꺼냈다.
승용차의 앞뒤 문을 활짝 열어 칸막이처럼 활용한 다음,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이왕 선 김에 바쁠 것도 없으니 담배도 하나 피우고.
강찬과 석강호가 담배를 물자, 최종일과 우희승이 다가왔다.
“전 실장님께서 전화 좀 받으라십니다.”
“지금 통화하면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래. 출발하거든 전화드려서 오늘 기분 좀 풀고 올라간 다음에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오늘 보았던 특수팀이 전대극, 김형정, 최종일 같은 모습일 거라고 기대해서 더 실망했는지 모른다.
하기야, 작전의 내용을 모른 채로 훈련에 차출되어서 강찬과 석강호를 삐딱하게 볼 수도 있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 남자들에게 고등학생과 체육 선생의 명령과 지휘를 받으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다. 하지만 바꿔서 말하면 언제고 그럴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용병은 더럽게 말 안 듣는다.
마찬가지로 실력 차가 월등하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고개 숙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새끼들은 부르면 대답은 한다.
마음가짐의 차이다.
아니꼽고 더럽지만, 명령에 따를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삐딱할 건지.
하겠다고 덤빈 놈이 실력을 보여달라면 오케이, 그러나 처음부터 삐딱한 놈들에게 내 실력이 이러니까 너희가 따라와 줘야 한다며 실력을 보인다?
강찬은 피식 웃었다.
“괜찮으시면 점심으로 매운탕 어떠십니까?”
차에 올라타려는데 최종일이 다가왔다.
“매운탕?”
“올라가는 길에 안성 쪽 저수지 근처에 매운탕 죽여주는 집이 있습니다. 거기서 점심 드시죠?”
나쁘지 않겠다.
석강호가 네비게이션 주소를 받았고, 바로 출발했다.
“대장. 정말 신기하우.”
속도를 높인 석강호가 느긋하게 운전대를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상처 말이오. 이제 가렵소. 캬하! 유 원장이 뭐라고 할지 벌써 궁금하우.”
잘 된 일인데 정말 석강호의 말대로 되었다면 소문이 나는 것과 부작용이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한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렸고, 다시 국도를 빠져나가자 한적한 시골 길이 나왔다.
“캬하! 경치는 죽이네!”
왼편은 산이고, 오른편은 저수지다.
간간이 낚시꾼들이 펼쳐놓은 낚싯대와 파라솔이 운치를 살렸다.
“그러고 보면 우린 낚시 한번 못해봤소.”
강찬은 풀썩 웃으며 창문을 내렸다.
팔을 내밀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낚시?
돈가스 하나 사 먹을 여유 없이 살았다.
“여차하면 하루 자고 갑시다.”
“전 실장님하고 김 팀장님 속 타 죽을 거다.”
“푸흐흐흐. 전화 한 통 해주면 되잖소. 밥 먹고 전화해요.”
“알았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 100m 남았다고 자상하게 안내했다.
“어? 저 양반 전 실장님 아니오?”
코너를 돌았을 때 실제로 가게 앞 평상에 전대극이 앉아 있어서 강찬도 화들짝 놀랐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덜컥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그러게 왜 전활 안 받아?”
이런 양반이 있다니!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달려올 열성을 지닌 남자.
“죄송합니다.”
“잘못한 거 같으면 매운탕 거하게 사!”
“알겠습니다. 우선 좀 들어가세요.”
이런 남자에게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강찬과 석강호의 부축을 받으며 전대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최종일. 거기 밖에 있는 직원들도 다 들어오라고 해.”
“예! 실장님.”
전대극을 수행하고 온 듯한 두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여기 내 단골집이다.”
“종일이한테 시키신 거네요?”
“안 그랬으면 계속 찾아다녀야 하잖아!”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늙수그레한 주인 내외가 벽에 기댄 전대극을 담요로 덮어주고, 등에 받칠 베게까지 받쳐가며 살뜰하게 챙겼다.
“왜 이런 몸으로 돌아다녀요?”
“저 친구가 속 썩여서요.”
주인의 안타까운 질문에 전대극이 웃으며 던진 대꾸였다.
“모처럼 왔으니까 매콤하니 부탁합니다. 밖에 애들도 배불리 주시고.”
“알았어요. 시간 좀 걸려요.”
강찬을 힐끔 본 내외가 전대극을 누에고치처럼 꽁꽁 싸 맨 다음에 나갔다. 잠시 후에 주인 양반이 봉지 커피를 탄 컵 세 개를 들고 와 놓아주었다.
“오래 다니셨나 봐요?”
“야전 때. 울적할 때면 와서 하루씩 자고 가고 그랬다.”
“실장님도 울적하실 때가 있으세요?”
“왜? 난 감정도 없냐?”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강찬은 뒷머리를 쓸었다.
이런 남자를 고등학교 때 만났으면 절대로 아프리카로 가지 않았을 거다. 석강호 같은 선생이나, 김형정, 김태진 같은 남자들이 끌어줬다면.
강찬이 멋쩍게 플라스틱 컵을 볼 때였다.
밖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기가 막히다.
김태진이 김형정을 부축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놀란 주인 영감이 빠르게 옆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왜들 이러세요?”
“자넨 몸도 아픈 사람이 왜 여길 왔어?”
“매운탕이 생각났습니다.”
김태진과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로 달려들어 김형정을 벽에 기대게 했다. 역시나 모포와 베개를 가져온 주인이 김형정을 기대게 하고 감싸주었다.
잠시 후, 커피가 두 잔 들어왔다.
“재떨이 좀 주세요.”
김형정의 부탁을 들은 최종일이 얼른 재떨이를 방으로 가져왔다.
“거보십쇼. 저를 빼고 일을 하니까 이렇게 되잖습니까?”
“너는 사업가 아냐?”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김태진이 전대극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하고는 김형정을 노려보았다.
“이 친구야. 내려오는 동안 한 걸로 끝낸다면서?”
“서운하니까 그렇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었다.
“담배 피워.”
“괜찮습니다.”
“계급장 뗀 거야. 아니면 술 한잔 할까?”
전대극의 말에 김형정이 모포 속에서 손을 뻗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편하게 해주려는 거다.
강찬은 눈짓을 해서 방문을 열게 하고 담배를 들었다.
라이터를 든 석강호가 김형정과 강찬에게 먼저 불을 붙여주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코드 에이라고 있다.”
전대극이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새로 누군가가 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지휘관이 오면 따르지 않는 거지. 보상도 별로 없는 특수군 생활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도 없애지 못했다.”
말을 마친 전대극이 도움을 청하는 얼굴로 김형정을 보았다.
“강찬 씨의 경력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우선 훈련지를 1공수로 바꾸고 대원들 전원 교체하겠습니다.”
강찬은 김형정을 똑바로 보았다.
“팀장님. 실장님. 제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선 것은 잘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두 분과 대표님이 여기까지 오실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잘못이구요.”
강찬은 담배를 재떨이에 끄며 전대극을 보았다.
“제가 말없이 돌아온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죽을 곳에 가는 일에 아무것도 모른 채 나와 있었고, 그중에 절반은 사람을 향해 총을 쏴 본 경험이 없는 대원들이었습니다.”
전대극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코드 에이가 어떤 건지는 모릅니다. 다만, 명령에 따르지 않는 대원과 경험이 부족한 대원은 실력에 상관없이 사고가 난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대원들 팔 하나쯤은 부러트려야 하는데 그래놓고 나면 어차피 작전은 틀어집니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훈련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흐흠.”
전대극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강찬 씨. 정말 그 짧은 순간에 지금 같은 판단을 한 겁니까?”
“솔직히 반은 감각이고, 나머지 반은 이런 종류의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번에는 김형정이 김태진을 보았다.
“이런 건 방법이 없어. 특수전은 지휘관과 대원들이 똘똘 뭉쳐도 어려운 건데 그렇다고 대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봐야 어차피 실력을 보기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게 아닌가.”
잔인한 평가였지만, 김태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설명을 하든, 안 하든, 눈으로 본 것이 없는 상태에서 강찬은 그저 고등학생일 뿐이다.
장기전으로 준비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함께 훈련하며 손발을 맞추고, 그동안 고개를 숙이면 된다. 그러나 당장 다음 주에 출발해야 하는데 불신이 쌓인 상태라면, 죽으러 가라고 등 떠미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전대극이 걸걸하게 입을 열었다.
“이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자. 잊어. 일단 잊고 매운탕 시원하게 먹고 돌아가서 생각하면 돼.”
“알겠습니다.”
강찬도 뒤에 매다는 성격이 아니라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그런데 석 선생은 벌써 다 나았소?”
“그러게요.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습니다.”
“자네는 아예 붕대도 안 감았고?”
“저야 특이체질이잖아요.”
김태진이 고개를 저어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너 마디 했을 때 이동용 가스버너와 널따란 냄비가 들어왔다.
반쯤 익혀서 가져온 냄비 안에는 세 종류의 물고기가 풍성하게 들어 있었다.
보글보글.
빨간 국물에서 거품이 올라오며 친숙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누구도 국자를 들지 않자 석강호가 손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석 선생. 이번엔 우리 방식으로 한번 드시지 않겠습니까?”
김태진이 웃는 낯으로 말려서 석강호가 “그러시죠.” 하고 지켜보았다.
잡담을 하며 다시 10분쯤 지난 다음이었다.
김태진이 수저를 들어 고기를 잘게 부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그야말로 흔적을 없애다시피 갈랐는데 그러자 금방 국물이 걸쭉해졌다.
“이렇게 해서 다시 팔팔 끓입니다. 직급 때문에 함부로 고기 뜨기가 미안할까 봐 옛날 상관들이 시작한 방법이랍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누가 국자로 떠먹든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요.”
김태진이 말을 마치고 국자로 국물을 누르자 정말 죽처럼 변했다.
“그럼 맛을 볼까요?”
가장 먼저 전대극에게 한 그릇을 가득 퍼준 김태진이 돌아가면서 매운탕을 떠 주었다.
“오!”
석강호가 감탄을 할 때 강찬은 수저로 국물을 떠 넣었다. 그냥 실없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맛이 있었다.
문이 빼꼼히 열리고 주인이 가져온 것은 다섯 그릇의 밥과 김치 세 가지였다.
다른 표현이 필요 없을 만큼 맛이 있었다.
가시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는데 그런 불편함이 맛을 포기하게 하지는 않았다.
“정말 좋네요.”
양도 푸짐해서 두 그릇씩 먹고 나서야 바닥이 보였다.
배불리 먹고 수저를 놓았다.
누군가가 프랑스식 만찬과 이 매운탕 중 하나를 택하라면 바로 매운탕을 찍었을 거다.
식사가 끝나자 테이블을 치웠고, 또다시 커피가 들어왔다.
“난 한숨 잘란다.”
전대극이 뻔뻔스럽게 몸을 옆으로 뉘이더니 등에 받쳐준 베개를 머리로 옮겼다.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알아서 해.”
김형정이 웃으면서 눈짓을 했다.
김태진의 부축을 받은 김형정이 몸을 일으켜서 네 사람은 밖의 평상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