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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죽거나 죽이거나.
개학 날이다.
일찍 나가는 학교도 그렇지만, 교문 앞을 가득 메운 학생들과 훈육봉을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보는 석강호까지 모든 게 낯선 느낌이었다.
함께 등교한 김미영은 오늘 강찬이 입학허가서를 받는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나, 운동부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
“응! 우리 이따 영화 보자. 개학 날이라 시간이 좀 있거든.”
“글쎄. 집에 먼저 갔다가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봐서 그렇게 하자.”
“그래!”
김미영을 보낸 강찬은 운동부실로 향했다.
덜컹.
“안녕하세요!”
운동부실은 아이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뭐야? 너희는 왜 교실에 안 올라가?”
“오늘부터 왕따나 삥, 그리고 빵셔틀 없애기 위해 아침 모임 가진 거야.”
허은실이 안쪽에서 답을 했다.
화장도 지웠고, 무엇보다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보니 이호준, 조세호, 차소연은 말할 것도 없고, 문기진까지 눈빛이 제법 살아 있었다.
“운동부라고 너희가 일진 대신 설치면 안 돼.”
“예! 선배님.”
“어렵고 힘든 애들을 도와주는 건 오케이. 대신 엉뚱한 애들 붙잡고 떼로 달려들어서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건 노케이야! 알았지?”
“조심할게요, 선배님.”
이 정도면 됐다.
그런데 이것들이 언제 이렇게 눈빛이 바뀐 거지?
강찬은 피식 웃고는 빈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석강호가 덜컹 소리와 함께 고개를 디밀고 “이제 교실로 들어가.”라고 말하자, 아이들이 모조리 교실로 향했다.
“갑시다.”
딱 잡혀가는 분위기였지만, 강찬은 어쩔 수 없이 석강호를 따라 교장실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교실에 시상 장면을 방송할 카메라가 있었고, 조명도 켜져 있었다.
“교장 선생님. 3학년 강찬 데리고 왔습니다.”
“오!”
교장이 만면에 웃을 띈 채로 강찬의 어깨를 다독였다. 잠시 어수선한 시간이 지나자, 교무실 직원 한 명이 손짓을 했다.
“아!아! 지금부터 2010학년도 2학기 개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건물 전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굵직하게 울려 나왔다. 교장의 연설이 끝나고 합격증과 장학증서, 표창장을 증정하는 시간이다.
“3학년 강찬 학생이 프랑스 국립대학교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기에 입학허가서와 장학증서, 그리고 표창장을 수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전체에서 “우와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상식은 그렇게 끝났다.
“선배님! 축하드려요!”
운동부실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날듯이 달려왔고, 그중에는 김미영도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어서 강찬은 풀썩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몰랐어!”
“급하게 연락 온 거야. 우선 집에 가서 이거 전해드리고 다시 올까 하는데 넌 어떻게 할래?”
“같이 가도 돼?”
“그럼. 차소연, 선생님께 말씀 좀 드려주라. 그리고 내가 집에 갔다 와서 점심 살 테니까 같이 먹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자 밥 한 끼는 같이 먹고 싶었다. 말을 전한 강찬은 김미영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정말 프랑스 가는 거 아니지?”
“그렇다니까!”
“혼자 가면 안 돼!”
“가게 되면 너 준비 다 됐을 때 같이 가기로 했잖아.”
“응! 대신 군대 가면 내가 매일 편지 쓰고 매주 면회 갈게.”
멀리도 나간다.
강찬은 김미영과 모처럼 걸어서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올라 갔다 오자.”
“나두?”
“그래. 이것만 전해 드리고 바로 올 건데 뭘.”
김미영은 쭈뼛거리면서도 강찬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때앵.
7층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유혜숙이 요란하게 달려오다가 김미영을 보고 멈칫했다.
“미영이요. 상 받은 기념으로 학교에서 점심 사기로 했는데 혼자 움직이기 뭐해서 같이 왔어요.”
“안녕하세요?”
“들어와, 잠깐 들어왔다가 가.”
강대경까지 손짓을 해서 넷이서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 이거.”
강찬이 강대경의 눈짓을 보고 유혜숙에게 합격증과 증서, 표창장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눈물이 왈칵 올라왔는데 그나마 김미영이 있어서 좀 덜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강찬은 옷을 갈아입었다.
교복은 이제 안녕이다.
강대경이 출근하는 길에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넷이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유혜숙의 전화기가 잠시도 쉬는 틈이 없었다.
아줌마들이 어떻게 합격증서 받은 걸 알 수 있지?
“점심 맛있게 먹고. 아, 참! 아들 용돈 있어?”
“아직은 여유 있어요. 저녁에 전화드릴게요.”
손을 흔들고 교문에 들어선 강찬은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어쭈?’
석강호 말마따나 제법 틀이 잡혔다.
저렇게 한 1년 이상만 꾸준히 연습하면 제 몫은 충분히 할 것처럼 보였다.
“점심 먹고 영화 볼 수 있어?”
“그 정도까지 시간이 돼?”
“학원은 정상수업에 맞춰졌는데 오늘 수업이 없으니까 5시까지만 돌아오면 돼.”
“그래.”
영화 한 편 보는 거야, 뭐.
공부에 지친 김미영을 위로해 주고 싶던 참이다.
관중석에 앉아있는데 석강호가 히죽거리며 걸어오다가 김미영을 보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 먹자. 선생님이 사마!”
석강호가 하얀 봉투를 꺼내 손바닥에 탁탁 때렸다.
“푸흐흐흐흐. 담당 교사도 금일봉을 주시네. 오늘은 고기 먹자, 고기.”
이 새끼는 근엄한 척을 하지 말던가?
기껏 표정을 바꿔서 저게 뭐하는 짓이냐?
적당히 운동을 끝내고 아이들과 고깃집으로 향했다.
“선배님. 그럼 프랑스 문화원은 언제부터 가는 거예요?”
“내일.”
“어? 그럼 내일부터 학교에 안 나와요?”
“그렇지.”
아이들이 부럽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러면서도 고기를 잔뜩 먹었다.
학교 앞에서 아이들과 헤어진 강찬은 김미영과 함께 극장으로 향해서 처음으로 영화를 함께 봤다.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강찬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자 팥빙수 먹고, 공부하느라 얼굴 너무 상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 후에 헤어졌다.
강찬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석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요?”]
“여기? 청담동 극장. 넌 어디냐?”
[“학교에서 막 나왔소. 차나 한잔 합시다.”]
“그러자.”
강찬은 자주 보던 사거리의 커피전문점에서 석강호를 만났다.
“뭐했소?”
“영화 봤다.”
“재미있습디까? 그럼 나도 마누라랑 한번 가게요.”
“나라면 안 갈 거 같다. 병신 같은 새끼가 자꾸 여자 때문에 휘청 데다가 나중에 질질 짜는데 여자애가 그걸 보고 또 사랑에 빠지더라.”
강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부동산에서 전화 왔었소. 목요일이 경매 날인데 원하면 유치권 가격을 좀 깎아주겠다고 하던데요?”
“잊어버려. 그 새끼들, 그런 식으로 또 엮이면 그만큼 피곤해진다.”
석강호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지 입맛을 다셨는데 그렇다고 다른 마음을 가질 일은 없다.
“스미든한테서는 연락 없소?”
“없다. 어차피 독하게 마음먹은 거, 느긋하게 생각하자.”
“그렇긴 하우.
“들어가자.”
“그럽시다.”
석강호와 함께 돌아온 강찬은 기분 좋게 월요일을 마무리했다.
***
화요일.
강대경과 유혜숙이 출근한 후에 라노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점심시간 지나서 호텔에서 보자는 이야기였다.
입학허가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수요일과 목요일 일정을 의논할 겸해서 만나고 싶었던 참이다.
약속은 오후 2시였다.
강찬은 점심으로 샌드위치나 먹을까 해서 조금 일찍 호텔로 나갔다. 오후 1시에 로비 라운지에 앉아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있자니 주철범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점심을 여기서 드십니까?”
“응. 2시 약속이라 그래. 지난번처럼 방을 쓸 거니까 준비 좀 해주라.”
“알겠습니다, 형님.”
주철범이 프론트로 가고 나서 강찬은 여유 있게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지연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키 가져왔습니다.”
주철범이 카드키를 가져왔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키를 받았을 때는 오후 1시 40분쯤 되었다. 15분쯤 지나자 라노크가 호텔에 도착했고, 둘이 방으로 올라갔다.
입학허가서 고맙다는 인사가 끝난 다음이다.
편안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데 라노크가 뜻밖의 말을 꺼내 들었다.
“강찬 씨. 내일 행사장에 나오면 루이가 권총을 전해 드릴 겁니다.”
“권총을요?”
“정보국 담당자는 각자 알아서 경호하기로 했고, 나와 친구들은 경호 책임자로 강찬 씨를 지정할 예정입니다. 로리암에서 보았던 다섯 명 모두 동의한 내용입니다.”
왜 이래야 하는 거지?
강찬은 쉬 납득하지 못했다.
“대사님. 한국에서 발표회를 하는 건 한국 정부에 경호와 행사진행을 맡긴다는 말씀으로 아는데 별도로 경호를 합니까?”
“공식 일정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보국 담당자들의 모임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이 강찬 씨에게 경호 책임을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요원들의 자존심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쪽을 흘깃 보았다.
“루이가 강찬 씨를 추천했습니다. 나만 경호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다른 정보국 요원까지 관리하는 데는 강찬 씨만 한 분이 없다고 하더군요.”
강찬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박 2일, 반가운 얼굴이나 볼까 했더니 덜컥 일이 떨어진 거다. 그것도 엄청난 부담이 생기는 일이.
“나와 로리암에서 보았던 다섯 명이 요원의 통제권을 강찬 씨에게 맡기면 러시아와 다른 나라 정보국 담당자들도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됩니다. 물론 강찬 씨가 나와 한국 정부가 만든 요원이라고 소문났지만, 그래도 한국의 요원이 전체 통제권을 쥐는 게 서로 좋습니다.”
강찬은 입맛이 썼다.
요원들을 통제하는 일은 전투와 전혀 다를 거다. 거기에 외곽 경호와 근접 경호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경호는 확실히 다르다.
“행사는 국제빌딩과 국제호텔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수요일 오전에 정확한 일정이 나오니까 그걸 참조하시면 됩니다.”
라노크는 아예 일이 확정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외곽 경호는 한국 606과 35 여단에서 하고, 국가정보원에서 총괄, 대통령 경호실에서 내부 경호를 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아, 물론 공식적인 회의를 말하는 것이고, 비공식 회의는 외곽을 제외한 그 어떤 경호도 거부합니다. 이것이 정보 담당관 회의의 특징입니다.”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이 구렁이가 사람을 그냥 부를 리 없을 거고, 강찬을 앞세워 무언가 계산한 것이 있겠구나 싶었다.
“맡아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당장 거절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사님. 그런데 이런 일을 하루 전날 말씀하신 데 다른 뜻이 있습니까?”
라노크가 의외란 듯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거다.
“어쩌면 정보국 담당자 한 명이 망명할지 모릅니다. 그럴 경우, 최악의 상황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대통령 경호실과 한국 국가정보원에 상황을 설명하고 바로 이해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졌고, 그 사람이 당연히 강찬 씨였습니다.”
봐라. 앞에서 좋은 말 했던 것과는 달리 분명하게 숨은 일이 있는 거다.
“이걸 국가정보원에 얘기해도 됩니까?”
“절대 안 됩니다, 강찬 씨.”
라노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이런 일에 대비하는 흔적이 남는다면 당사자는 무조건 제거됩니다. 정보국은 원래 그렇게 살아남는 겁니다. 더구나 망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강찬 씨만 아는 것이 좋습니다.”
젠장!
숨은 이야기가 뭔지 묻지 말걸.
“내일 오전 10시에 대사관으로 와서 나와 함께 움직이면 됩니다. 양복부터 장비까지 모두 준비해 놓았으니 따로 준비할 건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사님. 그럼 일정표도 그때 나오는 거겠네요.”
“그럴 겁니다.”
이왕 도와주는 거다.
사실 라노크에게 바라는 것도 있어서 이번 일은 제대로 돕기로 했다.
“우양젼우는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그런데 강찬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라노크가 질문을 던졌다.
“이번 달까지 기다렸다가 기회를 못 잡으면 정보총국의 도움을 받을까 했습니다. 위성으로 놈의 위치를 파악해서 외박할 때를 노려볼까 하구요.”
“그 정도라면 충분히 협조가 가능할 겁니다.”
정보총국은 원래 암살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일에 익숙한 라노크는 강찬의 의도를 알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두고두고 한국에 짐이 될 위인입니다. 이번에 유라시아 철도 발표가 있고 나서도 어떤 짓을 할지 모를 사람이라, 이번 기회에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던 라노크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강찬을 바라보았다.
“우양젼우는 변태성욕자입니다. 소아성애를 가지고 있어서 그 욕구를 못 채우면 대신 아주 어리게 생긴 여직원을 겁탈하곤 했습니다. 욕구가 생겼는데 해소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성향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참고하시는 게 좋습니다.”
“양진우를 그렇게까지 조사하나요?”
“강찬 씨. 우리가 상대하는 130여 개국의 상위 0.1%는 거의 조사를 해둡니다. 특히나 우양젼우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를 주기적으로 나가며 변태성욕을 채웠기 때문에 본국에서도 확실히 기억하는 인물입니다.”
개새끼가 나라 망신은 제대로 시키고 다닌다.
“몽골 작전과 유니콘 프로젝트 발표로 우양젼우는 입지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인물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강찬 씨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입맛이 썼지만, 아무튼 유혜숙 때문에라도 목을 비틀어버릴 참이다.
“대사님.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라노크는 친구에게 비밀이 없습니다.”
프랑스어를 인터넷에서 배웠다는 것만큼이나 신뢰가 안 가는 말이다만, 강찬은 그냥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유라시아 철도 발표를 굳이 우리나라에서 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나요?”
강찬을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세워주기 위해, 이런 소리를 또 하지는 않을 거다.
“흐음. 그 점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에 확실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 영국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미국과 영국이요?”
“전에 말씀드렸었습니다. 블랙헤드를 영국이 왜 찾는지, 샤흐란이 그것과 어떤 연관이 있길래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는지를 알아내고자 합니다. 게다가 미국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영국을 주시하고 별도의 라인으로 블랙헤드를 찾고 있습니다. 뭘까요? 강찬 씨.”
“뭐가 말입니까?”
“영국과 미국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지금까지의 경제권과 세계적 역할을 빼앗기게 생겼음에도 고작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악착스럽게 버티는 이유가 과연 뭐라고 생각합니까?"
알면 이러고 있겠나.
“글쎄요?”
강찬은 짐작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열쇠는 강찬 씨에게 있을 겁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믿으면 말입니다. 미국과 영국은 그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 점을 납득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머리만 복잡해졌다.
강찬은 내일 일정만 생각하기로 했다.
“유라시아 철도 발표가 있고 나면 영국과 미국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무슨 국제적인 인물이라고 미국과 영국까지 신경 쓰며 살겠나.
강찬은 복잡했던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차를 마셨다.
“강찬 씨는 프랑스로 귀화할 생각이 정말 없습니까?”
오늘 라노크는 생각 못했던 말을 참 많이 한다.
“한국은 강찬 씨와 같은 능력을 가진 분이 있기에는 갑갑한 곳입니다.”
“외인부대에 가란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요.”
라노크가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좀 더 활동적인 일을 해보는 게 좋겠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솔직히 강찬 씨를 정보총국의 실력자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습니다.”
강찬은 풀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총알이 날아들지 모를 긴장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강찬 씨가 조금만 더 야망이나 욕심이 있는 사람이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사님께서 친구로 인정해주시지 않으셨겠죠.”
“그럴까요?”
둘이서 비슷한 느낌으로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10시에 찾아뵙겠습니다.”
“차를 보낼 겁니다. 아파트 앞으로 9시 10분까지 나오면 됩니다.”
“그냥 택시로 가죠.”
“강찬 씨가 이 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그 정도 예우는 당연한 일입니다.”
라노크의 두 번에 걸친 권유에 강찬은 더 사양하지 못했다.
방을 나와서 라노크를 지하주차장에서 배웅했다. 발표를 코앞에 두고 조심하기 위해 호텔에서조차 도착과 출발을 다른 곳에서 하는 거다.
괜한 일을 맡은 건가?
인상을 찌푸려봐야 이미 결정한 일을 어쩌겠나.
강찬은 택시를 탈 생각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에서 내려 현관으로 걸었다.
프론트를 지나고 다시 오른편에 로비 라운지를 지나는 길이다.
슬쩍 본 로비 라운지에서 이지연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지배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각이나 무단 결근을 했나?
얼굴이 무척 초췌했는데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거고, 그걸 일일이 알 필요는 없는 거다.
강찬이 현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현관 옆의 공간에서 덜컥 눈에 들어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저 새낀 또 뭐야?’
강렬한 느낌이었다.
저런 놈이 일반인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눈빛이 다른 거다.
강찬은 빠르게 놈을 살폈다.
‘샤흐트 브니미?’
동양인이다. 그럼에도 왼손에 뱀 대가리가 불쑥 올라와 있었다.
조직원들이 너무 눈에 띈다고 폐지하자고 했어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버틴 문신.
‘그런데 저 새끼가 뭘 기다리는 거지?’
놈의 시선은 로비 라운지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한국까지 와서 커피 사 먹을 돈이 없어 저러는 건 아닐 테고.
‘짝사랑?’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 그 새끼. 더럽게 신경 쓰이네.’
강찬이 짜증을 털어낼 때 이지연이 로비 라운지를 나왔고, 놈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