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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해달란 대로 해주지.
허은실을 보내고 나서 미쉘에게 전화를 안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다. 당연히 전화를 걸었는데 미쉘 역시 20분 만에 트론스퀘어에 나타났다. 엄청난 시선을 끌면서.
“차니!”
미쉘이 안기는 순간, 수많은 시선이 강찬의 가슴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몇몇은 ‘TV에서 본 그놈인가?’ 하는 눈치여서 강찬은 서둘러 장소를 옮겼다.
“차 가져왔어. 우리 저녁 먹으러 가.”
트론스퀘어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던 미쉘은 곧바로 방배동으로 향했다.
“프랑스 사람들만 주로 이용하는 레스토랑 있어.”
확실히 미쉘은 눈치가 빠르다.
가는 동안 돌아오는 화요일에 첫 방송이 나간다는 것과 예상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야.”
방배동 골목을 파고들다시피 들어가자 분식집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레스토랑이 나왔다. 입구에 메뉴판을 세워놓지 않았다면 전혀 식당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이 10개쯤 있었는데 그나마 2인용 테이블이 일곱 개일 정도로 단출한 구조였다.
예약은 안 했지만, 저녁치고 이른 시간이라 가장 안쪽에 있는 조용한 곳에 자릴 잡을 수 있었다.
뜻밖에도 음식은 제법 맛이 있었다.
주문한 와인을 함께 마시며 이른 저녁을 먹었다.
“여기 어머니 모시고 올까 해.”
미쉘의 웃는 얼굴을 보며 강찬은 한 번 더 정리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미쉘.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나 정말 마음에 둔 여자가 있어. 소연이가 병원에 와서 만나기도 했었어.”
“소연이가 병원에 갔었어? 언제?”
미쉘은 엉뚱하게 소연이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
“어쩐지! 연기하는 애라 확실히 다르구나.”
“뭐가?”
미쉘이 의뭉스러운 눈길로 강찬을 보았다.
“차니. 소연이가 차니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 거지?”
“너 병 있는 거 아니냐?”
와인을 마시다 웃음이 터진 미쉘이 급하게 냅킨을 입에 가져갔다.
“이럴 때 차니는 정말 매력 있어.”
옆 테이블에 프랑스인 남녀가 앉았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느낌이라 대화하기 편했다.
“걔뿐이 아니야. 코디 애들, 연기자 몇 명이 차니 때문에 맘고생하고 있을걸?”
“그만해라. 혹시 TV에 나온 걸 보고 잠깐 그럴 순 있을지 몰라도 관심도 없고,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는다.”
“차니는 그렇지.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 마음이 더 타들어 가게 하지.”
미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소연이에 비하면 난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 옛날에 내가 남자들 많이 만났었으니까 차니도 가능하면 많이 만나. 그러다가 차니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게 되면 내가 깨끗하게 마음 접을게.”
심지어 재밌다는 표정까지 짓는다.
“대신 한 달에 두 번 키스 권리는 양보 못 해.”
“야! 그럼 나는 뭐냐? 좋아하는 여자와 너, 둘 다한테 미안하고 죄를 짓는 거잖아.”
“그냥 키스잖아. 그건 내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생각해.”
“에효!”
강찬은 커피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앞에 비슷한 분위기의 바가 있어. 우리 거기 가서 담배 피울까?”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
강찬은 계산을 마치고 미쉘을 따라 바로 뒤에 있는 와인바로 움직였다.
같은 가게이지 싶었다.
레스토랑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손바닥만 한 마당에 테이블이 있어서 담배를 마음 놓고 피우기 좋았다.
방배동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유혜숙이 정말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우선 커피를 먼저 주문하고 담배를 꺼냈다.
그래. 하루쯤 여유 있게 즐기자.
강찬은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TV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차니를 다시 못 보는 것과 이렇게라도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할까?”
드라마를 찍더니 애가 이상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애교 떨기는?
그런데 예쁘긴 정말 예쁘다.
“그냥 이렇게 지내게 해 줘. 난 차니가 다른 여자랑 잠자리하는 거 괜찮아. 아까 얘기 했던 것처럼.”
“됐다. 알았으니까 그만하자.”
“한 달에 두 번은 양보 못 해.”
커피를 가져왔던 여직원이 이상한 눈으로 미쉘과 강찬을 보고는 빠르게 안으로 사라졌다.
미쉘은 정장 차림이었다.
얜 이런 옷이 정말 잘 어울린다.
“참, 차니. 내일 시간 괜찮으면 옷 사러 가자. TV에서 보니까 정장 정말 잘 어울리더라.”
“그럴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고, 당장 어떤 옷이 좋은지를 모르는 판이라 미쉘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마당에 켜놓은 조명이 들어왔다.
“차니는 욕심 같은 거 없어?”
“뭔 욕심?”
“돈을 많이 벌고 싶다거나, 유명해 지고 싶다거나 하는 거. 아니면 꼭 하고 싶은 일?”
“글쎄.”
당장은 양진우를 죽이는 일 정도?
갑자기 미쉘과 참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혜숙이나 강대경, 그리고 김미영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죽인다는 일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왜 그래?”
“아냐. 잠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 봤어.”
“차니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인 건 알아. 라노크 대사와의 친분도 그렇고, 느닷없이 TV에 나타난 거, 그리고 가끔 보이는 엄청난 인맥과 돈.”
미쉘이 진지한 얼굴로 강찬을 대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차니는 그 어떤 것을 할 때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어머니와 있을 때 차니 눈이 웃는 모양인 건 알아? 남산 호텔에서 부모님과 식사할 때, 병원에 있을 때. 차니의 그런 얼굴을 보면서 정말 차니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얘는 결국 결론이 그쪽으로…….
“차니. 차니가 행복해할 일을 찾아.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볼 때처럼 웃을 수 있는 일. 쎄실에게 맡긴 돈도 작지 않다면서. 그것도 좀 쓰고. 차니가 정말 행복해할 일이 뭔지 찾아봐.”
미쉘의 커다란 눈에 진심과 간절함이 함께 담겼다.
“넌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냐?”
“한 가지만 빼면.”
“그게 뭔데? 야! 대답하지 마.”
눈빛이 촉촉해진 미쉘을 보자 답을 알 거 같았다. 이건 뭔가 남녀가 바뀐 느낌이다.
“와인 마셔도 돼?”
“그래.”
이왕 시간을 낸 터라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와인을 더 마시는 동안, 강찬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얼까?’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30분쯤 지나자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이 프랑스사람들로 가득 찼다.
테이블에 켜진 기름 초, 잔잔하게 들리는 재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미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올라타듯 강찬의 다리 위에 앉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몸이 뜨거웠다.
“무겁다.”
미쉘이 짓궂게 코를 찡그리더니 강찬의 코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건 병원에 있으면서 나 속썩인 거 보상이야.”
팔을 뻗은 미쉘이 강찬을 꼭 안았다.
살 냄새, 얼굴에 닿은 가슴의 감촉, 뜨거운 열기, 머리를 스치는 숨결까지.
더 나가면 위험하다.
“안아 줘. 차니가 잘못되는 줄 알고 정말 무서웠단 말야.”
병원에서 울던 모습이 떠올라 강찬은 미쉘을 안아주었다.
“더 요구하지 않을게. 지금처럼 지내. 대신 다시는 그렇게 위험한 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니만 괜찮다면 내가 벌어. 그렇게 할게.”
미쉘이 고개를 들어 커다랗고 파란 눈으로 강찬을 들여다보았다.
“힘들다.”
“차니, 이런 모습은 정말 흥분돼.”
짓궂은 표정을 지은 미쉘이 강찬의 코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
모처럼 맞는 평온한 일요일이었다.
양진우가 해저 터널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덕분에 전화도 뜸했다. 물론 유혜숙은 살짝 달랐지만.
토스트, 우유, 오믈렛, 그리고 커피와 차.
강대경과 강찬이 준비한 아침을 먹으며 유혜숙은 행복한 얼굴이었다.
쉬프도 잘 팔리고, 재단의 일도 잘 진행되고.
“아들은 오늘 뭐 할 거야?”
“낮에 미쉘이랑 옷이나 사러 가볼까 해요.”
“옷?”
“자꾸 어려운 자리에 나가게 돼서 양복하고,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 몇 벌 사볼까 하구요.”
“그래! 그런 거 필요하지. 돈은 있어? 엄마가 좀 줄까?”
“아니요. 디아이에서 월급이랑 나와요.”
“그렇구나.”
그냥 둘러댄 핑계에 유혜숙이 녹차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어머니. 제가 앞으로 뭘 했으면 싶으세요?”
질문이 이상했는지 강대경과 유혜숙이 의아한 눈으로 강찬을 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요.”
“갑자기 든 생각이냐?”
질문은 강대경이 했다.
“어제 미쉘이 그걸 물어봤는데 선뜻 답을 못했어요. 그냥 두 분은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해져서 여쭤보는 거예요.”
유혜숙의 시선을 받은 강대경이 넉넉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가끔 널 보면 고등학생이란 생각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을 하니까 이제야 고등학생 같구나.”
강찬이 풀썩 웃는 것을 본 강대경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게 없으면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아직 어린데 뭐가 걱정이냐? 정말 하고 싶은 일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아는 건 다 때가 있는 거다.”
“우선 대학은 가야지.”
강대경은 그런 말 할 줄 알았다는 투로 웃은 다음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 그래서 가능하면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버진 지금 하시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셨어요?”
그냥 툭 하고 나온 질문이지, 의도하거나 목적을 가진 질문은 아니었다.
“군대를 나와서 아빠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였어.”
그런데 정말 뜻밖의 대답이 곧바로 나왔다.
“엄마와 가정을 꾸미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을 해도 행복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아빤 정말 저건 꼭 해야지 했던 일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요?”
“엄마랑 결혼하는 거.”
이런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하다니.
강찬이 시선을 돌렸을 때 유혜숙은 멋쩍으면서도 감동한 얼굴이었다.
“네가 어떤 여자를 만나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아빠와 엄마는 만족해. 일도 마찬가지고. 다만, 염려되는 사람, 그리고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알지?”
“예.”
고맙고 감사했다.
아버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거 치우자.”
“내가 할게.”
“어허! 일요일 한 끼야. 아들이랑 같이 하는 즐거움을 뺏지 마.”
“이이는!”
닭살이 돋을 것 같은 눈빛과 말투여서 강찬은 얼른 일어나 그릇들을 치웠다.
정리를 끝낸 강찬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저 다녀올게요.”
“그래, 아들. 재밌게 지내고 와.”
“다녀와라.”
“예.”
강찬이 배웅한 유혜숙이 거실로 걸어왔다.
“여보. 우리 아들이 또 불쑥 컸지?”
“그래? 난 요즘 찬이가 열 살쯤 더 먹은 것처럼 느꼈다가 모처럼 고등학생이었지 싶은데?”
“당신도! 찬이가 열 살을 더 먹었으면 지금 스물아홉이게?”
“난 그렇게 느낄 때 많았어.”
강대경이 아예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찬이가 당장 결혼하겠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누구랑? 설마 그 미쉘이랑 아가씨는 아니겠지? 여보?”
“그 아가씨가 어때서?”
강대경의 웃는 얼굴 앞에서 유혜숙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나이도 많고, 외국인이기도 하고.”
“아이구, 사모님. 찬이가 그 아가씨 대하는 거 못 봤어? 아주 애 취급 하더구만. 우리 그냥 찬이가 좋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말 하지 말자. 당신은 미영인가 하는 애랑 결혼한다고 해도 걸릴 거 같은데?”
“걔를 왜?”
“미영이 엄마 대하는 당신 표정이 별로던데, 뭘.”
“잘난 체하느라고 찬이 힘들게 할까 봐 그렇지.”
“이거 봐. 벌써 생각해 놨지.”
강대경이 웃자 유혜숙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여보. 당신이 나 기다려 준 거, 나 때문에 유학 포기한 거, 장모님이 반대하셨으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러니까 우리도 찬이한테 다른 욕심은 갖지 말자. 그리고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군대 다녀올 때까지 그냥 지켜보면서 연습하자. 찬이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게.”
심란한 표정을 짓는 유혜숙의 등을 강대경이 다독여주었다.
***
미쉘과 만난 강찬은 백화점에 가서 이런저런 옷과 구두, 운동화등을 샀다. 소위 명품이라는 양복에서부터 라노크를 만날 때 입어도 괜찮을 만한 편안한 옷들을 샀는데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솔직히 이런 비용을 들여서까지 옷을 사는 게 맞는가 하는 심정이었는데 “오늘 산 옷에 지금까지 입던 옷을 섞어서 입으면 돼.” 하는 미쉘의 말을 듣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2시간가량이 훌쩍 지나갔는데 반나절 정도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진이 쪽 빠졌다.
“이제 어머님 것 좀 사자, 차니.”
“어머니?”
“이런 날 그냥 들어가면 서운해하셔. 아버님도 넥타이 하나쯤 사 가야지.”
그런가?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솔직히 마음 써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차니, 어머님과 아버님 거는 내가 살게.”
“그러지 말자. 골라주기까지 했는데.”
“대신 점심 사줘.”
미쉘이 성의라고 말하는 바람에 더는 말리기 어려웠다.
길었던 쇼핑이 그렇게 끝났다.
아침까지 연타석 양식이어서 한식을 먹고 싶었는데 밥을 사기로 했던 참이라 그냥 미쉘이 택한 걸 먹을 생각이었다.
미쉘은 한남동 어림에 차를 세웠다.
“여기 육개장이 맛있어.”
속을 읽힌 것 같아서 풀썩 웃음이 나왔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근처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가자.”
미쉘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끈적거리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땐 편안하게 대해준다.
“집 앞에선 못 할 테니까 지금 안아줘.”
애정 결핍도 아니고.
팔을 뻗어 안아주자 미쉘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또 걱정되는 일 하는 거 아니지?”
“그럴 게 뭐 있어.”
“차니. 다치면 안 돼.”
몸을 뗀 미쉘이 강찬의 손을 잡았다.
서양 애들은 손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런 여자들이 나이가 들면 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 스타일이 된다.
곱게 늙은 프랑스 여자?
글쎄. 강찬은 지금까지 열 명을 채 못 봤다.
차는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 통화해, 차니.”
“그래.”
옷을 가지고 내린 강찬은 곧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다녀왔습니다.”
TV를 보고 있었던 게 분명한 유혜숙이 현관에서 강찬을 맞아주었다.
“다녀왔니?”
“그게 오늘 산 거야?”
“예.”
강찬은 쇼핑백을 현관 앞에 내려놓고 강대경과 유혜숙의 물건을 찾았다.
“이거 하고, 또?”
강찬은 두 개를 찾아서 유혜숙에게 건네주었다.
“미쉘이 사 줬어요. 이건 아버지 거, 이건 어머니 거래요.”
“미쉘이?”
강대경과 유혜숙이 뜻밖의 선물에 놀라는 얼굴이었다.
강찬이 방에 옷을 놓고 나왔을 때 두 사람은 포장을 풀고 있었다.
“어머! 정말 예쁘다! 여보? 이거 어때?”
“잘 어울리는데?”
유혜숙이 들고있는 블라우스는 강찬이 봐도 세련돼 보였다.
“당신 건 넥타이네? 미쉘이 감각이 대단하구나. 다음번에 정말 동대문 한번 같이 가야겠다.”
이런 거였구나.
두 사람이 흡족해하는 것을 보며 강찬은 좀 더 사올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아들, 과일 먹을래?”
“그럴까요?”
모처럼 가족과 한가한 일요일 오후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뭐예요?”
“대서양과 태평양 심해에서 엄청난 지진이 있었나 보다. 쓰나미 주의보가 내려서 하와이부터 유럽까지 해안가가 난리다.”
유혜숙이 과일을 가져와 깎는 동안 강대경은 TV 뉴스에 나온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당최 요즘은 뉴스만 나오면 사상 최고다.
“지진의 범위가 이렇게 넓고 강했던 적도 없고, 또 바다 두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적도 없단다. 자칫하면 지각판 전체가 흔들릴지 몰라서 로스앤젤레스나 하와이, 그리고 작은 섬들은 존폐자체가 위험하다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양진우만큼 위험하진 않을 거다.
강찬은 강대경에게 참외를 건네주고 한쪽을 입에 넣었다.
엄청난 해일만 아니라면 저런 지진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하나 콱 터져주었으면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