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48화 (48/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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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 새끼.

라노크는 잠시 침묵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이 전화는 정보부에서도 도청이 어렵습니다. 호텔 예약을 제가 직접 했으니까 그렇다면 내부에 적이 있는 거겠군요.”]

강찬은 호텔의 현관 앞에 섰다.

솔직하게는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가서라도 놈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단순히 저를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 샤흐란이 굳이 지금 저와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을 강찬 씨가 몰라볼 리도 없고, 혹시 동양인이었습니까?”]

“예.”

라노크는 다시 원래의 차분한 음성이었다.

[“대사관도 도청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다시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요.”]

“그렇다면 이동 중에 교통사고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서울 시내에서 벤츠 방탄차를 들이받아서 즉사시킬 만한 곳은 드뭅니다, 무슈 강.”]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안한 음성이었다.

[“무슈, 강. 지금 남산 호텔로 출발하겠습니다. 대신 새로 방을 예약해주세요. 도착할 때 연락할 테니 입구에서 함께 올라가면 좋겠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무슈 강의 실력이라면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 능구렁이가?

[“미끼 역할을 제대로 해보죠. 우리 쪽에 잘못된 정보를 두 개 흘려놓겠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는 자가 있다면 우선 내부의 적은 발견한 셈이니 충분히 시도할 가치는 있지요.”]

“알겠습니다.”

[“대략 30분 내로 도착할 겁니다.”]

전화를 끊은 강찬이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수 훈련을 받고 실전에 배치된 사람은 반드시 냄새를 풍긴다. 아프리카에 배치된 신병이 대개 그랬다.

거기서 서너 번의 전투를 거쳐 살아남으면 대략 10명 안팎을 죽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놈들은 눈이 쓸데없이 번들거리고 예민해진다. 위아래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뒈지게 얻어맞고 나면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곤 한다.

다음 단계가 다예루와 같은 부류다.

항상 풀어져서 헬렐레하는 눈빛으로 돌아다니는데 목표가 생길 때면 잔인할 정도로 눈이 번들거린다. 나무에 늘어져 낮잠 자던 표범이 사냥감을 발견한 듯한 느낌.

그래서 슬쩍 둘러봐도 칠 할은 맞춘다.

시선이 마주치면 구할.

어깨라도 부딪치면 오히려 틀리기가 어렵다.

몸이 반응한다.

툭 치는 순간에 몸 전체에 흐르는 날카로운 긴장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거다.

강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몸 상태가 아프리카 때와 거의 비슷해서 라노크의 안전만 아니라면 걸릴 것도 없다.

칼질을 할 때마다 조금씩 올라오던 몸이 달리기를 이겨내면서 정상을 찾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강찬은 프런트로 가서 주철범을 불러달라고 했다.

직원이 전화를 걸고 1분쯤 되었을 때 그가 급하게 강찬의 앞으로 와서 깊숙하게 인사했다.

“담배 하나 피울 수 있냐?”

“모시겠습니다, 형님.”

강찬은 주철범을 따라 현관의 우측 안쪽으로 들어갔다. 레스토랑을 지날 때까지 몰랐는데 화장실과 레스토랑 사이에 ‘직원전용’이란 문이 있었다. 주철범이 목에 걸었던 카드를 자물쇠에 걸자 문이 열렸다.

좌우가 온통 방이다.

주철범은 그 중 우측 두 번째 방에 다시 카드키를 댔다.

“여기가 제 사무실입니다, 형님.”

안쪽에는 책상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주철범이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가져와 강찬에게 불을 붙여주고는 종이컵에 물을 담아 왔다.

“앉아.”

주철범이 인사를 꾸벅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10분쯤 있다가 방이 하나 필요해. 이름은 네 이름도 쓰지 말고 적당히 가명 하나 대라. 오늘 중으로 나갈 거니까 계산은 그때 하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

강찬은 “쯧.” 소리를 내며 주철범을 보았다.

“난 깡패도 아니고, 그런 대접 받는 거 기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오늘 나 때문에 쓴 비용 제대로 청구하고 방값도 똑바로 처리하자.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여길 올 수 있다.”

주철범이 시선을 들었다가 “예, 형님.”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상스레 오광택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자주 생긴다.

한번 얽힌 매듭이 계속 꼬여가는 느낌이었다.

주철범이 전화를 걸어 프런트에 스위트룸을 하나 비워두라고 한 후에 김성길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계약 끝났어. 뭘 더 볼 일이 있어?”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혹시 디아이 인수하신 겁니까? 형님?”

빌어먹을 놈의 형님 소리.

“왜?”

주철범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데?”

“저……, 이하연이 말씀입니다.”

“그년이 뭐?”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서 툭 욕을 뱉었는데 주철범은 오히려 반가운 기색이었다.

“걔가 이곳에 간혹 들릅니다. 아무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별! 다 큰 년이 호텔에 오는 게 강찬이 조심할 일이 뭐가 있겠나.

주철범은 강찬의 표정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게 전부 방송사와 드라마 관계자, 그리고 기업체 간부들 쪽입니다, 형님.”

강찬은 눈만 껌벅였다.

“이하연은 몸 로비를 합니다, 형님. 언제고 형님 뒤통수를 칠 년이니까 항상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쯧.”

강찬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찰칵.

“후우!”

미쉘이 제대로 수렁에 처박은 꼴이다.

도대체 왜 이런 더러운 일을 하자고 한 걸까? 잡지사 편집장이란 년이 이런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샤흐란만 잡으면 돌아보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이 새끼가 왜 이런 소릴 하는 거지?

강찬이 담배를 껐을 때 전화가 울렸다.

[“무슈, 강. 5분이면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현관에 있겠습니다.”

강찬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방 키 가지고 로비 앞에 있어라.”

“예, 형님.”

둘이 로비로 나와 주철범은 카운터로, 강찬은 현관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니 검은색 승용차, 감청색 벤츠, 그리고 검은색 승합차가 현관으로 들어오고 벤츠에서 라노크가 내렸다.

앞뒤 차에서 요원 10여 명이 우르르 나와 라노크를 둘러쌌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이해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과하다. 특히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면 말이다.

“무슈, 강.”

“들어가시죠.”

라노크와 악수를 나눈 강찬은 호텔로 들어갔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주철범이 놀란 얼굴로 달려와 키를 건네주었다.

2101호.

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숫자와 분위기에 눌려 다른 손님들은 함께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서자 라노크와 강찬, 그리고 요원 다섯이 타고 바로 문을 닫았다.

그 뒤로 객실에 들어가도록 아무런 일은 없었다.

방을 살핀 요원들이 커피 포트를 꺼내 차를 준비하는 동안 강찬과 라노크는 거실 소파에 마주앉아 담배와 시가를 피웠다. 요원들은 기특하게 강찬이 피울 담배까지 준비해왔다.

“무슈, 강. 북한 쪽 공작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강찬은 잠자코 라노크를 지켜만 보았다.

“중국 쪽의 요청이거나 공동 작업 같은데 아직 정확한 숫자나 명단이 파악된 것은 없습니다.”

“대사님.”

라노크가 시가 연기를 옆으로 뿜어내며 강찬을 보았다.

“샤흐란 말로는 대사님의 일로 유럽판도가 바뀔 거라는데 저는 그런 것 관심 없습니다. 오늘 되먹지 않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인수한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 이제 중국에 북한까지 나선다면 이건 제 일이 아닙니다.”

라노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강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샤흐란과의 싸움에 너무 많은 것이 끼어들었습니다. 배후가 있다면 알고 싶었지만, 첩보전 따위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식? 송금? 전 그런 것도 필요없구요. 뭔가를 감추고 저를 대하시는 거라면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이해합니다, 강찬 씨.”

라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정보국에서도 대선에나 관련 있을 줄 알았지, 뒤에 이렇게 커다란 덩어리가 매달린 줄 몰랐으니까요. 솔직히 저 역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이 정도 요원에 정보총국이 움직이면 대사님이 원하는 것은 충분히 이루시리라 봅니다.”

“불행하게 중국까지 끼어들면서 정보국의 움직임에 많은 제약이 걸렸어요, 강찬 씨.”

“저를 바라보는 눈들이 있었다면 제가 회사를 인수한 것도 저들이 모두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도움되겠습니까?”

강찬은 말이 나온 김에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인수한 회사는 미쉘에게 완전히 맡기고, 샤흐란의 일을 제외한 첩보전 따위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라노크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강찬을 보았다.

“두 가지만 도와주는 걸로 하지요. 첫째는 인수한 회사에서 드라마 제작 발표를 최대한 서둘러 해주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최대한이라면 어느 정도의 시간입니까?”

“내일이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라노크 돈으로 인수한 회사다.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만이다.

“샤흐란에게 제 동선을 전하고 그가 제시한 200억을 받으세요.”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돈의 흐름과 제 동선에 따라 움직이는 것들을 한 번에 소탕해볼 생각입니다. 이 두 가지만 도와주시면 저도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라노크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강찬을 향해 미소 지었다.

“공트 본사에서 한국 주문 차량을 우선 배정해 주었으면 싶고, 샤흐란을 잡는 일에는 저도 개인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라노크가 세련된 투로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는 바로 끝났다.

“내일부터 생산에 들어갈 것이고, 곧바로 선적한답니다. 앞으로 한국 발주는 10대 단위로 우선권을 보장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대사님.”

“강찬 씨에 대한 내 성의지요.”

일과 관련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라노크는 내부 배신자에 대한 판단이 설 때까지 호텔에 있을 눈치였다.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강찬은 미쉘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중으로 드라마 제작을 발표하라고 전했다.

[“차니! 그건 불가능해. 아무리 우리가 제작한다고 해도 이하연과 상의도 해야 하고.”]

“그냥 은소연으로 해. 책임은 내가 져.”

[“대본, 감독, 아무것도 없이 덜렁 은소연 주연의 드라마 제작이라고 하면 모두 비웃을 거야.”]

“미쉘. 할 거야, 말 거야?”

강찬의 말에 미쉘은 당황한 느낌이었다.

[“오케이, 차니. 일단 은소연과 이야기 나누고 내일 발표하도록 할게. 하지만 크게 보도되진 않아. 은소연을 띄워주기 위한 거짓 발표라고 생각하기 쉬워.”]

“알았다.”

전화를 끊은 강찬이 내용을 설명하자 라노크가 알았다는 답을 했다.

“강찬 씨는 드라마 관련 일이 싫은 모양이지요?”

“전 원래 TV도 제대로 안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우리 저녁이나 함께할까요?”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를 지겹게 길게 한다.

라노크가 움직이지 못하는 눈치여서 강찬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주로 운동과 취미 생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받을 때 라노크가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딸 아이 하나가 제 삶의 가장 큰 위안이지요.”

애가 없는 강찬은 대꾸하기 어려운 대화였다.

“강찬 씨.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어울리지 않게 왜 저런 소리를 하지?

그러면서도 느닷없이 김미영이 떠올라서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8시가 되었고, 마침내 라노크의 전화가 울렸다.

“잘됐군.”

듣고만 있던 라노크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들어가도 됩니다. 원하는 바를 얻은 모양이네요.”

다 같이 객실을 나와 로비에서 헤어졌다.

강찬은 얼른 호텔을 나가고 싶어서 카운터로 갔다.

“계산은 저분들이 이미 하셨습니다, 형님.”

“알았다. 오늘 수고 많았다.”

강찬은 주철범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

“아들 왔어? 저녁은?”

“먹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그래? 그럼 우리 수박 먹을까?”

삶이 좀 이래야 하지 않을까?

간단하게 씻은 뒤에 과일을 먹고 있자니 강대경이 들어왔다.

“오셨어요?”

“어. 그래.”

그는 강찬과 유혜숙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수박이 놓인 식탁에 앉았다.

“오늘 공트 본사에 연락이 왔었다. 너와 관련해서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바로 선적하겠다던데 이게 무슨 일이냐?”

“아! 쉬프요.”

유혜숙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 스미든 지사장과 통화해서 본사에 연락해 달라고 했더니 들어줬나 봐요. 그때 도움 주셨던 분께도 따로 부탁했었구요.”

“사업은 네가 해야겠다. 직원들이 얼이 빠졌어. 쉬프 전체로 보면 너무 까다로운 주문이라 최소 2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내일부터 신규주문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영업부는 오늘 회식도 가졌다.”

“여보? 그러니까 찬이가 차를 빨리 들어오게 했다는 거야?”

“그렇지.”

강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장 200대 정도는 더 팔 수 있을 것 같아.”

유혜숙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강대경이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원하려는 보육원 다섯 곳을 일 년 정도 더 도울 수 있는 수익 정도 될걸?”

“200대가?”

“그래!”

유혜숙이 손뼉을 마주치며 기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아들이 힘을 써줘서 더 많은 곳을 도울 수 있는 거잖아! 아들, 정말 고마워.”

세상에 그 어떤 칭찬도 지금 유혜숙이 안고 등을 도닥여주는 것만큼 큰 것은 없을 거다.

“당신은 얼른 씻어.”

“이제 기쁜 소식 다 들었다 이거지? 알았다.”

“저이가!”

강대경이 일어서는 것을 보며 강찬도 일어났다.

“왜?”

“들어가서 아버지 챙겨드리세요. 고생하고 오셨는데 서운하시겠어요.”

강찬은 기분 좋게 웃어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 강대경과 유혜숙을 보고 나자 낮에 더러워졌던 몸이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

10㎞를 달리고 학교에 조금 일찍 나간 강찬은 석강호와 봉지 커피를 마시며 어제 있었던 일을 쭉 전했다.

“다 모르겠고, 그 싸가지 년 뺨따귀는 한 대 치고 싶소.”

강찬이 풀썩 웃자 석강호가 입맛을 다셨다.

“TV에서 착한 척 한 거에 홀랑 속은 거 아니요? 난 그년이 정말 검소하고 얌전한 년인 줄 알았소.”

“너 그런 것도 보냐?”

“마누라랑 딸년이 같이 보자고 하면 피하기 어렵수. 그런 게 다 가족의 화목을 위한다는데 어쩌겠소?”

둘이 잡담을 지껄이고 있는데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이제 슬슬 몸 좀 풀어볼까?”

“며칠 쉬시지 그러쇼?”

“내 회복력 몰라? 오늘은 각오해라.”

석강호가 히죽 웃으며 스탠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정문 앞에 승용차와 승합차가 서더니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저 새끼들은 뭐지? 어? 김태진 사장 아뇨?”

아차! 깜박 잊었다.

강찬은 어제 통화 내용을 설명하며 들어온 이들을 살폈다.

가장 앞에 오는 사람은 김태진이었다.

“직접 오셨네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있나?”

김태진은 석강호와 악수를 나눈 후에 함께 온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사들 해라. 여기는 오늘부터 교관을 맡아줄 강찬 씨. 그리고 같이 교관을 할 석강호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말끝에 형님만 달았다면 영락없이 깡패들 자세였다.

“뭐부터 하나?”

“우선 좀 달릴까요?”

“그것도 좋지. 옷은 어디서 갈아입고?”

“운동부실이 따로 있습니다.”

강찬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김태진은 내부 시설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과 단체로 인사를 나눴고,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같이 달리기로 했다.

여학생들이 먼저 옷을 갈아입고 다음으로 남학생들과 직원들이 함께 운동복을 입었다.

김태진도 운동복 차림으로 나왔다.

“자! 시작해 보자고!”

직원이 6명이나 돼서 3명씩 두 줄로 섰고 그 뒤로 학생들과 김태진, 석강호가 섰다.

강찬은 약간 느릿하게 달렸다.

아침에 이미 10㎞를 달린 터라 기운을 많이 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어 바퀴를 달렸을 때였다.

얼핏 시선을 돌렸는데 직원들의 표정에 묘한 웃음이 담긴 것을 보았다.

하기야 김태진이 자신 있게 말해서 따라왔더니 고등학생 남자애와 체육선생이 교관이라고 하고, 함께 운동한다는 아이들의 자세가 어쭙잖아 보이기도 했겠다.

‘그래?’

이런 태도로는 좋은 훈련을 하기 어렵다.

강찬은 직원들의 기를 꺾어놓기로 했다.

운동장 한 바퀴는 대략 400m쯤 된다.

강찬은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래 봐야 아직 새벽 운동 속도에는 못 미치는 빠르기였다.

10바퀴쯤 돌자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아이들 절반이 떨어져 나가 스탠드에서 헐떡거렸다.

강찬은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16바퀴를 돌자 아이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는데 이때는 새벽 달리기와 거의 유사한 속도였다.

“헉헉. 헉헉.”

이미 오전에 뛰지 않았냐고 몸이 거칠게 반항했다.

‘신병이 왔잖아!’

직원 여섯이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면 자존심 대결이다.

‘오냐, 누가 이기나 보자.’

강찬도 이를 악물고 속도를 좀 더 높였다.

가장 뒤에서 석강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양보하면 안 된다.

‘신병에게 기죽지 마라.’

아프리카에 있는 것처럼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이다.

“헉헉헉헉!”

직원들의 숨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젠 몇 바퀴를 뛰었는지 잊어버렸다.

강찬은 다시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통쾌했다.

고통이 꼭 쥐고 놓지 않던 한계가 불쑥 치솟는 느낌이었다.

털썩!

직원 하나가 바닥에 엎어지자 연달아 셋이 주저앉았다.

두 바퀴를 더 돌자 남은 것은 강찬과 석강호, 김태진밖에 없었다.

“살려주라!”

김태진의 거친 외침이 없었다면 강찬은 아마 쓰러질 때까지 달렸을 거다.

“하악! 하악!”

스탠드 앞에서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토해낼 때 김태진과 석강호는 스탠드에 아예 널브러졌다.

아이들이 눈치껏 주전자에 물을 담아 부어주었는데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5분쯤 지나서 김태진과 석강호가 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그랬지?”

“격투술은 더 힘들 텐데요.”

김태진의 원망 섞인 질문을 강찬은 히죽 웃으며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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