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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 새끼.
진이 쪽 빠질 정도로 달린 후에 하는 모든 일은 거의 정신력의 산물이라 보는 게 맞다. 손을 비롯한 온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휴식을 취하고 매트리스 여섯 장을 넓게 펼친 운동장에서 강찬은 격투술을 시작했다.
운동부와 평일 자습을 위해 학교에 나온 아이들이 제법 스탠드에 앉았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이시죠?”
강찬의 권유에 석강호가 목을 비틀며 앞으로 나섰다.
“이쪽은 우선 두 명이 나오세요.”
강찬의 말에 각진 턱을 가진 직원 하나가 아니꼬운 눈초리로 웃음을 픽 하고 웃고는 석강호의 앞으로 나왔다.
이런 새끼는 꼭 사고가 난다.
“들어가.”
강찬이 짧게 한 마디를 던졌을 때였다.
홱.
놈이 강찬을 향해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말 못 들었어? 죽여버리기 전에 들어가라고.”
삽시간에 스탠드까지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직원이 슬쩍 시선을 돌렸는데 김태진은 너 알아서 하란 식으로 덤덤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나랑 한판 합시다.”
직원 놈은 자신이 생긴 모양이었다.
피식.
강찬은 그대로 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놈은 제법 무술을 배운 것처럼 오른발을 뒤로 빼며 손을 들었다.
병신!
무술에 자신 있는 새끼다.
발이 손보다 얼마나 느린 줄 알면 저런 자세를 함부로 잡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강찬이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갔을 때 놈이 오른발을 쳐들었다.
팍!
강찬은 놈의 정강이를 발로 밟듯이 밀어내며 옆구리를 엄지로 찍었다.
정강이를 맞아 앞으로 기운 놈이 막기 위해 왼손을 뻗어냈다.
퍽. 퍼벅. 퍽.
그러나 강찬은 엄지를 세운 주먹을 당기며 그대로 오른 팔꿈치로 놈의 턱을 가격하고 목, 명치, 그리고 다시 옆구리를 세차게 찔러버렸다.
“컥! 커어억!”
바닥에 쓰러진 놈이 좌우로 몸을 뒹굴며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냈다.
불만스러운 기색의 직원들이 강찬의 시선에 얼른 눈을 떨어트렸다.
“격투술을 왜 한다고 생각하나? 놀러 왔으면 남 연습하는데 헛짓거리하지 말고 한쪽에서 공이나 차다 가.”
강찬은 아직도 목을 부여잡고 버둥거리는 직원을 한번 본 후에 다시 시선을 들었다.
“죽고 사는 싸움이 격투다. 맨손 하나도 못 이겨서 버둥거리는 놈들이 어디서 건방진 얼굴을 해?”
“일부러 달리게 해서 힘을 뺐고, 기습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리도 만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김태진과 학생들을 의식했는지 직원 중 하나가 다부지게 반발했다.
강찬은 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다섯이 한꺼번에 한번 해 볼래? 어때? 난 혼자 해 주지.”
직원들이 눈짓을 교환한 다음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며 앞으로 나왔다.
“제대로 해라. 그리고 절대로 비겁하게 꼬리 빼지 마라. 아니면 정말 죽여버릴 테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프리카에서 신병을 받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쓰러졌던 놈이 겨우 일어나 스탠드로 어기적거리며 몸을 뺐다.
강찬은 고개를 좌우로 꺾은 다음 놈들을 보았다.
“시작한다.”
권투를 한 놈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척 보기에도 이런저런 무술을 익힌 자세였다.
강찬을 둘러싼 다섯이 쭈뼛거릴 때였다.
강찬은 우향우를 하는 것처럼 오른쪽 놈에게 몸을 돌렸다.
탁탁. 퍼버벅.
놈의 주먹을 파리 쫓듯 쳐내고 단박에 목과 명치, 겨드랑이를 찍으며 바로 왼쪽으로 돌았다.
콰작!
도는 순간 휘두른 왼쪽 팔꿈치에 뒤에 있던 놈이 코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타다다닥.
강찬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세 놈의 팔을 연달아 쳐냈다.
퍼억!
불만을 토했던 놈이 뾰족하게 세운 주먹에 명치를 맞고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로 뒤로 넘어갔다.
둘 남았다.
타닥.
팔을 쳐낸 강찬은 먼저 우측 놈에게 안기듯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바박.
김태진이 움찔할 정도로 빠른 찌르기였다.
삽시간에 겨드랑이, 목, 명치, 옆구리, 다시 옆구리를 양손 엄지로 찔러대자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놈이 바닥을 사정없이 굴러다녔다.
남은 한 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쓰러진 동료를 보며 달려들지 못했다.
“경고하는데 지금 네가 나한테 달려들지 못하면 넌 영원히 적을 향해 뛰어들지 못해. 맞는 게 겁나고, 찔리는 게 겁나고, 칼이 무서우면 이 짓 때려치우고 얼른 다른 직업 알아봐.”
놈이 어설프게 주먹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강찬은 놈의 팔을 위로 들어 어깨에 걸치다시피 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여기서 손목을 밑으로 당기면 팔꿈치가 부러진다.
홱!
콰작!
“끄아아아악!”
팔이 꺾인 직원이 팔뚝을 감싼 채 섬뜩한 비명을 질러댔다. 엄살이 심한 새끼다.
터억.
강찬은 그 직원의 멱살을 잡아채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조용히 해.”
“끄으으. 끄으으으으.”
“넌 마지막에 비겁했어. 동료들이 죄 바닥에 쓰러지는 동안에도 주먹을 안 날린 거야. 실전에서 너 같은 놈에게 뒤를 맡기면 어떻게 될 거 같나? 팔이 나을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그럴 것 같으면 정말 이 짓 하지 마. 알았어?”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찬이 멱살을 놓아주었음에도 운동장은 조용했다.
“전체적으로 몸이 무거워 보이는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김태진이었다. 피가 끓었는지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뜻밖의 질문을 했다.
“새벽에 10㎞쯤 달렸거든요.”
김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진정한 직원들과 겁에 잔뜩 질려있던 아이들이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커다랗게 숨을 쉬었다.
“어때? 가르쳐 볼 만해?”
“좋은데요? 이 중에 셋은 타고난 재능도 있구요.”
김태진이 씨익 웃으며 강찬을 보았다.
알아들은 거다.
다섯 중에 셋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이 다섯은 목숨 걸고 강찬에게 매달릴 거다. 신병을 두들긴 후, 특수부대 교관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저 친구는 어떻게 할까?”
“살짝 부러트렸으니까 3개월이면 나을 겁니다. 그때 가서도 하겠다면 제가 책임지고 가르치죠.”
“하겠습니다!”
팔을 싸안은 직원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통증을 이겨내느라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너 이리 나와.”
강찬의 말에 직원이 왼쪽 팔뚝으로 눈물을 쓱 닦고 앞으로 나왔다.
강찬이 코가 맞닿을 정도로 다가갔는데도 직원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지막 경고다. 다음번에도 비겁한 모습을 보이면 다시는 팔을 못 쓰게 부러트려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할 거야?”
“하겠습니다!”
입에 침이 잔뜩 엉긴 채로 직원이 소리높여 대답했다.
히죽.
강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팔은 3개월이면 낫는다. 시간 날 때마다 걸어라. 10㎞든, 20㎞든 걸어. 그럼 재활이 빨라진다.”
“예!”
“들어가.”
“감사합니다!”
직원이 무언가 뿌듯한 얼굴로 돌아갈 때 김태진이 야릇한 미소로 강찬을 보았다.
“점심 먹고 다시 하지?”
“그럴까요?”
김태진이 상체를 틀어 스탠드에 앉은 학생들을 쭉 돌아보았다. 운동부를 포함해 대략 50명쯤 되었다.
“여기 이 학생들, 내가 점심 사도 되나?”
아이들이 술렁였다.
“탕수육 15개면 대충 해결될 것 같은데?”
중간에서 사내아이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 소리쳐 대답했다.
팔이 부러진 직원은 바로 병원으로 보냈다.
다음으로 씻을 사람 씻고, 문기진이 짜장면과 짬뽕, 볶음밥 세 종류로 주문을 담당하기로 했다.
강찬도 수돗가에 가서 적당히 몸을 씻고 운동장으로 향할 때였다.
차소연이 벨이 울린다며 전화기를 들고 왔는데 미쉘이었다.
“왜, 미쉘?”
[“차니. 오늘 인터넷 신문에 우선 제작 발표했어.”]
어딘지 음성이 밝지 않았다.
“고생했다. 그런데 무슨 문제 있어?”
[“기사 나가자마자 친한 기자들한테서 전화가 많이 왔어. 이거 사기라는 소문 도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그리고…….”]
“말해.”
[“이하연이 난리야. 자기 빼놓고 어떻게 은소연 이름으로 드라마 제작을 발표 하냐고. 당장 기사 내리지 않으면 소속사를 옮기거나 방송 출현 안 하겠대.”]
“내년까지 계약된 거라면서?”
[“이쪽 계약금이 얼마 안 돼서 위약금 물어준다는 데 있을 거야. 차니가 사과하지 않으면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대. 기자들에게 말 흘린 것도 얜 거 같아.”]
“그럼 보내버려. 위약금도 받고 좋네.”
[“걔 보내면 은소연이랑 신인 두 명 조연 다 잘릴 거고, 다음 드라마 끼워 넣기 한 것도 모조리 날아가.”]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쉘은 직장을 그만두고 온 것보다는 강찬이 손해 볼 것을 걱정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그런다고 끌려다니면 나머지도 또 똑같은 짓을 한다.
“미쉘.”
[“예쓰, 차니.”]
“그년 잘라. 자르고 나서 나한테 전화해.”
워낙 강경하게 말을 전하자 미쉘은 대답을 못 했다.
“맡겨 놓는다고 하고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 말대로 해라.”
[“알았어, 차니.”]
미쉘이 전화를 끊자 차소연이 놀라고 궁금한 얼굴을 했다.
강찬은 모른척하고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김태진과 직원들까지 6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하는 점심이다.
운동부실로 들어가겠냐고 했을 때 김태진은 고개까지 저으며 함께 식사하겠다고 했다.
강찬과 석강호, 그리고 김태진이 둥그렇게 앉아서 볶음밥을 먹었다.
“아직 움직임이 없나요?”
“출항 일자를 확실하게 안 잡아서 매시간 체크하는 중이다.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줄 테니 그날은 함께 움직이는 걸로 하자.”
“알았습니다. 그런데 모가지 귀신은 그 전에 해결해야죠?”
“음.”
볶음밥이 입에 가득해서 김태진의 답이 이상했다.
“오후에도 자네가 가르치나?”
“왜요?”
“몸 좀 풀고 싶은데 팔이 부러질까 봐 겁나서 그런다.”
강찬이 풀썩 웃자 석강호가 “저랑 하십시다.” 하고 말을 받아주었다.
30분에 걸쳐 점심을 먹고 종이컵에 커피를 마셨다.
스탠드에 앉아 끼리끼리 편한 시간을 가졌고, 구경하던 아이들은 모두 교실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30분 정도는 더 쉬어야 한다.
앞으로 일주일에 3번씩 석강호가 직원들 교육을 담당하고 강찬이 뒤를 봐주기로 했다.
30분이 얼추 더 지났다.
석강호가 불러들였을 때 직원들의 눈빛과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꿩 먹고 알 먹고다.
석강호라면 저렇게 2주만 연습해도 확실히 효과를 볼 거고, 그런 만큼 직원들의 실력도 늘 게 분명했다.
스탠드에서 두 다리에 팔꿈치를 기대고 앉은 김태진이 슬쩍 강찬을 보았다.
“어디서 배운 거냐?”
강찬이 웃기만 하자 김태진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프랑스어에 외인부대 격투술을 가진 고등학생이라. 후-우.”
강찬은 석강호와 직원들의 대결을 지켜보며 김태진을 외면했다. 무슨 설명을 하든 믿기지 않을 테니 이런 때는 그냥 말이 없는 게 낫다.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울려서 들었는데 라노크의 번호였다.
“예, 대사님.”
프랑스어로 전화를 받자 김태진이 복잡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무슈 강. 드라마 제작발표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인터넷 신문에 올렸다고 하네요.”
[“역시 강찬 씨의 일 처리는 신뢰가 갑니다. 그렇다면 내일 중으로 육스벤처스 라는 프랑스 회사로 투자 신청을 해 주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사님.”
[“하나 더 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3시, 용인에 있는 사립 야구장에 들를 예정입니다. 공식 행사가 아니니까 강찬 씨가 불러내는 거라고 말하고 샤흐란과 대화를 나눠 주세요. 가능하면 이 일을 핑계로 200억을 움직이되 가능하면 한국으로 송금토록 해주세요. 워낙 거금인 데다 외국환 송금이라 쉽게 감추기 어려울 겁니다.”]
“대사님.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무슈 강. 당신 같은 인물을 만나서 기쁩니다. 그럼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대사님.”
[“말씀하세요.”]
“공트 자동차 일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강유모터스 직원들이 정말 기뻐하더군요.”
[“기분 좋은 소식이군요.”]
라노크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야구장은 경호하기 어떤가요?”
“야구장? 야구 경기하는 그 야구장 말인가?”
“예.”
김태진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꼭 두 번 나간 적이 있지. 한 마디로 경호원들이 미쳐있다고 보면 맞아. 잠시도 눈을 쉬지 못하는 데다 홈런이나 안타가 나올 때마다 언제든 몸을 던질 준비를 해야 하니까.”
“경호인원이 10명에서 20명 정도라면요?”
“암살 기도가 있는 건가?”
“그렇다고 치고요.”
김태진이 입술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보고 그런 상황에서 암살하라면 대략 90%의 확률로 성공할 자신 있지.”
“그렇군요.”
강찬은 기분이 찜찜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너무 무리한 시도다. 샤흐란보다는 그 배후를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의도인 건 알겠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위험한 일이다.
강찬이 더는 입을 열지 않자 김태진은 잠자코 대련을 지켜보았다.
석강호는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시종일관 직원들을 상대로 가르치고 대련하고 또 가르쳤다. 꽤 많이 달린 뒤라서 체력이 바닥났을 텐데도 훈련을 즐기는 얼굴이었다.
“우리 애들이 벌써 달라졌구만.”
김태진뿐만 아니라 강찬이 보기에도 그랬다. 저래서 태도가 중요하다. 교관이나 상급자가 신병이 오면 있는 대로 기를 꺾어놓는 가장 큰 이유.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네나 저기 선생님 같은 분이 몇 명이나 있다고 그래? 쟤들이 임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회칼 든 깡패 놈들 서넛은 해치우던 애들이야.”
강찬이 풀썩 웃자 김태진도 재미있다는 듯 따라 웃었다.
“어디 슬슬 나가서 나도 몸 좀 풀어볼까?”
“제가 상대해 드릴까요?”
“아서. 애들 앞에서 바닥을 구르고 싶지는 않아.”
김태진이 분명하게 거절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웅웅웅. 웅웅웅.
전화가 참 많은 날이다.
“미쉘. 무슨 일이야?”
[“미안해, 차니. 이하연이 차니를 만나서 분명하게 일을 매듭짓고 싶대.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봐. 혹시 오늘 회사로 나와줄 수 있어?”]
“쯧.”
언짢긴 했지만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알았다. 4시까지 갈게. 문자로 주소를 보내줘.”
[“고마워, 차니.”]
시간이 3시 근처였다.
강찬은 슬쩍 일어나 당직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찬물을 뒤집어쓰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물기를 닦을 때는 잠이 쏟아질 정도로 피곤했다.
‘너무 무리했나?’
실제로도 무리한 게 맞다. 하지만 이왕 가르치려면 제대로 시작해야 석강호에게도 도움이 된다. 사실 신병이 건방 떠는 꼴을 못 참는다는 성격이 나온 것이기도 했다.
훈련을 위해 옷이 좀 허름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강찬이 운동부실에 들어가자 운동을 끝낸 아이들이 책을 펴놓고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집에 가서 편하게 자.”
“아니에요.”
차소연이 잠을 쫓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며 답을 했다.
좋은 아이들이다.
무엇보다 표정이 밝아져서 정말 좋았다.
“선배님. 열심히 연습하면 저도 선배님처럼 될 수 있나요?”
강찬이 풀썩 웃고는 옷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피는 문기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나보다 훨씬 나을 거다. 대신 성적 떨어지면 운동부 끝난다는 거 잊지 마라.”
“아! 예.”
문기진은 잠이 확 깨는 얼굴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김태진과 석강호가 서로 옆구리를 싸 안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는 먼저 좀 가봐야겠어요.”
“어후. 그래. 오늘 고마웠어. 끄응. 나는 선생님하고 조금 더 연습하고 갈게.”
다른 사람들과 학생들이 있어서 석강호는 눈인사만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유난히 과묵한 모습이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교관님.”
직원들이 굵직한 음성으로 하는 인사를 받으며 강찬은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학교 앞에서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었다.
15분쯤 기분 좋게 졸고 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둘러보는데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디아이’란 간판이 보였다.
건물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3층까지 걸어 올라간 강찬이 문을 열자 삼 면에 거울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한 아이가 인사하자 다른 아이들이 연달아 인사했다.
아이들이 땀을 잔뜩 흘리고 있어서 돌아보니 바닥에 선풍기 두 대가 힘겹게 돌고 있었다.
“미쉘은?”
“저기 사무실에 계세요.”
강찬은 신발을 벗고 바닥에 놓인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한 아이가 달려가 안쪽 문을 열고 “이사님! 대표님 오셨어요!” 했는데 미쉘과 임수성, 그리고 김재태가 순서대로 나와서 인사했다.
“보스, 어서 와.”
뜬금없는 보스 소리에 의아했지만, 회사라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게 부를 거면 차라리 반말을 지껄이지 말든가.
미쉘은 전에 없이 힘들어 보였다.
“오셨습니까?”
“예.”
강찬은 임수성과 김재태에게 아는 체를 하고 미쉘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공간이 좁았다.
책상 세 개와 그 중간에 소파가 있고 조그만 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대표의 개인 업무 공간인 모양이었다.
강찬이 들어서자 소파에 있던 이하연, 성소미, 은소연이 일어나 인사했는데 이하연은 일어서는 척만 하고 바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강찬이 앉자 미쉘이 그 옆에 앉았고, 임수성과 김재태,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책상과 보조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보자고 그랬어?”
“반말하지 마……요.”
강찬이 피식 웃자 이하연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 피곤하니까.”
“나갈 때 나가더라도 사과는 받아야겠어……요.”
말끝이 두 번이나 이상하게 끝났다.
“이하얀.”
“이하얀? 지금 내 이름을 이하얀이라고 했어요?”
이하연이 발끈해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거나, 그거나. 상관없으니까 헛소리 말고 빨리 나가.”
“사과 안 하면 여기 연기자들 다시는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못 나올 거고, 얘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드라마 제작 사기라고 다 떠들 거야. 그러니까 당장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
미쉘과 은소연, 그리고 코디와 메이컵, 심지어 로드 매니저란 직원들까지 모두 시선을 떨궜다.
‘저년이 꽤 힘이 있었나 보네?’
강찬은 피식 웃으며 성소미를 보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나도 하연 언니랑 같은 생각이에요.”
성소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은소연. 너는?”
은소연이 미쉘과 이하연의 눈치를 살피고 입을 열지 못했다.
“얘네 계약서 줘봐.”
강찬이 미쉘을 보았는데 준비해 두었던 모양인지 김재태 부장이 시커먼 결재판을 앞에 놓아 주었다.
가장 위가 이하연이었다.
강찬은 이하연의 계약서를 우선 들었다.
그리고는 길게 찢어버렸다.
임수성이 신음처럼 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성소미였다.
“너도 같은 생각이라 이거지?”
강찬은 성소미 것도 그대로 찢었다.
“은소연. 너도 대답 안 하는 걸 보면 같은 생각인 거고?”
강찬은 은소연의 계약서도 길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