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06화 (10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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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빨리 좀 끝나라.

점심을 먹고도 강유모터스 직원들은 TV 앞에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2층 사무실은 아예 문을 걸어잠그고 방문객까지 받지 않았다.

“이상민 기자? 프랑스 대사와 함께 있던 동양인의 신원이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이라면서요?”

“네. 오늘 오전에 프랑스 대사와 함께 입장했던 학생은 신묵고등학교 3학년 강찬 학생으로 밝혀졌는데요, 이틀 전에 프랑스 국립대학 전액 장학생으로 초청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신묵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인터뷰를 보시겠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교장이 나와 읽는 듯한 말투로 ‘타의 모범’과 ‘학교의 인재육성 프로젝트의 성과’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강대경과 유혜숙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강찬이 화면에 나온 뒤부터 전화가 시작되더니 점심을 먹고 나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까지 전화해댔고, 그때부터 방문객이 몰려들어서 결국은 사무실 문을 잠그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교장의 인터뷰까지 나온 거다.

“강찬 학생의 아버지인 강대경, 강유모터스 대표가 공트 자동차의 판매권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프랑스 대사에게 강찬 학생을 소개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직 유라시아철도에 대표를 넣지 못한 우리나라로서는 향후 국제세계에 진출할 귀중한 인재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유모터스의 모든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현재 신묵고등학교는 내일까지 모든 수업을 유라시아철도 행사 중계를 보는 것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교장의 재량에 따라 TV 시청을 결정하도록 하라는 답을 따로 내놓았습니다. 이상 현장에서 이상민이었습니다.”

보도가 끝나자 광고가 나왔다.

새로 뽑은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유혜숙에게 다가왔다.

“이사장님. 커피 한잔 드릴까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대표님은 어떠세요?”

“나도 부탁할게요.”

“네.”

여직원이 돌아서는 순간에도 회사의 모든 전화에 영업부 직원이 매달려서 아우성이고, 닫힌 사무실 문을 두드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신은 아무래도 재단 사무실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지?”

“응, 여보. 여기 있다가 오늘은 조용히 들어갈까 해.”

“그러자.”

강대경이 고개를 끄덕일 때 전무가 다가왔다.

“대표님. 오늘 쉬프를 주문하겠다는 고객만 모두 천 명이 넘었습니다. 이 추세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5백 대는 추가될 겁니다.”

“전무님. 수량을 못 맞추는 상황에서 주문을 받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문을 받지 마세요.”

“예. 벌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대기번호를 달라는 고객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전무가 난처한 얼굴로 돌아서자, 강대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차를 팔고 싶지는 않았다.

아들을 파는 느낌이었다.

***

대회의실은 중앙에 네 방향으로 설치된 대형 TV를 중심으로, 두 겹의 원을 돌린 것처럼 좌석이 배치되었다.

뒤쪽 줄은 앞쪽보다 대략 50㎝쯤 높았고, 정보 담당자의 책상마다 마이크와 헤드셋이 설치되어서 발언하는 사람을 TV 모니터 혹은 고개를 돌려 바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책상에 있는 스캐너에 자료를 올려놓으면 TV로 보이게끔 준비되었는데 누구도 자료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앞쪽으로 루드비히, 반트, 그리고 라노크의 친구가 있었고, 뒷자리에 앉은 라노크의 좌우로 로리암에서 보았던 두 사람이 자리했다.

강찬과 루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요원들 모두 각자 정보국 담당자의 좌우를 지키는 모양새여서 분위기가 참 묘했다.

“바실리요.”

바실리가 깍지를 낀 손을 책상에 걸치고 마이크에 얼굴을 가져갔다.

마이크를 통한 쇳소리와 눈빛이 무척 잘 어울렸다.

“설립위원장과 초대운영위원장이 결정되었으니 조직의 구성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쉽시다. 부위원장과 운영위원, 이렇게 구성하되 운영위원은 몇 명으로 할지를 먼저 정하는 게 좋겠소.”

그가 말을 마쳤을 때였다.

“바실리.”

그와 라노크의 중간쯤 앉은 뚱뚱한 사내가 손을 반쯤 들었다.

“우리 루마니아처럼 철도가 바로 연결되지 않은 나라에서 부위원장과 운영위원이 나와야 하지 않겠소?”

바실리는 망신을 당한 듯한 눈빛이었다.

저 새끼가 왜 저러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부설 철도를 이용해. 정보 담당자라면 상황 파악을 현명하게 해야지. 어쭙잖은 일로 유럽에 가스가 끊겨서 되겠어?”

완벽한 협박이어서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강찬은 ‘이 새끼는 왜 지랄이야?’하는 심정으로 바실리를 보았는데, 그때 바실리의 왼편에 앉은 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강찬이 피식 웃는 순간, 바실리가 언짢은 표정으로 강찬을 보았다.

날카롭게 노려본다고 눈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강찬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모임이 처음이라 잘 모를 것 같으니까 한번은 설명해 주지. 가능하면 내 눈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 게 좋아. 특히 내가 발언하고 있을 때는.”

라노크를 제외한 모든 시선이 강찬에게 쏠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거에 머리 굽힐 줄 알았으면 외인부대에서 벌써 엄청난 간부가 됐을 거다.

“난 당신의 요원이 아냐, 바실리. 그러니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루마니아 대표가 바실리와 강찬을 번갈아 보았다.

바실리가 뱉은 코웃음이 마이크를 타고 또렷하게 들렸다.

“라노크. 이런 싸움을 부추겼나?”

결국, 시선은 바실리가 먼저 돌렸다.

“강찬 씨는 내 친구다. 그리고 나는 여기 루드비히, 반트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거나 제지할 권한이 없어, 바실리.”

“기가 막히는군.”

상체를 뒤로 넘겨 의자에 몸을 기댄 바실리가 요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립위원장께서 저러시니 할 수 없군.”

바실리가 강찬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러시아가 한발 양보하는 수밖에.”

요원 놈이 이를 깨물었는지 볼을 한번 씰룩했다.

물론 아직까지 강찬을 똑바로 노려본 채였다.

자존심 강한 놈이 엄청나게 인내하는 눈빛.

“라노크. 이렇게 된 이상, 요원들을 내보내고 실무진끼리 이야기하지. 아, 물론 요원은 아니지만, 아직은 정식 멤버도 아니니까 강찬 씨도 나가주었으면 싶다. 그렇게 요청해 주겠나?”

바실리의 프랑스어를 강찬이 모를 리 없었다.

시선을 흘깃 돌렸을 때 라노크는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밖에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찬 씨.”

라노크와 강찬이 비슷하게 웃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요원 둘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향해 걷고 있었다.

***

“담배 피우겠습니까? 무슈 강?”

대회의실을 나오자 루이가 바깥을 가리키며 눈짓을 했다.

그걸 왜 사양하겠나?

다른 나라의 요원들도 서넛씩 임시로 마련된 흡연장에 퍼져있었다.

멀리 러시아 요원 둘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찰칵.

“후우.”

강찬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회의가 5시에 끝나나?”

“그렇습니다. 이후에 대사님은 대통령 만찬에 가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낮에 식사를 한 곳에서 한국 국가정보원장이 주최하는 만찬이 있습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낸 강찬은 라노크의 정체를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커피를 주나 봅니다?”

루이가 고개를 돌린 곳에서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테이블을 설치하고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드시겠습니까?”

“그러지.”

루이가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깍듯하게 구는 모습이지만, 정해진 선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루이가 중형 종이컵 하나를 강찬에게 건네주었다.

“정보국 담당자들은 오늘 밤에 거의 돌아갑니다.”

“일정은 내일까지로 되어 있던데?”

“관례처럼 하루를 더 잡습니다. 지금 회의에서 실질적인 결정은 모두 끝나기 때문에 국가정보원장의 만찬이 끝나면 거의 돌아간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저렇게 살면 피곤하겠어.”

루이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찬은 퍼뜩 미쉘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안느하고는 어때?”

“푸후!”

루이가 화들짝 종이컵을 떼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강찬을 보았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그걸 알았단 말입니까? 대사님도 알고 계십니까?”

“모르시는 것 같던데?”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무슨 맹 진사댁 셋째딸도 아니고.

더는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강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회의실로 향하는 유리문에서 김형정이 나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팀장님!”

강찬이 손을 들자 김형정이 빠르게 다가왔다.

“무전이 안 돼서 달려왔습니다.”

“주파수를 특별한 걸로 바꿨거든요. 이 회의만 끝나면 어차피 합류할 거라 그때 바꾸려고 했지요. 무슨 일이신데요?”

“잠깐만 둘이서 이야기를 했으면 싶습니다.”

김형정의 표정을 본 강찬이 루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쪽으로 움직였다.

“현재까지 폭탄의 반입은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호텔이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로 위층이 중국인 단체 관광객인 것도 걸리구요.”

대리석으로 만든 화단 앞에 도착한 김형정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강찬은 듣기만 했다.

“채널 2번을 돌리시면 저와 석 선생, 그리고 경호팀 모두가 연결됩니다. 사전에 지정해 놓았으니까 연결하시면 되고, 코드명은 석 선생의 의견대로 갓 오브 블랙필드로 통일시켜 놓았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 있으세요?”

“강찬 씨의 이야기가 방송에 워낙 크게 퍼졌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상황이라 국민적 관심과 반응이 컸던 모양입니다.”

강찬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국제빌딩과 국제호텔을 지은 건설사가 서정건설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이 건물이요?”

“그렇더군요. 관리는 루투스 호텔 운영팀이 합니다.”

몽골에서의 활약을 보았기 때문인지 김형정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전해줬다. 하기야 그러지 않았다면 석강호를 경호팀에 넣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팀장님. 그런데 왜 우리나라 대표는 정보담당 회의에 없는 거죠?”

라노크의 말을 들으며 궁금했던 거다.

“우리나라가 설립과정에 포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오늘 위원회가 발족하면 다음 회의부터는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까?”

“예. 라노크와 의리를 지켜줘야죠.”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경호실장은 몽골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강찬 씨가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요구하셔도 됩니다.”

“예.”

김형정이 바쁘게 돌아가고 나서 강찬은 루이에게 돌아왔다.

눈앞에 긴박한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양복 입고 국제빌딩 한쪽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 거다.

솔직히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맞았다.

“담배 줄까?”

강찬이 꺼낸 담배를 루이가 받았다.

둘이서 불을 붙였다.

‘경호라는 게 힘들긴 더럽게 힘들겠어.’

이런 일상 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거다.

강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단의 대리석에 엉덩이를 기댈 때였다.

“무슈 강. 안느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루이가 질문을 던졌다.

“루이. 난 마음에 둔 여자가 있어. 그리고 안느는 안에 꽁꽁 뭉쳐두었던 슬픔을 그날 사건을 계기로 털어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관심은 그냥 그걸 털어내는 순간에 기댈 곳이 필요했던 거, 딱 거기까지야.”

강찬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차라리 몽골을 한 번 더 가라면 가지, 이런 짓은 정말 못해 먹겠다.”

강찬의 말에 루이가 웃음을 참는 것처럼 억지로 이를 깨물었다.

“나랑 있을 땐 편하게 있자. 대사님 앞에서야 웃는 게 실례가 될지 몰라도 난 아니다.”

루이가 어색하게 입술을 움직여 웃고는 강찬의 옆 대리석에 걸터앉았다.

그 새끼. 다리는 정말 길다.

***

양진우는 제2 접견실에서 사내 한 명과 마주하고 있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나가는 대로 언니의 죽음을 비관해서 목을 매단 것으로 처리될 겁니다.”

“늙은이도 있다던데?”

“신부전증으로 투석 치료 중입니다. 입원비를 부담하던 언니가 죽어서 금전적으로도 많이 어렵습니다.”

“남는 게 없어야 돼.”

“알겠습니다.”

“가봐.”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일어서자 양진우는 역시 걸음을 옮겼다.

제1 접견실.

허상수 의원의 보좌관인 곽도영이 커다란 덩치를 세우며 양진우를 맞았다.

“앉지. 어찌 됐어?”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양진우가 넓은 접견실을 느긋하게 둘러본 다음, 곽도영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은 아니겠지?”

“재경부 장관은 의장님과 의원님, 그리고 회장님께서 키우다시피 한 분입니다.”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나?”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어제도 의장님께서 따로 불러 저녁을 같이 하셨습니다.”

양진우의 표정을 본 곽도영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다른 말씀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허어. 조심 또 조심해야지. 당장 조 실장을 봐. 유라시아 철도발표가 있고 나서 우리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나. 지금 정권은 상상하지 못했던 잔인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 거다. 한국이 중국과 미국의 영향을 벗어나? 이래서 없는 놈들은 안된다는 거야. 하다못해 학교를 가도 서열이 있는 세상에서.”

양진우가 혀를 차다가 다시 상체를 곽도영에게 가져갔다.

“의장님과 의원님은?”

“회관과 개인 사무실에 계십니다.”

“외국으로 나간 건 아니고?”

“중국에서 관광객이 들어왔을 뿐입니다. 외국에 나가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크 흐. 흐. 흐.”

양진우가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웃고 난 뒤에 곽도영을 보았다.

“내가 의장님과 허 의원님의 젊은 시절도 보았지만, 자네만큼의 배포는 없었지. 도대체 자네는 어디까지 갈지 정말 궁금하구만.”

“저는 시키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후. 그렇지.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가진 것만큼 수준이 생기는 법이거든. 조만간 우리 곽 보좌관이 제대로 날개를 펼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거, 알지? 중국 쪽의 인맥도 절대 놓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곽도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회의는 정확하게 5시 30분에 끝났다.

2시간을 넘게 밖에 있는 동안 김형정이 두 차례 더 다녀갔고, 루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다.

강찬은 두 가지를 깨달았다.

죽어도 경호원은 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최종일이 더럽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

“강찬 씨. 오래 기다렸습니다. 친구들이 강찬 씨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대회의실을 나온 라노크의 표정은 밝았다.

루드비히를 비롯한 다섯 명이 강찬을 포옹하고 소리만 요란한 키스를 나누었다.

“자주 봅시다, 강찬 씨. 괜찮으면 우리나라에 한번 들러주십시다.”

“나중에 한 번 가죠. 또 뵙겠습니다.”

5분가량 인사를 나누고 나자 국가정보원 요원인 듯한 사내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행운을 빕니다.”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었다.

라노크와 강찬, 그리고 루이는 국가정보원 요원을 따라 국제호텔로 향했다.

“부위원장은 바실리가 하기로 했고, 네 명의 운영위원에 루드비히와 반트가 포함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내용을 몰라서 그런지 별로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 요원을 따라 국제호텔로 향하며 저녁은 또 얼마나 지겨운 시간이 될지 염려됐을 때였다.

“공식 석상에는 대사님과 강찬 씨만 입장하십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루이를 막아섰다.

솔직히 강찬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TV에 자꾸 얼굴을 비쳐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는 거다. 만약 테러를 저지할 일이 생기더라도 만찬 자리에서 함부로 일어서기조차 부담스럽다.

“죄송하지만 저도 밖에 있을까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직접 초빙하셨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시다면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직원의 말을 듣고 나니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잠시 검사하겠습니다.”

직원이 탐지봉을 드는 것을 요원이 막아섰다.

“두 분은 검사 제외 대상이십니다.”

놀란 직원이 컴퓨터를 확인하고는 급하게 사과했다.

“들어가시죠, 대사님.”

강찬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던 라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이쪽입니다.”

안쪽을 맡은 직원이 다가와서 중앙 앞쪽에 있는 자리로 강찬을 안내했다.

사방에 방송국 카메라가 즐비했고, 앞쪽에 연설대가 놓였다.

강찬은 자리에 앉기 전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날카롭기보다는 엄격한 시선들이 강찬과 라노크를 정중하게 맞았다.

하얀색 테이블보가 깔린 탁자에 각종 잔과 그릇, 그리고 수저가 준비되어 있었다.

라노크가 상체를 기울여 강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자리에서 하는 식사는 나도 제대로 소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송에 나가고 있을 테니 조금은 표정을 푸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아까 들어오기 싫다고 했었습니다.”

귀를 돌리고 강찬의 말을 들은 라노크가 다시 고개를 돌려 강찬의 귀 가까이에 대고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재미없는 식사가 외롭기까지 할 뻔했군요.”

강찬이 풀썩 웃자 라노크가 서양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다.

***

“지금 프랑스 대사와 우리나라의 강찬 학생이 무언가 재미있는 말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만, 내용은 알기 어렵습니다.”

라노크와 강찬이 말을 주고받다가 웃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 담겼다.

“아직 대통령이 입장하지 않은 가운데 역사적인 유라시아철도 설립을 축하하는 만찬장은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강유모터스는 아래층 전시장 문을 닫기 직전이었고, 전화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대표님은 지금 외근 중이십니다. 메모 남겨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직원들이 강대경을 찾는 전화를 연신 끊었다.

“여보. 우리 아들, 괜찮겠지?”

“지금 워낙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금방 다 잊을 거야. 걱정하지 마.”

반나절 만에 얼굴이 쑥 빠진 유혜숙의 등을 강대경이 다독여주었다. 방송마다 경쟁적으로 강찬에 대해 보도하고 전화가 빗발치는 것을 보자 걱정이 앞섰다.

“여보. 그런데 왜 찬이가 귀에 저런 걸 건 거야?”

“응?”

화면은 다시 만찬장 전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못 봤어? 귀에 회색 이어폰을 끼고 있던데?”

“행사에 필요해서 끼었겠지.”

강대경은 우선 적당히 덮어두기로 했다.

***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문재현 내외를 환영했다.

손을 흔들며 들어선 문재현의 뒤로 두 명의 경호원이 입구의 좌우를 지켰다.

문재현이 연설대에 서자 일행은 자리에 앉았다.

“유라시아의 철도 설립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문재현의 연설이 시작되자 라노크는 의자 옆에 걸려있는 이어폰을 귀에 걸었다.

강찬은 가능한 한 편안한 얼굴로 연설을 들었다.

못 알아듣던 수업보다 낫다.

20분쯤 있었던 연설이 끝나자 가장 앞자리로 걸음을 옮긴 문재현이 건배를 제의했다.

건배가 있고, 다시 박수.

한식으로 꾸며진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것만 먹으면 오늘 일정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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