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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더 꺼낼 게 있어?
오륜호텔에 먼저 도착한 김태진은 호텔 뒤편에 있는 장소를 별도로 알려주었다.
대형빌딩에 속한 주차장이었다.
건물을 돌아서자 구석에 김태진과 서상현이 서 있었다.
드르륵.
“어서 와.”
내리는 순서대로 인사를 마쳤다.
“실장님은 10분 정도 더 걸린다고 했으니 우선 앉아서 얘기하지.”
김태진은 미리 보아두었던 모양으로 주차장 대각선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밖에 놓인 탁자 세 개를 전부 차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담배를 편하게 피울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테이블을 한곳으로 모으고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주문은 우희승과 이두희가 받았다.
“무슨 일이야?”
김태진이 강찬과 김형정을 번갈아 보았다.
상황 설명이야 복잡할 것이 없다.
강찬은 그동안 양진우와 관련된 일을 쭉 설명했다.
김태진이 고개를 끄덕일 때 커피가 왔고, 마침 주차장에 검은색 승합차가 도착했다.
전대극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김태진과 김형정이 직속상관을 맞이한 군인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상현은 아예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결국, 강찬을 비롯한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대극을 맞았는데 다부지게 생긴 직원 다섯 명과 함께였다.
“강찬 씨.”
전대극은 가장 먼저 강찬과 악수를 나누고 다음으로 석강호의 손을 잡았다.
김태진에게는 시선만 돌렸다.
“앉아.”
“먼저 앉으시면 앉겠습니다.”
“사고뭉치가 이제 철이 좀 드나?”
김태진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강찬을 힐끔 보았을 때였다.
“강찬 씨, 얼른 앉읍시다.”
전대극과 강찬이 자리에 앉고 이어서 남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다들 커피 마시나 본데? 나도 커피로 하지.”
이두희가 전대극과 나중에 온 직원들의 주문까지 챙겨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양진우를 잡을 생각인 거요?”
“그렇습니다.”
강찬의 답을 들은 전대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는 말씀드리지 않고 왔소. 오늘 일이 문제가 되면 나와 여기 부하 놈들 다섯은 바로 교도소 직행이요. 나는 몰라도 얘들은 앞길이 창창하니까.”
전대극이 불쑥 고개를 돌려 김태진을 보았다.
“얘들 수발하고 출소하면 직장은 네가 책임져.”
“알겠습니다.”
김태진의 대답을 들은 전대극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본에서 들어온 요원이라고 했지요?”
강찬은 전대극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 중간에 시선을 돌렸을 때 김형정이 고개를 끄덕여서 이 건이 국정원 비밀 작업이라는 말까지 모조리 전했다.
“흥. 원장이 이제야 밥값을 하는군.”
전대극은 만족한 얼굴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면 안 되지. 지금 같은 위기에 강찬 씨가 있다는 건,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복이야, 복! 내가 너희 나이 때 강찬 씨를 못 만난 게 한이 된다.”
전대극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근엄한 표정으로 쏟아냈다.
“오늘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대한민국 특수군 출신으로 한치의 후회도 남기지 마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안 한 건, 강찬과 석강호 뿐이었다.
“적들이 우리나라에서 설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국가정보원 원장이 정신을 차린 모양인데, 서상현!”
“예! 서상현!”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서상현이 다부지게 답을 했다.
“우리의 구호!”
“나의 피로 국가를 지킬 수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좋아! 우리는 지금까지 군인으로 국가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으로 살았다. 이제 강찬 씨 덕분에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알겠나?”
“예! 알았습니다!”
답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 올라 있었다.
이건 뭐지?
프랑스 외인부대의 특수군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들이 가진 사명감이 가슴 한쪽을 뭉클하게 만드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부터 지휘는 강찬 씨가 한다. 작전수행을 위해 편하게 지내도록.”
“감사합니다.”
김태진의 답이 있자 다들 자세를 풀었다.
이제야 외인부대의 작전 분위기다.
이 사람들, 제법 멋있다.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물었다.
이두희까지 편안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앞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원래 열 명이 들어왔던 것으로 파악했는데 오늘 상황으로 봐서는 그 숫자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양진우의 집에 최소 20명 이상의 일본 요원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최대 몇 명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김형정의 설명을 들은 전대극이 강찬을 보았다.
“작전은 없습니다. 들어가서 양진우를 죽일 때까지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작전 중에 가장 무식한 방법이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발이 계속되는 데도 참기만 하니까 오늘 같은 짓을 하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의 각오와 힘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까지 여섯, 강찬 씨와 석 선생, 김태진이 둘, 김형정이 쪽이 넷.”
손가락을 접어 가며 숫자를 센 전대극이 시선을 들어 확인하듯 강찬을 보았다.
“우리 열네 명이 일본 요원 스물을 상대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는 해야 대한민국의 특수군이지.”
전대극이 묘한 미소를 지은 뒤에 고개를 틀었다.
“너는 몸이 둔해져서 빠지는 게 낫지 않겠냐?”
“경호 회사를 운영하며 게을러 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전 강찬과 이미 두 번 작전을 나간 경험이 있습니다.”
김태진이 함께 작전을 뛰었다고?
“두 번째 작전에서 서상현은 부상을 당했어도 저는 무사했습니다.”
강찬은 설명을 듣고서야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모가지 귀신을 잡았던 일과 석강호의 구출 건, 두 건 맞다.
“강찬 씨. 무기는 어떻게 됩니까?”
“권총과 대검입니다.”
전대극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내가 데려온 직원 중 둘이 저격병 출신입니다. 참고하시고, 나는 더 이상 궁금한 사항이 없습니다.”
전대극의 말 중간에 직원 두 명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장님. 아마 칼로 싸우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님을 습격할 때 권총을 들었다면서요?”
“기회를 봐서 급소를 노리려던 거지, 처음부터 총을 쏠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양진우도 총을 쏘게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도 굳이 총소리를 낼 이유가 없구요. 그러니 근접 격투술이 될 확률이 높지요.”
“흐-흠.”
“한쪽이 극단적으로 불리해지면 총을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면 저놈들이 먼저 총을 쓰게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국가정보원 팀장과 대통령 경호실장에게 총을 쏜 게 되니까요.”
전대극은 감탄사를, 김형정은 고개를 끄덕여 그럴 수 있다는 심정을 표시했다.
“문은 어떻게 열지? 안 열어주면 그만이잖나? 옆집에서 신고할 수도 있고.”
이건 강찬도 계산하지 못했던 일인데 대답은 김형정이 했다.
“양진우의 집은 옆에서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문은 담을 타고 넘어가서 열면 됩니다.”
“푸흐흐. 국가정보원 팀장에 경호실장이 앉아서 담을 넘겠다는 계획을 세우다니.”
전대극이 석강호처럼 웃은 다음이었다.
“제가 먼저 벨을 누르죠. 어차피 알아볼 거고, 인원이 적어서 안심하고 문을 열어줄 거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 해보지. 자! 그럼 담배를 하나 피우고.”
전대극의 말에 따라 모두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강찬 씨는 정말 대단하군요.”
“전 실장님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데요?”
“내가요?”
전대극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결과를 전혀 생각 안 하시는 거 같아서요.”
“푸흐.”
전대극은 입을 내밀며 고개를 먼저 저었다.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나나 여기 있는 대부분은 이미 국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름 하나 더러워지는 것으로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가장 앞에 내가 서야지요.”
강찬의 웃음을 본 전대극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양진우가 어떤 짓을 하는지 10대 재벌가와 국회 의원 몇몇은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그들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된다면 난 어떤 결과를 받든 만족합니다.”
강찬이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 나자 전대극이 허벅지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출발할까요?”
강찬을 비롯해 남은 모두가 숨을 들이켜며 카페를 벗어났다.
“강찬 씨.”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사이 전대극이 강찬을 불렀다.
“어떡해서든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짐은 나처럼 나이 있는 사람이 질 테니 강찬 씨처럼 능력 있고, 앞길 창창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서 더 큰 일을 해야 합니다.”
말뿐이 아니다.
전대극은 팔을 둘러 강찬의 등을 감싸듯 다독여주었다.
이런 사람이 상관이었다면.
강찬은 문득 전대극 같은 사람 밑에서 군 생활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드르륵.
승합차 두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김태진과 서상현은 권총을 받기 위해 전대극의 승합차에 올랐다.
시동이 걸렸다.
“다예. 뒷일 생각하지 말고 걸리면 그냥 죽여.”
“내 걱정 말고 혼자 너무 앞서가지 마쇼.”
“알았다.”
차가 방향을 틀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눈에 독기가 올라온 느낌.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고, 다시는 강대경과 유혜숙을 못 노리게 만들고 싶었는데 일이 더럽게 커졌다.
샤흐란, 이 개새끼.
그 새끼 이후로 일이 생겼다 하면 일단 커진다.
호텔 옆길로 돌아 횡단보도 신호를 받으며 비보호로 건너편으로 들어섰다.
쭉 올라가는 길을 타고 좌우로 성처럼 높은 집들이 나왔는데 위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부우우웅.
승합차가 기운을 쓰며 마지막 언덕을 올라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자 좌우로 높은 담이 나오고 정면에 교문의 네 배쯤 돼 보이는 철문이 나타났다.
이 지랄로 살면 어지간히 사는 사람은 거지처럼 보이기도 하겠다.
승합차는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정면 대문 위로 CCTV, 좌측 벽에 차가 출입할 크기의 샤시 문이 벽을 파 놓은 것처럼 있었다.
전대극이 탄 승합차가 곧바로 옆에 도착했다.
드르륵.
강찬은 차에서 내려 문에 달린 CCTV를 노려보았다.
“후우.”
이런 집에서 점심은 어떤 걸 먹을까?
‘양진우, 점심은 잘 처먹었냐? 난 비빔밥 먹었다.’
먹고 사는 거 정말 별거 없다.
많이 벌어서, 잘 처먹고, 비싼 옷 사고, 좋은 집 사는 거? 좋다. 좋은 일이고, 부러운 일이다.
그냥 그렇게 살면 누가 뭐랄 건가?
그런데 왜 불쌍한 자매 죽이고, 온 국민이 잘살 수 있다는 일을 막겠다고 무기와 외국 요원들 들여와서 생때같은 우리 요원과 대원들을 죽게 하는 지랄을 떠냐 이거다.
피식.
강대경이 얻은 고작 그 자동차 판매권한?
보육원 지원할 수 있다고 좋아한 유혜숙은 무슨 죄가 있는 건데?
강찬이 앞에 서자 그 뒤를 전대극과 석강호가 받쳤다.
뚜벅뚜벅.
강찬은 곧바로 정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쿠우웅.
그런데 벨을 누르기 직전에 문 전체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대문의 오른쪽 한 귀퉁이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열렸다.
피식.
‘해보자 이거지?’
시작이다.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죽어서 나올지 알 길이 없다.
강찬은 숨을 한번 고른 후,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면은 계단이었다.
좌우로 5m쯤 되는 공간을 둘러싼 것처럼 사람 키 높이의 돌벽이 있어서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집도 지랄 같이 만들어 놨다.
강찬은 앞에 놓인 돌계단을 노려보았다.
올라가는 순간에 총을 쏘면?
총을 꺼내서 올라가야 하나?
잠시 고민한 강찬은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감을 믿는 거다.
만약 누군가 총을 들고 기다린다면 이미 심장이 춤을 추고 있어야 맞다.
저벅. 저벅. 저벅.
계단을 올라가는 만큼 위쪽이 단계별로 모습을 보였다.
정면에 괴물이 마당을 먹기 위해 주둥이를 한껏 벌린 형태의 건물이 보였다.
1층은 오페라 하우스처럼 현관과 유리창이 나 있고, 그 위로 시멘트 돔에 2층과 3층의 창이 있었다.
정원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학교 운동장만 했다.
거기에 천연잔디, 단정하게 이파리를 자른 나무들과 정원석, 그리고 한쪽에 파인 연못이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강찬은 정원의 끝에서 건물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문을 열어준 놈은 총을 쏘지 않는다.
양진우도 강찬과 뒤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서 더욱 그렇다.
‘더럽게 질긴 새끼. 너도 이제 끝이다.’
뒈진 다음, 귀신이 돼서도 돈을 벌려고 버둥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이후로 살아서 다른 사람을 해치진 못하는 거다.
“후우.”
강찬은 숨을 커다랗게 쉰 다음, 다음 걸음을 옮겼다.
잔디가 잘 자라서 폭신한 느낌이었다.
중간쯤 도착했을 때다.
왼쪽 현관이 열리더니 사내들이 우르르 나왔다.
‘양진우?’
진회색 콤비에 셔츠, 그리고 짙은 남색 바지.
실제로 앞에서 걸어오는 놈은 양진우가 틀림없었다.
뭘 믿고 저 지랄을 떨지?
강찬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양진우의 좌우로 서양놈들 여섯이 함께 걷고 있었다.
셋은 요원 출신이 분명한 걸음걸이와 자세를 갖췄다.
피식.
그뿐이 아니다.
서양놈들이 모두 나오자 뒤로 일본 요원이 분명한 놈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양진우가 강찬의 앞에 도착했을 때 현관 유리문이 닫혔는데 일본 요원만 거의 서른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전 실장님이 약속도 없이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새끼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지?
서양놈들이 내가 모르는 힘을 가진 건가?
양진우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전대극에게 아는 체를 했다가 다시 시선을 강찬에게 돌렸다.
“네가 강찬이란 아이지?”
“양진우, 여유 있는 척해봐야 결과는 같아.”
양진우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근본이 없는 놈들은 이래서 안 돼. 너는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져보질 못한 거다. 하기야 네 잘못이라기보다는 너 같은 놈을 꾸역꾸역 낳아서 밥만 먹이면 책임을 다한 줄 아는 네 부모 잘못이겠다만, 너 때문에 네 부모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말을 마친 양진우는 볼을 한번 씹은 후에 강찬의 뒤에 있는 전대극을 보았다.
“흠! 전 실장. 뜻밖의 방문인데 내가 나갈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소.”
양진우가 막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양진우. 지랄하지 말고 가만있어. 안 그러면 바로 모가지에 구멍을 뚫어버릴 테니까.”
“쯧쯧쯧쯧. 못 배운 자식.”
양진우가 옆에 서 있는 서양놈을 돌아보았다.
“양 회장님은 미국 국민입니다.”
능숙한 한국말이었다.
“우리는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말을 마친 놈이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강찬의 앞에 디밀었다.
아!
강찬은 이제야 양진우의 지금 모습이 이해됐다.
결국, 이 개새끼는 미국의 위세를 등에 업고 그걸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주접을 떤 거다.
일본 요원과 미국 대사관의 힘을 내세워 한국에서는 누구도 힘이나 법으로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거였다.
“만약 불법적인 폭행이나 통행을 방해하는 행위가 있다면 미국 정부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미국 국민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더는 양 회장의 길을 막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뒤에서 전대극과 김형정의 한숨 소리가 들릴 때 양진우는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벌레 같은 놈. 이것이 세상이다. 네 부모가 앞으로 수천 년을 더 살아도 알지 못하는 세상. 돈이 없는 것들은 종이나 노비와 같아. 주인을 위해 새끼 낳고,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다가 죽으라면 죽는 노비! 종!”
“시끄러워, 이 개새끼야!”
강찬의 눈을 본 양진우가 얼른 미국놈을 보았다.
“경고합니다.”
“너도 조용히 해, 이 씨발 놈아. 여기 미국 아니니까,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너부터 죽일 거야.”
“당신 지금!”
철컥!
강찬이 총을 뽑은 직후였다.
철컥!
석강호가 곧바로 총을 뽑았다.
미국 쪽 요원 셋이 움찔했다가 석강호가 겨눈 총을 보고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양진우가 처음으로 당황한 눈빛을 띠었다.
“야, 이 씨발 놈아. 노비? 종?”
강찬은 피식 웃으며 양진우를 보았다.
“네가 그렇게 힘이 있어? 미국이 널 지켜준다고? 알았어. 어디 언제까지 지켜주나 보자.”
강찬은 말을 멈추고 당황해 있는 미국놈에게 시선을 주었다.
“프랑스 대사관에 전화해.”
“무슨 소리요?”
강찬은 양진우에게 향했던 권총을 움직여 놈의 얼굴을 겨냥했다.
“자꾸 귀찮게 하면 너부터 죽여버릴 테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프랑스 대사관에 전화해서 라노크를 바꿔줘. 질문하면 바로 대가리를 날려버린다.”
강찬은 실제로도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었다.
양진우 이 개새끼를 살려두면 어차피 일이 꼬인다.
일본을 등에 업고 지랄하나 미국을 믿고 설치는 거나 결과는 비슷할 거다.
전쟁?
지랄한다.
미국이 양진우 하나 죽였다고 전쟁을 일으켜?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전부 무기징역을 맞을지는 몰라도 전쟁 같은 건 없다.
미국놈이 조심스럽게 바지에 손을 넣어 전화기를 꺼내고는 난색을 표했다.
번호를 모르는 눈치였다.
염병. 강찬도 번호를 모른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김형정이 번호를 불러주었다.
삐삐삐삐삐삐삐삐삐. 삐-.
놈이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프랑스 대사관입니까?”
놈이 강찬을 흘깃 봤다.
“강찬이 라노크 대사를 찾는다고 말해.”
놈이 전화기에 대고 강찬이 말한 대로 지껄였다.
30초가량이 흐르도록 답은 없었다.
양진우가 불편한 기색으로 미국놈들을 번갈아 보았는데 일본 요원 놈들의 눈치가 수상할 때마다 석강호가 총구를 돌려가며 경고했다.
“헬로우, 라노크? 아임 프랭크.”
프랭크라고 자신을 밝힌 놈이 상황을 영어로 지껄이며 순간순간 강찬을 노려보았다.
“저스트 모우먼트.:
놈이 팔을 뻗어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알로?”
[“강찬 씨. 혹시 미국 대사관이 철수하는 것을 내게 중재하려는 겁니까?”]
구렁이라 그런지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
“이왕이면 좋게 끝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대사님 이름을 팔았으니 나중에라도 후환이 적을 것 같아서요.”
프랑스어로 말을 하자, 양진우가 내용이 궁금한 듯 프랭크를 빠르게 보았다.
[“흠. 알겠습니다. 대신 강찬 씨가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각오했습니다, 대사님.”
전화기 건너편에서 깊은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프랭크를 바꿔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대사님.”
강찬은 고갯짓과 함께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헬로우?”
프랭크가 전화를 받고 1분쯤 통화가 이어졌다.
주로 한 말은 누구나 알아듣는 “예쓰!” 가 전부였는데 놀란 눈빛으로 강찬을 보기도 했다.
마침내 통화를 끝낸 프랭크가 강찬을 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미국은 이 시간부터 이중국적 금지 조항과 테러지원 금지법을 위반한 양진우의 미국 국적을 취소합니다.”
“뭣이!”
양진우가 고개가 홱 하고 돌았다.
“미국 정부와 DIA는 강찬 씨의 협조 의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찬도 얼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미국 대사관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후로 법적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시, 강찬 씨의 정당방위를 미국 대사관이 증명하겠습니다.”
프랭크의 눈빛은 진지했다.
조금 전까지 양진우를 대하던 것처럼 말이다.
모르는 뭔가가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그걸 따질 수는 없었다.
“가.”
“고맙습니다. 강찬 씨. 필요하시다면 우리 요원 셋이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뒤로 물러나려던 양진우가 강찬의 총구가 움직이자 그대로 굳어서 눈알만 굴려댔다.
“이 정도면 충분해.”
“강찬 씨. 세계 평화를 위해 협력하기로 한 강찬 씨의 결단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 새끼가 미친 건 아닐 테고?
양진우 죽이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거란 아부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프랭크는 깍듯하게 고개까지 숙인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일이 묘하게 돌아갔지만, 아무튼 이제 양진우는 끝난 거다.
“야! 어떡하냐? 이제 너 미국놈 아니래.”
강찬이 피식 웃는 앞에서 양진우는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총을 먼저 뽑아서 일본 요원 놈들까지 한 번에 해결된 게 맞다.
강찬은 양진우를 죽이고, 이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서른에 가까운 일본 요원들과 애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는 일이다.
양진우쯤 죽이는데 총도 필요 없다.
“다예.”
“예.”
석강호가 답을 한 직후였다.
강찬은 권총을 석강호의 왼손에 건네주었다.
이렇게 하면 최소 30발 이상 연속 발사가 가능하다.
“움직이는 새끼가 있으면 그냥 쏴 버려.”
“알았소.”
석강호가 오른쪽으로 두 걸음을 움직인 뒤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야! 전 실장! 이러면 당신은 끝장이야! 난 법에 의해 보호받을 권리가……?”
퍼억!
강찬은 양진우의 배를 뾰족한 주먹으로 힘껏 내질렀다.
“크헉!”
양진우가 깡패들이 인사하는 것처럼 배를 싸안고 허리를 접었다.
터억.
강찬은 양진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쫘아아악!
만화처럼 볼살이 떨린 뒤에 후두둑 피가 흘러내렸다.
쫘아아악! 쫘아악! 쫘아악! 쫘아악!
고작 따귀 다섯 대를 때렸는데 양진우가 무릎을 꿇듯이 무너졌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서 강찬에게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보여? 널 못 지켜 준 건 정말 미안하다. 대신 이 새끼 오늘 보내줄 테니까…….’
이 새끼는 곧바로 지옥으로 갈 테니 그 착한 애들과 마주칠 기회는 없는 건가?
쫘아아악!
‘하여간 이제는 분 풀고 좋은 곳으로 가라.’
쫘아아악!
강찬은 왼손을 위로 당겨 양진우의 대가리를 똑바로 세웠다.
왼쪽 뺨이 퉁퉁 부었고, 눈 끝과 코, 입술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씨발놈. 난 또 피가 금색일 줄 알았더니 그냥 빨간색이잖아.”
“으흐흐.”
쫘아아악!
볼살이 사정없이 떨리면서 피가 오른쪽으로 확 튀었다.
“양진우?”
“으흐흐.”
쫘아아악!
“크흐흐흐!”
“웃는 거야?”
양진우가 빠르게 고개를 저어댔다.
쫘아아악!
“크흑! 크흐흑!”
“양진우?”
쫘아아악!
세차게 뺨을 때린 강찬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화려한 정원이다.
석강호가 권총을 겨누고 있어서 그런지 일본 요원들은 이를 악물기만 할 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서로 아는 거다.
실제로 방아쇠를 당길 사람인지 아닌지.
그리고 실력이 어느 정도 될지도.
양진우가 조심스럽게 강찬을 보는 순간이었다.
피식.
강찬은 오른발을 들어 양진우의 왼쪽 허벅지를 있는 힘껏 밟았다.
콰악! 꽈득!
“끄으윽! 끄아아아!”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처먹어서 그런가? 왜 제대로 안 부러지지?”
콰악! 콰자자작!
양진우가 입을 쩍 벌리고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끄으으으. 끄아아아아아.”
뒤늦게 폐부에서 울리는 듯한 비명이 터진 다음이었다.
“전상!”
일본 요원 놈 하나가 악을 썼다.
강찬이 시선을 든 다음이다.
“대 일본의 요원들과 당당하게 싸워봅시다! 원하면 우리도 그쪽 숫자에 맞춰드리겠소! 아니 반으로 하지!”
병신들이 뭐라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총을 꺼낼 테니 어디 누가 죽나 해봅시다!”
독기가 올라서 번들거리는 눈빛이 전염되는 것처럼 일본 요원들 전체로 퍼져나갔다.
“개새끼들아!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러 나섰던 놈들이 당당하단 말을 꺼내?”
“전상!”
강찬의 말을 무시한 놈이 다시 한 번 전대극을 불렀다.
“다예.”
“예!”
“저 개새끼 쏴버려.”
“알았…….”
석강호는 답을 마치지 못했다.
전대극이 강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설마 미련하게 저런 빤한 도발에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강찬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전대극은 미친 사람 같은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탁하자.”
앞뒤 다 자른 말이다.
거기에 지금까지와 다른 반말이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남자로 부탁하자. 저 새끼의 목을 우리 손으로 따게 해다오.”
“실장님!”
김태진이 불렀으나 전대극은 강찬만 보고 있었다.
“결과는 생각 안 하십니까?”
“그런 거 생각했으면 여기 왔겠냐?”
전대극의 반문에 강찬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강찬. 너에게 지휘를 맡겼다. 결정은 네가 해라. 하지만 나이 든 군인의 자존심을 지키게 해다오. 뒤를 봐.”
전대극의 말에 강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태진과 김형정이 난감한 표정인 반면에 나머지 모두는 분한 얼굴이었다.
“저놈들이 앞으로 대한민국 요원들의 중추를 담당할 거다. 미국의 도움 없이, 프랑스의 개입 없이 싸워서 자존심을 지키게 해다오.”
강찬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자신 있으십니까?’
‘자네가 도와줘야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군인이잖냐. 야전에서만 살아온.’
미칠 일이다.
전대극의 터무니없는 부탁이 가슴에 콱 박혔다.
“여기서 우리는 다 죽어도 괜찮다. 남은 요원들의 자존심을 영원히 지킬 일화가 생기는 거니까. 대한민국 안에서 그 어떤 놈들도 함부로 설치지 못한다는 교훈.”
강찬은 시선을 돌려 양진우를 보았다.
더러운 새끼가 침을 흘려가며 흐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