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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사업은 번거롭다.
금요일.
학교 운동부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아이들이 하나둘 나왔다.
이제는 정말 반갑고 친근해져서 운동부 아이들 중에는 강찬을 보며 쭈뼛대는 아이들은 없었다.
대충 다 모였을 시간이었다.
덜컹.
밖으로 나가려던 강찬이 들어서는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은실, 이호준, 조세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부터 나오지 말랬더니 총이라도 챙겼나? 그래서 느닷없이 탕하고 쏴서 죽일 생각인가?
강찬이 멍하니 앞을 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차소연, 문기진, 그리고 운동부 아이들이 모두 운동부실로 들어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찬은 잠시 지켜보기만 했다.
“기진이하고 운동부 전체에 사과했고, 받아줘서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다시 운동하게 해주십시오.”
조세호가 말을 끝냈을 때 허은실이 입을 열었다.
“세호도 잘못했다고 하고 다시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이번만 봐주라.”
빌어먹을 교복을 입고 있는 애들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진다.
강찬이 계속해서 말이 없자 이번에는 차소연이 나섰다.
“저희 정말 같이 운동하고 싶어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선배님이 받아주실 거라고. 그래서 제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차소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걸 정말 용서해줘야 하나?
강찬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가 맞겠습니다. 그날 기진이 때린 거, 정말 잘못한 일입니다.”
조세호가 한 걸음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는 차소연과 한 반이다.
“밖에 있는 형들이 어제 따로 데려가서 저녁 사줄 때 많은 얘기 해줬거든요. 그 형들 말이 맞습니다.”
김태진의 직원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해서 저보고 경호원 되라고 말해줬는데 정말 그런 거 해보고 싶습니다.”
강찬도 한 번쯤은 더 믿어보고 싶었다.
“너희 진짜냐?”
“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강찬은 허은실을 보았다.
얼굴에 반항기는 담겨 있지 않았다.
“조세호.”
“예.”
이놈도 반항기가 없다.
이건 깨끗하게 진 싸움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조세호와 차소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엄한 아버지에게서 결혼 허락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저게 조세호를 좋아하나?’
연신 고맙다는 말이 있고 나서 아이들이 다 나갔다.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일진 놈들은 허은실이 대장이고, 운동부는 차소연이 이끈다.
강찬은 모른척하고 기구운동에 전념했다.
실컷 운동하고 물 한잔을 시원하게 마신 다음 구경삼아 밖으로 나왔다.
목에 수건을 걸쳐서 여차하면 바로 씻으러 갈 생각이었다.
분위기가 무척 진지했다.
운동부실 앞쪽 운동장.
매트리스가 깔렸고, 직원들이 지도하는 가운데 둘씩 마주 서서 격투술을 연습하는 모습.
분위기는 정말 진지한데 보는 건 정말 웃겼다.
강찬은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지그시 깨물며 연습하는 모습을 보았다.
제법 재능이 보이는 놈도 있었는데 허우적대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놈도 있었다.
강찬이 고개를 흔들며 씻으러 몸을 움직였다.
***
점심을 먹고 운동부실에서 공부하는 걸 지켜본 강찬은 직원들 다섯을 상대로 한 시간가량 격투술을 가르친 후, 다시 씻고 학교를 나왔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유혜숙은 집에 없었다.
편안하게 앉아 드라마제작과 관련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다음으로 혹시나 살아 있는 부대원이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였다.
현관 키 소리가 울려서 거실로 나갔다.
“아들, 벌써 왔어?”
“예.”
강찬은 유혜숙이 들고 있는 종이 쇼핑백을 받아주었다.
“일요일에 아빠 입을 셔츠 하나 사왔어. 옷들이 너무 오래돼서. 그리고 아들 면티 하나하고.”
“또 어머니 건 빼놓고 사셨어요?”
“엄마는 옷 많잖아. 그럼 됐지, 뭐.”
언제고 옷 한 벌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찬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웃어 주었다.
방에 들어와서 다시 책상에 앉았다가 김미영과 잠시 통화했고 이후로 밤이 될 때까지 다른 일은 없었다.
자기 전에 석강호가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한 것 말고는 정말이지 무료할 정도로 편안한 하루였다.
***
토요일.
강찬은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었다. 방에 들어와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할까 하다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샤흐란의 일도 마무리되었고, 현재의 삶에 익숙해졌으니 새로운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공부를 다시 할까 싶었지만 당장 이해도 못 하는 과목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좀 더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다시 인터넷을 검색했다.
영어. 중국어. 일어를 뒤졌고, 다음으로 전부터 관심 있던 것이 뭐가 있었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일진 놈들 뭐랄 게 아니네.’
강찬은 낯이 확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쯧. 이렇게 되면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해 볼까?’
제대로 돈을 벌어 강대경과 유혜숙처럼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마침 석강호가 전화를 걸어왔다.
[“뭐하쇼?”]
“밥 먹고 빈둥대. 피곤할 텐데 좀 쉬지 그러냐?"
[“아파트로 이사 오더니 마누라가 아주 보살이 됐소. 뒷정리는 알아서 할 테니 하루 나갔다 오랍디다. 오늘은 양평 한번 땡깁시다.”]
“양평?”
귀가 쑥 나올 만큼 반가운 제안이어서 강찬은 석강호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뒤 아파트라 만나는데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강찬은 아파트 입구에서 석강호의 차에 탔다.
“가까이 사니까 이런 건 좋다.”
“그러게 말이우. 어딘지 든든한 거 같기도 하우. 이거 받으쇼.”
석강호가 아이스 커피를 한 잔 건네줬다.
차가 출발했고, 두 사람은 커피와 담배를 함께 즐겼다.
강찬은 우선 어제 있었던 아이들 이야기를 먼저 했다.
“우리도 어디 단합 대회 한번 다녀옵시다.”
“그렇지 않아도 미쉘도 그런 얘기 하던데 같이 한번 갈까? 따로따로 다녀오려면 너무 번거로워서.”
“대장만 괜찮다면 그것두 나쁘지 않지요. 사실 그런 건 여럿이 가야 재밌거든요.”
“한번 말해 볼게.”
“그러쇼. 숙소 잡고 버스 대절하고 하려면 어차피 한 번에 하는 게 나아요. 그리고 방학이니까 이왕이면 주말 피해서 다녀옵시다.”
“의논하는 대로 말해줄게.”
“그럽시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길이 조금씩 막혔다.
“다음 주부터는 드라마 제작 일도 좀 챙겨볼 생각이다. 나도 뭔가 하는 게 있어야지 싶기도 하고.”
“그럴 바에야 아예 경호 회사가 적성에 맞지 않겠소?”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내가 누구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건 죽어도 못하겠더라구.”
“그건 또 그러네. 잘못하면 온종일 차에 있어야 하니까.”
교외로 나오자 그나마 달리는 게 좀 나아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오리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둘이서 평상에 앉아 기분 좋게 오리 먹고 칼국수, 그리고 막걸리를 마셨다.
“너무 고민하지 마쇼. 대장은 뭘 하든 잘할 거 아뇨.”
“전쟁터에 대해 아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건 없는 거지.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 비겁해지는 건 싫으니까.”
석강호가 길게 담배를 뿜으며 웃었다.
“한동안 드라마 제작하는 쪽이 시끌시끌하겠소.”
“왜?”
“적당히 하지는 않을 것 아뇨?”
“야! 이건 적당히 할 거라니까. 일만 배운다는 생각으로 해보는 거라구.”
강찬이 말을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미쉘이었다.
석강호가 슬쩍 보더니 “하늘이 그렇게 안 둔다니까요.” 하며 웃었다.
“어. 미쉘.”
[“보스. 내일 갑자기 알리온이라고 업계 2위 제작사와 방송국 드라마 제작국장이 같이 보재서 전화했어. 시간 괜찮을까? 오후 1시, 남산 호텔.”]
“하아.”
[“왜? 약속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남산 호텔에 꿀을 발라놨냐, 왜 자꾸 약속만 잡히면 거기로 하는지 모르겠네. 어디 다른데 안 된데?”
[“이미 결정된 거야. 우리가 바꾸기는 어려워.”]
“알았다. 내일 오후 1시에 나가면 되지?”
[“그럼! 고마워, 보스. 우린 한 30분 전에 보자.”]
“그러지. 로비 라운지로 나갈게.”
[“응. 내일 봐.”]
통화를 마친 강찬이 커다랗게 숨을 쉬었다.
“또 남산 호텔이요?”
“그렇다잖냐. 서울 시내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일을 배우는 거요. 일! 제대로 해주쇼.”
“확!”
인상을 썼지만, 곧바로 둘이 바보처럼 웃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다.
이번에는 석강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아!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강찬은 그러려니 하며 앞을 보고 있었다.
“예. 예.”
석강호가 강찬을 힐끔 본 다음이었다.
“예?”
화들짝 놀란 소리에 강찬이 무슨 일인가 하고는 석강호를 보았다.
“아, 예.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예. 알겠습니다. 대장하고 의논하고 오늘이든 내일이든 병원에 들르죠. 예.”
전화를 끊은 석강호가 강찬을 홱 보았다.
“김태진 대표요. 나한테 7억을 넣을 거니까 통장 번호 하나 달랍디다.”
“그 얘기였구나.”
석강호는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요즘은 하도 부르는 돈의 단위가 커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소.”
“내가 그렇다.”
석강호는 잠시 운전만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돈은 대장한테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아쇼.”
“난 주식으로 받은 데다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번 돈도 얌전히 아주머니 드려라.”
“에이. 쓸데없이 그런 건 준다고 해가지고 사람 뒤숭숭하게. 담배나 하나 핍시다.”
“그러자.”
둘이 창문을 활짝 열고 국도를 달렸다.
***
집에 돌아온 강찬은 인터넷을 켜고 드라마 제작에 관한 자료를 외우고 또 외웠다.
어색한 용어는 확실히 챙겼고, 특히나 ‘한국드라마의 현실’이란 글은 열 번쯤 읽었다.
토요일 저녁은 이상하게 치킨을 시켜놓고 함께 TV를 보게 된다.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킬킬거리는 재미도 있고, 또 밤늦게 하는 영화를 보는 맛도 있었다.
아쉬운 것은 맥주 한 모금인데 이젠 콜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은 유혜숙이 부산을 떠는 바람에 역시나 강대경과 강찬이 준비했다.
오늘은 강대경이 비장의 솜씨를 발휘한다며 앞치마까지 둘렀는데 중간에 수저로 강찬의 입에 된장국을 떠넣어 주었다.
“어떠냐?”
기대에 찬 표정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도 된장국은 기가 막혔다. 강찬이 놀란 눈으로 엄지를 치켜세우자 강대경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설거지는 강찬이 했다.
다시 방에 들어와 빈둥거리다가 나가보니 유혜숙은 아직도 바빴다.
“늦으시겠는데요?”
“그렇지, 아들? 엄마 어때?”
강찬이 풀썩 웃으며 또 엄지를 세웠다.
“정말 예뻐요. 오늘 주인공처럼 보이시겠는데요.”
“고마워, 아들. 여보! 뭐해? 얼른 가야지.”
강대경이 방에서 다급하게 나왔다.
옅은 하늘색 셔츠가 눈에 띄었는데 어제 유혜숙이 사다 준 것인 모양이었다.
강대경의 셔츠에 대한 품평이 있고서야 두 사람은 현관에 섰다.
“저도 거기에 갈 일이 있어요. 12시 30분 넘어서 로비 라운지에 있을지 몰라요. 아니면 궁금하니까 한번 들러보든지요.”
“아들이 오면 정말 좋지. 너무 잘 됐다. 그럼 우리 끝나고 같이 빵 사오자. 그 호텔 빵 정말 맛있거든.”
강대경과 유혜숙이 출발하고 나서 1시간이 지나서 강찬도 옷을 갈아입었다.
***
호텔 로비는 일요일이라 꽤 붐볐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는데도 미쉘이 앉아 있다가 커다랗게 손을 흔들었다.
“차니!”
한동안 잠잠한가 했더니 병 도진 년처럼 미쉘이 강찬에게 매달려 요란스럽게 볼에 뽀뽀를 해댔다.
지배인이 달려와 아는 척을 했고, 강찬은 커피를 주문했다.
“알리온이 태클을 걸 거야. 이하연이 거기로 갔거든. 우리가 아직 드라마 제작 경험이 없는 걸 핑계로 방송사는 공동제작을 요구하고 알리온은 7대 3, 배분에 여주든 남주든 캐스팅 하나는 자기네가 한다고 우길 확률이 높아.”
미쉘은 지금처럼 까만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일 얘기를 할 때 참 매력적이다.
“우리는 무조건 5대 5를 고수해야 하고 남주는 저쪽에서 캐스팅해도 된다고 하면 돼. 그리고 해외판권부터 남은 모든 수익은 하여간 반반으로 가면 되는 거고.”
“방송사가 여러 개잖아? 그런데 꼭 오늘 결정 내야 되는 거야?”
미쉘이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알리온 정도면 공중파에는 전부 영향력이 있어. 그리고 공중파 편성부장끼리는 워낙 끈끈해서 한 곳에라도 찍히면 어려워져. 그게 문제야.”
“알았다.”
강찬은 이것도 일을 배우는 일부라고 생각하고 미쉘의 설명을 하나씩 받아들였다.
“참, 미쉘. 회사 단합대회. 우리 학교 애들이랑 같이 가도 되겠냐?”
미쉘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되면 직원들 앞에서 차니의 처지가 난처해지지 않겠어? 연습생들 앞에서 고등학생이 차니에게 이래저래 하는 거 보이는 게 어떨지 몰라서.”
“아, 그러네.”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강찬은 미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남은 방학은 단합대회 2번에 가족 피서 한번을 다녀와야 할 모양이었다.
***
알리온과 편성부장은 함께 호텔에 들어섰다.
미쉘의 표정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이하연이 두 사람과 함께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찬과 미쉘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강찬 대표님. 미쉘 이사님은 다 아시는 분들이고, 이쪽은 제가 새롭게 몸담게 된 알리온의 데이빗 최 대표시고, 여기는 문본근 편성부장님이세요.”
이하연의 소개로 인사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았고 차를 주문했다.
“얘기는 들으셨을 거고, 길게 얘기하지 맙시다.”
차가 나오기도 전에 데이빗이라는 마흔쯤 돼 보이는 남자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덩치가 제법 있었는데 입술이 두껍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여기 이하연을 여주인공으로 해주면 5대 5. 남자주인공을 우리가 섭외하려면 7대 3. 어떻소?”
“왜 그런 건가요?”
미쉘이 바라보기에 강찬이 나서서 질문을 던졌다.
“은소연을 여주로 캐스팅하면 상대역을 설득하는데 그만큼 애를 먹어야 하니까 그런 겁니다. 고생한 쪽이 더 먹는 거니까 선택은 그쪽이 하세요.”
데이빗은 아무리 봐도 유학을 다녀왔거나 현지에 살았다는 표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냥 멀쩡한 토종에 이름만 영어 이름을 붙인 게 분명했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은소연이 여주인공인 건 아무래도 부담이지요. 그나마 알리온이 경험이 많으니까 인정해 드리는 거지.”
문본근 국장은 완전히 털털한 스타일이었는데 더럽게 고집 세게 생겨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침 차가 나와서 시선을 드는데 이하연이 야비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이하연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피식.
강찬이 특유의 웃음을 웃자 이하연이 설마 하는 눈초리를 담았다.
사업?
결국은 돈 처먹자고 하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비굴한 조건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대가리가 머릴 숙이면 저 아래 연습생은 무릎을 꿇어야 하니까. 그것도 돈은 이쪽에서 전액 대는 일에 말이다.
강찬은 먼저 미쉘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이런 조건이 나온 게 우리가 융스에서 투자받는 것 때문인 걸로 아는데 맞나?”
“맞아요.”
확실히 눈치는 미쉘이 죽인다.
다소곳하게 하는 존댓말을 봐라.
“알리온의 조건은 인정합니다. 그럼 드라마 제작비도 반반씩 대는 걸로 하지요.”
강찬의 말에 데이빗이 불쾌한 듯 입에 댔던 커피잔을 사납게 내려놓았다.
“젊은 사장님이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반반씩 대는 조건이라면 디아이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이 줄을 서 있어요. 뭘 아시고 말씀을 해.”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 알리온과 안 하면 편성이 어렵다는 거죠?”
“그렇다고 보면 됩니다.”
강찬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없던 걸로 하죠.”
순간 분위기가 서늘해졌는데 눈치 빠른 미쉘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버텨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 살아남기 힘들 거요.”
데이빗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강찬이 정면으로 받았다.
“은소연 하나로 백억을 투자받을 정도의 능력이면 대충 살지 않을까요?”
“투자를 받으면 뭐하시나? 드라마 팔 곳이 없는데?”
강찬이 데이빗의 눈을 똑바로 본 채로 특유의 웃음을 웃었다.
“우리는 차라리 중국이랑 합작하면 됩니다. 융스에서 필요하면 백 억 더 해주기로 했으니까. 손실 나도 상관없는 조건이라 은소연만 중국에서 확실하게 떠주면 그거로 충분하죠. 거기다 조연이나 단역 중 누구 하나 더 떠주면 본전 이상 한 거고.”
인터넷에서 본 한국드라마의 현실에 담긴 내용이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중국 쪽도 막아버릴 수 있어.”
자존심이 상했는지 데이빗이 강하게 나왔다.
둘이서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참이다. 먼저 피하는 놈이 지는 싸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해주지. 앞으로 알리온 소속사의 배우가 단 한 명이라도 이름을 들이밀거나 알리온이 백 원이라도 투자한 드라마가 있다면 내가 분명하게 중국과 일본은 수출 막아주지. 이거,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데이빗이 뜨거운 김을 확 쏟았다.
저 새끼 코를 확!
“자, 자. 잘해보자고 만났는데 이러지들 마시고.”
보다 못한 문본근이 손을 내밀어 양쪽을 누르는 시늉을 했으나 이미 시작된 싸움이다.
“깡패 좀 알고, 돈 끌어오는 재주가 있다고 초짜가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을 만큼 이 바닥은 만만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이게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되는 건데 왜 말이 많아?”
“어허! 그만들 해요. 최 대표! 내 말을 아예 무시하는 거요?”
문본근이 대놓고 지목하고 나서자 데이빗이 이를 꽉 깨문 다음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시죠.”
데이빗이 일어서자 문본근이 얼른 그를 따랐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마음대로.”
세 사람이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개새끼들.
저렇게 나갈 거면 처먹은 커피값은 내고 가든가.
“아후!”
셋이 호텔 문을 나가자 미쉘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내내 덤덤한 표정으로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왜?”
“놀라기도 하고, 차니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그거 안 들키려고 무지하게 애쓰고 있었어.”
이년은 확실히 병이 있는 게 맞다. 아무 때나 몸이나 가슴이 뜨거워지는 병.
유헌우 원장을 소개해 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