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44화 (44/520)

0044 / 0419 ----------------------------------------------

3-3. 가슴이 시키는 일.

남아 있겠다는 김태진을 억지로 보내놓자 전화가 울렸다.

미쉘이었다.

[“인수하기로 했어. 언제로 할까?”]

“편한 때 해. 돈을 내가 송금해 줄 테니까.”

[“그건 아냐. 차니가 있어서 확인하는 게 좋아.”]

“꼭 그래야 해?”

[“그럼 다음 기회로 미뤄둘게. 인수 끝나면 직원들하고 인사는 해야지.”]

“알았다. 그럼 다음 주에 약속을 잡아.”

전화를 끊자 한숨이 푹 나왔다.

하기야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데다, 꽤 거금이 들어가는 일이라 걱정스럽기도 하겠다.

‘배가 고픈데?’

그건 그거고 배가 고픈 건 고픈 거다.

목에 깁스를 했던 석강호가 김밥을 꾸역꾸역 삼킨 것이 이해가 갔다.

강찬이 화장실에 들를 겸 몸을 틀었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석강호가 들어섰다.

“뭐야? 집에 들른다고 안 했어?”

“들렀다 온 거요.”

시계를 보니 얼추 11시가 다 되었다.

“그건 뭐냐?”

“푸흐흐. 보쌈이오. 내가 지난번에 제일 먹고 싶었던 게 이거였거든요.”

“잘했다!”

비닐봉지를 들어 보인 석강호가 냉큼 강찬을 부축했다.

“상처가 살벌하던데 움직여도 되겠수?”

“특수 체질이잖냐.”

석강호가 링거 팩을 옮겨다 준 덕분에 화장실을 쉽게 사용했다.

둘이 탁자를 가져다 놓고 보쌈을 거의 다 먹었다.

살 것 같았다.

“참! 집에다는 뭐라고 했냐?”

“사실 할 말이 없습디다.”

비닐봉지에 음식 쓰레기를 담은 석강호가 커피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서 오광택이 팔았지요. 교통사고 나서 합의금을 받았는데 중국 쪽에서 우리가 마약을 받은 줄 알았던 모양이라고. 말 안 나오는 조건으로 합의금도 따로 받았는데, 만약 밖으로 알려지면 그땐 납치고 뭐고 진짜 죽는다. 뭐 이렇게 둘러댔수.”

“그걸 믿어?”

“처음에 집 사라고 5억 줬고, 내일 5억 더 받기로 했다니까 고개를 끄덕입디다. 선생이 어디 가서 그 큰돈을 구하겠냐 싶은 모양이던데요.”

석강호가 커피를 건네주었다.

“딸 애랑 눈이 마주쳤소?”

뭔 소리지?

“눈 마주치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던데, 내가 보니까 걔 눈에 하트가 콱 박혔습디다. 아직 중학생이우.”

“야! 아우, 크흑. 큭.”

강찬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옆구리를 잡았다.

“완전히 백마 탄 왕자님으로 생각합디다. 멋지게 뒤를 돌아보면서 석강호 선생님이 보내서 왔어요! 했담서요. 마누라가 어떻게 됐냐고, 병원에라도 가봐야 한다는 걸 나중에 밥 먹으면서 인사하기로 했소. 알아서 하시오.”

“답답하다.”

“한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건 그렇고.”

강찬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김태진에게서 들었던 모가지 귀신 이야기와 샤흐란의 전화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호오.”

석강호가 눈을 번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방학 동안 너도 몸 좀 만들어. 그리고 여차하면 김태진 회사 교관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선생은 두 가지 직업을 못 갖는다니까 그러쇼.”

“그게 지랄이네. 차라리 교관하면서 공트 자동차 임원하면 적성에도 맞고 시간도 마음 놓고 쓸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은데.”

“방학이 없잖소.”

“그런가?”

하기야 여름과 겨울 방학을 주는 직장은 아직 모르겠다.

“샤흐란, 이 새끼가 사흘 뒤에 전화를 한다고 했으면 무언가 생각이 있단 소리 아니요?”

“나도 그걸 계속 생각 중이었다. 뒤가 무서운 놈이니까 나름대로 계획을 짰을 거 같고. 이번에 일도 반드시 성공하겠다기보다는 어딘지 우리 쪽에 장난처럼 경고한 느낌도 들고.”

“얼른 털고 일어나요. 그래서 둘이 운동합시다.”

석강호가 분이 안 풀리는 얼굴로 이를 북북 갈아댔다.

“나 담배도 끊었소. 내일부터 이 악물고, 몸 만들어 볼랍니다.”

그거야 개인의 선택이라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밤을 병원에서 꼬박 새웠고, 다시 지리산에 다녀온 피곤이 남았는지 석강호가 건너편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시 후다.

강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심한지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 김태진이 왔는데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점심을 먹은 다음, 석강호는 2학년의 귀가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로 출발했다.

우우웅.

문자가 울려서 확인했더니 [필립 정. 입금]이라는 글씨 뒤에 긴 동그라미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무슈, 강. 라노크요.”]

“대사님.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릴 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우선 제 용건을 말씀드리지요. 강찬 씨 증권 계좌로 공트 자동차의 주식이 입고되었어요. 한국 돈으로 대략 50억 원쯤 됩니다. 공트의 명예를 지켜준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세요.”]

“통장으로도 돈이 입금되었던데요?”

[“회사 인수 자금입니다. 우선 10억을 넣었으니 필요하면 그 정도 한도 내에서 추가지원이 가능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건데요. 이번에 5억으로 드라마 제작과 매니지먼트 회사를 인수합니다. 제게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이번 송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송금된 금액은 인수자금과 운영비로 사용하세요. 회사 인수가 끝나면 한번 뵙기로 하지요.”]

“대사님.”

강찬은 내용을 전하기로 했다.

“샤흐란과 일이 있었습니다. 어제 전화도 받았구요. 사흘 뒤에 다시 전화한다고 했으니 이틀 뒤에 전화가 올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만날 수 있도록 스케쥴을 조정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숙제를 하나쯤 마친 느낌이었다.

일이 너무 커져서 걷잡기 어려운데 반대로 따지면 샤흐란만 잡으면 해결될 문제들이다.

배후세력은 프랑스에서, 이번에 인수한 회사는 미쉘에게, 그리고 강찬은 석강호와 평범한 미래를 설계하면 된다.

얼마나 간단하고 단순한 일인가?

쓸데없는 주식과 돈이 자꾸 들어오는 것이 오히려 찜찜한 판국이다.

드르륵.

강찬이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 서상현이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섰다. 멋쩍어하는 표정이었는데 그렇다고 기가 죽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괜찮소?”

말을 마친 서상현이 멋쩍게 웃었다.

“태진이 형님이 말씀 다 했다고 하셔서 와 봤소. 어지간해서는 말도 안 놓는 양반이 강찬 씨에겐 말을 놓겠다고 한 것도 신기하고.”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굴리자 링거 팩이 앞뒤로 흔들렸다. 그는 강찬의 침대 앞에서 휠체어를 세웠다.

“전에 군대 있을 때 버릇이오. 한번 내 새끼라고 생각하면 양보 못 하는 거. 그래서 그 양반, 그 뒤로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도 어지간하면 반말 안 합니다. 죽은 대원들 편하게 묻을 때까지 아마 못 그럴 거요.”

각진 턱이며, 쭉 째진 눈이 강하게 생겼는데 그날 밤 실력으로 봐서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후-. 나이로 따져서 나보다 위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광택이 형하고 친구 한다니까 무시하지도 못하겠고. 그냥 이렇게 대할 테니 편한 대로 대하쇼.”

서상현이 슬쩍 강찬을 본 다음에 입맛을 다셨다.

“형이란 말은 지내다 보면 할 거요. 됐소?”

“마음대로.”

“에휴! 실력을 못 봤으면 우겨라도 보겠는데 이거야 원, 태진이 형 젊을 때 모습이니.”

말투며 표정에서 김태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모가지 귀신만 잡게 도와주쇼.”

“그건 얘기 끝난 거니까 따로 말하지 않아도 돼.”

서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 얘기 하고 싶었소.”

서상현이 휠체어를 돌려 병실을 나갔다.

쓸데없이 단호한 모습에 고개가 갸웃했는데 다른 생각을 할 이유는 없었다.

***

주말은 더없이 지루하게 지나갔다.

쎄실이 주식 입금에 대해 전화가 있었고, 다음 목요일에 회사 인수계약을 마치고 임직원들과 상견례를 갖기로 했다는 소식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이야기였다.

알아서 하라는데도 미쉘은 변호사까지 선임하고 반드시 강찬이 나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업무에 관한 한 선이 분명한 터라 강찬도 어쩔 수 없었다.

차소연이 수련회를 잘 다녀왔다는 전화, 하루에 한 번씩 유혜숙과 김미영의 전화가 왔던 것 정도가 그나마 다른 일상이었다.

퇴원은 화요일 오전으로 잡았다.

김태진과 서상현이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는데 구렁이 같은 유헌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 직원 다섯이 위민국을 계속 미행 중이고, 계약된 선박도 감시 중이니까 무언가 다른 일이 보이면 바로 연락하마.”

월요일 오후에 병원에 들른 김태진은 날이 지날수록 긴장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좋다.

샤흐란만 잡는다면.

드르륵.

고개를 끄덕일 때 석강호가 들어섰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핼쑥한 얼굴인 건 이해가 가는데 걱정을 잔뜩 담은 것은 의외였다.

“무슨 일 있어?”

김태진과 목례를 나눈 석강호가 그의 침대로 다가왔다.

“혹시 애 팔 부러트린 거 있소?”

강찬은 눈을 껌벅였다.

“어! 트론스퀘어에 갔다가 한 놈 그랬지.”

“그놈 아버지가 고소했나 봅디다. 양팔을 다 부러트렸다고. 일이 커지면 곤란하겠소. 우리 학교 애들이 아니라 말발이 먹힐 것 같지도 않고.”

“쯧!”

강찬은 말이 난 김에 그날 있었던 일을 쭉 설명했다.

일진 연합의 대가리란 놈이 고소할 줄은 몰랐다.

“이걸 어떻게 하지? 이호준이하고 허은실이 증언을 해주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놔둬라. 걔들한테 부탁하게 되면 앞으로 그런 꼴을 계속 봐야 한다.”

“칼을 들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잖겠소?”

“그거야 들어주겠지. 대신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고소하겠다고 대들 거 아냐? 차소연이나 문기진처럼 김치 물고 서 있는 애들은 고소할 방법도 없을 거고. 그러니까 놔둬. 내가 만나서 합의를 보든, 아예 더 두들겨 버리든 할 테니까.”

강찬은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 말한 거, 전부 사실이지?”

그런데 김태진이 불쑥 이야기 중에 끼어들었다.

강찬은 순간 불쾌한 눈빛이 나왔다.

뭐 아쉬운 게 있어서 석강호에게 비겁한 거짓말을 하겠나.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마. 대신 그 말대로라면 충분히 정당방위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내가 전화 한 통 해보고 얘기하자.”

김태진은 전화기를 들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걔 아버지가 깡패라고 들었는데 고소한 걸 보면 어지간히 억울했던 모양이오.”

“이호준하고 허은실이니까 그 정도에서 넘어갔지, 만약 거기에 차소연하고 문기진이 그렇게 맞고 있었으면…….”

“끔찍하우.”

석강호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버럭 썼다.

“오늘 오전부터 애들 나와서 운동해요. 기구하고 달리기하고. 애들이라 확실히 빠릅디다.”

학교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석강호가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을 두어 가지 했을 때 김태진이 들어섰다.

“경찰서에 재수사 지시할 거니까, 한번 지켜보자. 우리 쪽에서 부탁하는 게 아니라, 경찰에서 이호준과 허은실이란 애 불러서 협박받았는지 맞았는지 조사한다니까 결과 나오는 대로 대응하는 게 좋겠다.”

“고맙습니다.”

좀 전에 인상 쓴 것이 미안해지는 조치였다.

***

화요일 아침에 병원비를 지불하려고 보니 김태진이 이미 계산을 마친 다음이었다.

“VIP도 좋지만, 좀 쉬었다가 옵시다. 다음 주에 5일간 휴가 갈 거니까, 그땐 나도 없어요.”

유헌우가 병실까지 찾아와 강찬의 퇴원을 반겼다.

“근육을 무리하게 쓰지 말고, 조금이라도 곪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연락해야 합니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부러운 눈빛의 서상현을 두고 석강호와 강찬은 병원을 나왔다.

“옷 사서 입고, 점심 먹고 들어갑시다.”

무엇보다 옷은 필요했다.

깨끗하게 세차 된 쉬프를 타고 근처의 백화점에서 옷을 샀고,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살 것 같았다.

강찬은 간간이 미쉘이 인수할 회사와 라노크가 입금해 준 돈에 대해 설명했는데 석강호는 그저 듣기만 했다.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김미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 언제 와?”]

“지금 학교에 가는 길이야.”

[“정말? 그럼 나도 학교로 갈게.”]

목소리와 분위기는 정말 다른데 유혜숙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어디야?”

[“논현동 사거리.”]

“거기 있어. 내가 그리 갈게.”

[“응! 버스정류장이야.”]

바로 가는 길이다.

석강호에게 이야기해서 버스정류장에 차를 세웠다.

빵빵.

다른 사람은 다 쳐다보는데 김미영은 슬쩍 시선만 주었다. 강찬이 창문을 내리고 부르고서야 김미영이 달려왔다.

“선생님 차예요?”

“그렇지.”

얼떨떨하게 석강호가 답을 하자, “차 정말 좋아요!”, “선생님 부자였네요.” 하는 감탄이 있었다.

석강호가 룸미러로 힐끔거릴 정도로 김미영은 강찬에게 푹 빠진 눈빛이었다.

“선생님. 우리 트론스퀘어 가서 팥빙수 먹고 가요.”

마침 신호대기 중이라 강찬과 석강호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정말 맛있는 팥빙수 있어요.”

하필이면 트론스퀘어?

“집에 가야 하잖아.”

“오늘 엄마가 부부동반 모임에 가셔서 저녁 먹고 가도 돼.”

석강호가 강찬을 힐끔 보았다.

“그러지 말고 둘이 먹고 들어가.”

김미명의 눈빛이 간절해서 나온 권유일 거다. 언젠가 거실에서 외롭게 있던 유혜숙처럼 보였다.

“차도 쓰고.”

석강호가 거듭 눈치를 주었다.

집에서 기다릴 유혜숙이 걸리긴 했지만, 강찬도 잠시 짬을 내기로 했다.

학교 앞의 도로에서 석강호가 내렸다.

“선생님? 왜요?”

김미영이 당황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을 때 석강호는 학교를 향해 있었다.

“타.”

“어쩌려고?”

김미영의 눈이 정말 컸다.

“면허 있어. 괜찮아.”

강찬이 운전석에 오르자 김미영이 조수석에 들어왔다.

워낙 놀란 얼굴이라 강찬은 풀썩 웃고 말았다.

“안전벨트 매고.”

“정말 면허 있어? 우리도 딸 수 있는 거야?”

“그렇다니까. 선생님이 면허도 없는데 차를 주겠어?”

석강호의 이야기가 나오자 김미영도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차가 출발하고, 자동차 전용도로에 나오자 김미영의 표정이 완벽하게 바뀌었다.

행복한 얼굴.

“너무 좋다.”

강찬도 좋았다.

솔직히 김미영이 고등학생이 아니었으면 싶었다.

세상을 모르는 어린애, 그것도 또래보다 엄청나게 유치한 아이의 감정에 휘말려 죄를 짓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이란 단어가 절대로 벗겨선 안 되는 갑옷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공부를 잘하는 아이니까 좋은 대학에 가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도 있다.

“나 바보 같지?”

그때 김미영이 툭 던진 말이 강찬의 생각을 깨웠다.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처음에 얘기한 거 생각해보니까 정말 멍청했던 거 같구. 지금도 자꾸 귀찮게 하는 거 같구.”

강찬이 풀썩 웃자 김미영이 따라 웃었다.

그런데 슬쩍 눈길을 주었을 때 김미영은 아프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공부하다가도 생각나. 그리고 밤에 울면서 잘 때도 있어. 표시 안 내려고 애쓰는 게 정말 힘들어.”

덤덤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라 그런지 더 쉽게 다가왔다.

불쑥 성장해버린 느낌이었다.

그사이 미사리의 카페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강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자 김미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 좋다!”

앞에 ‘아들’이란 말만 있으면 영락없이 유혜숙이 한 말처럼 들렸다.

직원이 와서 커피와 쥬스를 주문한 다음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고집부리고 엉뚱한 소리 해서 들어준 거라는 거 알았어. 그래도 난 안 바뀔 거야. 나중에 내가 정말 좋아지게 할 거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줘.”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불쑥 큰 거지?

강찬이 빙그레 웃는 것을 본 김미영이 쑥스러운지 어깨를 들어 올렸다.

“흐흐흐.”

예쁘다.

크고 맑은 눈, 하얀 얼굴, 그리고 해맑은 웃음까지.

여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아이가 불쑥 커서 나타난 느낌이었다.

놀이공원에서 욕심이 나서 그랬던 건가?

그때 안았을 때 가슴이 설레서?

“프랑스로 유학 가?”

이건 뭔 소리지?“

“아파트에 소문이 쫙 놨어. 프랑스 전액 국비 장학생으로 추천받았다고. 우리 엄마도 처음에 안 믿었는데 다른 학교에서 말이 돌았대. 직접 그 자리에서 들었던 엄마가 그쪽 학교 엄마들에게 다 말했대. 대치동 학원에선 강찬이란 이름 유명해.”

김성희?

엄마들은 그런 얘기도 돌고 돌아서 서로 알게 되는 건가?

“프랑스어 굉장하다고. 요즘 프랑스어 인터넷 강의 듣는 게 유행이야. 쉽게 배울 수 있는 말인데 왜 못하냐고 혼나는 애들도 무지 많아.”

풀썩 웃음이 나왔다.

“나두 프랑스로 유학 갈 거야.”

“어? 나는 안 갈지 모르는데?”

김미영이 멍한 얼굴을 했다가 장난치지 말라는 투로 눈을 흘겼다.

‘왜 이러지?’

강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몸이 어려서 생각도 따라가나?’

김미영이 웃는 모습이 가슴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