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77화 (7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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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민원해결

강찬은 유니콘 프로젝트의 발표에 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라노크의 골프 일정을 발설한 쪽이 어디인지를 알기 전까지, 그렇지 않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이나 발표날이 확정될 때까지는 지켜볼 참이었다.

발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공개적으로 테러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다음 주에 3사관학교에 교육 갔던 직원들이 돌아오면 바로 라노크의 경호를 강화할 생각이다.”

“대통령님께선 라노크 대사와 면담을 통해 확신했던 바대로 우선 정국을 지켜볼 생각인 모양입니다.”

새벽 2시다.

결국,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지만, 김태진과 김형정은 훨씬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어야지.”

“먼저 출발하세요. 저는 여기서 담배 하나 더 피우고 갈게요.”

“왜? 내가 기다렸다가 태워다주고 가면 돼.”

“그러지 마시고 먼저 들어가세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 냄새도 빼야 하니까요.”

사정을 짐작한다는 투로 김태진이 웃고 김형정과 출발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렇지만 이 시간에 들어가면 강대경과 유혜숙은 잠을 설치게 된다. 강찬은 전화기를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오광택의 번호를 눌렀다.

세 번인가 신호가 울린 다음이다.

[“강찬!”]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음성이었다.

“어디야?”

[“남산 호텔.”]

“거기 꿀 발라놨냐?”

[“어딘데? 내가 그리 간다.”]

설명하기가 지랄 같은 데다 집 주변으로 부르기가 싫어서 강찬이 움직이기로 했다.

새벽 시간이라 5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 라운지는 테이블마다 초를 켜 놓아서 낮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형님!”

주철범이 클럽의 입구 쪽에 있다가 커다란 인사와 함께 달려왔다.

“광택이 형님 클럽에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거기 시끄러우니까 올라오라고 그래라.”

“알겠습니다.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클럽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로비 주변에서 못 보던 깡패들이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주철범이 클럽으로 내려가자 강찬은 로비 라운지에 앉았다. 음료수를 마시고 바로 온 길이라 간단하게 녹차 한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에 오광택이 중년 사내 둘과 클럽 계단을 올라왔다.

강찬은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분은 내가 모시던 권득모 형님, 이분은 안강민 형님. 형님, 말씀드렸던 강찬입니다.”

둘 다 마흔쯤으로 보였는데 눈매가 매서웠다.

“반갑다.”

권득모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안강민이다.”

강찬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로 안강민의 손도 잡았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가운데 넷이서 자리에 앉았다.

셋은 냉수를 주문했다.

“주차창 박기범이, 우악산, 그리고 이번에 신영동 얼라들까지. 우리끼리 칼부림해서 디비지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만도, 관을 끼어서 이런 기는 곤란해.”

안강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강찬이 지시한 건 아니다. 하지만 모양새가 그런 터라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짱개와 쪽발이들이 장난이 아냐. 특히 쪽발이 새끼들은 돈을 퍼붓다시피 해가꼬, 얼라들이 그쪽으로 죄다 자빠라지거든. 다음부터 언놈이고 널 건드릴라카면 여기 광택이나 우리한테 먼저 말해. 우리가 알아서 조정볼라카이까.”

“그렇게 하죠.”

어쩌면 유니콘 때문에 일본에서 이런 것일 수도 있어서 한 대답이었다. 오광택이 ‘이놈이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하는 눈으로 강찬을 흘깃 보았다.

“당장 거슬리는 건 엄꼬?”

“일이 생기면 광택이와 의논하겠습니다.”

안강민이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강찬과 오광택도 함께 일어섰다.

“강찬이.”

권득모가 걸걸한 목소리로 강찬을 불렀다.

“내가 호남, 여기 강민이가 경상도 쪽 실질적인 오야붕이라고 보면 돼. 서울 쪽이야 이제 광택이 세상이 됐고. 우리 둘이서 네 이름 걸어 놓을 거다. 우리끼리 칼부림을 하더라도 쪽발이나 짱개 돈에 머리 숙이게는 하지 말자.”

깡패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바람에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음 주에 행사 하나 있으니까 그때 광택이랑 같이 한번 와라. 이름만 듣는 것보다는 얼굴 한번 보이고 가는 게 깨끗해. 그래야 멋모르고 대드는 놈들 때문에 서로 불편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죠.”

강찬의 답이 있고 나자 오광택이 “들어가십쇼, 형님.”하고 고개를 숙였다.

털썩.

강찬은 의자에 소리 나게 앉았다.

“너 어떻게 된 거냐?”

“뭐가?”

오광택의 질문을 강찬은 알아듣지 못했다.

“나도 그렇지만 형님들 정도 되면 검찰이고, 법원이고 발이 넓거든. 그런데 이번 일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꼬리를 뺐다더라. 너 혹시 대통령 빽, 이런 거냐?”

“지랄한다.”

욕을 먹은 오광택이 기가 막히는지 풀썩 웃었다.

“내려가자. 내려가서 술 한잔 마시자.”

“시끄러워서 싫어.”

“그래? 그럼 나가자.”

“어딜?”

“요 앞에 소줏집 좋은 데 있다.”

피곤한데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야! 깡패가 사주는 술도 한번 마셔.”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나가자 입구에 있던 직원 둘이 고개를 허리까지 숙였다.

“이모네 가게 있을 거니까 너희는 여기 있어.”

오광택이 따라오려던 놈들을 막은 게 마음에 들었다.

호텔을 나와 왼편으로 편의점이 있고 그 옆으로 ‘실내포장마차’라고 투박하게 이름을 써놓은 허름한 가게가 나왔다. 낮에는 보이지도 않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퉁퉁한 노인네가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하며 오광택을 반겨주었다.

자리에 앉았고, 소주와 맥주, 그리고 두어 가지 안주를 주문했다.

오광택이 폭탄주를 만드는 동안 노인네가 급하게 몇 가지 밑반찬을 가져다주었다.

“꼬마 때부터 다니던 가게.”

묻지도 않았는데 오광택이 먼저 털어놓았다.

“마시자.”

둘이서 단숨에 잔을 비웠다.

“받아.”

두 번째 잔이 건너왔다.

“개새끼. 처음 같이 술 먹어 보네.”

뭐라는 거야?

장난치는 것이 분명해서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그러나 강찬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왼쪽 팔의 상처가 욱신거려서였다.

유헌우가 다른 건 몰라도 술을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쯧!

강찬은 그래도 술을 들이켰다.

하루쯤 쉬고 싶었다.

제라르의 눈빛, 안느를 부탁할 때의 라노크의 표정, 그리고 예전 사진 위로 빨갛게 찍힌 ‘사망’이란 글자가 강찬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20분도 안 돼서 소주 두 병과 맥주 네 병을 비웠다.

“좀 하네?”

“술이나 더 시켜.”

오광택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소주와 맥주를 직접 들고 왔다.

“네 말대로 일단 가지고 있는 거, 다 현금으로 바꿀 거다. 내가 이러다 칼 맞으면 내 마누라랑 딸년은 네가 책임져라.”

에효! 팔자에 없는 딸을 둘이나 지키게 생겼다.

강찬이 말없이 술을 들이켤 때였다.

“왜 이렇게 깡술을 먹어? 여기! 이것 좀 먹어. 밥은 먹고 다녀?”

“먹었어. 요즘은 속 썩이는 애들 없어?”

“지금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모친인가 싶을 정도로 오광택을 살갑게 대한 노인네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광택은 강찬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옛날에 여기 자리 탐낸 놈들이 있었거든. 그때 도와줬던 게 고맙다고 저래. 고생할 때 밥 얻어먹은 적도 있어서 이모 같기도 하고.”

오광택은 술기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도석이 아직도 의식이 없다. 그래서 그 새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거든. 적어도 날 진심으로 따르던 놈들만큼은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칼을 맞으면 맞았지, 더는 저런 꼴 못 보겠다면 알아 듣겠냐?”

말을 마친 오광택이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철범이 같은 놈, 제대로 먹고살 길 열어주고 싶었다. 나중에 나 없을 때라도 도석이 꼴 나지 않게.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 제대로 한번 알아봐 주라. 네 말대로 가진 거 깨끗하게 털 거니까.”

“조직 깨지면 위험해지는 거 아니냐?”

“그래서 말했잖아. 나 작업 당하면 마누라랑 딸 부탁한다고.”

술기운 속에서 오광택의 눈빛이 번득였다.

“다른 깡패 새끼들하고 달리 난 내 사업장으로 돈 벌었다. 그래서 이 나이에 강남에서 당당하게 큰소리치고 사는 거야. 대신 배운 게 도둑질이라 클럽, 호텔, 카지노에서 굴러먹은 건데, 이 바닥이 워낙 살벌해서 이대로 가면 오래 살기 어렵지.”

강찬은 듣기만 했다.

4시쯤 됐을 때 오광택이 비틀거렸다.

강찬이 전화하자 주철범이 동생 두 놈과 급하게 달려왔다.

“얘 좀 챙겨.”

“알겠습니다. 형님.”

주철범이 오광택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나머지 둘이 다리를 들고 움직였다.

“여기 얼마에요?”

“오만 원만 줘요.”

노인네가 갈색 음료를 잔에 가득 채워서 들고왔다.

“헛개수 달인 물이니까 이거 마시고 가요.”

“고맙습니다.”

강찬은 돈을 건네고 컵을 받았다.

“저놈이 심성은 착해.”

깡패가 착한 놈이 있나?

강찬은 웃음을 참으며 헛개수 물을 마셨다.

“깡패라고 다른 사람 상하게 할 때가 있는 모양인데 그럴 때면 여기 혼자 와서 술 진탕 마시고 울곤 했지.”

저 새끼가?

강찬의 표정을 본 노인네가 그릇을 쟁반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초창기에 이 자리 탐낸 사람들이 많았다우. 그때 혼자서 악착같이 지켜줬지. 내 아들놈이 몸이 불편한 걸 알고는 어떻게든 먹고 살라고.”

노인네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쳤는지 앞치마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 뒤로 내가 돈을 안 받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냈어. 그래서 오늘도 오만 원을 받는 거라우. 저놈이 너무 서운해하니까. 깡패 돈이라고 무시하는 거냐고 달려드는데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

마음은 알 것 같았다.

“갈게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저녁에 밥 생각나면 그냥 와요. 내가 얼굴 봐뒀으니까 그건 돈 안 받을게.”

“그럴게요.”

노인네의 마음이 고마워서 강찬은 기분좋게 가게를 나왔다.

호텔의 입구에 들어설 때 나오던 주철범과 마주쳤다.

“광택이 형님 방으로 모셨습니다. 형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새끼, 원래 술이 약했냐?”

“형님이 터무니없이 강하신 거라고 투덜대시던데요.”

주철범이 웃음을 터트렸다가 얼른 표정을 바로잡았다.

곧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눕자 숨어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강찬을 덮쳤다.

***

눈을 뜬 것은 오전 7시 경이었다.

기분이 개운한 건 좋았는데 왼팔이 예사롭지 않았다.

붕대 위에 수건을 감고 팔을 든 채로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는 자나?’

어제 옷을 세탁실에 맡기겠다며 주철범이 벗어놓은 옷을 가져간 거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샤워하고 나왔는데?”

[“직원이 올라갔다가 주무시는 것 같다고 내려왔었습니다. 제가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잠시 뒤에 주철범이 옷을 가지고 왔다.

“광택이 형님이 식당에서 기다리십니다.”

“정신 좀 차렸든?”

“형님 제대로 챙겼냐고 걱정하십니다.”

둘이 풀썩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식당에서 여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로 가자 오광택이 멋쩍은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어제는 미안했다.”

“기분 좋게 마셨어. 다음에 한 번 더 가자.”

직원이 식사를 가져와서 둘이 밥을 먹었다.

“가진 걸 대충 정리하니까 200억쯤 된다.”

“깡패 새끼가 더럽게 돈 많네.”

“카지노하고 호텔 지분이 비싸서 그래.”

밥을 급하게 삼킨 오광택이 목이 메는지 물컵을 입에 가져갔다.

“오광택. 만약 네가 서울을 비우면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 넘어온다는 거 아니었냐?”

“그렇긴 하지.”

“그럼 일단 기다려. 대신 엄한 짓 하지 말고.”

오광택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중국과 일본 세력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유니콘 사업을 설명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당장 서울에서 칼부림 나게 하지 말자는 뜻이다.”

“알았다.”

“영화에서처럼 괜히 사업체 뺏거나 하지 말고.”

오광택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웃었다.

***

오광택과 헤어진 강찬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유헌우를 만났고 왼팔의 붕대를 풀었다.

“아후!”

유헌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곪았네요. 다른 곳은 어때요?”

“두 번이나 샤워했는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술 마신 건 없죠?”

강찬의 대답이 없자 유헌우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강찬 씨.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였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두 달은 입원했어야 할 중상입니다.”

“주의할게요.”

소독하고 붕대를 감은 다음, 주사를 두 대나 맞았다.

유헌우가 치료해주자 안심이 되었다.

병원을 나와 우선 유혜숙과 통화했다.

다음은 석강호다.

양복에 셔츠 차림이라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병원과 학교의 중간쯤 되는 커피 전문점에서 석강호를 만났고, 강찬은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어쩔 셈이오?”

“당분간은 지켜보자.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태어난 이유가 밝혀질지도 모르니까.”

“다시 돌아갈 것도 아니잖소?”

“그렇긴 하지.”

목에 총을 맞는 순간으로 돌아가 봐야 목만 아픈 거다. 그다음은 그냥 죽는 거고.

“가만, 스미든 새끼는 뭐 아는 게 없겠소?”

“그냥 끌려다닌 놈인데 별거 있겠냐?”

“한번 만나는 봅시다.”

“나쁘진 않겠다.”

얼굴 볼 때도 됐다.

단순한 놈이라 그냥 슬쩍 물어봐도 아는 것 이상으로 떠버릴 놈이다.

“제라르 새끼는 한번 보고 싶네.”

“보면 놀랄걸?”

“그래 봐야 그 병아리 새끼가 어디 가겠소?”

강찬은 제라르에게서 얻어 마신 봉지 커피와 라이터 이야기를 느긋하게 풀어냈다.

“그 새끼! 그러니까 더 보고 싶소.”

대충 얘기가 끝났다.

한 시간쯤 더 노닥거리다가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이제 뭐 할 거요?”

“나온 김에 대본 연습 한다는 데 가보려고.”

“난 학교에 가서 애들마저 가르치겠소. 참. 그리고 우리 집에 한번 갑시다. 다음 주 괜찮소?”

“그러자.”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쉘과 통화했다.

택시를 타고 여의도에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대북송금 문제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내용의 대담이 이어졌다. 택시 기사가 몇 번 말을 걸었지만, 강찬은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SBC 방송국에 도착하자 로비의 의자에 있던 미쉘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보스!”

얘는 이제 달려드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 정말 멋있다!”

미쉘이 재킷에 출입증을 걸어주며 감탄하는 표정으로 강찬의 위아래를 살폈다.

대본 연습실은 3층에 있었다.

“여기야.”

미쉘이 문을 열고 강찬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은소연과 연습생들이 일어나 인사했다.

“보스, 이분이 표민국 감독님.”

어딘지 여성스럽게 생긴 마흔 중반의 표민국이 선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이어서 작가, 그리고 나름 유명하다는 연기자, 그 외에 스텝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표님. 커피 타 드릴까요?”

은소연이 다가왔으나 강찬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부터 너무 마셨고, 오늘만 해도 오광택과 석강호와 연달아 마시고 온 길이다.

“잘 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은소연은 기쁜 얼굴이었다.

안쪽의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지명도 있는 연기자라도 제작사 대표인 강찬에게 툴툴거릴 이유는 없다.

“좋아 보인다.”

“예.”

“뭐 필요한 건 없어?”

“저, 여기 계신 분들하고 회식 한번 하고 싶어요.”

강찬은 미쉘을 보았다.

그래 주었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돈이 없을 리는 없고, 대표가 시원하게 한번 쏘는 것을 바라는 표정.

“알았다. 미쉘하고 의논해서 적당한 장소와 날짜를 정해.”

“감사합니다, 대표님.”

은소연이 기쁜 얼굴로 답을 했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미쉘과 함께 내려와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렸다.

유혜숙이었다.

“예, 어머니.”

“응! 아들. 통화 괜찮아?”

유혜숙은 무척 난처한 음성이었다.

“예. 괜찮아요. 무슨 일이신데요?”

“저기, 방송국에 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 방송국에 엄마 친구가 딸이랑 가 있었나 봐. 엄마한테 인사나 하게 해달라고 전화 왔었어. 곤란하면 바쁘다고 할게.”

아들에게 이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있는 건가?

“괜찮아요. 제가 만나보고 알아서 할게요. 어디 있는지 오라고 하세요.”

“미안해, 아들.”

“괜찮다니까요.”

통화를 끝낸 강찬은 미쉘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런 건 일찍 알려주지.”

“곤란한 거 아니냐?”

“서너 자리는 비어. 아니면 적당하게 하나 만들면 되고. 원래 출연료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출연만 하게 해달라는 연기자들도 많아.”

“그런 건 싫고.”

“알아서 할게.”

미쉘의 눈빛이 뜨거워진다 싶을 때 중년 아줌마와 딸 하나가 쭈뼛거리며 강찬의 앞으로 왔다.

“저기…….”

“예. 혹시 전화하셨던 어머니 친구분이세요?”

“맞아요. 얘기 들었어요?”

“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휴! 그건 아니에요.”

강찬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딸과도 인사했다.

평범하게 생겼다.

그렇지만 유혜숙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강찬은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을 미쉘에게 인사시켰다. 의뭉스러운 미쉘은 한국말을 겨우 알아듣는 척했다.

“내일 사무실로 오시면 된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모녀가 연신 인사를 한 다음 환한 얼굴로 방송국을 빠져나갔다.

“몇 회만 찍는 거니까 그거 대본 넘겨주고, 집중적으로 훈련하면 돼. 우리 애들하고 섞일 일도 별로 없어.”

알아서 잘하겠지.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 주말에 시간 좀 낼 수 있어?”

“왜?”

“맥주 마시고 싶어.”

“그래.”

미쉘이 환한 얼굴로 안기는 것을 다독여주고 강찬은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이젠 집에 들어가서 쉴 생각이었다.

방송국 현관을 나서 택시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뭐지? 피곤해서 그런가?’

묘하게 신경이 거슬려서 강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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