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56화 (5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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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사업은 번거롭다.

화요일 오후에 김태진의 병실에 다녀오고 수요일까지, 하루 반나절쯤? 참으로 평온한 시간이었다.

김미영과 통화도 하고, 유혜숙과 시간도 보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맞은 목요일.

학교에서 석강호와 둘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차소연이 다급하게 강찬을 찾았다.

“선배님. 빨리 나와보세요.”

“왜 그래?”

강찬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석강호와 함께 운동부실을 나섰다.

운동장의 분위기가 묘했다.

스탠드를 내려가 보니 1학년 문기진과 2학년 조세호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련을 붙였는데 1학년 애가 잘했거든요. 그런데 끝나자마자 저 녀석이 비겁하게 주먹을 날리길래 제가 그만…….”

질문은 석강호가 던졌고, 대답은 직원이 했다.

한 마디로 문기진이 대련을 이기자 끝나는 순간에 조세호가 주먹을 날린 거다.

직원은 그런 조세호를 한 방 먹인 거고.

강찬은 조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예.”

조세호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가뜩이나 일진을 끌고 와서 운동부원들에게 미안하던 참이다.

강찬이 일진 놈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선 무서워서 못 살겠고, 규칙을 지키는 세상은 아니꼬워서 못 살겠냐? 좋은 것만 하고 살고 싶으면 그런 곳으로 가. 공연히 여기 더럽히지 말고.”

강찬이 조세호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희는 내일부터 여기 나오지 마라.”

이쯤에서 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꾸만 분통이 터져서 참기가 어려웠다.

강찬이 다가가는 것을 석강호가 붙들었다.

번득하고 시선을 돌렸을 때 석강호가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어대고 있었다.

“후우.”

강찬은 분을 삭이기 위해 두 번이나 숨을 고른 다음, 몸을 돌렸다.

“운동부 너희한텐 내가 미안하다. 오늘 이후로 저것들 못 나오게 할 테니까 오늘 일은 이렇게 이해해주라.”

운동부원들도 놀란 얼굴이었는데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강찬은 그대로 운동부실로 돌아왔다.

운동하긴 이미 글렀다.

의자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앉아 있는데 석강호가 들어왔다.

“아깐 잡아줘서 고맙다.”

석강호가 풀썩 웃으며 강찬의 맞은 편에 앉아 물을 마셨다.

“잘 참았소.”

“억지로 운동부에 넣어놨더니 저 지랄을 떠니까.”

“그거야 내가 더 잘 알지 않수. 그래도 생각보다 얌전해서 놀라던 참이었소. 평소라면 저 상황에서도 반항기를 뚝뚝 떨어트리거든요.”

“그래?”

그럭저럭 감정이 가라앉을 때쯤 되었을 때 차소연과 문기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또 무슨 일 있냐?”

“아니요!”

차소연이 과장되게 고개를 저어댔다.

이런 애들은 잘 키워서 행정병 시키면 딱인데.

“왜? 무슨 일인데?”

“저기, 죄송한데요.”

강찬이 풀썩 웃으며 차소연을 보았다.

“뭔데 그래?”

“저기요, 오늘 나오지 말라고 하신 거요. 그거 한 번만 물러주시면 안 돼요?”

강찬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저것들이 또 뭐라고 하던? 이것들이 진짜.”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선배님.”

차소연이 양손을 마구 내저었고 문기진이 다급한 눈으로 고개를 저어댔다.

“세호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요, 다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일로 못 나오게 하시니까 그게 좀 너무 아쉽고, 미안하고 해서 그래요.”

강찬이 고개를 갸웃하자 차소연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한두 사람 아닐 수도 있지만요.”

강찬은 잠시 차소연을 본 후에 입을 열었다.

“너희 생각이 그렇다니까 한 번쯤 더 생각해 볼게.”

“고맙습니다, 선배님.”

차소연이 인사하는 옆에서 문기진은 고개만 숙였다.

“야, 문기진.”

“예, 선배님.”

“넌 인마, 격투술을 익힌다는 놈이 날아드는 주먹을 맞고만 있는 게 어딨냐?”

문기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대련은 괜찮은데요,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몸이 잘 안 움직여요.”

“에라이.”

강찬은 손을 뻗어 문기진의 머리를 흩트리듯 쓸어주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해. 어떡하지? 이렇게 하나? 하는 생각 하면 절대 그렇게 못 움직여.”

“선배님은 싸움이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울 때도 있지. 숫자가 더럽게 많다거나. 아니면 뭐.”

하마터면 갱이 총을 겨누고 있을 때라는 말을 할 뻔했다.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나눈 다음에, 차소연과 문기진이 운동부실을 나섰다.

“저것들이 겁을 준 건 아니겠지?”

“내가 볼 땐 대장이 일진 애들을 겁 준거 같소.”

강찬이 흘깃 보자 석강호가 모른 척 다른 곳을 봤다.

조금 지나서 점심을 주문한 뒤, 강찬이 씻고 나왔을 때는 밥이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중식이다.

강찬은 볶음밥을 시켰다.

석강호, 그리고 김태진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

“애들이 많이 서운해하던데요?”

직원 하나가 볶음밥을 입에 넣으며 한 말이다.

정말 그런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른 말이 없어서 강찬은 운동부실에서 석강호와 둘이 커피를 마셨다.

“다른 일은 없지?”

“그럼요. 난 오후 교육할 거요.”

“나는 먼저 간다. 저녁때 통화하자.”

“그럽시다.”

강찬은 석강호와 인사를 나누고 운동부실을 나왔다.

***

김태진의 병실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서와.”

“어서 오십시오!”

덤덤한 김태진과 달리 휠체어에 앉아 있는 서상현은 완전히 흥분한 얼굴이었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서상현은 마치 로또에 당첨된 듯한 표정이었다.

강찬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나서였다.

“프랑스에서 외국 행사의 안전담당 회사로 우리를 지목했어. 프랑스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 외교통상부, 코트라에서 연락받았고, 신문이나 언론사에서 취재 요청도 잔뜩 있었다.”

“언제 그랬대요?”

“한바탕 난리를 치른 지 겨우 한 시간 남짓 됐어.”

강찬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라노크가 힘을 쓴 거 같지? 매출도 매출이지만 이걸로 우리 회사가 단번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회사가 된 거다.”

“잘 된 거네요.”

“이게 모두 다 자네 덕이지. 그래서 말인데, 서 이사랑 의논해서 회사 지분의 15%를 자네에게 주려고 해.”

강찬은 뻘쭘한 시선으로 김태진을 보았다.

먹지도 못할 지분을 받아서 뭐에다 쓰겠나.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프랑스 쪽 매출만 1년에 50억이 넘어. 거기에 EU 쪽 오더 들어올 거고, 국내 매출 늘어날 걸 계산하면 2년 안에 상장도 가능한데. 돈으로 주면 얄팍하기도 하고 내가 서운해서 그래. 그냥 받아.”

“마음만 받을게요. 그러니까 주식은 그냥 두세요.”

김태진이 서운한 듯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았다. 그럼 이번 계약 건으로 장외시장 거래가가 폭등할 테니까 지분 15% 계산하면 한 20억쯤 될 거다. 내가 처분해서 돈으로 건네 줄게.”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석 선생한테는 5% 계산해서 7억을 현금으로 줄 계획이었어. 자네가 계속 그러면 나도 프랑스 오더 안 받을란다. 일은 자네가 다 했는데 비겁하게 돈이나 세는 놈 되고 싶지는 않다.”

“아, 거. 불편하게 왜 그러세요?”

강찬이 투덜거려도 김태진은 서운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제가 탈게요.”

“왜 이러십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상현이 능숙하게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몸을 움직였다.

김태진은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다고 지분을 받을 생각은 정말 없었다. 뭐 해준 일이 있다고 그런 대가에 손을 내밀겠나. 거기다 석강호 가족의 납치 때만 해도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커피 냄새가 병실에 가득했다.

“지분 받아라.”

애처럼 투정하는 모습에 강찬이 풀썩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합시다, 강찬 씨. 우리도 직원 해외에 파견하고 덕분에 나도 좀 나가보고. 직원들 지금 좋아서 난리 났어요. 대표님 성격에 정말 계약 취소합니다.”

서상현이 워낙 간절하게 쏟아낸 말이어서 강찬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땐 한 번쯤 져라.”

김태진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존심을 걸고 매달린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것도 서상현이 보는 앞이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김태진이 풀썩 웃었고, 서상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다 커피를 쏟았다.

배운 것도 있었다.

이렇게 지분을 나누어준다는 게 당사자에겐 엄청난 소속감을 준다는 거.

“언제 퇴원하시는 거죠?”

“다음 주.”

“별일 없으면 내일 또 올게요.”

“알았다.”

“지분 고맙습니다.”

강찬은 웃는 얼굴로 병실을 나왔다.

***

원래는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에 문득 디아이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생들 간식은 잘 먹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강찬은 병원 앞에 대기하던 택시를 탔다.

‘간부들이 순시를 도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가끔 높은 놈들이 전투지역까지 올 때가 있었다.

불편한 건 없냐? 먹는 건 어떠냐?

그렇게 궁금하면 며칠 지내보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역시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택시에서 내린 강찬은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후 3시쯤 되었다.

강찬이 3층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연습실이 엄청나게 북적였다.

“어? 대표님! 안녕하세요!”

몇몇 연습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한 아이가 안쪽에 대고 “이사님! 대표님 오셨어요!” 하고 소리 지르는 동안 강찬은 실내화를 신었다.

미쉘과 임수성이 급하게 사무실에서 나왔다.

“어서와, 보스.”

“오셨습니까?”

강찬은 적당히 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직원이야 빤하다. 코디와 로드 직원이 없어서 사무실이 한결 넓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에 좁은 방이 있어서 일단 그리로 들어갔다. 벽에 작은 에어컨이 달려서 그나마 시원했다.

미쉘이 커피와 몇 가지 서류를 들고 문을 닫았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 보스.”

“그냥 시간이 났어.”

미쉘이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일을 하자고 했을 때 보스라면 사람을 보고 일할 거라고 믿어서였어. 내가 사람을 정말 잘 본 거지.”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사무실은 이상하게 커피를 못 탄다.

“이하연이나 성소미 계약 끝나기 전에 은소연과 연습생 서넛만 키우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거든. 빨대를 꽂아서 피를 빨아 먹는 게 아니라 상생하는 회사. 그런 거 해보고 싶었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은 각오였다.

“육스 투자로 내 꿈이 엄청나게 빨라지고 또 그만큼 거대하게 이루어진 거야. 그래서 요즘 너무 행복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남자 주인공 때문에 그래.”

강찬이 피식 웃자 미쉘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주인공 중 하나는 한류로 인정받는 애가 나와야 하거든. 그런데 그런 애들이 보기에 은소연이 레벨이 떨어지거든. 작가도 남주만큼은 특A급 캐스팅이어야 한다고 하고, 공중파 방송은 방송대로 남주마저 약하면 편성 못 주겠다고 버티고 그런 거야.”

대강 알아들었다.

“공중파 편성은 뭔 소리야?”

“전엔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는데 요즘은 다 외주제작을 주잖아. 그러니까 주말이나 월화, 수목, 이렇게 자리가 빌 때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제작사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해. 차기작을 결정하는 곳이 편성부, 그 책임자가 편성부장, 이런 거지.”

강찬이 빙그레 웃었다.

‘잡지사 편집장을 했다더니 제법이네.’

미쉘은 화낼 때만큼이나 일에 열정적일 때 매력 있었다.

“편성을 딸 수 있는 대형 기획사는 공동제작을 강요해. 수익 배분이 우리가 3이래. 그래서 방송사에 편성 주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도 하고.”

그거야 뭐.

원래 기득권을 가진 새끼들은 절대로 새로운 강자가 나오는 걸 원하지 않는 법이니까.

“크게 얻고 멋지게 나가는 만큼 저항도 센 거지, 뭐.”

그나마 미쉘의 당당한 얼굴을 보니까 든든했다.

“한국에 방송 안 내보내도 되는 거 아냐?”

“그건 좀 위험해. 사전 판매가 있으니까 가능하긴 해도 2차 판매권에 대한 분쟁도 있고 해서.”

역시 아는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찬은 이참에 솔직하게 속을 보이기로 했다.

그래서 이 일이 제대로 굴러가면 미쉘이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보스. 뜻은 알았어. 하지만 실무는 내가 하고, 회사의 중요한 업무는 지금처럼 가끔 나와서 챙겨줬으면 해. 직원들이 존경하고 조금은 어렵게 대할 대표가 있는 건 좋은 일이니까. 그리고 이거.”

강찬은 미쉘이 앞에 놓아준 카드를 보았다.

“대표이사 법인 카드야. 보스 이름 새겨져 있고, 한도가 제법 되니까 사용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부분을 경비처리 할 거니까 양쪽 다 이득이야. 가능하면 이제부터 그걸 써.”

요건 괜찮겠다.

강찬은 고맙다고 말하고 카드를 받아들었다.

“다음 주에 오디션 있고, 주연 배우 섭외할 때랑 방송국 편성 부장 만날 때, 이런 때만 좀 나와 주었으면 해.”

“그러자.”

미쉘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이랑 연습생 다 합쳐서 1박 2일로 단합대회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갈 수 있어?”

“글쎄?”

“같이 가자. 다들 기대하고 있는데.”

“언제 갈 건데?”

“보스가 정하는 대로 하지, 뭐.”

“알았다.”

“고마워, 보스.”

사업 얘기만 들었더니 머리가 꽉 찬 느낌이었다.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쉬움 가득한 연습생의 인사를 받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후! 살 것 같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 없다.

***

일찍 집으로 돌아온 강찬은 모처럼 유혜숙과 둘이 아파트 앞의 마트에 다녀왔다. 그렇게 준비한 저녁은 각종 채소를 풋고추와 된장, 고추장에 싸먹는 것이었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그렇지? 엄만 사실 고기보다 이런 게 더 좋아.”

실제로도 유혜숙은 밥보다 오이, 채소를 더 먹는 것처럼 보였다.

“보육원 일은 어떻게 결정하셨어요?”

“우선 다섯 곳에 매월 200만 원씩 지원하기로 했어. 아빠 수입이 늘어나면 더 하는 걸로 하고. 회사가 돈을 번다고 해도 당장 다 쓸 수도 없는 거고, 또 거의 절반 이상은 아빠 수입에서 메워야 하는 거니까.”

“그거면 애들 먹는 건 좀 좋아지나요?”

강찬은 문득 그날 양동이에 들고가던 음식과 그걸 먹으러 가야 하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그게 우리가 지정할 수 없는 거래. 보육원 입장도 이해는 가. 전기세니 뭐니 내야 할 건 많은데 그걸 밀리면 당장 생활 자체가 안 될 테니까. 그래서 더 마음도 아프고.”

“그러네요.”

다행히 식사가 끝날 때라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밥을 제대로 못 먹을 뻔했다.

설거지는 둘이 함께했다.

“어머니는 정말 멋져요.”

“얘는.”

유혜숙은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 할 것 같아서요. 저도 어머니 같은 여자 만나고 싶어요. 얼굴도 마음도 곱고 예쁜 사람.”

반찬을 다 정리한 유혜숙이 개수대로 다가왔다.

“앉아 계세요. 이것만 끝나면 되는데요.”

“아들 덕분에 호강하네.”

유혜숙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빠가 다음 주말쯤에 우리 계곡이라도 다녀오자고 하시던데 아들은 어때?”

“다음 주말에요?”

“응. 원래는 이번 주가 좋은데 엄마 동창회가 있거든. 부부동반이라서 아빠도 매번 나가셨었어. 지금껏 아빠가 많이 미안해했었는데 이번에 가서 아빠 자랑 많이 하려고.”

“아빠가 왜 기가 죽어요?”

강찬이 힐끔 뒤를 돌아보자 유혜숙이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왜요? 제가 보기에 아빠 대단하신데요?”

강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릇을 헹구었다.

“엄마 시기하는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 직업 얘기하곤 했거든. 자기 남편은 큰 기업 이사고, 누구는 외국 기업 상무고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미안해했었어.”

“음. 그런 게 미안한 거구나.”

“엄마가 안 나가겠다고 해도 그럼 친구 관계 다 끊어진다고 아빠가 항상 챙기곤 했었어. 이번엔 아빠가 정말 멋질 거야.”

그런 거라면 당연히 나갈 만하겠다.

만약 강찬이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상대방 남편을 하나씩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마누라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으르렁거려 줬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하세요?”

“일요일 11시. 남산 호텔.”

강찬은 하마터면 접시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거야 정말,

그쪽 방향에 십자가를 하나 걸어놓든가 해야지.

정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밥은 먹었수?”]

“지금 막 먹었다. 너는?”

[“정신없소. 지금 시켜놓고 담배 하나 피우는 참에 전화 한 거요.”]

“왜? 무슨 일 있냐?”

[“내일 이사 가잖소.”]

“그게 내일이야? 정신없겠다.”

[“그래서 말인데 여차하면 나 내일 학교 못 가우.”]

“애들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걱정하지 말고. 이사 끝나면 전화해라.”

[“알았소. 마누라가 완전 흥분 상태요.”]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생각난 김에 강찬은 스미든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챠니.”]

놈은 헤어진 가족만큼이나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요?”]

“그래. 그리고 일 대강 끝났으니까 이제 적당히 알아서 다니고 해라.”

[“샤흐란은요?”]

“알아서 처리했다.”

잠시 멈칫한 다음에 스미든은 모른척 다른 말을 꺼냈다.

[“오케이, 챠니. 그럼 어학당이랑 접수해도 되겠네요.”]

“알아서 해.”

[“고마워요, 챠니. 언제 다예루하고 셋이 만나지요.”]

“그러자.”

[“피서도 갑니다.”]

“가라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아, 그 새끼 참!

[“알았어요, 챠니.”]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말을 잘 들었으면 맞을 일이 반으로 줄었을 거다.

강찬은 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어떻게 이렇게 다시 살아난 거지?

대한민국 어딘가, 그도 아니라면 세상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 적응하고 있는 놈들이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강찬은 불현듯 전생의 부모가 아직 살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1998년에 프랑스에 가서 2007년에 죽었고, 지금이 2010년이니까 대략 13년을 못 봤지만 두 사람 모두 죽었을 거라 생각 들지는 않았다.

‘찾아서 뭐할 거냐?’

어렵고 힘겹게 산 걸로 한 번도 원망해 본 적 없다. 미친 듯이 돈가스가 먹고 싶었지만, 그 빌어먹을 돈가스 값이 없다고 원망해 본 적 없다.

학교에 내는 돈, 운동화, 옷, 한 번도 손 내민 적도 없다.

하지만 시도때도없는 매질과 차가운 눈초리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어쩌면 철든 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을 안아준 적이 없을까?

“으잇. 쯧!”

강찬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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