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67화 (67/520)

0067 / 0419 ----------------------------------------------

4-5. 적당히 해라.

허은실과 헤어져 도착한 약속 장소는 한정식집이었다.

“남영상사에서 예약했다고 하던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색 정장의 중년 여자가 강찬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다.

드르륵.

“어?”

강찬이 들어서며 풀썩 웃었다.

김태진과 석강호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김태진과 김형정이 안에 앉고 강찬과 석강호가 맞은 편에 앉았다.

술 마신 표가 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강찬 씨. 우선 이거 받으시고, 이건 석 선생 거.”

김형정이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나는 주민등록증이고 다른 하나에는 ‘국가 정보원’이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찍혀 있었다.

“정부청사는 어디든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찰이나 공무원과 문제가 있으시면 먼저 그걸 보여주시고 뒷면으로 연락하라고 하시면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찬은 25세의 나이로 만들어진 주민등록증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담배를 마음 놓고 살 수 있다!

석강호가 신기한 듯 신분증을 보더니 안주머니에 넣었다.

“강찬 씨. 라노크 대사와 골프 약속 잡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틀 정도 여유를 두고 날을 정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세요?”

이쪽에서 부탁했던 일이다.

라노크가 기뻐하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비공식 행사라 경호는 유비캅에서 맡아야 합니다.”

별로 문제없을 것 같은데 김형정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유니콘을 막으려고 하는 쪽에서 예상보다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가 정보원장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중이라 저희는 라노크 대사의 경호를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님과 총리님께서 애쓰고 계시는데 그만큼 라노크 대사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골프장은 장흥에 있는 경서울로 예약하겠습니다. 일자는 이틀의 여유만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의논해 볼게요.”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궁금한 것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철도 연결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요?”

어떤 사람들인지, 왜 그런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다음 정권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정권에서 철도 연결을 발표하면 다음 선거는 보나 마나 결과가 뻔한 일이라 목숨 걸고 막고 싶은 겁니다.”

강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본이 필사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도 답답한 구석이 많습니다.”

참 어렵다.

얘기가 대충 끝나자 김형정이 주문을 위해 벨을 눌렀다.

“프랑스 대사관과 연락해서 오늘부터 직원들을 파견했다. 국가 정보원에서 세 명 지원받았고. 골프를 치는 날은 석 선생도 그 자리에 있을 거다. 우리 직원들보다 실력이 뛰어나서 도움을 부탁했다.”

석강호가 만족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이 새끼가 무식한 거 하고, 싸움은 제법 한다.

식사가 들어와서 밥을 먹으며 현재 정국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가 많았다.

***

새벽에 10㎞를 달리고 집에 올라왔을 때 유혜숙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강대경과 강찬이 아침을 준비했고, 유혜숙은 밥을 국에 말아 마시듯 먹은 다음 화장대로 달려갔다.

아직 8시다.

강찬과 강대경은 느긋하게 차를 타서 식탁에 마주 앉았다.

“너 사고 난 이후로 갑자기 행운이 밀려드는 느낌이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강찬은 차를 마셨다.

“고맙고 감사하지. 그런데 내가 그릇이 작아서 그런지 요즘은 자꾸 네 걱정이 된다. 다치는 건 아닌지, 위험한 상황에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편치 않아.”

강대경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강찬은 가슴으로 받았다.

‘집엔 꼭 들어오라는 뜻인가?’

그런데 강대경은 뜻밖에도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날개를 펼쳐야 할 일이라면 집 걱정은 잠시 덮어둬라. 못 들어오는 날이 있으면 지난번처럼 아버지에게 말하고. 아버지와 엄마는 너 믿는다. 네가 옳다고 하는 일이라면 당당하게 해라. 하지만 우리 세 식구는 늘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엄마 옷은 고맙다. 아마 내가 사준다고 했으면 절대 안 받았을 거다.”

둘이 마음 따듯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런 아버지와 마주앉아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강찬은 모처럼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래도 9시까지 시간이 남았다.

둘이 오전 뉴스라도 볼 겸해서 TV를 틀었는데 우악산 파에 관한 보도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살인, 살인교사, 협박, 갈취는 물론이고, 범죄단체조직의 죄명으로 100명 가까운 조직원이 체포되었고, 도주한 조직원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나가는데?’

화면의 아래로 다른 뉴스의 자막이 연신 흐르는 가운데 느닷없이 ‘알리온 엔터테인먼트 대표 구속’이란 자막이 먼저 보이고, 다음으로 ‘연기자 이하연, 성매매’란 자막과 함께 ‘검찰, 연예계 정조준’이란 자막이 연속해서 흘렀다.

“이하연이면 제법 유명한 연기자 아닌가? 아직도 저런 일이 있나?”

“그러게요. 좀 놀랍긴 하네요.”

강찬은 강대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 척했다.

이렇게까지 할 줄 몰라서 실제로 놀라기도 했다.

9시쯤 되었을 때 강대경이 옷을 입었고, 9시 30분에 두 사람이 아파트를 나갔다.

이제 슬슬 학교에 나갈 시간이었다.

강찬은 우선 전화를 걸었다.

라노크가 기뻐했으면 싶었다.

[“무슈 강, 대사님께서 면담 중이십니다. 급한 연락이신가요?”]

“그렇진 않아요. 시간 되실 때 전화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에 비해서 무척 공손한 대꾸여서 강찬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학교로 향했다.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은 제법 훈련하는 표가 났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체형이나 자세가 그럴듯했는데 그렇더라도 제 몫을 하려면 6개월쯤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강찬은 우선 운동부실로 들어갔다.

“오셨소?”

“응. 커피 마셨냐?”

“기다리고 있었수.”

석강호가 커피를 타는데 운동부실 문이 열렸다.

젠장!

다른 놈들이 보는 앞에서 석강호가 커피를 타는 건 별로 좋은 모양이 아니다. 강찬이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였다.

강찬은 부산스럽게 한쪽에 있던 책상을 뒤지며 “여기 어디 뒀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찾았냐?”

석강호가 종이컵을 양손에 들며 몸을 돌렸다.

“없네요.”

“여기 커피나 마시고 나중에 찾아봐.”

“예.”

염병. 커피 한잔 먹자고 이 지랄을 떨어야 하다니.

짜증이 나서 돌아봤는데 허은실과 이호준을 비롯한 일진 놈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뭐야?”

이것들을 요즘 너무 풀어줬나?

강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몇몇 놈이 시선을 떨궜는데 허은실과 이호준은 버텼다.

“우리 제대로 교육받고 싶어.”

제대로 죽여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도 유비캅에 들어갈래. 그래서 경호원 될 거야. 우리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해서 찾아온 거야. 공부는 어차피 틀린 일이니까 이렇게라도 할 일을 찾고 싶어.”

“꺼져.”

강찬은 아예 고개를 돌리고 커피를 마셨다.

“우리가 그동안 한 짓은 잘못했어.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고 앞으로 절대 일진, 이런 거 안 할 거야. 학교에서 왕따도 없애고 할게. 우리도 희망 같은 거 갖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

이 뻔뻔한 새끼들이 진짜.

강찬이 워낙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꿋꿋하던 허은실도 고개를 숙였다.

강찬은 커피잔을 놓고 허은실과 이호준 앞으로 걸어갔다.

“너희가 일진 연합인가 하는 멍청한 놈들에게 맞고 다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해서 봐주고 있는 거다. 학교에 왕따를 없애겠다고 해서 참는 거고. 여기까지니까 하던 거나 제대로 해.”

“잘못했다고 하잖아.”

“나한테?”

강찬이 피식 웃자 조세호가 움찔했다.

“나한테는 잘못해도 돼. 내가 알아서 두들기거나 팔을 부러트려 버릴 테니까. 그런데 너희가 그동안 괴롭혀서 전학 가고, 자살 시도하고, 우울증 거린 애들은? 너희가 나한테 잘못했다고 하고, 내가 알았다고 하면 걔들 상처도 없어져? 너흰 아직 멀었어. 꿈? 다른 애들의 학교생활과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너희가 경호원?”

피식.

“까불지 말고 가서 하던 거나 해.”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해?”

“너희가 벌인 짓이니까 너희가 해결해. 가서 사과하고 그동안 뺏은 돈 모조리 돌려주고라도 용서받아.”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냐는 투로 눈치를 봤다.

“겁나지? 이 뻔뻔한 새끼들아. 용서 구할 자신도 없고, 시간당 몇천 원 하는 아르바이트 뛰어서라도 갚을 마음도 없고. 그런데 경호원은 하고 싶다? 그러니까 죽어라 괴롭힌 애들은 모른 척하고 나한테 사과하는 걸로 넘어가자?”

강찬은 때려버리고 싶은 생각을 이를 깨무는 것으로 삼켰다.

“밖에서 같이 운동하는 애들이 너희랑 친하게 지내니까 다 끝난 거 같냐? 까불지 말고 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다시는 운동 못 할 정도로 팔을 부러트려 버릴 것 같으니까.”

비겁한 새끼들.

이전의 삶에서 그 몇 푼 안 하는 돈가스가 먹고 싶어 분식집 앞을 열 번쯤 지나다니던 심정을 이것들은 알까?

당시에는 자존심 때문에 견뎠다.

다른 아이들의 돈을 뺏는 게 자존심 상해서였다. 대신 힘으로 누르려는 놈들을 용서해 본 적도 없었다.

강찬이 이를 꽉 깨무는 순간에 다행히 아이들이 운동부실을 나갔다.

석강호가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커피를 마셨다.

“다시 한잔 타 드릴까?‘

“놔둬라. 기분 잡쳤다. 운동이나 해야지.”

강찬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운동복을 드는 순간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라노크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사님.”

[“강찬 씨.”]

반가워하는 감정을 감추지 않은 음성이었다.

“하루쯤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틀 정도 전에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개인적인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골프장을 예약하려구요.”

[“하하하.”]

라노크의 이런 웃음은 처음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일정 조정이 가능한지를 묻는 대화가 오갔다.

[“강찬 씨. 다음 월요일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시간은요?”

[“날이 더우니 새벽 티업이 좋겠어요.”]

“확인하고 전화드리죠. 장소는 경서울이랍니다.”

[“강찬 씨.”]

갑자기 진지한 음성이라 강찬은 듣기만 했다.

[“고맙습니다. 그날 제가 한 명을 더 데려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대사님. 그런데 제 실력이 워낙 엉망이라 혼자 하신다고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친구와 즐기는 골프는 그 자체로 즐거운 법이지요. 강찬 씨 덕분에 지겨웠던 이번 주말이 설레는 시간으로 바뀌겠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찬은 김형정과 먼저 통화했고, 다음으로 김태진에게도 일정을 알려주었다.

“너도 시간 비워 둬.”

“알았소.”

석강호가 웃으며 답을 하고는 남은 커피를 홀랑 마셨다.

둘이 근력 운동을 한 후에, 짤막하게 격투술을 연습했는데 석강호의 실력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이젠 좀 안심이 된다.”

“나두 그렇수. 이제야 전에 느끼던 대로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거든요.”

점심을 시키고 샤워를 한 후에 밥을 먹었다.

분위기가 서늘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오광택에게도 추천할 만한 적당한 회사가 있다면 가진 것을 모조리 사회에 기부하라고 했던 강찬이다.

***

일진 놈들 꼴 보기 싫어서 일찍 학교를 나선 참이었다. 전화가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대표님. 저 은소연이에요.”]

긴장했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기사 보고 전화드렸어요. 대표님은 괜찮으신지 궁금해서요.”]

이년이 이렇게 한가하면 안 되는데?

“난 괜찮아. 그런데 아직 일이 없냐?”

[“아니에요, 대표님. 저희 지금 리딩 들어갔어요.”]

“리딩?”

[“대본연습이요.”]

“열심히 해라.”

[“예. 그런데 대표님, 한 번쯤 저희 리딩할 때 다녀가시면 안 될까요?”]

“왜?”

[“그냥요. 그냥 대표님 다녀가시면 저랑 우리 애들 다 힘이 날 거 같아서요. 캐스팅이 끝나서 나름 유명한 분들이 다 모이는 자리라 저도 자꾸만 주눅이 들어요.”]

귀여운 척하기는?

“알았다. 나중에 미쉘이랑 통화해 볼게.”

[“제가 전화 드린 건 비밀로 해주세요.”]

“그래.”

[“들어가세요, 대표님.”]

이년이 왜 내가 집에 가는 걸 챙기는 거야?

강찬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큰길로 나왔다.

우선 집으로 향했다.

강대경과 유혜숙의 연락이 없어서 걱정되기도 했는데 상황을 모르니 전화를 하기보다는 집에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

아파트에 도착해서 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대경과 유혜숙이 거실에 있었다.

“어? 오셨네요?”

유헤숙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무슨 일이세요?”

“엄마 많이 놀랐다.”

대답은 강대경이 했다.

강찬이 거실로 들어가자 “우선 앉자.”라고 해서 셋이 편하게 소파에 앉았다.

“총리님을 직접 만났다. 다음 주까지 재단 만들어주신다고 하고, 네가 나라에 정말 큰 일을 해결해 주었다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니 적극 협조 부탁한다고 하시더라.”

영감이 또 있는 대로 과장했구나.

“아들! 혹시 서울대학 특례 입학 얘기 들었어?”

“그 얘기도 했어요?”

“세상에!”

유혜숙은 완전히 로또 맞은 사람 표정이었다.

“어쩜! 어쩜!”

“엄마가 아빠한테 그 얘기 들은 거 맞냐고 백 번쯤 물어봤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빨리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대학 특례는 잊고 있었던 일이다. 갈 마음도 없는 걸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이제 밥 먹자. 나 회사 나가봐야 돼.”

“아! 당신 밥 안 먹었지?”

“당신도 안 먹었어.”

“난 며칠 굶어도 배부를 거 같아.”

강대경이 “아이구.” 하면서 웃고는 부엌으로 움직였다.

“아냐. 내가 할게.”

어딘지 어수선한 동작으로 유혜숙이 늦은 점심을 준비했다.

“너 대학 가는 거 아니었으면 엄마 걱정하다가 병났을지 몰라. 그러니까 당분간은 엄마에게 좀 더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럴게요.”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는 일은 게을리하지 말고.”

“예.”

유혜숙이 “여보, 식사해.” 하는 소리에 강찬은 밥을 먹었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40억을 내놓았을 때도 걱정 가득하던 유혜숙이 대학 이야기에 저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다.

우웅.

문자가 와서 들어보니 김미영이었다.

[학원 끝났어.]

서운한 모양이었다.

강찬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집인데 내가 나갈까?”

[“정말? 나올 수 있어?”]

“그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갈게. 우리 빙수 사 먹자.”

[“응!”]

강찬은 입은 채로 다시 거실로 나왔다.

“미영이 잠깐 만나고 올게요.”

“그럴래? 용돈은 있니?”

강찬이 “있어요.”하고 답을 했는데도 유혜숙은 지갑에서 만 원권 다섯 장을 꺼내주었다.

“고맙습니다.”

“다녀와.”

유혜숙이 강찬의 목을 안아줄 때 뒤편에서 강대경이 눈을 찡긋했다.

***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영이 달려왔다.

“흐흐흐.”

미쉘 같으면 벌써 품에 안겼을 텐데 김미영은 웃기만 했다.

“힘들었지?”

“공부는 괜찮은데 보고 싶은 거 참는 게 힘들었어.”

강찬은 함께 웃어주고 가방을 받아 어깨에 멨다.

“빙수 먹을 시간 있어?”

“응! 한 시간 정도.”

둘이서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전문점에 들어가 빙수를 주문했다.

“나 알고 싶은 거 있어.”

“뭔데?”

김미영이 프랑스어 책을 꺼내서 발음과 유사한 표현을 물어보았다.

“너 벌써 이 정도까지 한 거야?”

놀랄 정도로 빠른 발전이었다.

물론 발음이 엉성했는데 본인도 그 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청한 거다.

강찬은 김미영이 원하는 부분을 읽어주고 둘이 번갈아가며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거 녹음해도 돼? 나중에 반복해서 듣게.”

“그래.”

전화기 녹음 버튼을 누른 후, 강찬이 먼저 읽고 김미영이 따라 읽었다.

원하는 부분을 다 읽었다.

“고마워. 나 프랑스어 공부가 재밌어.”

갈수록 김미영만 프랑스에 갈 확률이 높아졌다.

김미영과 있으면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요즘은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는 편안하게 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아이가 고등학생이 아니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강찬은 팥빙수를 입에 넣고 입맛을 다셨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