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 / 0419 ----------------------------------------------
2-9. 끝까지 교훈을 주는구나.
문자를 확인한 석강호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도 참 대단하네.”
그리고는 강찬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넌 죽는다.]
도대체 누구지?
있는 곳만 안다면, 심지어 그곳이 아프리카라도 달려가서 때려잡을 것만 같았다.
“갑시다. 가서 밥 먹고 기운 내서 이놈 잡읍시다.”
“그러자.”
아무래도 주차장 파와 관련된 놈이지 싶었다.
샤흐란의 배후라면 누구보다 먼저 문자를 보냈어야 할 스미든을 빼놓을 리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경호업체에서 지켜주는 동안 놈들을 찾아내 마무리를 제대로 해주면 되는 일이다.
“수업 끝나고 뭐 할거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늘은 일찍 가야 돼.”
“잘됐소. 나도 수련회 때문에 회의가 있수. 내일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알았다.”
다예루는 점점 석강호가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선생으로, 연장자로 대접해야 하는 건가?
강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들뜬 모습이었다.
방학에, 수련회까지 겹친 2학년들이 특히 그랬다.
김미영이 행복한 얼굴로 차소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옆에서 강찬은 식사를 마쳤다.
***
수업이 끝난 강찬은 김미영과 함께 집에 도착해서 옷만 갈아입고 근처의 커피 전문점으로 나갔다.
“대표 김태진입니다. 강찬 씨가 고등학생인 줄은 몰랐네요.”
명함을 건넨 김태진은 실제로도 놀랐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는데 날카로운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문자 말고 다른 정황이 있나요?”
“아직은 그 정도밖에 없어요.”
“위협 문자만으로 이 정도 비용을 내기는 어렵지요. 경호 대상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짐작 가는 점이 있으면 말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깡패 조직인가 싶기도 한데 그것도 분명치 않구요.”
“대한민국에 있는 거의 모든 조폭과 연결됩니다. 이름만 안다면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일 수도 있을 겁니다. 최고의 경호란 위험요소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죠.”
“일단 경호만 해 주세요. 그걸로 됐습니다.”
강찬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서상현 이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강찬 학생이 뭘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조폭들도 우리 대표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 그리고 위험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데 뭐하러 헛수고를 합니까?”
강찬이 서상현을 날카롭게 보았다.
고등학생이란 이유로, 그리고 깡패 좀 안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사람이 과연 경호를 제대로 할까?
서상현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라릴 때였다.
“서 이사.”
그러나 그는 김태진이 짧게 고개를 흔들자 입을 다물었다.
“도와주시려면 문자 보낸 놈이 누군지나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석강호 선생이 다음 주에 지리산으로 3박 4일 수련회를 떠납니다. 그때도 눈치채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강찬은 계약서에 서명하고 입금증을 받았다.
이걸로 계약절차가 끝났다.
“되신 거죠?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최선을 다하겠소.”
강찬은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곧바로 커피 전문점을 나섰다.
“어린 애가 돈 좀 있다고 건방지네요.”
서상현이 김태진의 눈치를 살피며 건넨 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싸가지가 없다.’라고 할 참이었는데 김태진의 눈치를 살펴서 조심한 거였다.
“강유모터스 아들이라고 했었지?”
“예.”
“너 경호실 8년 근무했었나?”
“정확하게 8년 3개월입니다.”
김태진이 서상현을 아쉽다는 투로 보았다.
“그런데도 저 학생 눈빛을 보고 느껴지는 게 없든?”
“예?”
김태진은 강찬이 나간 출입구 쪽을 노려보았다.
“살면서 저런 눈을 또 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해진 건가?”
“어떤데 그러세요?”
“모가지 귀신을 본 줄 알았다.”
“예에?”
큰 소리를 냈던 서상현이 얼른 주위를 살폈다.
“강유모터스 대표는 확인했다고 했지?”
“예. 지금도 애들이 붙어 있는데 특이사항은 없는데요?”
“분명 사람을 죽여본 눈빛인데. 그것도 아주 많이.”
“그 정돈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
김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눈빛은 금방 표시가 나지. 그런데 아무 때고 목을 비틀 수 있는 사람이 가진 눈빛은 알아보기가 힘들어. 그러니 둘이 붙으면 잴 것도 없이 승부가 나는 거다. 내가 보기에 너랑 저 학생이랑 붙으면 무조건 네가 죽는다.”
“에이. 너무 과민하신 거 아닙니까?”
김태진이 쓰게 웃었다.
“모가지 귀신하고 붙었을 때 내가 그랬었다. 그런데 가슴을 찔리고 알겠더라.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넌 아직 모르는 거다.”
김태진이 진심인 것을 안 서상현이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도 비무장 지대에서 김태진만큼 적을 많이 죽이고 돌아온 아군은 없다. 시국이 변하는 터라, 앞으로 이런 인물이 나오기도 힘들다.
“집중해. 이 사건 아무래도 냄새가 나. 애들 두 명씩 더 배치하고.”
“그 정돕니까?”
김태진이 날카로운 시선을 돌리자 서상현이 얼른 “알겠습니다.”하고 답을 했다.
“저런 놈이 눈 돌아가면 너는 말할 것도 없고, 경호 업무에 실패한 놈들은 죄 모가지를 잃을 수도 있어.”
요즘 세상에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 서상현의 생각을 읽었는지 김태진이 고개를 저었다.
“뒤를 계산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마 죽여놓고 혀를 차면 찼지, 그딴 거 고민하지 않을 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태진이 입술을 오므리며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저 학생에게서 누굴 경호하라는 거였으면 난 절대 일 안 맡았다. 차라리 위약금 두 배로 물어주는 게 나아.”
“당장 애들부터 늘리겠습니다.”
“저 학생 주변 싹 훑어봐. 필요하면 내가 정보원하고 경찰청에 따로 전화해 놓으마.”
서상현은 의심을 버렸다.
그가 아는 김태진은 이런 일에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
강찬이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울려서 확인해 보니 오광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차장 파 때문에 찜찜하던 참이다.
“여보세요?”
[“강찬. 별일 없지?”]
“왜? 무슨 일이야?”
단박에 알 정도로 오광택의 음성은 좋지 않았다.
[“남산 호텔 도석이 알지? 걔가 당했다. 지금 병원에 있는데 상태가 안 좋아. 그러니 당분간 몸조심 좀 해라.”]
결국, 주차장 파였나?
서도석에겐 미안했지만 묘하게 안심도 됐다.
[“우리 일이 원래 이렇긴 한데 이번은 아무래도 이상해. 애를 아주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강도를 당했나 싶기도 하고.”]
“도석이가 타겟이 될 이유가 있냐?”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업장을 덮치면 덮쳤지, 영업직원을 따로 칼질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강도치곤 솜씨가 너무 깔끔해. 그러니까 일단 몸조심하고 있어봐. 그리고 여차하면 애들 보낸다. 그건 태클 걸지 말고 모른 척해.”]
말을 해야 하나? 하지 말까?
강찬은 잠시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다.
“이쪽도 협박 문자가 왔었다.”
[“뭐? 그건 또 뭔 소리야?”]
“석강호 선생 포함해서, 내 주변 몇 사람에게 죽는다라는 문자가 왔었어. 내가 호텔에서 잃어버린 전화기를 주운 놈이 있나 본데 도석이 얘기를 듣고보니 대충 연결되는 것 같다.”
어차피 시작한 이야기여서 강찬은 경찰서에 신고하기까지의 과정과 오늘도 문자가 왔었음을 모두 알려주었다.
[“주차장 새끼들이네. 이 씨발 놈들이! 알았다. 아무튼, 몸조심하고 있어라.”]
“알았다.”
군더더기 없이 전화를 끊었다.
솔직하게 적이 누군지 알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그리고 김태진 정도의 눈빛이라면 주차장 파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깡패 새끼들 뒤지러 다니기도 그렇고.’
강찬은 입맛을 다셨다.
막상 범인이 주차장 파라고 생각하자 오광택의 도움 없이는 놈들을 찾아다니기 뭐했다.
‘병신 새끼들.’
그러고 보니 정작 강찬에게는 문자가 없다.
서운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화는 났다.
***
새벽 운동에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강찬도 내심 놀랄 정도였다.
“헉헉.”
아파트로 돌아온 강찬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 몸뚱이로 육상 선수를 했으면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회복 능력이 뛰어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전에도 이랬다면 결국 2㎞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서 능력을 알아차리지 못한 걸 거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간 강찬은 석강호와 함께 외출해서 필기시험과 장내, 장외 주행을 모두 통과했다.
“오!”
“그 표정은 뭐냐?”
합격증을 받아들고 나왔을 때 석강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젠 제법 목이 돌아갔는데 그래서인지 깁스의 위쪽 천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교육은 언제요?”
“내일 받으란다.”
“그럼 내일 면허증이 나오는 거요? 푸흐흐.”
석강호의 야릇한 웃음에 눈을 흘겨주고 둘이 학교로 돌아왔다.
아직 수업이 한 시간쯤 남아서 새로운 기구로 운동을 했다.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이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반항을 해댔으나 말을 들어줄 강찬은 아니었다.
모처럼 마음껏 운동하고 숙직실에서 씻고 나자 몸과 마음이 한결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석강호가 수련회 준비로 바빠서 김미영과 둘이 집에 왔고 유혜숙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으나 가능한 표시 내지 않으려 애썼다. 차라리 함께 무기를 닦고 있는 거라면, 제 목숨은 각자 알아서 챙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좋았겠지만, 전쟁터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유혜숙과 아프리카에 함께 있는 거라면? 밤마다 다음 날 맞을 적의 목을 자르러 돌아다녔을 게 분명했다.
강찬은 거실에 있을 때도 전화기를 항상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
다음날, 석강호와 둘이 가서 2시간짜리 안전 교육을 받았다. 면허를 딴 놈에게 헛짓거리 말고 운전 잘하란 소릴 하는 교육이라니.
어쨌든 교육을 마쳤다.
“뜨근뜨근하겠소.” 라는 석강호의 농담을 들으며 함께 면허시험장을 나왔다. 그런데 석강호는 학교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공영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긴 왜?”
“내려보쇼.”
담배라도 피우고 갈 참인가?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석강호가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하나 건네주었다.
“선물이요.”
작은 군용 단도가 달린 고리에 검은색 명함을 달아놓은 모양이었다.
“뭐야?”
“아, 거 좀! 한번 눌러봐요.”
강찬이 들여다보니 자물쇠가 열린 모양, 닫힌 모양, 그리고 트렁크가 열려있는 차의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강찬이 열쇠고리에서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쉬프요. 거, 오늘 맞춰서 꺼내느라고 애 좀 썼소.”
강찬은 순간 말문이 탁 막혔다.
“푸흐흐. 그 표정은 또 뭐요? 혹시 태어나서 선물 처음 받아봤다, 뭐 그런 거요?”
이 새끼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물론 오광택이 사준 전화기가 있지만,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거 참! 문 한번 열어보라니까요!”
강찬은 일단 버튼을 눌렀다.
바로 앞쪽에 있던 감색 승용차가 ‘삑삑’ 소리를 내며 비상등을 깜박였다.
“풀옵션이요. 보험도 깔끔하게 넣어놨고. 대한민국에서 풀옵션으론 두 번째 고객이랍디다. 마음에 드쇼?”
“야. 너도 저런 차 타면서. 저거 비쌀 거 아냐?”
“어허! 선물이요, 선물! 그동안 내 돈이 아닌 것 같아서 한 푼도 못 썼는데 이제야 마누라한테도 돈 좀 줄 수 있을 것 같소.”
강찬은 석강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색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저거 내 이름으로 했냐?”
“그게 그렇게 하면 아버님이 바로 아실 거 같아서 일단 내 이름으로 해 놨소.”
고마웠다.
가격을 떠나서 그런 곳까지 배려한 석강호의 마음이.
“다예.”
석강호가 슬쩍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 선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엄청 좋다.”
강찬이 씨익 웃자 석강호도 만족한 듯 웃었다.
“고맙다.”
“푸흐흐. 그런 소리 안 어울리는 거 아쇼?”
강찬이 입맛을 다시자 석강호가 담배를 하나 꺼내주었다.
“대장 없었으면 미쳐버렸을지 몰라요. 생각도 못 했던 복수 마쳤고, 큰돈도 생겼고. 내가 더 고맙수.”
이런 대화는 어딘지 낯 간지럽다.
담배를 끈 강찬은 차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는 도중에 주차장 바깥의 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경호를 하는 것이거나, 깡패일 텐데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야. 이거 여기 세워두지 말고 당분간 네가 끌고 다녀.”
조수석에 올라앉은 석강호가 서운한 표정으로 강찬을 보았다.
“내가 이걸 끌고 가서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마다 내가 빌리는 걸로 하자. 어차피 둘이 다닐 텐데 매번 여길 들르는 것도 그렇고.”
석강호가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학교 선생이 똥차를 사줬대도 이상할 판에 쉬프 최고급형을 사줬다는 말을 어디 가서 하겠나.
“일단 그렇게 해.”
“쩝.”
“아직도 안 식구한테 돈 안 줬냐?”
“이상하게 못 쓰겠습디다.”
“기대하고 있을 텐데 병나겠다. 얼른 줘라.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이걸로 돈 얘긴 정말 끝이다.”
“알았소.”
다예루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럼 새 차를 산 기념으로 점심이나 먹으러 가볼까?”
학교에서 갈아입은 면티 차림이라 운전을 한대도 그리 눈여겨볼 사람은 없다.
강찬은 어색하게 스타트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다.
그런데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거는 게 더 확실하고 안전하지 않을까?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어허! 거 좀!”
강찬이 큰 도로로 진입할 때 석강호가 터트린 불평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장을 누빌 때처럼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 저 개새끼.”
“푸흐흐. 나도 처음에 그랬소. 운전대 잡을 때마다 전쟁터 나가는 기분입디다. 참으쇼.”
둘이 그렇게 나가서 중국집에 갔다.
쉬프를 멋지게 주차한 다음 자장면 두 개를 시키자 주인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하는 동안 오광택과의 통화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는데 석강호 역시 강찬과 같은 생각을 했다.
***
토요일부터 석강호에게 협박 문자가 없었다.
슬쩍 유혜숙과 김미영에게 물어봤는데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오광택이 나섰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일요일 오전까지도 협박 문자는 없었다.
월요일이 방학이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련회라 석강호는 준비할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토요일에 한계치까지 운동을 한 탓에 일요일은 운동을 걸렀다. 적당한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오전에 유혜숙과 둘이 영화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며 빈둥거린 다음, 점심으로 국수를 삶아 먹었다. 유혜숙은 대학 진학을 궁금해하면서도 강찬이 쉬는 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켰다.
요즘 인터넷 검색에 익숙해져서 개개인이 올린 해외 블러그나 관련 자료를 검색하게 되었다. 이미 샤흐란의 일이 끝났지만, 혹시 그와 관련된 자료가 있을까 싶어서 해외 사이트, 특히나 프랑스어 자료들을 검색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유혜숙이 과일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방을 나간 다음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전화기가 울어서 무심코 들었는데 발신자 번호가 ‘000-0000-0000’이었다.
강찬은 숨을 한번 고른 후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알로.”]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강찬은 당장 대꾸하지 않았다.
[“무슈 강, 라노크요.”]
이건 이상하다.
“강찬입니다. 발신자 번호가 이상해서 대답 못 했습니다. 이 번호가 대사님 번호 맞나요?”
[“이건 정보국 전용 번호라서 특이한 숫자가 뜰 겁니다. 녹취나 도청, 감청이 안 되게 하는 거지요. 아마 강찬 씨가 녹취를 해도 나중에 들어보면 내가 한 말은 잡음만 남을 겁니다.”]
“그렇군요.”
[“무슈 강. 문제가 생겼어요. 만나서 의논하고 싶은데 시간을 내 줄 수 있습니까?”]
라노크의 음성에 기계음이 섞인 것처럼 들렸는데 중요한 건 내용이었다. 강찬은 라노크와 한남동에 있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한남동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무슈 강?”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랑스인 사내가 “따라오시죠.”하고 강찬을 안내했다. 한눈에도 정보국 요원이겠구나 싶은 복장과 행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사내가 카드키를 꽂은 후에 16층을 눌렀다. 그는 1601호에 강찬을 안내한 후에 문을 열어주고는 곧장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거실이 꽤 넓었다.
침실 문이 닫혀 있어서 안에 누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강찬이 들어서자 라노크가 수행원 한 명과 일어서며 그를 맞았다.
“강찬 씨. 전화기 전원을 꺼 주시겠소?”
“그러죠.”
강찬은 아예 배터리를 빼 버렸다. 그러자 수행원이 공항 검색대에서 사용함직한 탐지 봉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협조 부탁하오.”
태연한 라노크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강찬은 일단 하자라는 대로 따랐다.
발끝까지 검색을 마친 수행원이 커피 두 잔을 준비해준 뒤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강찬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강찬 씨. 정보국에서 놀라운 소식이 있었소.”
라노크는 곤란한 얼굴이지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샤흐란이 살아 있다는 정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