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12화 (11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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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엉뚱한 전개.

김미영이 학원으로 가고 나자 강찬은 아예 석강호의 병실로 움직였다.

“진즉 이 방에서 지낼 걸 그랬다.”

“그러게 말이오. 둘이 담배라도 피우고 있는데 미영이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소?”

생각만 해도 뒷수습 뻑뻑한 소리다.

“누가 또 오는 거 같던데요?”

“연기자 한 명 다녀갔어. 아후. 내일 봐서 퇴원해야겠다.”

“그러지 말고 하루 더 같이 있읍시다.”

좋은 것을 권한다는 듯한 말투여서 강찬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때 강찬의 병실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 보우.”

“누구지?”

강찬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김형정이 들어왔다.

“벌써 오셨어요?”

“5시입니다. 전화기 전한다는 핑계로 퇴근했지요. 출출할까 봐 사무실 앞에서 삼계탕 세 마리 싸 왔습니다. 여기, 강찬 씨. 그리고 이건 석 선생 전화기.”

전화기를 받은 강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재중 전화, 문자 등이 전화기가 무거울 정도로 가득 담겨 있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한칼에 모두 지워버린 뒤에 셋이서 탁자에 둘러앉아 삼계탕을 먹었다.

확실히 이곳 배달음식보다 맛이 있었다.

“어후! 우리 김 팀장님 사무실에 있으면 난 돼지가 되겠는데요?”

“석 선생이 오신다면 제가 바로 방을 빼겠습니다.”

“푸흐흐. 책상에 온종일 앉혀 놓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모처럼 배불리 먹었다.

몸이 성한 김형정이 커피를 탔고, 강찬과 석강호가 대강 치워서 쓰레기통에 담아두었다.

탁자에 다시 둘러앉았을 때 강찬은 낮에 샤흐트 브니므가 했던 말을 전했다.

“결국, 라노크 대사가 먼저 움직였군요.”

“팀장님은 왜 그러는지 짐작하세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알아서 내놔라. 아니면 내놓을 때까지 죽여주마.”

“죽는 놈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요?”

김형정이 재미있다는 미소를 담았다.

“핑곗김에 죽여 버릴 생각인 거죠. 경고, 복수. 두 가지가 한꺼번에 해결되잖습니까? 어느 정도 화가 풀리면 그때 요구하겠죠. 아마 샤흐트 브니므가 숨도 안 쉬고 내놓을 겁니다. 다음번에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글쎄요? 그때도 라노크 대사가 관련된 일에 무기를 팔 수 있을까요? 아마 절대 못 팔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햐! 그 양반, 무서운 사람이었네.”

“그렇긴 하지.”

강찬도 그 말에 동의했다.

“프랑스에 아들이 있는 건 맞습니다. 그곳에서 해외로 빼돌린 자금을 관리하는데 정확한 규모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도 있다고 하던데요?”

“양진우의 아들이 모두 여섯 명입니다.”

“딸도 있구요?”

“딸은 하나뿐인데 미국에 있죠. 사실 6남 1녀를 모두 다섯 명이 낳았습니다.”

하여간 양진우는 하나에서 열까지 당최 이해되는 구석이 없는 새끼다.

“원장님께 강찬 씨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고, 여권도 일단 신청은 해 놓았습니다. 아마 조만간 양진우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방법을 만들어낼 겁니다.”

“내일쯤 라노크를 만나볼 생각이에요.”

“벌써 퇴원하려구요?”

“예.”

석강호는 서운하고, 김형정은 놀란 얼굴이었다.

아무튼, 움직일 수 있는데 병원에 있기는 싫었다.

1시간쯤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 병실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서 강찬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자 간호사실로 향하던 유혜숙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아들! 병실에 없어서 찾으러 가는 길이야. 어디 갔었어?”

“심심해서 옆 병실에 갔었어요. 일찍 오셨네요.”

“걱정되잖니. 아빠가 맛있는 초밥 사주셔서 가져왔어. 얼른 들어가자.”

“예.”

어설프게 삼계탕 먹었다고 했다가 병실에 붙은 석강호 이름이라도 볼까 봐 강찬은 서둘러 유혜숙을 챙겼다.

“봐! 맛있겠지, 아들?”

맛보다는 배 터지게 생겼다.

“얼른 먹어봐.”

“예. 어머니도 얼른 드세요.”

강찬은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한 점 먹었다.

맛은 있었는데 그런다고 배가 고파지는 건 아니다.

“왜?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유혜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젓가락을 놓으려 했다.

“아니요. 정말 맛있어서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이거 먹고 있으면 오실 때 치킨 사오시기로 했어.”

“예에?”

“아플 땐 잘 먹는 게 최고야. 모처럼 아빠가 큰 맘 먹고 사주신 거니까 걱정말고 마음껏 먹어.”

저런 얼굴로 권하는 걸 어떻게 거부하겠나?

TV 앞에서 기절까지 했을 정도로 걱정했다지 않던가.

그래! 어머니가 행복해하는 일이다!

이왕 먹는 거! 맛있게!

솔직히 삼계탕을 먹었다고 고백할까 했으나 실망할 유혜숙의 얼굴을 생각해서 강찬은 한개 두개 사명감을 가지고 악착같이 먹었다.

“어! 정말 맛있네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좋아하는걸! 앞으로는 엄마가 가끔 사 줄게.”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말이었으나 강찬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많이 먹었다고 배가 찢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혜숙이 저렇게 함께 먹으며 기뻐한다면 한 번쯤은 감당할 만한 일이다.

강찬이 몰래 숨을 조절할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미쉘이 환한 얼굴로 들어섰다.

“어서 와요, 미쉘!”

“안녕하세요? 어머니?”

강찬은 미쉘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니, 이거 좀 드세요.”

“이게 뭐예요?”

“케이크하고 샌드위치에요.”

“어머. 고맙기도 해라. 저녁 전인 모양인데 어째요! 우린 지금 막 먹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있다가 먹을걸.”

“예. 어머니.”

말이 길어지자 미쉘이 못 알아들은 척하고 강찬을 보았다.

“안 바쁘냐?”

정말 짧은 통역이다.

유혜숙이 당황해서 볼 때였다.

“어머니. 저 샌드위치 하나 먹을게요. 어머니는 케이크 드세요.”

“미쉘은 영리한가 봐요. 어쩜 이렇게 한국말이 빨리 늘지요?”

“고맙습니다.”

영리한 게 아니라 영악한 겁니다!

아차 할 때 미쉘은 이미 상자를 열고 있었다.

커피를 타고, 케이크와 샌드위치가 앞에 놓였다.

“아들, 아!”

강찬은 유혜숙이 떠주는 케이크를 한번 먹고는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미쉘은 짧은 문장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샌드위치를 먹으며 유혜숙과 대화를 나눴다.

낮에는 김미영과 은소연의 수다를 듣더니 저녁이 되자 유혜숙과 미쉘의 수다를 듣는다.

“동대문 옷이 정말 괜찮아요.”

“그건 알지요.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가면 당한다던데?”

“잡지사에 협찬하던 회사 옷, 그거 사러 가요.”

“나한테 맞는 게 있을까요, 미쉘?”

“그럼요, 어머니.”

무언가 덩굴이 뿌리부터 엉키는 느낌, 김미영과 은소연이 번호를 교환하더니 이젠 유혜숙과 미쉘이다.

강찬이 심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강대경이 들어섰다.

양념치킨 냄새를 맡으며 강찬은 내일 반드시 퇴원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밤 8시까지 함께 있던 세 사람은 간호사의 주사가 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은 강찬은 소화제를 얻으러 간호사들이 있는 카운터로 갔다가 움찔했다.

보쌈을 맛있게 먹으며 권하는 거다.

화들짝 놀라 소화제를 부탁해서 먹은 후에 음식 냄새를 피해 석강호에게 움직였다.

소화제를 먹었으니 담배를 하나 피우면 살 거다.

드르륵.

석강호의 병실을 열었던 강찬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김태진과 김형정, 석강호가 사이좋게 앉아 족발과 보쌈을 먹으며 강찬을 반겼다.

“전화 안 받아서 직접 왔지. 어서 와. 간호사실이랑 경비실에도 넉넉하게 챙겨 줬고 자네 몫까지 푸짐하게 싸 왔어. 기다리려다가 먼저 먹은 걸 가지고 뭐 그리 서운한 얼굴을 해? 자네 건 아예 포장도 뜯지 않았다니까.”

“이거요. 얼른 오쇼.”

하마터면 탁자를 걷어찰 뻔한 것을 초인적인 의지로 참아낸 강찬은 잠시 방으로 몸을 피했다.

“후우.”

강대경이나 유혜숙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담배를 하나 피워 물자 속이 조금 편해졌다.

***

“그래서 아까 표정이 그랬구만!”

김태진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투로 웃었다.

“TV로 보다가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이 친구까지 연락이 안 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통화가 되어서 바로 달려왔자. 가끔은 소식도 전하고 살자. 석 선생도 그러는 거 아니요.”

“그럴게요.”

김태진의 진심이 담긴 말이어서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광택이 나한테도 한 10번쯤 전화했었어. 기록에 남아 있었을 텐데 나중에 전화 한번 해 줘.”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한 번에 싹 지웠거든요. 이따가 봐서 전화하지요.”

“그래. 아무리 바빠도 안부는 전하고 살자.”

말을 마친 김태진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강찬을 보았다.

“오늘 전 실장님을 뵀다. 자네 얘길 하시더군.”

“제 얘기를요?”

“그래. 느닷없이 불러서 자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으로 자네 같은 친구가 많이 나와야 한다. 절대로 프랑스에 빼앗기면 안 된다.”

김태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양반은 나이를 먹어도 어떻게 변하는 게 없어. 자네가 나랑 강찬이랑 친분이 두텁다고 했다면서?”

“처음에 소개받기 위해서 자네에게 부탁했었다는 말은 했지. 만난 때부터 그 뒤의 이야기를 하라 시니까. 그랬더니 자네랑 친분이 두텁냐고? 그래서 네, 그랬지.”

김태진이 김형정을 힐끔 보고는 웃고 말았다.

살아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것도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

아침에 강대경과 유혜숙이 병원에 들러 출근한 다음, 강찬은 유헌우에게 퇴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움직이는 게 아직 불편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예. 이렇게 누워만 있는 거라면 차라리 집이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럽시다. 하지만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올 거 같으면 바로 입원해야 합니다.”

“그럴게요.”

유헌우가 강찬의 얼굴로 장난처럼 들여다보았다.

“TV에 나오는 모습이 훨씬 멋있어 보이던데요? 첫날 기자들 피하느라고 혼났습니다. 관계자들이 막아준 덕분인지 그때 이후론 잠잠하지만, 아무튼! 큰일 했습니다. 강찬 씨를 치료했다는 것이 자부심을 느낍니다.”

“안 어울리는 거 아시죠?”

유헌우가 풀썩 웃은 다음 강찬의 팔뚝을 툭 치고 병원을 나갔다.

그런데 강찬은 당장 퇴원을 하지 못했다.

옷이 없는 거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석강호가 들어왔다.

“나두 퇴원하기로 했소.”

“괜찮겠냐?”

“대장도 없는 병실에 혼자 있어 뭐할 거요? 그냥 몸살 좀 난 거 같다고 하고 집에 있는 게 훨씬 낫지요. 저녁에 같이 미사리 가서 차나 한 잔씩 합시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이건 누가 언제 올지 모르니 당최 불편해서 어디 맘 놓고 담배나 피겠냐?”

둘이 결론을 내렸는데 당장 입고 갈 옷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최종일이 두 사람의 옷과 신발을 사다 주었다.

***

집으로 돌아오자 이전까지의 일들이 싹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건물, 엘리베이터, 그리고 현관, 거실, 방.

강찬은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유라시아철도에 한국이 포함되었고, 발표가 끝났다.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침대에 앉은 느낌도 들었다.

왜 그럴까?

모든 것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조용한데 가장 먼저 이지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떨리던 손.

불러세웠을 때 지치고 겁먹었던 눈.

어린아이처럼 맹한 얼굴로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고 팻말을 들었던 여자.

그런 여자가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도 못한 채 밧줄에 걸려 죽었다.

얼마나 무섭고, 억울했을까?

강찬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있어도 해서 되는 짓과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짓이 있는 거다.

강대경을 습격했고, 유혜숙을 노린 것도 모자라 불쌍한 자매를, 갖은 고생이 다 끝나서 이제 둘이 힘껏 벌어 홀어머니와 셋이 처음으로 행복을 꿈꾸던 그 어린 여자 둘을 벌레처럼 죽였다.

“양진우.”

강찬은 모니터에 양진우가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넌 정말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이 개새끼야.”

이를 꽉 깨문 채로 모니터를 노려보던 강찬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개새끼, 밥 잘 처먹고 있어라.”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 새끼처럼 미운 새끼는 처음이었다.

강찬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하나씩, 그리고 완벽하게.

늘 그래 왔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하게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다.

전화기의 배터리를 교체한 후 강찬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강찬 씨.”]

“대사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나야 강찬 씨 덕분에 거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에 가보려던 참입니다.”]

“저 퇴원했습니다.”

[“강찬 씨는 늘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대사님. 괜찮으시면 잠시 뵙고 싶습니다.”

[“얼마든지요. 어디서 뵐까요?”]

“대사님이 편하신 곳으로 하겠습니다.”

[“당장 강찬 씨의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호텔은 어렵고, 오늘은 제 사무실이 좋겠습니다.”]

“그러죠. 언제가 편하세요?”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알겠습니다. 12시까지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강찬은 거실로 나가 천천히 몸을 풀었다.

파편에 찍힌 상처는 이미 딱지가 앉았다.

하지만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에 맞은 자리는 그야말로 실컷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뻣뻣했다.

‘끄으응.’

굳은 몸은 풀어준다.

뼈가 부러졌거나 근육이 찢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면 스트레칭만큼 확실하게 몸이 풀리는 것은 없었다.

무리하는 거 맞다.

쉬는 게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져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30분 정도 몸을 풀어준 강찬은 옷을 갈아입고 아파트를 나섰다.

몸뚱이가 악을 써댔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깨끗하게 무시했다.

‘끄응. 주인을 잘못 만난 거야.’

강찬은 택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강찬 씨!”

라노크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프랑스식으로 안고 볼에 소리만 요란한 키스를 나누었는데 알지 못할 동지의식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앉읍시다. 식사 전에 간단하게 차를 한잔 하지요.”

라노크가 긴 팔로 탁자를 가리키자 보좌관이 홍차를 따라주었다.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다음이다.

강찬은 자비에가 방문했었던 일에 관해 라노크에게 있는 대로 털어놓았다.

“자비에는 샤흐트 브니므의 우두머리 파브릭스의 양아들입니다. 잔인한 것으로 파브릭스를 누르는 유일한 후계자이지요.”

“후계자가 많은가요?”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브릭스가 오래 살 수 있는 보험이지요. 양아들, 부하들끼리 견제하는 바람에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역대 가장 영악하고, 잔인한 데다, 또 가장 악랄한 두목이 파브릭스입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그런 놈이 라노크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거다.

그럼 이 구렁이는 얼마나 영악하고, 잔인한 데다, 악랄한 걸까?

“내가 파브릭스에 원하는 정보는 단 한 가지입니다.”

라노크가 정보총국에서도 얻지 못한 정보가 뭘까?

강찬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샤흐트 브니므가 구입한 C4와 이글라의 구입처. 단지 그것뿐입니다.”

고개가 갸웃한 답이었다.

“그 정도라면 정보국이나 정보총국에서 얼마든지 얻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강찬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판매자를 지켜주는 것은 무기 중개상의 첫 번째 원칙이고, 발설할 경우, 그 응징이 마약 거래는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이 구렁이는 김형정의 말대로 샤흐트 브니므를 완벽하게 두들겨 놓고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거다.

“그렇게 되면 샤흐트 브니므는 판매자와 전쟁을 치러야 할 텐데요.”

“그건 그들이 선택할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내가 참석하는 행사에 그런 물건을 팔았다는 것에 대한 응징은 확실하게 해줘야겠지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강찬이 풀썩 웃자 라노크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강찬 씨는 강찬 씨의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강찬 씨가 내 방식의 싸움까지 해낸다면 난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가능하면 대사님과는 싸울 일이 없었으면 싶습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샤흐트 브니므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놈들은 양진우의 자식들 목을 잘라서라도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데 무기 판매상의 이름을 실토하는 건, 지금까지 해왔던 문신을 지우는 것보다 치욕스러운 일이 되는 거다.

“강찬 씨.”

찻잔을 내려놓은 라노크가 강찬을 불렀다.

“샤흐트 브니므와 중재를 하시겠습니까?”

“제가 두목이라면 무기 판매상의 이름을 실토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자비에를 두목에 앉히면 제가 이쯤에서 참는다고 하십시오.”

“대사님.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자비에는 미국 정보국의 요원입니다. 미국이 프랑스에 심으려고 꽤 오랜 시간 공들인 인물이지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는 거지?

강찬은 픽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가 두목이 되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라노크가 의미심장하게 웃은 다음 입을 열었다.

“그가 허상수에게서 받은 군사 정보를 미국에 넘길 겁니다. 미국이 원하는 건, 무기 중개상의 명단, 거래 내역, 그리고 각국의 군사기밀이니까요. 우린 일본과 중국을 싸움 붙일 겁니다.”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화가 나서,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샤흐트 브니므에게 경고 및 복수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속에 이런 계산이 있는 거다.

배우고 싶었다.

적을 죽이기만 하기보다는 저렇게 멋지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돼보고 싶었다.

세상 참!

구렁이가 부러워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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