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76화 (7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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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여러 가지 만남.

일곱 명이 함께 한 아침 식사였다.

거실과 싱크대 사이에 기다란 간이 식탁이 있었는데 모두 둘러앉자 살짝 비좁은 느낌이었다.

‘이것들은 정체가 뭐야?’

빵과 잼을 건네주고, 스크램블을 입에 넣으며 강찬이 한 생각이었다.

유럽을 대표한다는 놈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격식을 갖춰 먹어야 하는 법은 없는 거다. 오히려 이렇게 편하게 앉아 토스트에 잼 발라 먹는 거, 강찬은 더 좋았다.

“그래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금융 쪽을 살짝 눌러드리면 어떻소?”

“그렇게 도와주신다면 대통령도 더는 거부하기 어렵겠지요.”

라노크만 아니라면 과대망상증 환자들 틈에서 속고 있는 거라 믿기 딱 좋은 수준이었다.

“강촤안 씨의 연락처를 나눠도 됩니까?”

루드비히의 질문에 강찬이 “물론입니다.” 하고 답을 했다.

“식사가 끝나면 강찬 씨의 번호를 알려드리고, 여러분의 연락처도 강찬 씨에게 전해 드리지요.”

다들 만족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샤워를 하시는 게 좋겠군요.”

“그럴 참입니다.”

강찬은 접시를 싱크대에 넣은 후 샤워실로 향했다.

“라노크. 저 친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겁니까?”

반트가 시리얼을 입에 넣고는 강찬이 걸어간 샤워실을 바라보았다.

“절박한 순간에 꼭 한 번의 전화를 걸 수 있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강찬 씨의 번호를 누를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그 이상입니다.”

“그렇더라도 강찬 씨에게 우리는 아직 낯선 인물이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강찬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그러자 라노크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은 후에 숨을 내쉬었다.

“유니콘이 발표되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입니다. 저는 이미 안느를 저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다섯 명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눈빛으로 라노크를 보았다. 지금의 말이 갖는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다.

“위급한 순간이 생기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한국으로 오시거나 강찬 씨에게 연락하기를 권합니다. 내가 유니콘을 빨리 발표하자고 한 배경에는 그 점도 담겨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강찬 씨의 입지를 세워주는 일이 우리의 안전을 위한 일도 됩니다. 우리의 안전을 맡길 사람으로 강찬 씨 외에는 없습니다.”

“확신합니까? 라노크?”

“안느를 맡겼습니다.”

다섯이 시선을 교환했다.

“흠. 그렇다면 우리 모두 강찬 씨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군요.”

“친구로 받아들였다면 그렇습니다.”

식사가 대충 끝났다.

“라노크. 이미 유니콘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으니 발표를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라노크가 위험에 처한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당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유럽과 여러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우리 모임이 누구 한 사람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라노크의 말이 끝난 다음이다.

반트가 당할 수가 없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유럽의 경제 부흥이란 명목으로 유니콘을 시작해 단숨에 미국의 목줄을 거머쥐었으니. 후후후. 미국을 믿고 버티던 영국의 입장이 그들 말대로 goddamn이 되지 않았소?”

“핫핫핫.”

‘제기랄’쯤 되는 ‘goddamn'이란 단어는 프랑스인이 영국인을 비하해서 부를 때 쓴다.

반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노크. 힘을 합쳐도 모자랄 영국과 미국이 왜 서로 눈을 흘기는지 아직 모릅니까?”

“글쎄요? 저도 그 점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혹시 정보가 들어오면 우리의 방식대로 공유하기로 하지요.”

“그럽시다. 그런 의미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 마셔야겠소.”

***

강찬은 샤워실에 들어와 붕대를 풀었다.

가슴의 상처는 물이 닿아도 견딜만했지만 팔은 아직 살점이 뜯겨 나왔다.

옷을 다 벗은 상태에서 붕대를 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강찬은 왼팔을 위로 든 채로 샤워를 했다.

전에 손바닥을 베었던 자리는 흔적만 남았다.

비누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뻣뻣한 물이다.

샤워를 마쳤을 때 시원하긴 했는데 후련하지는 않았다.

강찬은 물기를 닦았다.

왼팔에선 아직 피가 배어 나왔다.

요원들이 준비한 옷은 양복과 셔츠였는데 꽤 가격이 나감 직한 명품이었다.

어쩌면 라노크의 뜻인지 모른다.

‘옷을 좀 사긴 해야겠네.’

강찬은 셔츠를 조심스레 입고 왼팔에는 수건을 감은 채로 샤워실을 나갔다. 식사는 이미 끝났고, 반트만 앉아 커피를 마실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강찬은 눈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임무 교대를 했는지 제라르와 다른 대원들이 현관 앞에 편하게 서 있었고, 요원 둘도 대기하고 있었다.

“붕대를 감아야 돼. 구할 수 있을까?”

“연락해 보겠습니다.”

강찬이 왼팔을 보여주자 요원이 전화를 걸었다.

“군의관을 데려오겠습니다. 팔에만 감으면 됩니까?”

“응. 부탁해.”

요원 둘이 지프를 타고 막사 사이로 사라졌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싶었는데 주변을 둘러본 강찬은 마음을 접었다.

직위가 높다고 껍죽대는 꼴을 싫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라노크를 등에 업고 설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강찬은 담배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담배 드릴까?”

강찬이 풀썩 웃었다.

“마침 궁금하긴 했지. 답례로 따끈한 커피 한잔 가져다줄까?”

“우린 넷이오.”

제라르가 고개로 옆에 선 대원들을 가리켰다.

“갈 때 괜찮으면 봉지 커피나 한잔 더 줘.”

강찬은 안에 들어가 머그잔에 다섯 개에 커피를 가득 채워서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여깄소!”

제라르가 담배를 건네주었다.

철컹. 치익. 치익. 치익.

세 번 만에 불이 켜졌다.

이 자식은 그새 석유를 섞은 거다. 좀 많이 넣긴 했지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눈앞에 활주로와 막사가 있고, 바로 곁에 대원들이 있으니 금방이라도 다예루가 커피를 들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한국 사람이오?”

“왜? 휴가받으면 한번 올래? 그럼 내가 돈가스하고 불고기 사주지.”

제라르의 표정을 보며 강찬은 아차 싶었다.

“예전에 알던 한국 선임도 똑같은 음식을 추천했었소.”

“맛있으니까.”

제라르가 피식 웃었다.

이 새끼가 원래 이렇게 웃었었나?

“구대원들이 마음에 드나?”

제라르가 옆에 선 대원들을 흘깃 보았다.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고 멈춰. 포상, 훈장 따위 버려라. 살아 있는 게, 한 명이라도 살려내는 게 구대장의 가장 큰 임무다.”

담배를 깊숙하게 빨아들인 탓인지 제라르는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강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지프가 돌아왔다.

화이트 크로스 백을 내린 군의관이 강찬에게 다가왔다.

강찬이 수건을 내리자 군의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에 붕대를 푸느라 살점이 여기저기 뜯겨 있었다.

“소독을 해야겠습니다.”

“부탁하죠.”

상처에 소독약이 닿으며 거품이 일어났다. 그 위에 약을 바르는 동안 강찬은 커피를 여유 있게 마셨다.

붕대를 감았고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수고하셨어요.”

경호원 루이가 지프에 군의관을 태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직급이 높으신가 봅니다?”

“왜?”

“루이, 저 양반이 정보국 소속이라 우리보다 직급이 위거든요.”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강찬은 커피만 입에 넣었다.

붕대를 감은 터라 셔츠의 팔을 내려 잠갔다.

“컵은 이 앞에 둬.”

“알았슴다.”

거칠게 하는 대답에 슬쩍 제라르를 바라본 강찬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라노크와 일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강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말끔한 복장과 가방으로 보아 출발할 모양이었다.

“강촤안 씨. 이제 자주 보십시다.”

“고맙습니다. 언제고 연락 주십시오.”

다섯 명이 라노크와 강찬을 안고 볼 키스를 나눈 후에 막사를 빠져나갔다.

“우리는 이제 샤흐란을 만나러 갈까요?”

라노크와 강찬은 막사를 나서서 준비된 지프에 올랐다.

대원들은 따라오지 않고 활주로 쪽으로 움직였다.

1㎞쯤을 가자 콘크리트로 지어진 거대한 돔이 나왔고, 지프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천장에 조명이 없었다면 거대한 실내 축구장이라고 오해할 만한 규모였다.

지프는 돔의 가장 안쪽으로 가서 멈춰 섰다.

라노크와 강찬이 내려섰을 때였다.

“지프 이동!”

스피커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루이와 요원 한 명이 지프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우웅.

모터가 멈추는 듯한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이 열렸다. 신기해서 유심히 보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을 콘크리트 벽처럼 위장해놓은 거였다.

라노크가 먼저 타고 강찬이 뒤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시작하자 강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버튼이 없다.

조정실에서 카메라를 보며 조작하는 거다. 내부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그 어떤 인물도 지하로 내려갈 수 없는 구조였다.

‘제대로 걸렸구나, 샤흐란.’

이 정도라면 안심할 수 있겠다.

1분쯤 뒤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소총을 앞에 멘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라노크와 강찬은 군인을 따라 50m쯤 걸었고, 두꺼운 철문을 통과했다. 다시 복도가 50m, 그리고 두 번째 철문을 들어선 다음에 넓은 방이 있었다.

샤흐란은 그곳에 있었다.

공기가 탁해서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방 한가운데 철장이 설치되었고, 그 안에 샤흐란이 있었다.

철컹!

군인 한 명이 철장 문을 열어주자 라노크가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샤흐란은 아직 두 대의 기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강찬.”

삶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강찬은 샤흐란의 침대 왼편으로 걸었다.

침대 위쪽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어서 얼굴을 보기 좋았다.

“양복이 멋지군.”

“고가품이니까.”

강찬은 고개를 살짝 틀며 샤흐란을 보았다.

이 새끼가 속임수를 쓰고 있는 거다.

언제고 방심할 때를 기다리며 이곳의 경계를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샤흐란. 눈빛 감추는 연습을 좀 더 하는 게 좋겠어.”

놈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거래를 하자.”

“거절이다.”

이 새끼와 엄한 짓을 하느니 허은실과 매일 만나는 게 백번 현명한 짓이다.

“구미가 당길 텐데?”

“듣고 싶지도 않아. 하고 싶은 말이 그거라면 이만 돌아가마.”

“갓 오브 블랙필드.”

“헛소리 그만하지.”

“네가 정말 그 강찬이라면 들어둬라.”

이걸 들어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돌아서야 하나?

“블랙헤드가 완벽하지 않았단다. 내가 한국에서 너에게 당했을 때 영국이 바로 나서지 않은 이유가 그거였다더군. 내가 배신한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나를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왜 그럴까?”

이 새끼에게 누군가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거다.

“재미없어, 샤흐란.”

“왜 내가 필요할까?”

샤흐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영국이 반지를 만들려고 블랙헤드를 사지는 않았겠지?”

무언가 실마리를 잡고 계획적으로 강찬을 자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가 외인부대의 강찬이라면, 세상에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난 거라면, 그건 틀림없이 블랙헤드와 관련이 있는 거다.”

“거래를 하자면서 이렇게까지 주절거리는 이유가 뭐냐?”

샤흐란의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죽은 네놈이 지금의 몸뚱이로 옮겨갈 만큼 엄청난 일이 있었던 거다. 거기다 다예루도 그런 경우라면 더더욱 더. 난 네놈을 핑계로 영국과도 거래하고 있지. 날 여기서 꺼내주면 블랙헤드를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 어때?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나와 거래하지?”

“샤흐란.”

강찬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지옥에나 가.”

샤흐란이 거죽만 남은 얼굴을 우그러트리며 흉측한 미소를 지었다. 악만 남은 인간을 보는 느낌이었다.

강찬은 미련없이 철장을 나왔고, 군인이 바로 문을 채웠다.

말없이 들어온 길을 거꾸로 나왔다.

안에서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건지 라노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서자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무척이나 신선했다. 돔으로 둘러싸인 가장 안쪽인데도 말이다.

잠시 후에 지프가 달려와서 두 사람을 태웠다.

***

지프는 곧바로 활주로로 향했다.

요원들과 대원들이 올라타는 순간에 비행기는 바로 이륙했다.

띵. 띵. 띵.

정상고도를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요원 한 명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강찬은 샤흐란이 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확실히 영국이나 미국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이 강찬 씨와 관련된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군요.”

“샤흐란과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도 분명한 거죠.”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라노크는 강찬의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너무 서둘 것 없습니다. 그를 통해서 알아낼 수도 있는 거니까요.”

라노크의 결정을 강요하기는 어렵다.

“지금부터 미국과 영국의 반응을 살펴보면 무언가 나올 겁니다.”

그럼 그렇지.

라노크같은 구렁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논을 위해 친구들을 부르고 고작 5분 샤흐란을 만나자고 한국에서 프랑스로 올 리가 있겠나.

오늘의 모임과 샤흐란을 만난 것에는 영국과 미국의 반응을 살피려는 계획도 포함된 거였다.

같은 편이라 망정이지 이런 사람이 적이었다면?

생각만으로도 뒷골이 뻑뻑했다.

“당분간은 유니콘 프로젝트의 발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발표가 확정되었다고 알려지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테러와 국제적인 움직임들이 공개적으로 펼쳐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사님.”

“한국의 현 정권이 유지돼야 저 역시 안전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서두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노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들어가서 잠시 쉬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저는 좀 더 있을게요.”

혼자 남게 된 강찬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한국과 프랑스를 이틀 만에 오가는 거다.

이렇게 오산에 도착해서 헤어지고 나면 내일 라노크가 어디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절대 부럽지 않은 삶이다.

피곤이 몰려왔다.

침대보다 소파에서 잠시 졸았으면 싶었다.

강찬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자 몸이 훨씬 개운했다.

밖에 있는 제라르에게서 봉지 커피를 한잔 얻어먹을까 했던 강찬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정도가 꼭 좋았다.

말을 하다 보면 자꾸만 과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였다.

16시간 만에 오산에 착륙했다.

비행기가 멈춘 후에 트랩을 내려서자 제라르와 대원들은 이미 주변에 넓게 서 있었다.

‘쯧. 말 한마디라도 하고 갔으면 좋을 텐데.’

어차피 제라르는 강찬을 모른다. 아쉽지만 치근덕거리는 것보다는 좋았다.

차에 오르기 전에 강찬은 활주로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제라르와 눈이 마주쳤다.

‘멋지게 살아라.’

거기까지였다.

오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저야 잘 먹고 잘 잤는데요. 보기에는 대사님도 절대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신 분 같지 않은데요?”

실제로도 라노크는 그렇게 힘겨운 기색이 아니었다.

“이동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최대한 수면을 취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견딜만하더군요. 참. 다음 주 식사는 괜찮은가요?”

“예. 시간만 정해주시면 언제고 괜찮습니다.”

고속도로가 한적한 만큼 차는 빠르게 달려나갔다.

***

한남대교를 빠져나와 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라노크와 헤어진 강찬은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에 들어갔다.

시원한 음료수를 주문했고, 테라스에 앉았다.

가장 먼저 김형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찬 씨!”]

무척 반가워하는 음성이었다.

“전에 뵀던 사거리 커피점인데 어디세요?”

[“유비캅 사무실입니다. 그리로 갈까요?”]

어떻게 할까? 어느 쪽이 좋을까?

강찬은 커피전문점이 편했다.

“여기가 나을 것 같은데요. 불편하시겠지만 여기서 뵙지요.”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석강호는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유비콘 프로젝트를 김형정에게 말하면 과연 그가 입을 다물고 있을까? 반대로 한 팀이라고 해놓고 이런 결정적인 일을 입 다물고 있어도 되는 걸까?

참 어려운 일이다.

음료수를 반쯤 마셨을 때 김형정과 김태진이 차를 세우고 테라스로 걸어왔다.

김태진은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 있었다.

굳이 말을 전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자네 잘못이 아닌 걸 자꾸 그러면 내가 부족하다는 뜻이 돼.”

강찬의 손을 잡은 김태진의 눈빛이 그랬다.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에 김형정이 음료수 두 잔을 사 와서 셋이 마주 않았다.

“라노크와 프랑스에 다녀왔어요.”

“이틀 만에?”

“예. 프랑스 로리암 기지에서 샤흐란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어서 조건을 걸었었던 건가 봐요.”

“내용은?”

“깨끗하게 헛고생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실제로도 헛걸음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저도 그렇습니다.”

김형정의 눈가로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오가면서 뉴스는 봤습니다.”

김형정이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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