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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엉뚱한 전개.
자리를 옮기자 직원들이 식사를 준비해주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원래 프랑스 식사는 계속해서 음식이 나와야 맞는 거지, 이렇게 한 번에 다 내주고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비벼 먹으란 뜻이 아니라면 자리를 비우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강찬 씨. 중국과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입니다.”
라노크가 스테이크를 자르며 건넨 말이었다.
“특히 일본을 주목하세요. 그들은 중국과 달리 기댈 곳이나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그건 저보다 정부가 나서야 할 일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요.”
라노크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부터는 처절한 스파이전입니다. 강찬 씨도 이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사님.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라노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서양놈들은 정말 이렇게 쉬었다 먹어도 괜찮은 건가?
식사라는 게 원래 딱 먹고 말아야 하는 건데 이놈들은 이런 식으로 2시간씩 밥을 처먹는다.
***
라스베이거스의 호화로운 저택 2층.
미국에선 보기 드물게 창호 문에 온돌을 깔았고 고급스러운 상을 방 가운데 놓았다.
양진우는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양 회장. 중단했던 해저 터널을 건설할 예정입니다.”
“어쩐지. 바다 밑으로 고속도로와 기차를 낸다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일본은 그때부터 유라시아철도가 설립될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양진우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해저터널 비용 100조는 전액 일본이 부담하겠습니다.”
“흥. 이제와서 한국으로 몰릴 물동량을 일본으로 가져가겠다? 그렇다면 한국은 그저 거쳐 가는 정류장쯤 되겠군요.”
양진우가 입술을 길게 늘이며 커다랗게 숨을 내쉴 때였다.
“양 회장께 해저터널 공사를 전부 맡기겠습니다.”
“한국 정부가 그걸 받아들이겠소?”
눈이 뒤집힐 제안이었으나 양진우는 코웃음을 치는 표정이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쉽게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진 않아요, 가네마루 상. 아무리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재현은 국민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유라시아철도는 당장 보이는 것이 없지요. 하지만 해저터널은 곧바로 한국의 모든 건설업체가 달려들 수 있는 일입니다. 한국의 국민들이 건설을 요구하게 만들면 됩니다.”
가네마루가 달래듯 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본은 본국의 방송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한국의 경제적 속국이 되었다는 보도를 떠들 것이고, 해저터널로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제 효과를 한국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비판할 것입니다. 이 정도라면 한국 국민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흥분할 것입니다. ”
양진우의 입 끝이 살짝 올라오는 것을 가네마루는 놓치지 않았다.
“양 회장이 공사를 따낸 것으로 하고, 한국의 1군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더욱 좋습니다. 거기에 과반을 차지한 의원들이 공사를 요구하고 나서면 지금 정권은 이 일을 막지 못합니다. 사전 작업을 위해 10조를 내놓겠습니다.”
“크흠.”
“양 회장. 총리께서는 양 회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바하마에 2조를 예치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내놓았습니다.”
양진우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침묵이 잠시 흐른 다음이었다.
“이 일로 한국에서의 전세를 역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 회장의 일을 막아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일본의 정보국이 알아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양진우는 나직하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의 거시적인 계획과 판단은 도저히 한국이 따르기 어렵군요.”
“대신 한국에는 양 회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일본은 늘 양 회장이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가네마루가 넉넉하게 웃은 다음 뒤를 돌아보며 손뼉을 한번 쳤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양복을 입은 사내 10명이 세모꼴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코타로우.”
“하이!”
가장 앞에 엎드린 사내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며 답을 했다.
“앞으로 네가 모실 주인이다.”
“하이! 하지메 마시데! 도조 요루시쿠!”
“일본 정보국 100년 동안 가장 뛰어난 요원입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 드릴 것입니다.”
양진우가 엎드린 사내를 보며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라노크와 헤어진 강찬은 오광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찬! 너 어디야!”]
“서대문. 전화기를 잃어버렸다가 이제 찾았다.”
[“하여간! 야! 그냥 들어가지 말고 얼굴 한번 봐!”]
“그러자. 어디로 나올래?”
[“남산 호텔 어떠냐?”]
“지금 당장은 불편하지. 어디 조용한 데 없겠냐?”
[“조용한 데? 야! 그러지 말고 그냥 방 얻자. 요즘은 조용하게 커피 마실만한 곳이 거의 없어.”]
이상하게 남산 호텔을 떠날 방법이 없다.
“알았다. 지금 출발할 거니까 한 30분 걸릴 거다.”
[“예. 예. 쳐오기나 하십쇼.”]
강찬이 풀썩 웃자 오광택이 따라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주철범이 강찬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뭐하냐? 빨리 들어가.”
“예, 형님.”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던 강찬은 로비 라운지의 앞에 잠시 멈추고 말았다. 새로운 직원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차 한잔 하고 올라가시겠습니까?”
“됐다. 가자.”
“예, 형님.”
주철범이 존경심을 가득 담은 얼굴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701호에 도착한 주철범이 카드키를 꺼내 바로 문을 열었다.
“야!”
오광택이 소파에서 일어나 강찬의 앞으로 왔다.
“괜찮냐? 괜찮은 거야?”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어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개새끼! 텔레비전에 나갈 거였으면 날 데리고 갔어야지.”
둘이서 소파에 앉자 주철범이 공손한 태도로 커피를 따라 주었다.
당연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어, 그래라.”
오광택의 답을 들은 주철범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아직 분당 일 일으킨 놈이 누군지 제대로 못 찾았다.”
“알아! 그렇게 바빠서 찾을 시간이나 있었겠냐? 그 난리 통에서 살아났으면 됐다.”
이상하게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뭘?”
오광택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강찬이 담배를 끄고 빤히 바라보자 오광택은 먼저 얼굴을 쓸었다.
“동생들한테는 말 못했는데.”
놈은 말을 하다말고 다시 담배를 꺼내물었다.
“이상하게 불안하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전부 칼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집에 있어도 불안하고, 호텔에 있어도 불안하고. 흐아! 애들한테 쪽팔려서 말도 안 나온다.”
깡패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전투에 나가서 대원들을 잃은 구대장들이 느끼는 공포를 깡패 두목이 느끼고 있는 거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니까 말한 거야. 이래도 아직 누구한테든 안 질 자신 있어.”
강찬은 피식 웃었다.
이런 건 그냥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나온다.
이걸 이기고 일어서느냐,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느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의 전화가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자비에입니다.”]
이 새끼가 라노크를 만난 걸 알고 전화한 건가?
뒤를 쫓아다녔나 싶어서 강찬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양진우의 아들 가족 셋을 처리했습니다.”]
뭐를 어떻게 했다고? 가족 셋?
“양진우 아들한테 어린 애가 있었다면서? 누가 그걸 시켰어?”
[“두목께서 성의를 보이시기 위해 지시한 일입니다. 모두 참수했습니다.”]
“야, 이 개새끼야!”
오광택이 퍼뜩 고개를 들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답은 없었다.
“아직 어린 애라면서! 영감이나 아버지가 잘못한 건 있을지 몰라도 애가 무슨 죄가 있어, 이 개새끼야!”
[“아무리 우리가 중재를 부탁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이 새끼가 정말 미국의 정보국 요원이 맞는 건가?
길게 숨을 내쉬는 강찬을 오광택이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이미 미국에 있는 조직원에게도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지금쯤 목을 썰고 있을 겁니다.”]
강찬은 아예 헛웃음이 나왔다.
라노크는 이런 새끼를 왜 두목으로 앉히려는 거지?
“자비에. 지금 전화해서 멈추라고 해. 그럼 중재해 주지.”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끝까지 냉정한 음성을 듣자 기운이 쭉 빠졌다.
양진우가 미운 것과 어린 애들을 죽이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부족 간의 전쟁도 아니고, 죄 없는 아이들의 목을 자르는 건 목적이 어떻든 간에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찬은 담배를 들었다.
상황이 자꾸만 엉뚱하게 꼬인다.
“무슨 일인데 그래?”
“말도 마라. 유라시아철도에 오만 잡놈들이 끼어들어서. 에휴! 관두자.”
오광택은 더 묻지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웅웅웅. 웅웅웅.
강찬은 재빨리 전화를 들었다.
[“자비에입니다. 이미 참수를 끝냈답니다.”]
“미국에 있는 식구 전부를?”
[“아들과 딸 내외, 그들의 자녀 셋, 도합 일곱입니다.”]
미친 개새끼들.
세흐토 브니므의 잔인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부로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하도 기가 막히니까 웃음이 피식, 피식 나왔다.
[“우선 여기까지입니다. 양진우의 동향이 파악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후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다.
몸뚱이는 뻑뻑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전화가 몇 통 왔는데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어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찬은 전화를 들어 방금 있었던 통화 내용을 라노크에게 전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군요.”]
이 구렁이가 이걸 정말 짐작 못 했을까?
[“지켜봅시다.”]
“예. 대신 저는 중재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제 선에서 알아서 하지요.”]
강찬은 전화기를 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가족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쓸데없이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됐다면 양진우를 하루속히 죽여서 싸움을 끝내는 것이 현명하다.
***
오광택과 헤어져 집에 온 후로 별일은 없었는데 전화기가 문제였다. 강대경, 유혜숙은 물론이고 느닷없이 강찬의 전화기까지 도통 쉬지 않고 울려대는 통에 다른 통화를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용은 전부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방송에 출연하라는 것이었는데 당연하게 그에 응할 이유는 없었다.
유혜숙의 경우는 특히 심해서 아는 기자가 있는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인터뷰해 달라는 친구들이 제법 됐다.
다음 날, 강찬은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이틀 사이 국가정보원이 총력을 기울여 테러리스트들의 신원을 파악하려 애썼고, 중국에 항의와 협조요청을 했으나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외교라는 게 웃기다.
중국은 몰래 북한군 준비시켰다가 모두 죽었고, 한국은 또 모르는 척 항의하고 협조를 요청한다.
“하아.”
몸이 개운해지자 덩달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 뒤로 자비에로부터 전화는 없었다.
아이들의 목을 자르는 놈과 굳이 연락할 이유도 없어서 강찬도 아예 잊어버리기로 했다.
혹시 모른다.
눈앞에 또 불쑥 나타나면 목을 비틀어 버릴지.
“얼른 씻어, 아들. 밥 먹자.”
“벌써 운동해도 되겠니?”
“예. 몸은 이제 괜찮아졌어요.”
대답을 마친 강찬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은 세 사람 모두 전화를 아예 무음으로 조작했다.
도대체 아침도 먹기 전에 인터뷰를 요청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침을 먹고 강대경과 유혜숙이 출근하자 문자가 떴다.
[무슨 일 있는 거요? 전화 좀 받으쇼.]
이 새끼가 언제 전화했었지?
강찬은 석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소?”]
“하도 인터뷰하자고 전화를 해대서 아예 소리를 죽여놨었어. 왜?”
[“특별한 일 없으면 차나 한잔 하러 갑시다. 이상하게 속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자. 얼마나 걸려?”
[“아예 한 시간 뒤에 봅시다.”]
“알았다.”
강찬은 느긋하게 석강호와 만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전화기에 연속해서 불이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서 보면 모르는 번호다.
이게 사람 환장할 노릇이다.
당장은 번호를 바꾸기도 그렇고.
***
아파트 앞에서 만나 미사리로 움직였다.
이른 시간이라 첫 손님쯤 되는 모양이었다.
멀리 펼쳐진 강을 보며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후련하게 느껴졌다.
강찬은 세흐토 브니므가 양진우의 아들 둘과 딸을 살해했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염병.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구. 거 괜히 불똥이 대장한테 튀는 거 아니오?”
“글쎄? 양진우 그 새끼 능력이라면 누가 했는지 금방 알 테니까, 세흐토 브니므를 노리지 않겠냐?”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걔들과 맞선다는 게 어디 쉽겠소? 라노크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 양진우가 돈으로 그걸 이겨보려고 한다면 당장 제 모가지가 먼저 날아갈 텐데요.”
“그렇긴 하다.”
커피를 마시며 오광택과 만났던 이야기, 라노크와 점심을 먹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대장은 이제 어떻게 할 참이오?”
“쯧! 애들이 그렇게 죽었다니까 마음이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양진우를 정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셈이다.”
“에이, 죄는 양진우가 졌는데 왜 엉뚱한 애가 죽는 거야? 빌어먹을!”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그 새끼가 또 부모님을 노릴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냥 두기는 어려워. 더구나 불쌍하게 죽은 여자애들도 있고.”
“들어오긴 하겠소?”
석강호가 테이블을 감싸듯 어깨를 둥글게 한 자세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봐야지. 자비에 말로는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로 들어올 것 같다고 했고, 김 팀장님도 별도로 알아본다고 했으니까 방법이 있겠지.”
“후우. 자비에는 미국 정보국 요원이라고 했다면서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프랑스 정보총국 같은 조직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
강찬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댔다.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뒤엉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번 마주쳐서 단번에 끝장을 보는 것이 백번 낫다.
“내일부터는 뭐할 거요?”
“딱히 할 일도 없다. 학교 나가기도 그렇고 그냥 근처에 운동할 만한 곳 한번 알아보려고.”
“이거 봐. 지난번에 그 땅을 샀어야 했던 건데.”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석강호는 아직 그 땅이 마음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전화가 계속 걸려왔는데 그때마다 강찬은 번호를 확인했다.
“보는 내가 다 정신 사납소.”
“당하는 난 어떻겠냐?”
강찬이 투덜거린 다음이었다.
또 전화가 왔는데 이번엔 김형정이었다.
“이거 봐라.”
강찬은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강찬 씨. 김형정입니다. 어디세요?”]
“저 석강호와 미사리에 와 있는데요.”
[“양진우가 귀국한답니다. 거기 계실 거면 내가 그리로 가지요.”]
“예. 여기서 점심 먹을까 했으니까 이리로 오세요.”
전화를 내려놓자 석강호가 “이리 온다는 거요?” 하고 물었다.
“양진우가 귀국한단다.”
“예?”
강찬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양진우가 들어온다는데 왜 이렇게 찜찜한 느낌일까?
자식들과 손자를 잃은 것에 대해 동정심이 생겨서 그런가?
강찬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강을 바라보았다.
독하게 마음먹자.
하나씩 정리하는 거다.
양진우, 그리고 첩보전.
따지고 보면 원래 유라시아철도의 연결을 위해 도움을 주겠다고 시작했던 일이 여기까지 온 거다.
철도의 발표까지 앞당겨 일을 이루었으니 양진우를 통해 뒷마무리를 하고 편하게 살아가 주면 된다.
“개새끼. 이번에 들어오면 반드시 해결해 버리고 속 편히 삽시다.”
석강호의 걸걸한 목소리가 강찬의 생각을 깨웠다.
커피를 좀 더 달라고 해서 막 가져왔을 때 김형정이 도착했다.
“하여간 저 양반도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야.”
테이블로 다가온 김형정이 먼저 커피를 주문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둘 다 퇴원했는데요. 앉으세요.”
셋이 자리에 앉자 김형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피 올 테니까 온 다음에 말씀하세요.”
“그럴까요?”
며칠 사이에 얼굴이 더 빠졌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아닌 게 아니라 보고서에 치여 죽을 지경입니다. 사망한 테러리스트 신원 파악, 사용된 무기 동향, 입국 경로 등등에, 강찬 씨가 전해준 제보에 맞춰서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데. 아후! 이건 뭐.”
김형정이 세수를 하는 것처럼 손을 펼쳐서 얼굴을 길게 쓸어댔다.
커피가 오자 한 모금을 마신 김형정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양진우가 들어옵니다. 내일 오후에 한국에 도착하는 비행기의 좌석을 예약했는데 일본의 정보국 요원과 함께 움직인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 새끼, 그 지랄을 떨어놓고 그래도 살겠다고 별짓을 다 하네. 미국 국적에 일본 정보원까지, 참나.”
석강호가 불만을 터트린 다음이었다.
“아직 양진우가 정확하게 개입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에 있던 양진우의 자녀들이 살해당한 것은 알고 계시죠?”
“손자들까지 전부 당했다던데요?”
“맞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의 정보국과 손을 잡고 들어온다면 반드시 믿는 구석이나 계획한 것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강찬은 김형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뭐라고 하고, 무엇을 믿든 간에 양진우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강찬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