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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돌아오는 길
대원들을 향해 풀썩 웃어준 강찬을 따라 석강호가 입구를 향해 걸었다.
대기하던 프랑스 요원 둘이 깍듯한 태도로 승합차 문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이 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가방을 걸머진 채, 수송기에 오르던 대원들이 승합차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잘 가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정문을 향해 방향을 틀자 대원들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무슈 강. 전화입니다.”
조수석에 앉은 대원이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알로.”
[“강찬 씨. 라노크입니다.”]
“예, 대사님.”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 차를 타시고 대사관으로 바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강찬은 전화기를 요원에게 건네주었다.
“라노크가 대사관에서 잠깐 보잔다. 거기 들렀다 가자.”
“알았소.”
고속도로에 들어선 승합차는 버스 전용차선을 이용해서 달렸다.
평화로운 일상이다.
끔찍한 고문, 처절한 전투를 모르는 이들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채, 일상을 이뤄가고 있었다.
강찬은 속에 담긴 독기가 풀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전투를 치르고 나면 흔히 있는 일이다.
만약 제라르를 잃었다면 이틀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을 거다.
한숨 푹 자고 싶었다.
그래서라도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독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출근길임에도 승합차는 빠르게 대사관에 도착했다.
요원들이 얼른 문을 열고서 강찬과 석강호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라노크의 집무실이다.
보좌관과 루이가 입구에 서 있다가 강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어서는 순간에 라노크가 다가왔다.
“강찬 씨.”
“대사님.”
악수를 나눈 후, 라노크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는데 직원들이 바로 간단한 쿠키와 차를 준비해 주었다.
달칵!
보좌관과 루이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고생했습니다.”
이런 말에는 딱히 대꾸하기가 어렵다.
“아침부터 중국과 미국, 그중에서도 중국의 정보국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놀랐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을 겁니다.”
라노크가 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선 외인 특수팀에게는 우리 규정으로 최고의 포상을 내리기로 했고, 작지만 강찬 씨와 함께 고생하셨던 분에게도 프랑스 정보국에서 작은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석강호에게 준다는 거라 강찬은 거절하지 않았다.
놈은 뭔 소린지 모른 채, 비스킷을 버석거리며 먹고 있었다.
“쇽꽝호? 저분께는 현금 5억을 통장으로 입금할 겁니다. 한국 정부와 조율이 끝났으니까 세금 등의 문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생명수당쯤 생각하면 된다.
강찬이 고개를 돌려서 석강호에게 지금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대장은요?”
“우선 네 얘기만 나왔어.”
“받아도 되는 거요?”
“프랑스에서 주는 거라잖아. 일단 받아라.”
“너무 크잖소.”
강찬의 눈을 본 석강호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감사하답니다, 대사님.”
석강호가 어색하게 고개 숙인 것을 라노크가 여유 있고, 세련된 동작으로 받았다.
“강찬 씨. 전에 제가 공트 자동차 주식을 드리기로 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거 잊었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강찬 씨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금액이 커서 시간을 끌었는데 이번에 한국 국가정보원과의 교류를 통해 현금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쓸 만큼은 있구요.”
라노크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찬 씨가 이번에 수행한 작전의 의미를 모르셔서 그럴 겁니다. 당장 유럽의 친구들과 러시아, 그리고 몇 개 나라가 숨통이 트인 일이니까요. 로리암에서 보았던 친구들이 모두 감사의 뜻을 전해왔고, 덕분에 제 입지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성과입니다.”
뭔 소릴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길지?
“유니콘의 발표가 좀 더 빨라질 거라 기대합니다.”
이런 거라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유럽의 친구들이 조금씩 성의를 표시했습니다. 원래 암살 대상에 들었던 친구들이라 이번 작전에 커다란 만족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작전이 실패했다면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 그렇습니다.”
“저는 김 팀장님을 구하러 간 겁니다. 대사님이 도와주셨고, 12명을 모두 데려왔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버석. 버석.
눈치 없는 새끼!
강찬과 라노크가 풀썩 웃자 쿠키를 씹던 석강호가 멋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6개국에서 성의를 표시했습니다. 모두 300억이 강찬 씨 통장으로 입금될 겁니다. 물론 이것도 한국 정부와 이야기가 끝난 것이니까 세금 등의 문제를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 외에 제가 드리기로 했던 공트 자동차 지분을 한화로 환산한 200억이 추가로 들어갑니다. 이건 저와 친구들의 성의입니다.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한두 번 본 라노크가 아니다.
강찬은 그의 눈에서 무언가 다른 말이 있음을 알았다.
“혹시 유럽의 친구들이 저에게, 정확하게는 강찬 씨에게 작전을 부탁할지 모릅니다.”
강찬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유니콘 프로젝트와 관련한 기습 작전을 제게 의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싸움을 더 하라고?
강찬은 당장 답을 하지 못했다.
아군이 잡혀 있거나, 혹은 유니콘 프로젝트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면, 거기에 이번 구출 작전을 위해 라노크가 외인 특수팀을 불러준 데 대한 고마움을 갚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식의 싸움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천천히 생각하시죠.”
“그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찬 씨.”
라노크가 양복 안에 입은 조끼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강찬에게 건네주었다.
“우앙젼우에 관련된 상세 정보입니다.”
강찬의 시선을 받은 라노크의 답이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강찬은 풀썩 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쉬시고, 저녁이나 한번 먹지요.”
“알겠습니다.”
“피곤했을 텐데 얼굴 보고 싶어서 공연히 시간을 뺏었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뵙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강찬은 ‘아차! 이 구렁이한테 또 당했구나!’ 싶었다. 500억을 거절할 틈도 없이 이야기가 끝나 버린 거다.
아무튼, 일단 대사관을 나왔다.
대사관의 승합차를 타고 향한 곳은 집 앞 사거리에 있는 커피전문점이었다.
익숙한 테라스, 아이스 커피, 그리고 담배.
긴 꿈을 꾸고 막 일어난 느낌이었다.
“멍하우.”
“나도 그렇다.”
강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사흘이라고 그랬는데 둘이 어디 놀러 갔다 올까요?”
석강호가 아쉬운 듯 툴툴거렸다.
“어디 가서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
“우리 찜질방 갑시다. 가서 뜨거운 물에 몸 푹 담그고 잠도 자고 합시다. 그러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그거 괜찮겠다.”
솔깃한 제안이어서 강찬은 바로 일어섰다.
독기를 풀고 싶었다.
이상하게 전투를 치르고 나면 독기가 올라온다.
***
가뜩이나 잠을 설친 강대경은 아침부터 폭격을 맞은 듯한 심정이었다.
호텔에서 보았던 유혜숙의 동창들이 부부동반으로 재단 발족을 축하한다며 모여든 탓이다.
사무실이라고 6평짜리 오피스텔이다.
“여보, 어떡해?”
강대경은 당황한 유혜숙을 다독여서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강유모터스 사무실로 방문객들을 모았다.
“어머! 혜숙아! 축하해.”
강대경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인사하는 여자들의 표정에 담긴 우월감을 모르지 않았다. ‘네가 아들 잘 뒀다고 설쳐봤자지.’ 하는 묘한 눈길과 ‘재단이라더니 고작 이만한 사무실이야?’ 하는 조소를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것뿐이 아니다.
“자동차 견적을 받아볼 수 있나요? 아내 차를 바꿀 때가 되어서요.”
빤히 강유모터스 대표인 것을 알면서도 영업사원을 대하듯 내리까는 남편들의 의도도 분명하게 알았다.
내가 이 정도다.
그러니까 아들 잘 뒀다고 설치지 말고, 부탁하는 거 잘 들어라, 그럼 차 한 대쯤 사주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시선이고 태도였다.
강대경은 유혜숙을 위해, 유혜숙은 강대경의 사업에 지장이 가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였지만,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제 발로 걸어와서 거만하게 구는 꼴이 기가 막히기는 했다.
오전이라 약속이 없는 영업부 직원들까지 전부 매달려 다과를 준비하고 접대에 최선을 다했지만, 호텔에서나 감당할 인원이 들어서서 강유모터스는 어수선함 그 자체였다.
“어이! 여기, 음료수 좀 줘.”
두 번째로 강대경의 명함을 받아간 사내가 듣기 거북한 반말로 직원을 대했다.
재단 일을 위해 선발한 여직원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맞춰 열심히 살아보려는 아이인데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시불로 내면 1억 좀 넘는다는 거 아냐?”
“그렇습니다, 사장님.”
“왜 이래, 직원 할인 있잖아? 내가 여기 사장님 봐서 사는 건데 좀 깎아줘야지? 현금 일시불이라니까. 독일 차도 다 해주는 걸, 왜 여긴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이래서 차 팔겠어?”
견적서를 세 번이나 받았던 사내는 절대 살 마음이 없는 게 확실했지만, 오늘도 여전히 커다란 목청으로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
“뭐가? 자동차 영업이 원래 저런 거야.”
강대경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유혜숙을 다독였다.
너무 좁다는 둥, 재단이 이래서 후원금이나 들어오겠냐는 둥, 강유모터스는 한 달에 몇 대나 파느냐는 등, 전혀 고맙지 않은 관심과 강찬에 관한 이야기가 드문드문 들렸다. 심지어 국무총리와 대통령이 보낸 화분을 보며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많았다.
“잠시만 비켜 주십시오.”
그때 강유모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가 양해를 구하는 것이 보였다.
강대경은 유혜숙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직원까지 대동해서 왔으니 얼마나 유세를 떨 건가.
우습기도 했다.
혹시나 강찬의 덕을 볼 일이 있을까 해서 와놓고 잘난 척을 해대고 있는 거다.
누가 오라고 그랬나?
언제 아들이 잘났다고 그런 적 있나?
지금도 걱정돼서 숨이 턱턱 막히는 데, 이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아들이 ‘저 왔어요.’ 하고 들어서거나 전화만 한 통 해주었으면 싶었다.
“여보.”
유혜숙이 손을 잡아주었다.
“응.”
강대경은 억지로 웃었다.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유혜숙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
그 순간, 문 쪽에서 놀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던 강대경과 유혜숙은 거의 동시에 들어선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짝짝짝짝짝.
박수를 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분명 대통령, 문재현이었다.
“각하. 이분이 강대경 씨, 그리고 이분이 재단 이사장을 맡은 유혜숙 씨입니다.”
경호원들이 현관과 창문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앞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중년 사내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대통령님이십니다.”
이런 소개를 굳이 할 필요가 있나?
“반갑습니다. 문재현입니다.”
“예!”
강대경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뜻밖에도 그의 손을 문재현이 꼭 쥐었다.
“마음고생이 심하시다고 국무총리께 들었습니다. 대통령인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아니 대통령이 직접 나타날 줄은 꿈에서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강찬 학생의 어머님이시군요.”
문재현이 웃는 얼굴로 유혜숙과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 많은 건 좋은데 제가 그만큼 일을 못 한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예에.”
당황한 유혜숙이 대통령을 단박에 부끄러운 짓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좋은 일을 하신다기에 일정 중간에 잠시 들른 거라서 바로 가봐야 합니다.”
강대경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지난번에 병원에 보내주신 것과 화분, 감사드립니다.”
“화분이야 판공비에서 제하지만, 병원에는 제 한 달 월급을 모두 넣은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구박 많이 받았습니다.”
문재현이 엉뚱한 대꾸를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가겠습니다.”
강대경과 유혜숙에게 눈인사를 한 문재현이 털털한 걸음으로 강유모터스를 나갔다.
“여보. 지금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마음고생 말, 혹시 찬이 얘기야?”
“병원에서 국무총리께 들었잖아. 찬이가 프랑스 높은 분을 알아서 연결해주고 한 거, 그 말씀 같은데?”
사무실은 아직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모두 멍해진 게 맞다.
강대경이 무심코 사무실을 돌아보았는데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댔다.
“어머!”
재단 신입 여직원이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이가 가뜩이나 성격 괄괄한 사내의 옷에 음료수를 쏟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괜찮아! 괜찮아! 이런 걸로 죄송할 게 뭐 있어? 바쁘면 이럴 수 있어! 그러니까 사람이지! 음료수가 독도 아니고!”
“여보! 왜 아무한테나 반말을 해? 여기 직원분이라시잖아!”
“아! 내가 그랬나? 미안합니다. 그냥 조카같고, 딸 같아서, 괜찮지요?”
사내가 의식적으로 활짝 웃는 표정을 지으며 강대경의 눈치를 살핀 직후였다.
“할인은 뭘! 이 좋은 차 사면서. 저기 내가 1년 할부할 거니까, 당장 계약서 가져와요. 그럼요! 아, 좋은 차 사는 건데 내가 더 고맙지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로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을 보며 강대경은 강찬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
“야! 이거 죽인다!”
“푸흐흐흐.”
굶다가 온 놈처럼 삶은 계란을 처먹으면서 석강호가 웃어댔다.
“밥 먹으러 가자면서?”
“아무렴 이런 거, 몇 개 먹었다고 밥을 못 먹겠소?”
강찬은 못 먹을 것 같았다.
구충제를 사 먹여야 하는 게 아닐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서, 2시간쯤 푹 자고 일어난 참이다. 기계로 하는 마사지까지 받고 났더니 기분이 한결 개운했다.
몸의 흉터를 본 사람들의 놀란 시선만 빼면 뭐.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다.
“점심 먹으러 갑시다.”
“지금?”
“매콤한 게 땡기우. 우리 낚지 볶음에 밥 비벼 먹읍시다.”
웃음만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충전을 위해 프론트에 맡겼던 전화기를 찾아 찜질방을 나왔다.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강찬은 석강호에게 라노크가 주겠다는 돈에 대해 말했다.
“잘 됐소.”
이 새끼는 욕심이 안 나나?
하긴, 반대가 됐더라도 같은 말을 하고 끝냈을 거다.
“많이 받은 사람이 밥 삽시다.”
이상하게 이러면 밥값 몇만 원이 아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사요?”
“내가 산다.”
“푸흐흐흐.”
저렇게 웃고 싶었다.
석강호가 웃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킬킬거리고 싶었다. 독기가 좀 빠졌으면.
‘미영이를 만나볼까?’
강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공부하는 애다.
밥 먹고 나서 유혜숙에게 전화를 걸어볼 참이다.
***
양진우의 비서실장 조일권이 두툼한 코 위에 얹힌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분명 관계가 있습니다. 강대경이나 유혜숙이, 둘 다 이럴 정도로 여유 있었던 것들이 아닙니다. 게다가 오늘 오전에 문재현이 들렀다 간 것도 수상쩍은 일입니다.”
비서실장의 사무실이 아니라,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 건물의 높은 층이었다.
조일권은 책상에 올려진 A4 크기의 사진을 한 장씩 뒤로 넘겼다.
출근하는 강대경, 아파트에서 허름한 차림으로 봉지를 들고 걸어가는 유혜숙, 일상에서 편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사진을 넘길 때마다 차례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보십시오. 여기, 여기, 같은 놈들입니다. 분명 사설 경호업체 직원인 것 같은데 강찬이란 놈이 유비캅에 자주 다녔던 것으로 봐서 그쪽 직원일 확률이 높습니다.”
“용인에서 다친 놈들은 경찰 병원에 입원했다면서?”
“유비캅과 경찰 병원이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상과 뼈 부분에선 국내 최고 실력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정부 요원일 확률은?”
“정부 요원이면 규정상 군 병원으로 옮기게 되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은 낮습니다. 게다가 병원비도 모두 현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누가?”
“현금으로 지불해서 출처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조일권이 입술을 모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지?”
“저희는 회장님과 실장님께 충성할 뿐 그 뒤는 알지 못합니다.”
조일권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다음 정권은 회장님께서 원하는 분이 되셔야 돼. 족보도 없는 것들이 정권을 잡는 건, 면허도 없는 것들이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지. 악착같이 움직여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이 나라의 질서를 지켜내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가져.”
“회장님과 실장님을 모시게 돼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가 봐. 그리고 가능하면 여기 유혜숙이 적당한 사고를 당할 방법을 찾아봐. 국회의원이란 것들이 고작 깡패를 믿었다가 망신을 당하는 꼴이라니.”
조일권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책상 앞에 서 있던 사내를 보았다.
“강도가 적당합니다.”
“강도?”
“베트남 애들 둘 불러서 칼을 먹이는 게 제일입니다. 적당한 업체에 산업 연수생으로 들어왔다가 노름하고, 돈 잃자 눈 뒤집혀서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하겠습니다.”
“흐-흠.”
“10억이면 서로 하겠다고 베트남까지 줄 설 겁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네?”
사내는 먼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이미 준비해 놓은 놈들이 제법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기뻐하시겠군.”
“감사합니다, 실장님.”
조일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