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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죽거나 죽이거나.
솔직히 이지연이 눈에 확 뜨일 만큼 매력적인 여자라면 또 모른다. 마른 데다 얼핏 보면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인상이다.
하기야 차소연과 조세호가 사귀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아무튼, 이지연이 현관으로 향하자 놈이 뒤를 따르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젠장!
샤흐트 브니므가 심심해서 이지연을 따르지는 않을 거다.
강찬은 결국 놈의 뒤를 따랐다.
이지연은 버스를 타려는 모양인지 현관을 나와 밖으로 걷고 있었다.
“이지연 씨!”
강찬은 아예 이지연을 불렀다.
개새끼! 놀랐을 거다.
화들짝 뒤를 돌아본 이지연이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저렇게 망가진 걸까?
“안녕하세요?”
파리한 얼굴에 겁이 잔뜩 오른 눈으로 이지연이 강찬을 보았다.
“오늘은 근무 안 해?”
이지연이 쭈뼛거리며 강찬에게 다가왔다.
주철범이 대하는 것도 그렇고, 지배인에게 들은 것도 있을 테니 어쩌면 강찬을 깡패 두목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저, 근무 못 나온다고 말씀드리러 나온 거예요.”
“무슨 일 있어?”
강찬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이런 건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다. 스토커도 아니고, 길에 세워놓고 뭔 일이 안 좋은 거냐? 왜 그러냐? 묻기는 곤란한 거다. 그래도 샤흐트 브니므가 따라다니는 이유는 알아보는 게 맞다.
“집이 어딘데?”
“상계동이요.”
강찬은 퍼뜩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렸다.
“잘 됐다. 나도 거기에 갈 건데, 택시 타고 같이 갑시다. 혼자 가기 지루했거든.”
“그런데 선생님, 저 지금 집에 안 가요.”
염병할!
괜히 혼자 상계동 가게 생겼다.
말문이 막힌 강찬을 보며 이지연이 가겠다는 의미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지금 어디 가는 데?”
입구에 있던 도어맨이 안쓰러운 얼굴로 이지연을 보았다. 영락없이 힘없는 여직원 희롱하는 꼴이다.
“테헤란로요. 서정 사옥에 가요.”
“왜?”
“언니가 억울하게 죽어서 혼자 시위해요.”
강찬이 자꾸 찝쩍대는 게 싫었던지 이지연이 당돌하게 말하곤 시선을 푹 떨궜다.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혼자 시위?
서정 사옥에서?
“미안한데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선생님. 저 그냥 보내주세요.”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잠깐이면 돼.”
이지연의 얼굴에 망설임이 올랐다가 잠시 후, “예.”하는 대답이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강찬은 현관을 들어서며 유리에 비친 샤흐트 브니므를 보았다.
난처할 거다.
로비 라운지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이지연을 힐끔 보며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차 한잔 마시려구요.”
“알겠습니다.”
“주철범 좀 잠깐 불러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찬은 이지연에게 자리를 권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뭐 마실래?”
“커피 할게요.”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났을 때 주철범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철범이 힐끔 이지연을 보며 던진 질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년이 뭘 잘못했습니까?’ 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실제로도 이지연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앉아 봐.”
“예, 형님.”
형님 소리에 확 짜증이 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돌아보지 말고 들어.”
“예, 형님.”
주철범이 고개를 가까이 가져왔다.
“로비 라운지 건너편 소파에 샤흐트 브니므라고 프랑스 갱단 놈이 하나 있다. 내가 그 새끼 불러서 사무실 쪽으로 데려갈 거니까 지난번에 담배 피우던 방 있지? 거기 좀 비워놔라. 돌아보지 말고!”
고개를 돌리려던 주철범이 움찔했다.
“만약 반항하면 두들겨 버릴 거니까 뒷수습도 좀 하고.”
“알았습니다, 형님. 그럼 전 프론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주철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프론트를 향해 걸어갔다.
강찬은 다시 이지연을 향해 말을 건넸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지연 씨를 미행하는 놈이 있었어. 그래서 부른 거고, 만약 언니? 언니라고 그랬지? 그래. 언니가 억울하게 죽은 거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미행하던 놈을 먼저 처리해 놓고 얘기하자. 괜찮겠어?”
주철범과의 대화도 얼추 들었던 데다, 강찬이 미행이란 말을 하자 이지연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예.”
직원이 다가와 강찬과 이지연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전에 샤흐란을 때려잡을 때 샤흐트 브니므에서 한 가지 부탁은 들어준다고 했었는데, 번호를 입력해 놓지 않았다.
번거롭게 구느니 이럴 땐 이름 한 번 파는 게 낫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미안한데 혹시 누가 미행할 만한 이유가 있니?”
“아니요.”
이지연은 고개를 젓다가 퍼뜩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정 사옥 앞에서 시위를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걸로 저런 조직이 움직이긴 어렵지.”
“네에.”
답은 들었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갱에게 다가갔다.
애새끼. 모른 척하기는. 서로 다 아는데.
“샤흐트 브니므. 부탁 하나 하자.”
프랑스어로 말을 걸자 놈이 날카롭게 강찬을 노려보았다.
“누군지는 모르는데 그쪽에서 내 이름을 대면 한 가지 부탁 정도는 들어준다고 했었거든. 위쪽에 전화 한 통 넣어줘.”
“우리 조직을 아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런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생각 안 하나?”
강찬은 피식 웃으며 놈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예의를 지킬 때 잘해. 헛짓거리하다가 앞에 놈들처럼 팔다리 끊어져서 돌아가지 말고.”
서른 초반쯤으로 보인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갓 오브 블랙필드.”
퉁명스럽게 질문과 답이 오간 직후다.
“원하는 게 뭐지?”
“왜 저 여자를 따라다니는 건지 알려주면 돼.”
놈의 시선에 ‘그래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스쳤다.
“안쪽에 조용한 사무실이 있는데 담배라도 하나 피우며 얘기하는 건 어때?”
강찬이 고갯짓을 하자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파악!
그리고 한순간에 눈을 찔러왔다.
타악! 퍼억! 퍼억! 퍼억!
손을 때려낸 강찬은 의도적으로 있는 힘껏 놈의 목과 명치, 그리고 겨드랑이를 찍어버렸다.
“꺄아아악!”
비명과 함께 주철범이 다가왔고, 강찬이 받치고 있던 놈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곧바로 프론트 직원과 로비 라운지의 직원들이 와서 손님들을 안심시켰는데 놀라고 겁먹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이지연이 보였다.
“지배인님. 이지연 씨더러 기다려달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강 선생님.”
강찬은 서둘러 주철범의 사무실로 향했다.
“여깁니다, 형님.”
문을 살짝 열어둔 주철범이 강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랑 재떨이 좀 가져다주라.”
“예, 형님.”
주철범이 나가자 소파에 늘어졌던 놈이 정신이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짧게 털어댔다.
“꼭 한 번이다. 한 번 더 엉뚱한 짓을 하면 팔을 부러트려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끙. 우릴 알면서 이런단 말이지?”
“쫓아다닌 이유?”
강찬은 담배를 꺼내 놈에게 건넸다.
순순히 받는 것을 본 강찬은 다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고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전화해 보고 답을 해도 되나?”
“좋을 대로.”
놈이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누르는 동안 주철범이 커피를 두 잔 가지고 와서 탁자에 놓아주었다.
“나가 있어도 돼. 끝나는 대로 로비로 갈 테니까.”
“예, 형님.”
전화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던 놈이 통화가 끝나자 전화기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확인하고 5분 내로 전화한단다.”
“커피 마셔.”
강찬이 가리킨 커피를 노려보며 놈은 잠자코 목과 옆구리를 주물렀다.
뻑뻑하게 말 한마디 없이 5분이 지났다.
전화가 안 와도 그만이다.
최소 이지연을 쫓아다닌 건 분명해졌으니까 여차하면 팔 하나 부러트려서 더 못 쫓아다니게 할 생각이었다.
강찬이 소파에 기대앉아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놈의 전화가 울렸다. 세 번쯤 “위.”라고 답을 하던 놈이 강찬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알로.”
강찬은 앞에 앉은 놈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군.”
단 한 번의 통화가 확실하게 기억날 만큼 느물느물한 음성이었다.
“자네의 이름으로 부탁한 것 하나는 들어주기로 했었지. 바라는 게 뭔가? 갓 오브 블랙필드.”
언제고 한 번쯤은 면상을 갈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강찬은 입을 열었다.
“앞에 이 친구가 왜 여자를 쫓아다니는 거지? 이게 양진우와 관련이 있나?”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답이 나왔다.
“이봐. 자네는 라노크와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나?”
답을 하랬더니 질문을 던진다.
강찬은 상대방의 음성에서 묘한 기대가 있음을 느꼈다.
“친구라고 하더군.”
“라노크의 친구라.”
걱정이 담긴 듯한 음성이었는데 상대방이 어떤 점을 걱정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세상살이엔 운이라는 게 있지. 운은 늘 기회의 손을 내민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 기회를 빠르게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고, 실패한 자들은 고집과 만용을 부리다 기회를 날려버리는 멍청이들이지.”
“인생 강의는 이쯤하고 이제 질문에 답을 해 주었으면 싶은데.”
강찬의 말에 폐로 웃는 듯한 웃음이 먼저 건너왔다.
“라노크와 적이 되는 건 우리도 부담스럽다. 오늘 내가 주는 정보로 이후에 일어날 일에서 샤흐트 브니므를 빼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자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겠다.”
강찬은 아직도 목을 주무르고 있는 맞은 편을 힐끔 보았다. 고작 이지연을 왜 쫓아다니는지 물었는데 왜 라노크가 나오고 샤흐트 브니므를 빼달라는 가볍지 않은 조건을 거는 건지 의아할 뿐이었다.
“우양진우에게서 160만 유로를 받았다.”
이게 얼마지?
200억? 200쯤 된다.
이렇게 큰돈을 고작 이지연을 쫓아다니는 일에 쓴다고?
“눈앞에 있는 친구는 필립이다. 이번에 그놈을 제외하고 모두 다섯 놈이 한국으로 들어갔는데 우리 쪽에서 우양진우에게 건넨 C4가 모두 100파운드다.”
강찬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빌어먹을!
미친 개새끼!
C4 1파운드가 수류탄 1.3개의 위력이다.
찰흙처럼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가능한 폭탄이라 탐지기에 걸리기도 어렵다.
그게 한꺼번에 터진다면?
국제빌딩 한 층은 깨끗하게 털려서 없어질 거다.
“누구야? 정확하게 누구에게 건네준 건지를 말해 줘야 라노크에게 나도 할 말이 있지.”
“워! 침착해, 침착하라구, 친구.”
가까이 있었으면 바로 팔을 부러트렸거나 눈알을 깨트려 버렸을 거다.
“이런 일은 당사자가 나오지 않아. 나는 장사를 했고, 내 신의를 걸고 자네의 운에 배팅을 한 거야. 이 정도라면 남은 일은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찬은 우선 숨을 골랐다.
아직 행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전화 상대방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거기에 C4는 비린내처럼 역겨운 플라스틱 냄새 때문에 탐지견을 풀면 바로 찾아낼 수도 있다.
“필립이 쫓던 여자의 언니가 그 정황을 알았던 모양이더군. 증거를 집 어디에 두었을 수도 있어서 그걸 찾아낼 생각이었다.”
“여자를 죽인 것도 너희냐?”
“물론 계약에는 포함되어 있었지.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
강찬은 마음이 바빠졌다.
C4 100파운드다.
지금부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내일 오전 행사까지는 시간이 별로 없다.
10파운드가 대략 4.5㎏.
행사장에 탐지견이 들어가지 않는 한, 다섯 놈만 허리춤에 두르고 스위치를 누르면, 참석자 전원 사망을 보장할 만큼의 위력인 거다.
양진우! 이 미친, 개 또라이 새끼!
“라노크에게 우리의 진심을 꼭 전해주게.”
“오늘부터 여자를 쫓는 일은 그만두지.”
“이미 들켜버렸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필립을 바꿔줘. 아! 그리고.”
강찬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행운을 비네, 친구.”
개새끼. 폭탄을 그렇게나 팔아놓고.
강찬은 놈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두 번의 대답으로 통화를 끝낸 놈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이놈은 이제 볼일이 없는 거다.
그런데 강찬이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홰액.
놈이 손을 뻗쳐왔다.
터억.
강찬은 오른손으로 놈의 손목을 잡아 비틀고 왼손을 팔꿈치에 걸었다.
병신. 먼저 손을 뻗어놓고 놀라기는!
콰자작.
“끄으윽!”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면 이렇게 되는 거다.
강찬이 문을 열고 나오는 사이 안에서 프랑스어 욕이 우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복도 문을 열자 주철범이 대기하고 있었다.
“팔을 부러트렸으니까, 적당히 병원에 보내주고 끝내라. 치료비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형님.”
강찬은 바로 로비 라운지로 향하면서 김형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찬 씨. 김형정입니다.”]
“팀장님. C4 100파운드를 양진우가 들여왔답니다. 판매자는 프랑스 갱단 샤흐트 브니므이고, 아마 증거가 있을지 모르니까 우선 그걸 찾으러 갈게요.”
[“강찬 씨, 지금 컴포지션 4가 100파운드라고 했습니까?”]
당연히 김형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음성이었다.
“자세한 것은 확인하기 어려우니까 우선 양진우 주변에 이상한 정황이 있나, 먼저 파악해 주세요. 윤봉섭 같은 놈이 두 놈 더 있었다니까 그놈들 중 해외에 나갔다 오거나 선박, 비행기를 통해 화물을 받은 사실이 있는지도 확인하시구요. 지금 남산 호텔에 샤흐트 브니므 갱 놈 하나의 팔을 부러트렸거든요. 이놈 외에도 다섯 놈이 더 들어왔다는데 입국자 명단도 확인해 주시구요. 팔을 부러트린 놈 이름은 필립이라고 했습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강찬 씨.”]
워낙 빠르게 말을 해서인지 김형정이 강찬을 불렀다.
“팀장님. 우선 움직이시고 결과가 나오면 다시 통화하시죠.”
로비 라운지에 들어선 강찬은 이지연을 향해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아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지연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다.
“경찰에 넘겼으니까 조사해봐야 알 것 같아.”
이지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 답을 했다.
“미안한데 언니가 억울하게 죽은 걸 경찰에서 자살이라고 처리했다는 거지?”
“예.”
이지연은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언니 이지은, 그리고 이지연, 세 식구.
이지연 보다 세 살 많은 언니는 계열사 순시 중에 비서실장 조일권의 눈에 띄어서 회장 비서실 특채로 들어갔고,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자살 사건이 일어난 거다.
회장 비서실에 들어간 후로 힘들어하긴 했지만, 우울증이란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고, 최근에는 이지연이 정직원으로 취직할 때까지만 회장 비서실에 다니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겠다고까지 했었단다.
그런 이지은이 자살을 한 거다.
낡은 운동화와 청바지, 그리고 늘어진 면티를 보던 강찬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언니도 이지연 씨처럼 어리게 생겼어?”
“예. 언니가 저보다 더 앳돼 보였어요.”
설마? 설마 아니겠지?
강찬은 라노크의 말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보았다. 그 개새끼를 조금만 빨리 죽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조일권을 족칠 때 달려갔어야 했는지 모른다.
강찬은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증거로 낼 게 있어?”
“언니 메모가 있어요.”
“메모? 뭐라고 적혔는데?”
“엄마와 동생을 위해 참아야 한다, 무서운 사실을 알았다. 대강 이런 것들이에요. 언니는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에요.”
“뭔지 알겠다. 내가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메모 잘 보관하고, 우선은 집에 가 있어. 당장은 서정 사옥에 가지 말고.”
이지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강찬의 눈을 보고는 “예.”하고 답을 했다.
이지연을 먼저 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기가 울려서 들어보니 라노크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할 판이다.
“예, 대사님.”
[“강찬 씨. 최근에 혹시 미국에 다녀온 적 있습니까?”]
뭔 자다 봉창 뚫는 소리를 이렇게 다급하게 하는 거지?
“그럴 리가요? 제 일정은 대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상합니다. 미국 정보부는 블랙헤드와 관련된 사람이 한국에 있다고 확신하는 분위기고, 강찬 씨 이름까지 언급됐습니다. 본국 정보총국도 모르는 정보를 누가 미국에 넘길 수가 있는 건지 짐작이 안 갑니다. 강찬 씨는 짐작합니까?”]
“저야 정말 모르죠. 그건 그렇고, 대사님. 낮에 샤흐트 브니므를 남산 호텔에서 만났는데요.”
강찬은 우선 C4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말부터 전했다.
[“팔아먹을 건 다 팔아먹고 또 정보를 흘리다니 역시 음흉한 놈들이군요. 늘 그런 식으로 빠져나갑니다. 강찬 씨가 아니었다면 정보총국에 같은 제안을 했을 겁니다. 특히나 무기나 마약 거래는 그런 식으로 합니다.”]
이 구렁이가 지금 행사에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판국에 뭔 헛소리를 이렇게 하는 거야?
[“강찬 씨. 유라시아 철도의 발표가 갖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건 일부분일 뿐입니다. 정보총국에서 오늘까지 발견해서 사전에 제거한 테러 조직만 모두 세 곳입니다. 그 외에 루드비히 쪽에서 두 곳, 반트가 별도로 두 곳을 봉쇄시켰습니다.”]
듣고 있던 강찬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샤흐트 브니므가 그런 짓을 해도 발견하지 못한 건 정보총국과 유럽의 모든 정보국이 테러에 집중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은 그 정도의 비중이 충분히 있습니다.”]
강찬의 한숨 소리를 들은 라노크가 마치 앞으로 이런 일을 계속할 사람을 가르치는 것처럼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이 어떻게 강찬 씨의 이름까지 알았느냐 하는 것이군요.”]
구렁아! 그게 아니라 C4 100파운드가 남은 게 더 중요한?
“대사님! 제가 세계 1% 안에 드는 희귀 체질이라고 해서 조직 검사를 의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인지는 몰라도 해외에 보낸 적은 있습니다.”
[“저런!”]
라노크는 아예 답을 들은 것처럼 아쉬운 탄식을 쏟아냈다.
[“알겠습니다, 강찬 씨. 일단 윤곽이 잡혔으니 최대한 방해공작을 펼치고, 미국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명심하세요. 미국이 알았다는 건, 앞으로 일주일 내로 영국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걸 지금 알고 있는 너는 뭐냐?
[“프랑스 정보총국은 그들보다 대략 일주일가량 앞섭니다. 정보 세계에선 무시무시한 시간이지요.”]
강찬이 주변을 둘러볼 만큼 속을 들여다본 듯한 답이었다.
[“아무튼, 나머지는 내일 보고 의논하기로 합시다.”]
전화가 끊겼다.
이 구렁이한테는 그 엄청난 폭탄이 내일 의논할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강찬이 한숨을 내쉴 때 지배인이 세련된 동작으로 다가와 커피를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