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 / 0419 ----------------------------------------------
2-8. 날카롭게.
월요일 새벽 5시.
강찬은 운동복 바지에 편한 면티 차림으로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후우!”
시원하게 숨을 들이켜고 이리저리 몸을 기울여 근육을 천천히 풀었다. 상처가 많이 아물어서 한바탕 달려볼 참이었다.
어느 정도 근육이 풀렸다고 느낀 강찬은 적당한 속도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라이트를 켠 차량이 빠르게 달려가고 부지런한 사람들 몇이 있을 뿐, 도로와 인도는 한가했다.
주차장 파와의 싸움 막바지에 이전의 몸을 느꼈었다. 특히 복도로 나와서 마지막에 칼을 휘둘렀을 때는 완벽하게 아프리카에서의 몸 상태와 같았다.
만약 그때의 느낌이 없었다면 샤흐란을 이기기 어려웠을 거다.
강찬은 두 번씩 숨을 끊어 마셨다.
샤흐란은 경험이 풍부했지만 오랜 지휘관 생활로 날카로움이 줄어 있었다.
강찬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몸에 적응해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과 몸의 날카로움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깡패가 되어 칼을 휘두를 게 아니고, 더 해야 할 복수가 남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날카로움은 유지하고 싶었다.
‘젠장!’
2㎞쯤 달리자 숨이 턱에 찼다.
몸뚱이가 기억하는 한계가 이 정도라는 뜻이다.
그 잘난 일기장에 운동도 빠지지 않고 했다더니 달리기는 고작 2㎞이었던 모양이다.
강찬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이 고통을 이겨내야 몸이 새로운 한계를 받아들인다.
3㎞쯤 달리자 숨이 터졌다.
마치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갈 것처럼 기운이 솟구쳤다.
‘이 새끼는 도대체.’
좋지 않냐고? 모르는 소리다.
벌써 이러면 5㎞쯤에선 더 끔찍한 고통이 달려든다.
강찬은 호흡을 통해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2㎞쯤 더 달렸을 때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강찬을 괴롭혔다.
‘맘대로 해라.’
고통과 타협하면 안 된다.
숨이 너무 일찍 터지면 반드시 고비도 빨리 온다. 한 마디로 몸이 달리기 싫다는 거다. 이런 고통에 양보해 본 적 없다. 마라톤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몸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강찬은 삭막한 프랑스 외곽의 활주로와 붉게 타오르던 아프리카의 저녁놀을 떠올렸다.
전투에서 죽어버린 놈들이 생각날 때면 숨 막히게 달렸었다.
“대장! 나 잘했죠?”
녀석은 강찬에게 칭찬받고 싶어 했다.
위탁가정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용병에 지원했다고 들었다.
스무 살, 프랑스 놈치곤 앳된 얼굴이었는데 첫 전투를 마치고 나서 밤새 “미안해!”를 외쳤었다.
그놈만 그런 게 아니다.
대개 첫 전투를 치르거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때의 심정을 잠꼬대처럼 토해낸다.
“죽어!”라고 외치는 놈들은 전에 살인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와악!”, “안 돼!” 하는 놈들은 센척했지만, 겁이 났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미안해!”는 처음 들었다.
멍청한 새끼.
제 또래 놈의 시체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더라니.
강찬이 달릴 때 끝까지 따라 붙은 다음, 샤워를 하려는데 생수 두 병을 어디선가 가지고 왔을 때도 놈은 늘 “나 잘했죠?” 했다.
그다음 전투에서 놈을 지켜주지 못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후퇴 명령이고 지랄이고, 악착같이 적의 목줄을 끊어가며 달려갔을 때, 놈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개새끼.
그럴 거면서 왜 마지막에 “차니!”라고 외쳤을까.
강찬은 이를 악물었다.
허리? 끊어져라.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할 거면 차라리 끊어져 버려라.
그날 빈정거린 알제리 놈을 피떡으로 만들고, 함께 달려들던 그놈 구대장과 대원 둘을 묵사발 냈을 때 그를 유일하게 이해해 준 것이 다예루였다.
스미든이 마지막에 보였던 눈빛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도 비슷했다. 처절할 정도로 외롭게 살았던 놈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사람, 강찬.
절대로 그걸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염병!
길을 잘못 알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대략 10㎞쯤 달렸는데도 아직 1㎞ 이상 떨어진 곳에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거리는 몸이 가장 정확하게 안다.
‘넌 주인을 잘못 만난 거야.’
몸뚱이가 약속된 10㎞라며 여기저기 삐걱댔으나 강찬은 모른 척했다.
“헉헉. 헉헉.”
아파트 입구를 들어와 벤치에 도착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에 두 팔을 걸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어지럽고, 심지어 토할 것처럼 속이 뒤집히기까지 한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강찬은 놀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놀이 기구에 발을 걸치고 푸시업, 턱걸이, 평행봉.
‘빌어먹을.’
오늘을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
“어머! 땀 좀 봐. 운동하고 온 거야?”
아침을 준비하던 유혜숙이 밝은 얼굴로 강찬을 맞았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평소랑 같은 시간이야.”
“저 좀 씻을게요.”
“그래. 얼른 씻고 밥 먹자.”
강찬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가 샤워를 했다.
뻐근한 통증이 은근히 기분 좋았다.
상처는 이제 흉터만 남았다.
씻고 나오자 강대경이 유헤숙을 도와 반찬을 꺼내고 있었다.
“좋아 보인다. 내일부터 아빠도 같이할까?”
“그래요. 당신도 운동 좀 해야 돼.”
큰일 날 소리다.
운동에 방해되는 것도 그렇지만 강찬을 따라 하면 강대경은 분명 응급실에서 아침을 맞을 거다.
다행히 강대경도 굳이 아침에 나서겠다는 의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기분 좋게 현관을 나서 김미영과 만났다.
“흐흐흐.”
“아침부터 뭐 좋은 일 있어?”
“시험이잖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놀러 가자.”
김미영이 묘한 표정으로 강찬을 보았다.
“학원은?”
“시험 보는 주 일요일은 놀아도 되는 날이야.”
몸매 되지, 눈 초롱초롱하지, 얼굴 또렷하지,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이 녀석이 어느 정도만 조숙했어도 키우는 맛이 있었을 텐데. 이거야, 좋은 감정이 생기려다가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과 엉뚱한 소리를 삑삑 해대는 걸 보면 범죄처럼 느껴지니…….
강찬은 저도 모르게 김미영의 입술로 가 있던 시선을 얼른 버스로 옮겼다.
아이들은 적응력이 참 빠르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강찬이 올라타도 예전처럼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김미영의 역할이 컸다.
조잘조잘 거리거나 “흐흐흐.”하고 웃으며 강찬을 대하는 광경이 아이들의 경계심을 낮추는 데 크게 한몫한 느낌이었다. 식당에서도 그렇다.
정문에 들어서자 목에 깁스를 한 석강호가 있었다.
반가웠다.
정말 상쾌한 월요일 아침은 꼭 거기까지였다.
시험이다.
왜 답을 다 썼는데도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지.
이름을 써넣은 강찬은 적당히 답을 체크하고 문득 김미영을 보았다. 고개를 모로 틀고 시험에 집중하는 모습이 제법 매력 있었다.
강찬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느낌, 마치 친여동생을 넘보는 오빠가 된 듯한 죄책감이 일시에 밀려들었다.
시험 세 과목을 보고 나자 수업이 끝났다.
이건 정말 좋다.
김미영을 먼저 보낸 강찬은 석강호를 따라 운동부 실로 갔다.
“문자 안 왔소?”
“뭐? 나한테 문자 보냈냐?”
석강호가 커피를 타는 동안 강찬은 한쪽에 세워 두었던 의자 두 개를 옮겨왔다.
“얼래? 그럼 이 개새끼가 나한테만 보낸 거네?”
“뭔데?”
“그 공 여섯 개 말이오. 넌 죽는다.”
무슨 소린가 했다.
“그게 또 왔든?”
“오늘 아침에 떡하니 왔습디다. 이게 왜 나만 편애하지?”
“어떤 새끼지?”
“신경 쓰지 맙시다. 정 뭐하면 번호를 바꿔버리지요. 그럼 놈이 얼래? 하고 놀라지 않겠수? 푸흐흐흐.”
저게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 건가?
“아! 그리고 나 방학 때 3박 4일로 수련회 가우.”
“그건 또 뭐냐?”
“2학년들이 수학여행을 못 가는 바람에 수련회로 대체하기로 했었소.”
“재밌겠다?”
“재미요? 남들 다 쉬는 방학에 애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뭐가 재밌겠소? 혹시 요거 목 부상을 핑계 대면 빼 줄라나?”
둘이서 돈가스로 점심을 때울 때였다.
문자가 와서 확인해 보니 미쉘이었다.
[하니, 토요일에 시간 돼?]
강찬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니!”]
“다른 사람 찾는 거면 끊고.”
전화기 너머에서 미쉘 특유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쎄실하고 씬디랑 셋이 밥 먹기로 했는데 이왕이면 하니도 같이 나왔으면 싶어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틀 중 언제가 좋아?”]
어차피 한번은 다시 모이기로 했던 참이다.
거기다 일요일은 김미영이 먼저 침 발라 놓았으니까.
“토요일이 좋겠는데?”
[“그래, 그럼 토요일로 정할게. 그날 봐, 하니.”]
“그래.”
***
강찬은 육체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수요일부터는 달리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고, 특히 턱걸이 횟수를 배 이상 늘였다.
‘쯧! 이것도 의사 선생하고 상의를 해봐야 하나?’
몸이 좀 수상했다.
운동을 심하게 하면 나타나는 근육통이 한두 시간 지나면 멀쩡해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돈도 넉넉하고 검사를 받아볼 생각이었다.
수요일 시험이 끝나고 강찬은 은행에 가서 현금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때 놀라운 사실을 알았는데 강찬이 생일이 3월 13일이어서 면허시험 대상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은행을 나오고 30분쯤 지나 지점장이 자리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전화를 했는데 뭐 중요한 건 아니어서 적당히 끊었다.
강찬은 그 길로 석강호와 함께 면허시험을 신청하고 교외로 빠져나왔다.
“장어 먹읍시다.”
한 시간 정도 걸려 둘이 김포의 한적한 장어구이 전문점을 찾았다.
“아, 거! 개새끼.”
석강호가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짜증을 버럭 냈다.
“공육이냐?”
“그게 뭐요?”
“발신자가 공이 여섯 개짜리.”
“아!”
석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새끼가 왜 이러는 거지? 이거 전화국에 가서 알아보면 잡을 수 있나?”
투덜거리는 동안 장어가 나와서 화제가 바뀌었다.
운전면허시험을 접수하며 산 책자와 요령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다시 학교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번에도 미영이가 1등 하겠지?”
“그럴 거요. 2등하고 차이도 워낙 많이 나는데다가 오늘 시험 본 거까지 다 합쳐서 딱 한 문제 틀렸답디다.”
잘 익은 장어 두 점을 입에 넣으며 석강호가 한 말이었다.
‘쯧!’
가게 유리창으로 보이는 시원한 풍경 속에 김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뽀뽀 정도야.’
죽는 일도 아니고, 시험 잘 봤다고 해주는…….
“뭔 생각을 그렇게 하쇼?”
이런 건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이다.
***
시험이 끝났고 금요일에 운동부를 다시 열어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차소연도 그렇고, 모두 밝은 표정이었는데 특히 문기진은 다시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하며 만족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첫날이라 운동을 하기보다는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돌아간 다음이다.
“운동기구 몇 개 사놓으면 어떨까?”
“여기 말이오?”
석강호가 운동부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방학 때는 어디 헬스클럽을 하나 끊지 그러쇼?”
“그게 사람들이 많아서 영 신경 쓰이겠더라구. 그냥 집에서 달려오기도 적당한 거리고, 너 만나기도 편하고.”
“그건 그렇수. 그 김에 나도 운동도 좀 하고.”
“사자.”
“그럽시다.”
운동기구는 강찬이 골라서 주문하기로 했다.
얼추 집에 갈 시간이었다.
“저녁 먹고 가요. 내가 낙지 볶음 집 죽여주는데 찾았으니까.”
“너 요즘 왜 그렇게 먹는 걸 밝혀?”
“그랬나?”
석강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푸흐흐.”하고 웃었다.
“병원에서 나오고부터 이상하게 대장하고 좋은 것도 먹으러 가고 싶고, 구경할 곳이 있으면 함께 가고 싶기도 하고 그렇수.”
“방학 때 같이 운동하자. 그때쯤이면 깁스도 풀 거 아니냐?”
“그래야죠. 그러고 보니까 스미든 새끼가 조용하네?”
“내버려 둬라. 그게 지금 제정신이겠냐?”
“푸흐흐. 갑시다. 토요일이랑 일요일 다 바쁘담서요? 가서 매운 낙지에 밥 비벼 먹고 들어갑시다.”
석강호는 조금이나마 목이 돌아가는지 움직임이 한결 편해 보였다.
***
토요일 오전은 유혜숙과 함께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강대경이 들어온 다음에야 집을 나섰다.
라츠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였는데 미쉘 일행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하니!”
미쉘이 커다랗게 손을 흔들자 강찬을 시기하는 시선이 단박에 달려들었다.
와락.
안는 게 아니라 아예 달려든 게 맞다.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야외 테라스다.
미쉘은 강찬에게 매달리듯 안긴 다음, 그의 양볼에 요란스럽게 뽀뽀를 했다.
“어서 와, 차니.”
쎄실과 씬디는 허그와 가벼운 볼맞춤을 했는데 예의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우선 간단하게 맥주 한 병씩을 시켰다.
씬디가 특집 프로그램 하나를 끝내는 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차니.”
“왜?”
서비스로 나온 땅콩 과자를 집으며 씬디가 강찬을 불렀다.
“알리스가 그러는데 스미든과 차니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거라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강찬은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개새끼가 결국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는 거다.
“차니가 스미든을 대하는 게 이상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인데 말해봐야 믿지 못할 거라고 했다던데? 알리스가 나보고 아는 거 있냐고 묻는데 우리야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잖아.”
“글쎄.”
씬디의 표정으로 봐서 떠보는 것은 아닌듯싶었다.
이번 주 지나서 확실하게 경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테라스에서 아예 간단한 스테이크를 주문한 다음, 와인 한 병과 곁들어 먹었다.
라츠 호텔의 지하 클럽에 들르자는 말에 그러기로 했는데 미쉘이 정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해서 반쯤 마셨을 때, 어둠이 살짝 내려앉았다. 테이블마다 앙증맞은 기름 초를 밝혀주자 분위기가 한결 로맨틱해졌다.
두 칸 건너서 커다란 목소리로 떠드는 50대 남자만 없다면 프랑스의 한곳에서 미녀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석강호가 젊은 몸뚱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다섯이서 정말 재미있었을 텐데.
강찬이 풀썩 웃고 말았다.
석강호의 말처럼 놈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였다.
“하니.”
미쉘이 부르는 바람에 강찬이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녀가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제안했다.
“아름다운 밤을 위하여.”
“넷이서?”
강찬이 농담과 함께 잔을 들자 씬디가 커다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