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14화 (11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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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해달란 대로 해주지.

유라시아철도 발표의 감동이 수그러드는 시점에 터진 해저터널 공사 발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덕분에 인터뷰 요청이 없어지다시피 했는데 양진우가 너무 급격하게 관심의 중심에 서버려서 당장 그를 어쩌기는 어려웠다.

강찬과 석강호는 토요일 점심시간에 김형정의 삼성동 사무실을 방문했다.

“오늘은 탕수육도 하나 시킵시다.”

“알겠습니다.”

석강호의 요청을 김형정이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차와 담배를 준비해 준 김형정이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국가정보원에서 분석한 자료입니다. 양진우의 제안대로 해저터널을 이용한 고속도로와 철도가 연결된다면 유라시아철도의 거의 모든 수익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점을 방송이나 언론에 내보내면 안 되나요?”

“지금은 어렵습니다.”

김형정이 재떨이를 찍는 것처럼 담배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이 먼저 우리나라에 졌다는 식으로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거기다 양진우의 자식들이 살해된 이유가 해저터널을 저지하기 위한 협박이었다고 동정표까지 몰린 상황입니다. 이런 걸 바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무리 객관적 자료를 내놓아도 바람이 불면 소용없습니다. 고도의 선거전에서나 쓰는 방식입니다.”

“허가를 안 내주면요?”

“일본에서는 공사를 진행할 겁니다. 그럼 공사가 진척되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힙니다. 가뜩이나 내년에 국회의원 선거까지 있어서 자칫하면 유라시아철도를 지켜내지도 못하는 꼴이 됩니다.”

“이 새끼도 강적이네.”

석강호의 한 마디가 가장 적절한 표현처럼 들렸다.

“당장은 손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양진우가 갑자기 죽게 되면 민심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김형정이 흘깃 강찬을 보며 말을 마쳤다.

“팀장님.”

“말씀하십시오.”

“이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 안 드세요?”

강도가 세다고 느꼈는지 석강호가 슬쩍 김형정을 보았다.

“대통령이 있고, 국가정보원부터 많은 국가 기관이 있는데 이런 걸 그냥 지켜보겠다는 건가요?”

“당장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강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긴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목숨을 대놓고 노린 건 증거가 없는 거고, 유라시아철도의 이익을 일본에 팔아넘기겠다는 것은 민심이 무서워서 못 막겠다니.”

김형정은 이를 꽉 깨문 채로 담배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 형사 면책권은 유효합니까?”

“강찬 씨.”

“그것도 양진우에게는 해당 안 되는 건가요?”

“강찬 씨! 이런 건 감정으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 감정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하실 건데요?”

강찬의 질문에 김형정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를 대놓고 습격했고,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외국인 칼잡이를 고용한 데다, 불쌍한 두 자매를 죽였습니다. 제게 증거가 없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김형정이 결정권자가 아니란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할까요? 부모님과 프랑스로 귀화할까요? 내가 사는 나라에서 내 부모가 살해당할 위협에 놓였는데 상대가 돈 많고, 힘이 있어서 꼼짝도 못 합니다. 국가 정보원 요원들이 20명 가까이 지켜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흠.”

강찬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정 방법이 없다면 제가 양진우 해결하고 프랑스로 가겠습니다.”

찰칵.

“후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 뒤에 유라시아철도가 어떻게 되든 그건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알아서 할 부분입니다. 이 정도로 빤한 음모에 방법을 못 찾을 줄 알았다면 전 절대로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원장님께 강찬 씨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강찬 씨.”

강찬은 시선만 주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정보국 모두 위급한 순간에는 암살이란 걸 합니다. 우리가 그걸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나중에 이런 방법들이 정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쓰일까 봐 염려하는 부분도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김형정이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지금의 러시아가 그렇습니다. 공작 정치나 암살을 자행합니다. 대통령님은 국가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정착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지, 민심의 이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찬은 김형정의 눈빛에 담긴 열의를 보았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며 몽골로 출발했던 남자, 끔찍한 고문을 견디면서도 소속된 나라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남자다.

“제가 말이 심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진 않습니다. 솔직히 강찬 씨 핑계로 원장님께 속에 있는 말을 시원시원하게 쏟아 부을 거니까요.”

김형정이 손바닥을 펼쳐서 얼굴을 쓸어댔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을 답답해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양진우가 죽으면 해저터널을 막을 수는 있나요?”

“양진우가 함께 다니는 경호원이 10명입니다. 움직임으로 봐서 특수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젠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 돼 버렸다.

“일단 막을 수야 있겠지요. 서정그룹을 공중분해 시킬까 하는 점도 생각해 봤는데, 자칫 일본의 자금이 들어와 서정그룹을 인수해 버리면 그때는 아예 막을 방법조차 없습니다. 거기에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야권이 양진우를 지지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동선은요?”

“집과 회사만 오갑니다. 철저하게 CCTV 반경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사고를 위장하기도 어렵구요.”

“쯧!”

총으로 쏴서 죽이는 건 한국에서 무리한 짓이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있어서 뒷수습이 정말 어려울 거다.

“해저터널이 정식으로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기간이 있나요?”

“우리 정부가 승인을 안 내주면 연결은 절대 어렵습니다. 민심을 등에 업은 야권이 대통령 탄핵안을 내놓는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한 달 정도는 여유가 있다고 봅니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유라시아철도를 막으려고 난리를 치던 놈들을 이번에는 이쪽에서 막아야 하는 거다.

축구나 야구 경기도 아니고, 수비와 공격을 바꿔야 한다.

“양진우를 죽였을 때도 역시 가장 무서운 건 대통령 탄핵입니다. 국민을 못 지켰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지요. 그렇게 되면 해저터널은 또 진행됩니다.”

“국회의원이란 놈들이 왜 그러지?”

석강호가 툴툴거리며 화를 쏟아냈다.

“엄청난 자금을 풀 겁니다. 일본이 현재 가진 모든 경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일을 통과시키려 할 테니까요.”

“결국은 일본이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거네요.”

“그렇게만 된다면 양진우는 제 손으로 해결하겠습니다.”

강찬과 석강호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해저 터널을 막고 싶은 김형정의 절절한 심정을 느끼자 그냥 동시에 나온 웃음이었다.

“이건 좀 더 고민해 보죠.”

지금 답이 나올 건 아니어서 그렇게 의논을 끝냈다.

***

김형정의 사무실을 나와서 강찬과 석강호는 집 앞으로 움직여 사거리 커피 전문점에 자리를 잡았다.

석강호가 음료수를 주문하러 간 틈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려서 들었는데 입력이 되지 않은 번호였다.

인터뷰 전화가 뜸하니까.

강찬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어디서 들은 목소린데?

[“나야. 은실이.”]

하! 또 어디서 일이 생기나?

강찬은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왜?”

[“잠깐 볼 수 있어?”]

“무슨 일인데? 그냥 전화로 얘기해.”

[“만나서 얘기해야 돼. 어디든 장소만 정해주면 내가 갈게.”]

‘어디든 사고 하나 끌고 갈게.’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아서 강찬은 한 시간 뒤에 오라는 말과 함께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줬다.

“누구요?”

석강호는 탕수육을 혼자 다 처먹다시피 하고도 또 세숫대야만 한 팥빙수를 들고 왔다.

“은실이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한 시간 뒤에 이리 오라고 했어.”

“은실이? 허은실이 말이오?”

“그래.”

“걔는 또 무슨 일이지?”

석강호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팥빙수를 가득 입에 넣었다.

“고민할 거 없어요. 우린 우리 식대로 해결합시다.”

“마음 같으면 용병 하나 조직해서 일본 가겠다.”

“그것도 괜찮소. 어흐!”

강찬의 시선 앞에서 석강호가 머리를 손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야! 이것 좀 많이 먹었다고 골이 다 쩡쩡 울리네.”

이놈하고 있으면 이렇게라도 웃는 맛이 있다.

석강호가 가고 나서 10분쯤 지나 허은실이 커피전문점에 들어섰다.

쫄티에 팬티를 겨우 가린 것 같은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거기에 입술만 붉게 칠해 놓으니까 ‘나 좀 놀아요.’하고 온몸에 써놓은 것처럼 보였다.

허은실은 강찬을 보고 “뭐 마실래?” 한 뒤에 바로 주문대로 향했다.

“TV에 멋지게 나오더라.”

강찬의 맞은 편에 앉은 허은실이 빨대의 비닐을 벗기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응. 축제 때문에.”

“축제?”

허은실이 빨대를 입에 물고 있어서 강찬은 잠시 기다려주었다.

“우리 가을 축제 하잖아. 심덕이랑 두 곳에서 학부모들까지 동원해서 빵빵하게 한대. 그러니까 좀 도와줘.”

음료수를 내려놓은 허은실이 맡겨놓은 것을 달라는 투로 강찬을 보았다.

“내가 축제 운영위원장이야.”

강찬은 그만 풀썩 웃고 말았다.

“운동부 전체가 운영위원이야. 이번만큼은 심덕에 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는 대학도 못 갈 거고, 그래서 이게 마지막 축제잖아.”

“어떻게 해야 안 지는 건데?”

“학교 축제에 주민들이 많이 오면 되는 거야. 마지막 날 공연에.”

“사람을 불러달라는 거냐?”

허은실이 왜 모르는 척하느냐란 눈빛으로 강찬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심덕은 소유란하고 AMP 부른대. 거기 학생 아빠 한 명이 기획사 운영한다고. AMP 몰라? 요즘 막 뜨는 걸그룹 있잖아.”

에효. 이년을 만나서 뭘 기대한 거냐.

결국, 학교 축제에 연예인 불러달란 말인 거다.

“우리 학교에 왕따 없어졌다고 전학 오겠다는 문의가 들어온대. 나 요즘 처음으로 학교 나가는 게 재밌어. 그래서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보고 싶어졌어.”

이런 말은 좀 진지하게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허은실은 삐딱하게 등받이에 기대앉아서 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 옷 사는데 같이 가주라.”

이 년이 나도 모르는 약점을 잡았나?

아니면 날라리 짓을 못해서 미쳐버린 건가?

“옷이 전부 이런 거 밖에 없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평범해 보이는 옷 입어 보려는데 도통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좀 골라줘.”

“그런 건 호준이랑 같이 가면 되잖아?”

“걔도 나랑 똑같은데 어떻게 믿어?”

다른 건 몰라도 이년 깡다구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화장도 하지 말래서 안 했잖아.”

강찬은 짜증이 올라오려고 했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것 많은데, 이게 정말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오늘만 같이 가주라. 다신 이런 부탁 안 할게. 정말 나도 똑바로 살아보고 싶단 말이야.”

제 딴에는 애교를 섞은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하아!’

강찬은 심오한 표정으로 허은실을 보았다.

차라리 수학 교과서를 들여다봤으면 봤지, 이년의 속은 도통 알 길이 없다.

“난 내 옷도 못 골라.”

“그러니까 네가 고르면 숙맥들이 입는 옷일 거 아냐.”

이젠 아예 웃음이 나왔다.

오냐. 일진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아보겠다는데 그깟 옷 사는 거 한번 같이 못 가 주겠냐.

“옷을 어디서 파는데?”

“트론스퀘어.”

지겨운 곳이다. 남산 호텔만큼이나.

“알았다. 가 보자.”

강찬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허은실이 냉큼 따라 일어섰다.

택시를 잡은 강찬은 조수석에 올랐다.

“트론스퀘어요.”

가는 동안 말도 없었다.

기사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허은실이 뒷좌석에 삐딱하게 앉아서 다리를 꼬고 꺼떡거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트론스퀘어는 엄청나게 붐볐다.

토요일이다.

백화점과 연결된 2층과 3층에 옷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저 안쪽에 좀 싼 것들이 있어.”

미쉘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허은실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싼 티, 날라리.

두 가지를 이년처럼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어려울 거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강찬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허은실은 트론스퀘어에서도 꽤 큰 매장으로 들어갔다. 가격이 저렴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강찬은 옷을 고르는 허은실의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강대경과 유혜숙의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와 달리 어딘지 목에 줄을 매단 것처럼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이거 어때?”

“아기 옷이냐? 지금 입고 있는 거랑 똑같잖아.”

툭.

허은실은 골랐던 옷을 성의 없이 던져 놓았다.

“이건?”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뭘?”

“지금 입고 있는 거보다 더 짧잖아?”

“이게 짧은 거야?”

강찬의 눈빛이 달라진 걸 본 허은실이 잽싸게 몸을 돌렸다.

“허은실?”

강찬이 부르는데도 허은실은 모른척하고 있었다.

“야.”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괜한 짓을 한 거다.

병아리 대원이 모자와 두건을 달랄 때 눈빛이 떠올라서, 한 번쯤 똑바로 살아보겠다는 말에 같이 와주기는 했지만, 이걸 더 참기는 어려웠다.

강찬이 돌아서기 직전이었다.

홱!

허은실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모르겠어! 몰라! 그래서 도와달라고 했잖아! 먼저 골라주지 않으니까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좋아하는 게 뭐야? 어떤 걸 입으면 보통 애들처럼 보이는 거야!”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달려왔다.

억울해 하는 얼굴과 눈빛이었다.

잘해 보고 싶어하는데 안 되는 거다.

이년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몰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와.”

허은실이 반사적으로 강찬의 오른손을 보았다.

“나와 봐.”

실망하는 기색을 덮어쓴 허은실을 데리고 강찬은 매장을 나왔다.

통로에 등이 없는 벤치가 있었다.

“앉아.”

허은실이 털썩 소리가 나게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전화를 거는 강찬을 힐끔 보며 억울한 얼굴이었다.

“여보세요?”

[“차니! 어디야?”]

“여기, 트론스퀘어. 미쉘, 미안한데 코디하는 직원 한 명 이리 보내줄 수 있을까?”

[“차니, 옷 사려고? 그럼 내가 갈게!”]

“그게 아니라 좀 평범하게 입고 싶어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옷을 못 고르겠어서 그래. 미쉘이 오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우니까 직원 있는지만 알려줘.”

[“설마 차니의 새로운 여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강찬이 뚝 자르자 미쉘이 얼른 말투를 바꿨다.

[“미안, 차니. 여의도하고 논현동에서 야외촬영이 있으니까, 음. 트론스퀘어까지 20분안에 갈 수 있을 거야. 어디야?”]

“2층 안쪽 통로에 있어.”

[“지금 바로 출발하게 할게. 오늘은 한가해? 그럼 같이 저녁 먹자.”]

한가한 꼴을 보인 거다.

“그래. 일단 여기 정리하고 전화할게.”

[“알았어, 차니.”]

통화를 끊었을 때 다리를 꼬고 앉은 허은실은 하도 바지가 짧아서 아래는 아예 아무것도 안 입은 것처럼 보였다.

20분이나 기다려야 한다.

“담배 피우고 올 건데 여기 있을래?”

“같이 가.”

허은실이 먼저 일어났다.

2층에서 내려서 전에 애들을 두들기던 화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찬은 담배를 꺼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피울래?”

“응.”

같은 ‘응.’이란 대답이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지. 그러고 보니 김미영에게도 티 한 장 사준 적이 없다.

둘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안, 전혀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강찬이 힐끔 바라보자 “심덕 일진 새끼들.”하고 허은실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2층으로 돌아와서 10분쯤 시간을 보내고 나자 코디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토요일에 미안해.”

“전혀요. 요즘처럼 일하는 건 정말 힘든 줄도 몰라요, 대표님!”

옷을 사는 허은실보다 코디 직원이 더 들뜬 얼굴이었다.

“우리가 제작사로 주연, 조연 다 하는 거잖아요. 코디나 메이컵들도 주연 맡거나 제작사 쪽이 힘이 생겨요. 저뿐만이 아니라 직원들 전부 요즘은 산삼 먹은 것처럼 힘이 있어요!”

이거야 원.

강찬은 틈을 봐서 허은실을 소개하고 평범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찾아봐 달라고 했다.

“비용은 얼마나 생각하세요?”

강찬은 당연히 허은실을 보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쭈뼛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는데, 진짜 어처구니없게도 돈가스를 먹자는 친구들과 헤어질 때의 심정이 떠올랐다.

“내가 살 거야. 그러니까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돈에 구애받지 않아도 돼.”

“예, 대표님.”

허은실은 끝내 강찬을 보지 않았다.

코디 직원은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 다음 매장 한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사천리, 일당백이다.

삽시간에 매장 네 곳을 돌고 난 여직원이 허은실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촌스럽지도 않다.

이건 이렇게 입어라, 아까 산 옷과 이걸 섞어 입어도 된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어쩐 일인지 허은실은 군소리 않고 여직원이 입어보란 대로 입고, 골라주는 대로 받았다.

1시간이 채 안 돼서 코디 여직원이 돌아갔다.

솔직히 허은실은 다른 아이처럼 보였다.

‘나도 옷을 제대로 사야겠구나.’

옷이 이 정도까지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하는 줄은 몰랐다.

“됐어?”

허은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 하나 피우고 가자.”

구경하는 게 엄청나게 지치는 일이다.

강찬은 다시 화단 앞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 허은실과 둘이 불을 붙였다.

아무튼 끝났다.

강찬이 무심코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느낌이 이상해서 시선을 돌렸는데 허은실이 울고 있었다.

이년이 옷 몇 장에 울어?

코디 직원의 전문성에 감동했나?

강찬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년은 그냥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처음이야.”

코를 문지른 손등을 엉덩이에 닦으며 허은실이 입을 열었다.

“옷 사주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거.”

미친년, 눈물을 닦아야지 콧물만 닦냐.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잘해 보려고 할 때마다 아무도 안 도와… 줬거든. 흡.”

허은실이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짝다리나 풀고 얘기하든지.

“담배 하나 더 줘.”

그냥 줬다. 얼른.

“축제 멋지게 끝내보고 싶어. 정자년들이랑 심덕 일진 새끼들한테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거 보여줄 거야. 그리고 나, 코디 해볼래.”

어떤 연기자인지 모르지만 날 티 나게 입는 거 하나는 우주 최강이 될 거다.

“아까 그 언니 전화번호 좀 알려주라. 학원이랑 물어보게. 흡!”

하여간 이년은 정말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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