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4 / 0419 ----------------------------------------------
4-8. 자신 있으십니까?
집에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거실에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유혜숙의 뒤에서 강대경이 눈을 찡긋했다.
“약 먹었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저 먼저 들어가서 잘게요.”
“너무 무리해서 그래.”
“정말 그랬나 봐요.”
감기는 아니지만 무리한 건 맞다.
강찬은 실제로도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야당이 어쩌고, 국가정보원 원장 자리가 어쩌고, 거기에 탄핵까지. 회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보다 더한 진흙탕 싸움에 끼어든 느낌이다.
“자자.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강찬은 그렇게 잠이 들었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직은 무리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유헌우의 당부를 생각해서 새벽 운동을 걸렀다.
적당히 씻은 다음 아침을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할 때였다.
뜻밖에도 라노크가 전화를 걸어왔다.
“대사님.”
[“강찬 씨. 몸은 좀 어떻습니까?”]
“다음 주부터는 운동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다행입니다.”]
라노크가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주 저녁 약속은 언제가 좋을까요?”
[“강찬 씨.”]
“예, 대사님.”
안느가 저녁 약속을 재촉한 줄 알았더니 라노크는 다른 이유로 전화한 모양이었다.
[“오늘부터 며칠 간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예?”
뜻밖의 말에 강찬은 어리둥절했다.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남산 호텔에서 뵙죠. 9시 30분이면 좋겠습니다.”]
“예. 그럼 그 시간에 뵙지요.”
통화를 끊고 나자 이유가 궁금하긴 했는데 어차피 한 시간 뒤면 밝혀질 일이었다.
‘뭐라고 하지?’
꼬였다. 감기가 어쩌고 하는 핑계를 댔는데 갑자기 또 며칠 집에 못 들어오게 생긴 거다.
강찬은 우선 셔츠에 양복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아들! 오늘도 방송국 가니?”
“아뇨. 대사님이 보자는데요? 같이 지방에 좀 다녀오자구요.”
“안 돼. 몸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은 좋아요. 그리고 이렇게 함께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것도 재미있구요.”
가능하면 유혜숙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다른 분도 아니고 프랑스 대사와 함께 가는 거라잖아. 당신 친구들이 알면 모두 부러워할 일이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엄마.”
강찬은 유혜숙을 안아주고 강대경과 함께 아파트를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정말 프랑스 대사가 시간을 비워달라고 전화했었어요. 남산 호텔에서 만나자구요.”
“태워다 줄까?”
“안 늦으세요?”
“그 정도는 괜찮지.”
강대경은 선뜻 강찬을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이렇게 가니까 전에 공트 자동차 계약하러 갈 때 생각난다.”
강대경은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다음부턴 아빠 출장 가방을 써. 속옷이랑 양말, 갈아입을 옷도 좀 가져가고.”
“그럴게요.”
“으이그.”
강대경은 안쓰러움을 장난처럼 표현했다.
“주말까진 오겠니?”
“오늘부터 며칠 간이라니까 그럴 것 같은데요?”
“혹시 못 오게 되면 꼭 전화하고, 중간중간에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네가 다른 사람 앞에서 곤란할까 봐 전화기 들고 종종대는 거 보면 안쓰러울 때 많다.”
“전화하시면 되는데.”
“가뜩이나 학생이 사회생활하는 건데, 주변에서 무시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더라.”
출근 시간인 데도 호텔로 향하는 길은 그리 막히지 않았다.
“잊지 않고 전화드리도록 할게요.”
“그래라.”
강찬을 호텔에 내려준 강대경은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로비 라운지로 가서 차를 시킨 후에 석강호, 김형정에게 차례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차피 전화가 가능할 테니 변동사항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기로 했다.
9시 20분쯤 되었을 때 라노크에게서 연락이 있었다.
[“현관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로비 라운지니까 바로 가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강찬이 현관에 서 있자 검은색 승용차와 승합차가 동시에 들어섰다. 승용차의 뒷유리가 열리고 라노크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강찬은 바로 뒷좌석에 올랐다.
“아침부터 바쁘게 해서 미안합니다. 급하게 일정이 잡혀서 저 역시 많이 난처했던 참입니다.”
대사의 근엄한 모습과 친근한 모습이 뒤엉킨 느낌이었다.
“안느는 괜찮은가요?”
“강찬 씨 덕분에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요. 물론 절반은 강찬 씨의 이야기였습니다.”
차는 출근길의 올림픽 도로를 뚫고 외곽으로 나가더니 바로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멀리 가는 건가요?”
“우선 오산이란 곳에 갈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때 설명하겠습니다.”
앞쪽에 앉은 두 명의 직원을 슬쩍 바라보며 한 대답이다. 강찬은 그러려니 했다.
“한국의 입학 편제를 알아봤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면 프랑스 국립대학에서 입학허가서를 강찬 씨의 학교와 문교부에 발송할 겁니다.”
“아직 학기가 남았는데요?”
“전액 장학생이라 프랑스 문화원에서 기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대사 명의의 공문을 따로 보낼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될 겁니다.”
유니콘 프로젝트만큼이나 제대로 된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강찬을 향해 장난처럼 눈길을 주었던 라노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한국의 정세가 급변할 겁니다.”
강찬은 그냥 듣기만 했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국에 부임한 가장 큰 이유는 차기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기 규제와 치안이 잡혀 있어서 저격이나 암살의 위험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이번 일이 문제가 되나요?”
“본국에서 귀국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연락이 있었지요.”
“제가 매달려야겠네요.”
“중국, 러시아를 상대할 필요가 크다고 우기기는 했습니다.”
차가 오산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차 한 잔과 시가 생각이 간절하네요.”
강찬도 그랬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15분쯤 달린 후에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오산 비행장이었다. 검문소를 통과한 자동차는 아예 활주로 끝에 있는 비행기 앞에 멈춰 섰다.
‘뭐야?’
강찬은 라노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외인부대 소속이 분명한 대원들이 비행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라노크는 강찬의 시선을 외면한 채로 차에서 내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쓴 녹색 베레모.
군복, 군화. 어깨에 사선으로 끈을 걸쳐 앞으로 내린 소총까지.
강찬은 차에서 내려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반가움, 아련한 향수, 그리고 끔찍했던 기억들이 단박에 튀어나와 강찬을 덮쳤다.
“올라가실까요?”
비행기를 탈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알지도 못했던 오산의 비행장에서.
군용기처럼 도색을 하긴 했지만, 비행기는 분명 보잉 737이었다.
트랩을 오르려던 강찬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대원을 보고 멈칫했다.
제라르 쥐이.
강찬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던 신병이 산전수전 다 겪은 대원의 눈빛으로 서 있는 거다. 왼쪽 눈 끝에서 볼을 가로지른 칼자국이 강렬하게 강찬의 시선에 들어왔다.
애새끼. 어깨 부러지겠다.
제라르가 의아한 눈빛을 던질 때 라노크가 트랩 위에서 강찬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타고 보자.
강찬이 트랩을 오르자 요원 여섯과 십여 명의 대원들이 그 뒤를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칙칙한 외부에 비해 비행기의 내부는 깔끔했다.
커다랗게 소파가 놓인 안쪽으로 라노크가 강찬을 안내했다.
연속해서 따귀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강찬이 들어서자 라노크가 중간 문을 닫았다.
비행기 안이 아니라 남산 호텔의 스위트룸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띵. 띵. 띵. 띵.
경고음이 네 번 울리고 비행기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프장에서 구해 준 일이 고맙다고 제주도 놀러 가자는 건 아닐 테고.
“이륙하고 나면 차와 시가를 즐길 수 있지요.”
거칠게 활주로를 달린 비행기가 허공에 떠올랐고, 5분쯤 뒤에 고도를 잡았다.
띵. 띵. 띵.
다시 경고음이 울리고, 문이 열리더니 요원 둘이 토스트와 바게트, 그리고 차 주전자와 잔, 시가와 담배, 재떨이, 라이터 등을 탁자에 올려주었다.
라노크가 직접 차를 따랐다.
“비행 중에 마시는 홍차는 각별한 맛이 있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디까지 가나 보자.
강찬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물었다.
“후우.”
여유가 생겼다.
라노크가 시가 연기를 두어 모금 뱉어낸 다음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서류를 꺼내 강찬에게 건넸다.
“뭡니까? 이게?”
“오늘 제가 강찬 씨의 시간을 뺏은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강찬은 받은 서류를 펼쳤다.
가장 먼저 décès(사망)이란 붉은 표기가 눈에 띄었고 곧바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프랑스에서 전사한 강찬이란 인물의 기록입니다. 당시에 부대장이 샤흐란이었지요.”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서 좋다.
“그 서류에 있는 강찬에 대한 대원들의 평가가 대단하더군요. 심지어 적들이 갓 오브 블랙필드란 닉네임으로 불러줬을 정도니까요.”
강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라노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강찬 씨가 그 갓 오브 블랙필드가 맞습니까?”
늘 이런 순간을 바랐다.
구차스럽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순간. 그런데 막상 기대했던 질문을 받았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 대원들 중에 당시의 강찬과 함께 싸웠던 대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 새끼가 서 있던 이유가 이거였나?
강찬은 숨길 이유가 없었다.
“제라르 쥐이 말씀이신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강찬이 피식 웃으며 답을 하자 라노크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믿을 수가 없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프랑스어, 엄청난 실력, 전에 강찬 씨가 제게 아프리카 교전 내용을 달라던 이유까지 모두 설명되는데 믿을 수가 없으니.”
당사자도 아직 어떨떨한 마당인데 오죽 하겠나.
라노크가 표정을 감추려는 듯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까?”
못할 것도 없다.
먼저 궁금한 것만 풀어준다면.
“대사님께서 알게 된 계기를 먼저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강찬은 담배를 껐고, 라노크는 시가를 길게 빨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라노크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혼란스럽습니다. 먼저 샤흐란의 진술을 알려드리는 게 맞겠군요. 그가 강찬 씨 때문에 모든 일이 꼬인 것이라고 계속 진술하면서, 강찬 씨가 갓 오브 블랙필드의 환생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습니다. 일개 고등학생이 샤흐란과 스미든, 그리고 샤흐토 브니미를 상대하고도 일방적인 이득을 취했으니까요.”
그건 그렇다.
강찬이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넣을 때 라노크가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골프장 사건 다음 날, 미국에서 비밀리에 협조요청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라진 블랙헤드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는데 한반도 반경 300㎞ 내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하더군요.”
“샤흐란은 그걸 팔아서 공트 주식을 샀다고 하던데요?”
“우리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다만, 미국이 모든 힘을 모아 블랙헤드를 찾고 있고, 그 이유가 미국의 안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만 압니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영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정도로 절박하게 찾는다는 정도입니다.”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갈수록 일이 커지더니 미국과 영국의 전쟁까지 나왔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화성에서 온 문어들과 회칼로 싸우게 생겼다.
“영국은 유니콘에서 철저하게 발을 빼고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이를 갈고 있는데 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게 가장 급한 일입니다.”
이 양반들은 피곤하지도 않나?
“더불어 그런 영국을 미국이 왜 노리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되지요.”
라노크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담배를 꺼내 드는 강찬을 보았다.
“미국에서 허무맹랑한 협조를 요청했더군요. 블랙헤드가 다이아몬드의 형태가 아니라 기이한 현상일 수도 있을 거라구요. 그 시점에 우리는 샤흐란의 진술을 하나씩 검토하던 중이었습니다. 사망자 명단을 뒤지다가 익숙한 이름이 나와서 확인하던 중에 앞뒤가 맞았습니다. 유럽의 정보국에서는 블랙헤드가 생명에너지로 변종이 가능한 일종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내가 다이아몬드라고?
강찬이 몸을 내려다보자 라노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국이 말하는 블랙헤드는 분명 다이아몬드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찾아내야 하는 거지요.”
“저를 실험실에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아닙니다. 샤흐란과 만날 생각입니다.”
강찬은 설명이 필요했다.
“정확하게는 샤흐란이 강찬 씨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해주면 미국과 영국이 왜 저러는지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쯧.
결국, 15시간 이상을 날아가서 샤흐란을 만나는 게 일이라니. 그리고 얽힌다는 것이 미국과 영국의 전쟁?
“제가 꼭 샤흐란을 만나야 합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강찬 씨. 당신이 내 친구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갓 오브 블랙필드와 관련한 내용을 본국에도 따로 알리지 않은 겁니다. 만약 싫으시다면 제 친구들과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구렁이가 뭘 들고 있는 거지?
라노크의 표정에 여유가 흘렀다.
“유니콘의 결정권자들이지요. 각국 비선끼리의 모임이니 강찬 씨가 앞으로 살면서 도움될 일이 많을 겁니다.”
“뭔가 감추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이게 뭔가 있는데?
“그렇다면 강찬 씨. 이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죽은 사람이 한국의 고등학생이 된 과정을요.”
이미 밝혀진 일이다.
강찬은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죽음, 그리고 다른 몸으로 태어나 지금까지의 일들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석강호가 다예루라는 말만 빼고 말이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저도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으니까요.”
입맛을 다신 라노크가 심오한 표정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비행시간이 길어서 그런데 TV를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영화라도?”
“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제작사의 대표가 TV 시청을 싫어한다니 투자자들이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일이군요.”
차를 더 따라주면서 라노크가 여유를 보였다.
“옆에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른쪽 방을 사용할 테니 피곤하시면 왼쪽 방에서 좀 쉬도록 하시죠.”
마치 강찬을 위해서 침실에 들어가는 것처럼 라노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여기에 좀 더 있겠습니다.”
“편하게 즐기시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노크는 침실로 들어갔다.
혼자다.
강찬은 소파에 몸을 깊숙하게 기대고 멍하니 벽을 보았다.
샤흐란을 만나?
로리암의 지하에 갇혀있는 놈을 죽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미국과 영국의 전쟁에 끼어들어 피곤하게 살 이유가 있을까?
라노크는 분명 무언가 얻을 게 있는 눈치였다.
게다가 강찬의 원래 모습을 안다.
강찬은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생각을 털어냈다.
이거야, 전 세계의 능구렁이들을 죄 만나서 그 틈에 끼어 있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나.
‘까불면 뺨을 한 대씩 갈겨주지 뭐.’
마음을 편하게 먹자 밖에 있는 제라르가 떠올랐다.
강찬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볼에 상처가 난 다음이었다. 악착같이 구해서 돌아왔고, 이후로 놈은 강찬을 꿋꿋하게 따라다녔었다.
망갈라 작전 때의 모습도 생각났다.
“살고 싶으면 내게서 떨어지지 마.”
제라르는 정말 강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석강호를 구출해 냈을 때 굵은 눈물을 팔등으로 닦았다.
강찬이 피식 웃었을 때였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렸다.
“팀장님.”
[“강찬 씨. 통화 괜찮으신가요?”]
김형정은 어딘지 안정되지 못한 음성이었다.
“예. 무슨 일이신데요?”
[“방금 몇 가지 일이 터졌습니다. 일본 쪽에서 대통령 비자금이라며 스위스 계좌를 밝혔고, 그중 일부가 국가정보원 원장의 손을 통해 북한에 건넨 정황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대통령이 북한에 돈을 건네?
모르는 강찬이 듣기에도 욕먹을만한 일이었다.
[“유니콘을 연결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강찬 씨가 나서기 전에 우리는 비선이 없었으니까요. 그 후로 따로 보낸 적은 없습니다.”]
이래서 강찬에게 그렇게 매달렸던 건가. 심장마비가 걸린 것처럼 좋아하고?
“문제가 큰가요?”
[“국가정보원 원장님은 물러나시게 될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나나 우리 요원들, 그리고 강찬 씨의 사건을 덮었던 작업들이 모조리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피곤하게 생겼다.
[“강찬 씨.”]
“말씀하세요.”
[“라노크에게 부탁해서 프랑스 대사관에 머무세요. 저와 우리 요원들이 부모님의 안전은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원장님이 물러나시면 강찬 씨는 프랑스로 가시는 편이 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이 건너가실 수 있도록 이쪽에서 조치하겠습니다.”]
“팀장님은 괜찮으시구요?”
[“저는 별일 없을 겁니다.”]
쯧! 별일 있구만!
“다른 방법은 없나요?”
[“다각도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당장은 유니콘 계획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것 외에 특별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또 연락주세요.”
전화를 내려놓은 강찬은 라노크가 노린 게 이거였구나 싶었다.
어쩐지 유니콘을 결정하는 놈들이 하필이면 로리암에 모이나 했다.
결국, 라노크의 바람대로 샤흐란을 만나주고도 유니콘의 발표를 구걸하는 꼴이 됐다.
‘샤흐란, 이 개새끼.’
미국과 영국의 전쟁에 끼워 넣어?
천하에 도움 안 되는 새끼.
모가지를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