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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대로 해주지.
“저는 남고 싶어요.”
그런데 은소연의 풀 죽은 목소리가 강찬의 손길을 막았다.
“잘 생각해. 나중에 가서 후회된다느니 또 나가고 싶다느니 하면 정말 화날 것 같으니까.”
이하연이 경멸한다는 눈초리로 은소연을 쳐다보았다.
“남을 거예요. 미쉘 언니, 아니 미쉘 이사님이랑 정말 잘해보고 싶어요.”
강찬은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계약금이 3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른한 몸을 좀 깨우고 싶었다.
“커피 있음 한잔 줘.”
강찬의 말에 여직원이 화들짝 일어나 온수대 앞으로 갔다.
강찬은 그 밑에 있는 서류들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연습생들은 먹고 자는 것, 그리고 운동과 기타 들어가는 비용이 곧 계약금이다. 계약 기간 10년, 계약을 해지할 때는 무조건 들어간 비용의 6배와 5억의 위로금을 별도로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노예가 따로 없구만.’
강찬은 여직원이 준 커피를 받으며 풀썩 웃고 말았다.
“임 실장님.”
“예, 대표님.”
“여기 직원들도 이런 계약서가 있나요?”
“저하고 김재태 부장, 그리고 경리 최유진 씨만 정직원이고 다른 직원들은 전부 임시 계약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약서를 찢고 나자 이하연은 아예 꼰 다리 끝을 꺼떡거리면서 강찬을 보고 있었다.
“메이컵은 얼마 받아요?”
“메이컵과 코디가 월 150, 그리고 로드 애들이 월 120씩 받습니다.”
“보너스도 없이요?”
“예.”
강찬이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니까 이하연이 ‘이제 좀 뭘 아셨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쯧!’
더운 사무실에서 땀 찍찍 흘리며 이하연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끼어들 때까지 연습하는 애들에다, 이하연이 벌어다 주는 돈이 있어야 월급을 기대하는 직원들, 그리고 강찬에게 어떡해서든 손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미쉘까지.
‘제대로 해봐야겠는데?’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세웠다.
월급 한 푼 없이 연습하는 것도 서러운데 눈앞에 있는 쓰레기 같은 년 비위까지 맞춰줘야 겨우 조연을 얻을 수 있는 건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는다.
결심했으면 빨리빨리 진행하는 게 맞다.
“미쉘?”
“예쓰, 보스.”
“넌 월급이 얼마야?”
미쉘이 당황한 듯 파란 눈으로 강찬을 보았다.
“사실 아직 못 정했어. 나중에 의논해서 정하려고.”
강찬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임 실장님은 한 달에 얼마 받으세요?”
“250 정도 됩니다.”
처참한 수준이다. 강찬은 자존심이 확 상했다.
“펜 좀 줘봐.”
미쉘이 고개를 들자 경리 최유진이 얼른 볼펜을 들고 왔다.
“거꾸로 시작하자.”
강찬은 계약서를 들어 연습생들 것을 한쪽으로 밀었다.
“임실장님. 근처에 이 정도 되는 거 2개 층 얻을 데가 있나요?”
“아래층이 비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그거 계약하세요.”
“예?”
“사무실 하나가 더 필요해서 그러니까 오늘 중으로라도 계약하시라구요.”
“예.”
임수성이 미쉘의 눈치를 살폈다.
“아, 참. 얼마 정도 필요한가요?”
이하연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증금 5천만 원이면 될 겁니다.”
“그럼 그거 얻어서 사무실을 새로 꾸며 주세요. 내 방도 하나 만들어 주고 여기 계신 분들도 방에 들어가게 하고. 그 정도 넓이는 되죠?”
“충분합니다.”
“그럼 이 공간은 연습생들 휴게실로 하면 되겠네요.”
“그렇죠.”
임수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달부터 코디, 메이컵 분들은 전부 정규 직원으로 고용하고 한 달에 250만 원씩 지급하세요.”
직원들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강찬은 풀썩 웃은 다음 “로드분들은 200씩.”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미쉘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쉘은 1년에 1억 5천.”
“보스!”
“임 실장님은 1년에 7천, 김재태 부장은 1년에 5천.”
임수성과 김재태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강찬은 얼이 빠져있는 듯한 최유진을 보았다.
“최유진 씨는 얼마 받았어?”
“예? 저요? 저는 한 달에 100만 원이요.”
“그럼 일단 200에서 출발하자. 그만두지 않으면 계속 올라갈 테니까. 오케이?”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최유진이 깡패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습생들은 지금 지원하는 것처럼 똑같이 하고 전부 한 사람당 70만 원씩 줘. 그래야 연습할 맛이 나지. 그리고 이 계약서 전부 바꿔. 언제고 나갈 수 있는 걸로.”
이하연이 코웃음을 픽 하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은소연.”
“예?”
강찬은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계약금 3천을 받은 걸로 돼 있는데 맞아?”
은소연이 고개를 떨구자 미쉘이 얼른 “그중에 반만 받았어.”라고 대신 답을 했다.
“저 친구도 내일 계약서 다시 써. 계약금 1억. 그리고 이런 엿 같은 계약서 말고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받은 금액만 돌려주는 걸로 바꾸고.”
“정말 뭘 모르시네.”
이하연이 발끝을 까딱거렸는데 그러면서도 표정 끝에 아쉬움이 살짝 묻어났다. 참고 있었으면 저도 뭔가를 얻을 것 같았나 보다.
“미쉘. 육스벤처스라는 프랑스 회사 알아?”
질문한 강찬이 당황할 정도로 미쉘의 눈이 커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하연과 성소미가 귀를 쫑긋했고, 임수성은 고개를 쑥 내밀기까지 했다.
“거긴 세계적인 투자회사야. 영화나 드라마 공동제작 지원이 많은데 기본 투자가 우리 돈, 100억 이상인 곳이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샤흐란이 하도 200억, 200억, 지랄을 해대서인지 강찬은 100억이 그리 크게 실감 나지 않았다. 솔직히 100억이나 200억이나 돈가스를 몇 개 살 수 있는지 모르는 건 같다.
“내일 그쪽에 드라마 제작 협조 요청해.”
“육스벤처스에? 우린 주연으로 은소연 말고는 정한 것도 없어, 보스. 그쪽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강찬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됐으니까 공식적으로 투자 신청만 해.”
미쉘이 잠시 굳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우. 오케이, 오케이, 차니, 보스.”
남산호텔에서 본 프랑스 갱에 라노크 대사, 공트 자동차와 연관있는 강찬을 떠올린 미쉘이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저, 대표님.”
임수성이 강찬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정말 육스벤처스와 말씀이 있었습니까? 제 말은, 의심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처음 투자하는 거라서 연예계 쪽이 발칵 뒤집힐 일이라서요.”
덩치는 남산만 한 임수성이 당황한 듯 겨우 말을 마쳤다.
“분명 답이 있을 겁니다. 기본적인 투자를 할 걸로 아는데 내일 투자 신청하고 뚜껑을 열어보면 정확하게 알겠죠.”
“디아이가 제작하는 드라마로 말씀이시죠?”
“그렇죠.”
밖에서 갑자기 “와!”하는 탄성이 터졌다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우리가 직접 제작하면 작은 역할이라도 하나씩 맡을 기회가 생겨서 저럴 겁니다. 육스벤처스에서 투자한 드라마라면 기본적으로 유럽의 웬만한 나라와 일본에는 거의 수출됩니다.”
“그렇군요.”
답을 하면서도 임수성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은소연은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내일 3억을 보낼 테니까 아래층 계약해서 우리가 쓰기 편하게 수리해 놓고, 쟤 계약금하고 애들 급여랑 다 내 말대로 처리해 놔.”
“예쓰. 보스.”
“그럼 다 끝난 거지? 나 간다.”
“차니! 쏘리, 보스. 저녁 함께 먹고 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정해진 약속이라서 가봐야겠다. 임 실장님.”
“예, 대표님.”
“내일부터 이 사무실과 아래층 어디에서도 저 둘은 안 보이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하연은 돈을 뺏긴 얼굴이고, 성소미는 그런 이하연을 원망하는 눈치였다.
제깟 년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강찬이 일어서자 두 년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김재태가 잽싸게 문을 열어주어서 강찬이 밖으로 나오자 연습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댔다.
“하나, 둘, 셋!”
“대표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중 하나가 숫자를 센 후, 합창하듯 다 같이 인사말도 외쳤다.
강찬이 풀썩 웃어주고 현관으로 향하자 깡충깡충 뛰면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임수성이 인사를 하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미쉘과 둘이 있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와락!
미쉘이 강찬에게 뛰어들어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읍.”
기습 키스다.
프랑스 년이 이정도 흥분한 순간이면 충분히 인정할 만한 수준이어서 강찬도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고개를 뺐다.
“무겁다.”
강찬에게 딱 붙은 미쉘의 몸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 있었다.
“보스. 오늘 너무 멋져서 숨이 막히는 거 같아.”
허리를 꿈틀대며 미쉘이 아래를 너무 붙여서 강찬은 커다랗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하자, 미쉘. 힘든 일 맡겨서 미안하다.”
“노우, 보스. 나 지금 완벽하게 행복해.”
쪽.
미쉘이 또 한 번 입술을 마주치고 마침내 몸을 뗐다.
“전에 혹시 사업해 본 적 있어?”
사업은 개뿔.
성격대로 휘젓는 것뿐이지 탄약 한 개 팔아본 적 없다.
강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속없이 몸이 반응해서 손을 흔들어주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걸음이 이상했다.
***
집에 돌아왔을 때 유혜숙은 탁자에 한가득 서류를 늘어놓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들!” 소리를 세 번쯤 들은 후에 간단하게 몸을 씻고 강찬은 탁자로 갔다.
“지난번에 그 서류잖아요?”
“그래. 아들 덕분에 더 많은 곳을 지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선별해 놓으려고.”
“정말 아깝지 않으세요?”
유혜숙이 강찬을 살짝 보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엄만 다른 여자들이 하는 고급 가방이나 옷 같은 거, 하나도 안 부러워. 대신 이게 엄마가 하는 사치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빠가 이해해주셔서 다행인데 아들도 엄마 이런 거 그냥 이해해 주라.”
“정말 좋아 보여요. 저는 그러면 됐어요.”
“고마워, 아들. 이거 10분만 더 보고 밥 차려 줄게.”
유혜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강찬은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털썩 앉았는데 노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행복을 좀먹는 전화가 울렸다.
“샤흐란.”
[“좋은 소식이 있나?”]
“제대로 하나 만들었지. 야구장. 어때?”
[“훌륭하군. 강찬. 장소와 시간은?‘]
샤흐란의 음성에 묘한 흥분이 깃들었다.
이 새끼는 요럴 때 바람을 빼 줄 필요가 있다.
“샤흐란. 난 스미든 같은 멍청이가 아니야. 돈은?”
[“돈을 건네줬는데 약속이 어겨지거나 거짓 약속일 때는 어떻게 하나?”]
“믿지 못하겠다면 없던 일로 하자, 샤흐란.”
[“그렇게 하면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하나가 세상에서 없어지는데도?”]
칼자루는 확실히 샤흐란이 잡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번 뒤를 잡히면 계속 끌려간다.
“샤흐란. 넌 유럽을 처먹는 일이라면서? 그거에 비하면 200억은 고작 돈가스 정도밖에 안 되는 거 아닌가?”
하필이면 돈가스를 댔을까?
좀 더 멋진 비유도 많을 텐데.
[“흠. 일정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그런 식으로 넘겨 짚는 건 좋지 않아, 샤흐란.”
[“회사를 통해서 자금을 이체시키려고 하는 거다. 물리적 시간이 필요해서 시간을 맞춰볼 필요가 있지.”]
누군가 샤흐란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월요일까지는 내 손에 돈이 쥐어져야 해,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 거래는 없는 걸로 하겠다. 그리고 샤흐란.”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너도 그렇게 내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만 알아라.”
말을 마친 강찬은 그대로 전화를 꺼 버렸다.
개새끼. 약 좀 오를 거다.
“아들! 밥 먹자.”
“예!”
강찬은 기분 좋게 저녁을 먹으러 거실로 향했다.
***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 잠이 쏟아졌다.
느닷없이 20㎞를 달렸으니 그럴만하다.
‘그만 좀 자자!’
몸뚱이가 미쉘이나 함 직한 아우성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강찬은 어쩐지 고소했다. 한계를 이겨내야 한다.
“어! 미영아!”
[“나야! 지금 집에 왔어. 내일 바다에 갈 수 있어?”]
“그래. 대신 10시쯤 출발하자. 그럼 되지?”
[“응! 흐흐흐흐.”]
“아침에 아파트 앞에 차 준비할 테니까 입구 밖으로 나와.”
[“알았어! 잘자. 내일 봐.”]
“잘 자라.”
전화를 끊자 어쩐지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책상에 전화를 내려놓을 참이었다.
웅웅웅. 웅웅웅.
오늘은 정말 바쁘다.
석강호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여보세요? 왜?”
[“뭐하쇼?”]
“그냥 늘어져 있어. 무슨 일인데?”
[“나 아파트 앞이요. 괜찮으면 차나 한잔 땡깁시다.”]
“그거 좋다. 바로 내려갈게.”
강찬은 산책 좀 하고 오겠다고 하고 아파트를 내려갔다.
빵빵.
석강호가 운전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 피곤하냐?”
그렇지 않아도 석강호의 눈이 쑥 들어갔다.
“대장에게 비하겠소? 그래도 모처럼 기분이 상쾌하우.”
이해한다.
모처럼 예전에 용병 시절 생각도 나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 다음 주에 이 옆 아파트로 이사오우.”
강찬이 풀썩 웃자 석강호가 머리를 긁어댔다.
“마누라 꿈이었다고 합디다. 그냥 그러라고 했소.”
“잘했다.”
“고맙소.”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할 거면 가서 잘란다.”
“뭔 소리요? 둘이 차 한잔 때리고 담배 하나 시원하게 깨물어 줘야지.”
“뭔 소리야? 담배 끊었다고 하지 않았냐?”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닙디다.”
둘이서 ‘푸흐흐.’하는 웃음을 웃어가며 미사리의 커피숍에 갔다.
내일 김미영과 바닷가에 가는데 차를 좀 쓰고 싶다는 이야기, 다음 주 금요일에 이사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노크의 미끼와 샤흐란의 반응, 디아이에서 있었던 일을 느긋하게 설명했다.
“수요일에 나갈 거지요?”
“그래야지.”
“나도 갑시다.”
강찬이 진지한 얼굴로 석강호를 보았다.
“라노크의 일은 너한테만 말한 거다. 자칫하면 내 쪽에서 말이 퍼져 나간 걸로 오해하기 쉬워. 그 부분은 내가 라노크와 따로 의논해 볼게.”
“그렇기도 하겠소.”
석강호가 담배를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이하연인가 하는 년은 잘라낸 거네요.”
“그렇지. 왜?”
석강호가 담배 연기를 뿜는 것을 보며 강찬도 담배를 잡았다. 확실히 이 새끼랑 둘이 있으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피운다.
“주변에 물어보니까 그 계집애 인기가 장난이 아닙디다. 드라마에 나가는 영향력도 좀 있나 보구요.”
석강호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담배 연기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쯧. 그거 내 옆에 더 있으면 뺨따귀 맞고 기절하는 일만 남은 거다. 전에 내가 말했지? 딱 나이 든 허은실이라고. 속이 다 후련하다.”
석강호가 “푸흐흐.”하고 웃음 다음 “대장답소.”하고는 담배를 껐다.
둘이서 낮에 있었던 훈련 이야기, 내일부터 석강호도 아침마다 달리기를 시작하겠다는 이야기, 납치된 일이 있기는 했지만, 갑자기 10억을 가져다주자 마누라가 밤마다 뜨거운 눈길을 보내서 사는 맛이 난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노곤한 게 훈련을 뛰고 와서 저녁에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전투의 끝이 독기를 남긴다면 훈련의 끝은 어딘가 개운함을 남긴다.
강찬이 석강호를 내려다 주고 아예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웠다. 방문자 차량으로 해 놓아서 하루쯤은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와 적당히 인사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높다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찔한 느낌이 들면서 잠이 쏟아졌다.
‘내일부터는 매일 20㎞씩 달려볼까?’
몸뚱이가 강찬의 의식을 꺼 버린 것처럼 깊게 잠이 들었다.
***
잠깐 졸고 일어난 것 같은데 아침이었다.
잠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자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강찬은 가벼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와 몸을 좀 더 풀어준 다음, 아파트를 달려나갔다.
숨어있던 근육통과 피로가 싹 달아나는 느낌. 달리면서 느껴지는 고통이 묘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10㎞만 뛰었다.
단번에 두 배를 뛰는 건 확실히 위험한 짓이다. 차라리 시간을 내서 오후에 한 번 더 뛰다가 몸이 완전히 받아들이면 내쳐 20㎞를 뛰는 게 맞다.
수요일에 라노크의 일도 있고 해서 몸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
“어휴, 힘들지 않냐?”
“아버지는 회사 일 하시잖아요.”
강찬이 흘린 땀을 보며 강대경은 질린 얼굴을 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디아이 법인통장에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송금을 한 뒤에 함께 아침을 먹었다. 송금 한도를 늘려둘 필요가 있었다.
“내일 상정 보육원 가는 건 어떠니?”
“예. 같이 가고 싶어요.”
“모처럼 다 함께 움직이는 거구나.”
강대경만큼이나 유혜숙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아들, 오늘은 뭐 할 거야?”
“미영이랑 바닷가 가볼까 하는데요? 회도 먹고 싶다고 하고.”
“미영이랑?”
“예. 왜요?”
유혜숙은 놀란듯한 반응을 얼른 감추고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재미있겠다. 용돈은 있니?”
강대경이 얼른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충분히 있어요. 전에 통역비 받은 거 아직 남았거든요.”
“건전하게 만나는 거지?”
강대경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강찬이 풀썩 웃었다.
“친구잖아요.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엄마 같은 사람이 없네요. 저도 정말 엄마처럼 예쁜 여자 만나고 싶은데.”
강대경이 ‘많이 늘었다! 엄마에게 제대로 먹힌 거 같은데?’ 하는 눈빛으로 웃었고, 유혜숙은 “어머, 얘는! 엄마보다 훨씬 예쁜 여자 만나야지.” 하면서도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밥을 먹고 강찬이 나간 후에 유혜숙은 강대경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미영이네 부모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
“당신은 엄마들을 잘 몰라서 그래. 저러다 미영이 성적이 떨어지면 찬이가 죄 원망을 뒤집어쓰니까.”
“그렇진 않을 거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만약 내가 미영이 아버지라면 우리 찬이 절대 안 놓친다.”
유혜숙이 눈을 껌벅이며 강대경을 보았다.
“프랑스어를 현지인처럼 하지. 국비 장학생 초청 있지. 공트 자동차에 영향력 행사하는 거 보면 우리나라 어지간한 장, 차관보다 낫지. 무엇보다 눈빛을 보면 저놈은 뭘 해도 제대로 하겠구나 싶거든.”
꿈을 꾸는 것같은 유혜숙의 표정을 슬쩍 본 강대경이 기분 좋은 미소를 떠올렸다.
“첫날 호텔에서 상담할 때 찬이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해. 집에서 기다리는 당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 녀석이 있다면 당신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
유혜숙이 손으로 입을 가리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강대경을 꼭 안았다.
“그래도 당신, 내 옆에 꼭 있어줘야 돼.”
“난 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우리, 이렇게 둘이 꼭 붙어서 찬이가 성장하는 걸 함께 지켜보자.”
유혜숙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강대경이 유혜숙을 안아서 들어올렸다.
“괜찮지?”
유혜숙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