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35화 (13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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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가야지.

미쉘과 만난 시간은 10시였다.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다 함께 차를 타고 압구정동의 와인바로 향했다.

확실히 미쉘은 이런 곳을 잘 안다.

2층에 자리한 ‘재즈 인 크라우드’에 들어섰을 때 4인조 밴드의 반주에 맞춰 뚱뚱한 중년 여자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았고, 주문도 미쉘이 했다.

‘썸머 타임’이란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그때쯤 와인과 치즈 안주가 나왔다.

“여긴 담배 피워도 돼.”

미쉘은 강찬과 맞춘 것처럼 검은 정장에 하얀 셔츠 차림이었다.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쉘.”

파란 눈동자가 강찬을 향했다.

“수요일부터 정부에서 하는 일을 제대로 해 볼 생각이야. 연락이 안 될 수도 있고.”

껌벅껌벅.

서양 년들은 태생적으로 속눈썹 진짜 길다.

“나 때문에 미쉘이 위험해 질 수도 있어. 이거.”

강찬은 준비해 왔던 압정 형태의 발신기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손지갑에 꽂던데 그걸 미쉘이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에 꽂아. 그러면 미쉘이 어디 있는지 내가 알 수 있어.”

미쉘은 핸드백을 열어 손지갑을 꺼낸 다음, 곧바로 핀을 꽂았다.

“이렇게?”

“응.”

강찬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니.”

미쉘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껐다.

“위험한 일이어도 당신이 지금 같은 눈빛으로 선택한 일이라면 난 괜찮아. 언제고 당신이 힘들 때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이 나였으면 좋겠어. 물론 부모님 다음으로.”

“미안하다.”

“알아. 하지만 내가 기뻐서 하는 일이야. 부담 주기 싫으니까 내 걱정 말고 일해. 대신 한 달에 두 번은 잊지 마”

미쉘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해서 강찬은 풀썩 웃었다.

“한 달이라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 달엔 더 강한 걸 요구할 거야. 난 당신이 점점 멋진 남자로 성장하는 게 싫지만, 정말은 그래서 당신에게 빠져든 건지도 몰라.”

“간지럽다.”

“바람둥이!”

“내가?”

“예쁜 여학생에, 은소연에, 김미영, 그리고 나!”

허은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은소연은 알지도 못하는 거다. 억울했지만 변명하기도 그렇다.

미쉘이 웃으며 얼굴을 가져왔다.

프랑스 애들은 이야기하다가 이런 거, 그냥 생활인 거다. 강찬이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미쉘이 활짝 웃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척 많았는데 미쉘을 향한 시선은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미쉘의 위치를 확인하려 들 정도로 위험한 일이 있을지 몰라. 가능하면 혼자 다니지 말고, 외딴곳이나 업무 때문이라도 모르는 사람과는 둘이 있지 않은 게 좋아."

“차니. 나 다음 달에 생일이야.”

염병! 기껏 위험하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미쉘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생일 선물은 알지?”

“뭐?”

정말 모른다.

“하룻밤. 1년에 그날 하루. 그건 거절하지 마.”

하아!

강찬은 심오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화제를 빨리 바꾸는 게 좋다.

“미쉘. 빌딩을 하나 살까 해. 그걸 좀 알아봐 줘.”

“빌딩?”

강찬은 얼마 전에 석강호가 사기당한 일을 설명했다.

“금액은 얼마나?”

“글쎄. 천억까지는 부담 없겠는데?”

이번엔 미쉘이 심오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내가 필요한 게 2개 층쯤 돼. 그 외에 강유모터스하고 어머니 재단, 그리고 디아이도 그 빌딩으로 들어오면 좋겠고.”

“차니가 필요한 시설은?”

“지하로 내려가는 전용엘리베이터. 별도로 사용할 수 있는 지하 주차장. 운동시설, 샤워시설.”

“침실!”

미쉘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부를 거의 새로 꾸미다시피 해야겠네.”

“그런가?”

강찬이 고개를 갸웃할 때 미쉘은 아예 고개를 저어댔다.

“차니. 기존의 건물은 그렇게 지어진 게 거의 없어. 차라리 적당한 땅을 사서 새로 짓는 게 나을 거야.”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냐?”

“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돈은 준비된 거지?”

“쎄실에게 있어.”

미쉘이 “아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잘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거네.”

무대에 새로운 반주자들이 올라가 음악을 준비했다.

미쉘은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연주를 보자는 뜻일 거다.

강찬이 옆자리에 앉자 미쉘이 몸을 기울여 강찬의 상체를 안았다.

‘플라이 투 더 문’의 연주가 감미롭게 흘러나왔는데 재즈가 괜찮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차니. 위험한 일은 하지 마.”

미쉘이 강찬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아버님, 어머님과 차 마실 때 알았어. 두 분은 당신이 하는 일, 자랑스러워 하시면서도 불안해하셔. 나도 그렇고.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두 분 먼저 떠올리고, 나도 생각해 줘. 알았지?”

“그래.”

강찬이 오른팔을 들어서 미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가 성감대인 건 어떻게 알았어?”

강찬이 화들짝 놀라자 미쉘이 짓궂게 웃었다.

“바보! 다음 달 생일이 유일한 요구라니까.”

하아! 이런 건 역시 미쉘의 적수가 아니다.

두 번째 음악이 나올 때였다.

사회자가 춤을 즐기실 분을 위한 곡이라고 설명하자 서너 커플이 무대 앞의 공간으로 나섰다.

“나가자.”

“엉망인데?”

“맡겨주세요.”

미쉘이 강찬의 손을 당기며 일어섰고, 시선이 삽시간에 달려왔다.

이건 뭐.

무대로 나간 미쉘은 강찬의 재킷 안에 두 팔을 뻗어 아예 안기다시피 했다. 등을 감싸주었을 때 미쉘의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

가슴의 감촉이며, 아래로 느껴지는 몸까지.

부러움과 시샘이 가득한 시선 앞에서 미쉘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몸을 꼭 붙이며 강찬을 파고들었다.

혼자서 강찬을 바라고 사랑하면서 이런 순간에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강찬은 미쉘의 머리에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정장 바지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이 마치 맨살처럼 느껴졌다.

미쉘이 고개를 들었다.

강찬이 웃었을 때 미쉘이 고개를 저었다.

“키스해 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럼 내 생일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나직하게 한숨이 나왔다.

음악 참 더럽게 길다.

“알았다.”

답을 했을 때 음악이 끝났다.

미쉘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는데 주변에 있던 놈들이 비슷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미쉘은 촉촉하게 젖은 눈이었다.

“행복해.”

이런 건 대꾸하기 어렵다.

“차니. 혹시 시간 되면 부모님과 주말에 제주도라도 다녀와.”

“제주도?”

“그래.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좋은 추억도 선물할 겸. 두 분은 아마 먼저 그런 말씀 못 하실 거야.”

“바쁘셔서 그런 거 아닐까?”

“이거 봐. 차니는 이런 거 정말 몰라. 두 분은 차니에게 부담될까 봐 말씀 못 하시는 거야. 이럴 땐 주말에 어디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런데 시간 내달라고 하고 깜짝 여행 가는 거야. 내가 예약할게.”

강찬이 멀뚱멀뚱하게 바라보자 미쉘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제주도라?

훈련이 끝나면 주말에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거다.

***

행복해하는 미쉘을 보내고 택시로 집에 돌아왔을 때는 12시가 살짝 넘어간 시간이었다.

어쩐 일로 강대경과 유혜숙은 거실에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어! 이제 자야지.”

혹시나 미쉘과 함께 잘까 봐 걱정했던 건가?

강찬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참. 주말에 모시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주말에? 토요일? 일요일?”

“토요일 아침에 갔다가 일요일에 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강대경과 유혜숙이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괜찮아. 당신은 어때?”

“난 바쁠 일 없어, 여보. 어디 가는데 아들?”

“비밀로 하려는 데요?”

“옷이랑 준비해야지. 펜션에 가려는 거야?”

“아뇨. 하여간 비밀이에요. 시간은 되시는 거죠?”

“응. 당신 정말 괜찮아?”

유혜숙의 질문에 강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거구나 싶을 정도로 유혜숙은 설레는 얼굴이었고, 강대경은 무언가 힌트를 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이런 건 미쉘이 정말 한 수 위다.

강찬은 적당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

화요일은 석강호와 둘이 만나 역시나 미사리로 향했다.

“어젯밤에 미쉘 만나서 빌딩 알아보라고 했다.”

“잘 생각하셨소.”

멀리 보이는 강가로 붉은 잎들이 보이는 계절이었다.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자 자연스럽게 담배로 손이 갔다.

“그나저나 몸은 어떠냐?”

“대충 나았소.”

“하루 만에?”

“어제 헤어지고 병원에 가서 꽁꽁 싸매달라고 했거든요. 상처 핑계로 날 뺄 생각은 마쇼.”

“알았으니까 무리하지 마라. 괜히 작전 나갈 때 싸매고 누워서 피곤하게 하지 말고.”

“대장.”

석강호가 진지하게 강찬을 불렀다.

이 새끼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이러는 거겠지?

강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석강호는 꿋꿋했다.

“학교에서 오늘 전화 왔었소.”

“학교에서? 왜?”

또 불러내려고 그러나 싶어서 걱정이 앞섰다.

“친하게 지내던 선생이 안부 삼아 전화한 거요. 애들이 병원에 엄청 간다고 합디다. 수진이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수진이도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혹시 정부 쪽에 부탁해서 수진이 다시 학교에 나오게 해줄 수 없겠소?”

“그냥 다시 다니겠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

“휴학이 아니라 자퇴는 쉽지 않아요. 교육청이나 뭐 이런 곳에서 힘을 써주면 가능할 것 같아서 그렇소.”

“야! 어차피 수진이 1년은 넘게 입원해야 한댔잖아.”

“허락만 하면 방법이 있나 봅디다. 수진이 아버님이 교수라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그 양반 힘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운 모양이오.”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아보자.”

“그래도 신기하잖소. 난 사실 호준이나 은실이, 사람 못 될 줄 알았소. 병원에서 퇴원한 놈들도 얌전히 학교 다닌답디다. 푸흐흐. 호준이 놈이 꽉 틀어쥐고 숨도 못 쉬게 한다던데.”

“걔들이 정말 정신 차린 거겠냐?”

“못 한 건 못했다고 하는 게 맞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니오?”

그런가?

“내일 훈련 다녀와서 생각하자.”

“하긴. 말이 나와서 한 거요.”

뭔가 당한 거 같은 느낌에 강찬은 석강호를 지그시 보았다.

“왜 그러쇼?”

“아무리 그래도 몸뚱이 안 나으면 함께 못 간다.”

“어허! 내일 보면 알 거 아니오?”

석강호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가 “아! 뜨거!” 하며 흘렸다.

점심을 같이 먹고, 역시 삼성동 사무실로 향했다.

김형정은 아예 상심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세요?”

“같이 못 간다고 생각하니까 억울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계속 할 건데요, 뭘.”

상심이 커 보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랄 몸 상태는 아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3공수 여단장이 전 실장님 직계이고, 김태진 그 친구와 저의 한 기수 아래입니다. 조금 전에 연락 왔었습니다.”

김형정이 아쉬운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몽골에서 두건 사이로 보았던 강찬 씨의 눈과 석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강찬 씨는 소총을 겨눈 채로 뒤로 물러났지요. 후! 함께 하고 싶어서 숨이 꺽꺽 막히는 기분입니다.”

놀러 가는 거라면 덥석 들어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전 날짜까지 어떡해서든 일어날 겁니다.”

김형정이 시선을 들었는데 눈빛이 번들번들했다.

“기대할게요.”

“고맙습니다. 살면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이 응징을 가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전 실장님 말씀으로는 다섯 번인가 준비했다가 결국 못하셨다고 하던데요? 아직 출발한 게 아니니까 출발할 때까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프랑스 정보총국이 나서고, 바실리가 침묵한다면 반쯤 성공한 일입니다. 전 실장님이 준비하실 때는 눈치 보느라 이렇게 훈련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했었습니다.”

김형정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강찬 씨.”

“얼른 일어나세요. 가능하다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러겠습니다.”

김형정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네.”

김형정이 내민 손을 강찬이 꽉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을 통해 그가 지니고 있는 염원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삼성동 사무실을 나와 석강호의 치료를 위해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오후 3시쯤 된 시간이었다.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는데 유헌우가 있었다.

“어? 강찬 씨. 오른손 붕대를 벌써 풀었어요?”

“이거요? 이렇게 잘 움직이는데요?”

그러고 보니 김형정과 악수할 때는 아픈 줄도 몰랐다.

유헌우는 고개를 저으며 석강호의 붕대를 풀었다.

“몸을 많이 움직이셨네. 이대로라면 오래가겠는데요? 그나마 여름이 지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다시 입원하시라고 했을 겁니다.”

강찬은 석강호를 노려보았다.

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거다.

“선생님. 하나도 안 아픕니다.”

뻔뻔한 말을 하는 석강호의 상처를 유헌우가 꾹 눌렀다.

“아!”

“거 보세요. 부어올랐어요. 요 며칠 계속 몸을 썼다는 뜻인데요? 염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유헌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핀셋으로 소독약에 적신 솜을 집어 상처를 소독했는데 그때마다 석강호는 눈을 부릅떴다.

“제 피를 좀 넣으면 어떨까요?”

“예?”

유헌우는 놀란 소리를 냈고, 석강호는 고개를 홱 돌렸다.

“둘이 꼭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지금 제 피를 수혈하고 오늘 밤 자고 나면 좀 더 빨리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생각해 보니까 저도 자고 나면 훨씬 상태가 좋아지곤 했거든요.”

“흐흠.”

유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보시죠. 반드시 같이 가고 싶은데 다른 방법은 없는 거잖아요.”

“강찬 씨만 좋다면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저야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그렇게 해봅시다. 언제 출발입니까?”

“내일이요.”

유헌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항생제 처방을 좀 강하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상태가 안 좋아지면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합니다. 정말 위험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소독하고 약을 바른 다음, 붕대를 감은 뒤에 수혈을 했다. 대략 40분쯤 걸려서 과정이 끝나자 유헌우가 차 한잔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셋이 앉은 자리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계속 찾아왔었습니다.”

“그 얘기는 들었어요.”

“의외로 수진이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강찬 씨의 효과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회복이 빠릅니다. 그 외에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은 것도 있구요.”

“잘됐네요.”

“의사로는 실격이지요.”

찻잔을 들고 있던 강찬은 의아한 눈으로 유헌우를 보았다.

“상태가 호전됐다고 해도 부작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혈을 한 거니까요. 오늘은 더 그렇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것도 아닌데 수혈을 했습니다.”

의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강찬은 새롭게 배우는 느낌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의사로 실격이든 아니든, 방법이 없던 학생을 살린 것만큼은 강찬 씨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 구렁이는 하여간 고맙다는 말도 참 어렵게 한다.

“학생들이 강찬 씨 이야기를 했다더군요. 중환자실 앞에서 며칠을 두 시간이 넘게 무릎을 꿇고 있다가 갔습니다. 그걸 보고서 수진이 부모님 마음이 풀린 거구요. 강찬 씨를 치료한 보람을 그때 제대로 느꼈습니다.”

“그전엔 못 느끼셨구요?”

강찬이 말을 하고 웃자 유헌우가 따라 웃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한 유헌우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기분 좋게 차를 마시고 병원을 나섰다.

“어? 이상하게 졸립소.”

“약을 세게 놨나 부다. 얼른 가자. 내가 운전할게.”

아닌 게 아니라, 석강호는 눈이 축 늘어졌다.

석강호의 주차장까지 차를 운전해 놓고 강찬은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저녁은 집에서 먹었고, 함께 드라마를 본 다음 잠이 들었다.

***

수요일 오전이다.

강대경과 유혜숙이 잘 다녀오라며 출근한 다음 강찬은 석강호와 아파트 앞에서 만났다.

최종일까지 뒤에 대기하고 있어서 시간을 길게 끌 것도 없었다.

길 건너편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사 와서 나누고 증평으로 출발했다.

“대장. 정말 신기하우.”

“뭐가?”

“수혈받고 집에 가서 저녁 먹은 거 말고는 계속 잤거든요. 그랬더니 아침에 정말 벌어진 상처가 하나도 없는 거요.”

“정말이냐?”

강찬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석강호는 억울한 얼굴이었다.

“이따가 보쇼. 상처가 다 아물어 있다니까요.”

하긴. 실제로 강찬은 매번 그랬다.

“대장이 하룻밤 만에 붕대 풀 때 이해 못 하겠더니 겪어보니까 확실히 알겠소.”

“야! 나는 피만 팔아도 부자 되겠다.”

“에이! 이거 소문나면 큰일 나겠소.”

“너만 조용하면 아무 일 없어.”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평일이라 그런지 길이 제법 뚫렸다.

출발하고 두 시간이 채 못 돼서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는데 산으로 들어가는 비포장 도로를 군인들이 막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군인이 강찬과 석강호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바리케이드를 치워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차장인 듯한 공간에 군용트럭 네 대와 지프 두 대, 그리고 콘트리트 막사 두 동이 있었다.

강찬과 석강호, 그리고 최종일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막사 안에서 장교들이 나왔다.

최종일이 먼저 인사했는데 이미 안면이 있는 눈치였다.

“강찬 씨?”

“제가 강찬입니다.”

“3공수 최성곤 준장입니다.”

악수를 하고 난 최성곤은 다시 석강호와 인사를 나눈 뒤 조금 전에 나왔던 막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네들도 들어와.”

“저희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리로 차를 가져다줄까?”

“오면서 마셨습니다.”

최성곤은 더 권하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흔한 소파도 없는 야전에 딱 어울리는 단출한 방이었다.

중위가 빠르게 봉지 커피를 타서 탁자에 놓아주었다.

“전 실장님과 김 선배께 말씀 들었습니다. 선발하신 대원들은 옆방에 대기하고 있고, 방어조를 할 우리 대원들은 모두 중사급 이상으로 선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 드시죠.”

최성곤이 검게 탄 얼굴을 들어 강찬과 석강호를 살폈다.

봉지 커피는 나름의 각별한 맛이 있다.

산속이라 서늘한 기운이 풍겼는데 그래서인지 커피가 더 맛있었다.

종이컵을 내려놓자 최성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방에 군복과 장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하여간 야전에 있는 군인들은 다 비슷하다.

뭐든 직선인 거.

강찬과 석강호를 안내해 옆 막사로 들어가자 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색 군복에 검은색 베레모.

그리고 왼쪽 팔뚝 위에 붙은 태극기.

“이분이 강찬 씨, 이분이 석강호 씨다.”

최성곤의 소개에 따라 시선들이 달려왔다.

경계하는 눈빛에 호기심이 묻은 느낌이었다.

“복장을 갖추고 나오십시오.”

최성곤은 그대로 막사를 나갔다.

왼편 관물대 앞에 두 벌의 군복이 걸려있었다.

남자들만 있는 곳이다.

가릴 것도 없어서 강찬과 석강호는 곧바로 관물대로 올라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강찬은 온몸이 흉터투성이고, 석강호는 흉터 위에 붕대를 감았다.

옷을 갈아입고, 베레모를 어깨에 꽂아 넣은 다음, 군화를 신었다.

“1조?”

강찬의 질문에 당장 대꾸가 없었다.

“1조?”

두 번째 불렀는데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특수군이라는 뜻이다.

부리고 싶으면 존중하라는 뜻이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가 맞다.

피식.

강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석강호가 슬쩍 눈치를 보았을 때 강찬은 마음을 접었다.

전대극과 김형정이 워낙 사명감이 어쩌고저쩌고해서 너무 기대했던 모양이다.

“다예. 옷 챙겨라. 간다.”

석강호가 군화를 신은 채로 침상에 올라가 옷을 들고 내려오자 강찬은 곧바로 막사를 나왔다.

군복을 입은 최종일과 우희승, 그리고 이두희가 막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일.”

“예.”

군복을 입어서인지 대답이 좀 더 단단했다.

“돌아간다.”

“예?”

“돌아간다고. 앞으로 석강호와 너희 셋만 포함할 거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구할 테니까 그렇게 해.”

최종일이 눈치를 볼 때 석강호는 두말않고 운전대에 올랐다. 강찬이 조수석으로 움직일 때까지 최종일은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최종일.”

“예.”

“너도 안에 있는 새끼들처럼 일일이 설명해야 따를 생각이면 여기서 집어치워!”

말을 마친 강찬이 조수석에 오르자 석강호가 바로 차를 몰았다.

최성곤이 급하게 나오는 것이 보였고, 최종일과 우희승, 그리고 이두희가 빠르게 차에 오르는 것도 보였다.

오바한다고?

지랄한다.

프랑스 용병도 부르면 답은 한다.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해도 명령이 내린 상태에서 답을 안 하는 군인은 없다.

대한민국의 온갖 특수훈련을 다 완수한 놈이라도 대답조차 안 하는 놈을 데리고 작전에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실력을 먼저 보여달라고?

왜?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데려가야 하는데?

전화기가 울려댔지만, 강찬은 꺼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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