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33화 (3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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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일이 점점 커지네.

토요일 오전에 석강호의 가족이 온다고 했고, 일요일에도 같이 있을 예정이라 주말엔 문병을 가지 않기로 했다. 언제고 인사할 사이긴 하지만, 현재의 모습도 그렇고 그걸 굳이 병원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유혜숙은 토요일 내내 지인들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으며 행복해했다.

“응! 다음 주 토요일, 오후 3시. 고마워, 얘!”

그 외에도 다음 토요일에 있을 공트 자동차 발표회에 김성희를 초대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계속 이런 평화가 이어졌으면 싶었다.

점심을 먹은 강찬은 미쉘에게 부탁해서 쎄실을 따로 만났다. 주식과 통장에 있는 금액이 적지 않아서 자칫 소문이 돌까 봐 국내에 있는 증권사는 거래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주식 분배, 스위스 계좌의 송금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디엣 파리에 있는 강찬의 돈을 찾는 문제까지를 모두 의논했다.

문제는 많았다.

우선 주식은 증여로 처리돼서 세금이 절반가량 나오고, 돈은 외국에 있는 것이라 외국환 신고가 어렵다는 거였다.

“머리 아프다. 나중에 스미든 시켜서 찾아오라고 할 테니까 그냥 놔둬라. 한국 지사장이 자기 개인 돈 들고 들어오는 건 괜찮을 거 아냐?”

“알았어. 내가 좀 더 알아보고 연락할게.”

토요일은 그렇게 헤어졌다.

일요일에 집에서 쉬고 있자니 쎄실에게서 전화가 왔다.

HNC 지점에서 스미든이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다음, 다시 스위스에 있는 돈을 찾아 상환하는 좀 치사하고 복잡한 방법을 쓰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스미든이 석강호와 강찬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처리하면 편법이지만 당장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과 증여세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다.

“나랑 석강호가 돈을 갚아야 하잖아?”

[“미리 채권 소멸 서류를 만들면 돼. 그건 우리 쪽 법무팀이 알아서 준비할 거야.”]

“세금은?”

[“증여로 처리하지 말자는 거야. 남들 다 이렇게 해. 딱히 눈에 띌 것도 없고, 서류로 완벽하게 처리할 거고.”]

“위법이야? 아니야?”

[“편법이라고 하자, 차니. 내가 알아서 할게.”]

“쯧! 문제 생길 짓은 하지 마라.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건 우리 팀에게 맡기라니까.”]

“알았다.”

이게 도대체 뭐라는 건지.

딱 세 가지만 짚은 후에 나머지는 모두 쎄실에게 맡겼다. 스미든이 따로 준비할 것도 없어서, 오후에 병실로 찾아가 서류 다섯 장에 사인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라 들었다.

석강호는 통장이 있고, 강찬은 월요일에 만들어야 했다.

염병! 번거롭기도 하다.

귀찮아서 석강호 통장에 다 넣으라고 했더니 굳이 나눠 넣는 것이 현명하단다. 꼼짝없이 월요일 점심시간에 은행에 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

월요일.

학교에 가서 오전을 견디고, 점심을 먹은 다음,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고, 다시 첫 장을 전화기로 찍어 쎄실에게 보내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이지 성격에 안 맞는 짓인데 집을 구하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스미든을 생각해서 이 악물고 해달란 대로 해줬다.

[“차니. 저녁에 차용증에 사인해줘. 법무법인에서 가지고 있을 거고, 스미든이 대출을 변제하면 순차적으로 차용을 풀 거야.”]

주식은 일단 삼등분으로 나누어서 강찬과 석강호가 압류를 걸어 팔지 못하도록 처리했다고도 들었다.

뭔 소린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복잡하고 골 흔들리는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석강호를 만나자 살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소?”

“야! 칼을 들고 싸우라면 싸웠지, 통장이 어쩌고, 서류가 어쩌고 하는 건 도저히 감당 못 하겠다.”

석강호가 “푸흐흐.” 하며 웃고는 커피를 한 잔 타줬다.

“스미든은 내일 돈 들어오면 알리스란 애랑 둘이 아파트로 옮긴다고 합디다.”

“쯧! 차라리 잘 됐다. 말 배우는 건 저게 최고니까. 당장 몸뚱이 아픈 놈, 수발할 사람도 없고.”

“그건 그렇수.”

“다예.”

커피를 마저 털어 넣은 석강호가 진지한 얼굴로 강찬을 보았다.

“내일 입금되는 돈은 네 몫이다. 목숨값. 다 너 알아서 해라.”

“그래도 되겠소?”

“스미든도 당장 집 구하고, 전화기 사고, 옷 사고, 난린데 뭐. 너도 마누라를 주든, 차를 사든, 술을 퍼먹든 알아서 해.”

“고맙소.”

“내가 준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샤흐란하고 그 피 냄새나는 싸움 덕분에 생긴 돈 아니오? 그걸 내가 똑같이 나눴다는 게 미안해서 그렇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담배나 줘.”

둘이 담배를 하나씩 물었다.

“돈 얘긴 이걸로 끝내자.”

“알았소.”

강찬의 성격을 아는 석강호다. 실제로도 강찬은 한번 덮은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는다.

둘이 학교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쎄실이 들어왔다.

그녀는 무려 여섯 장이나 강찬의 사인을 받은 다음, 다시 새로 두 장의 서류를 꺼냈다.

“이건 뭔데?”

“혹시 몰라서, 크리디엣 파리 계좌 청구 건이야. 사회보장번호와 비밀번호 안다니까 여기 적어줘 봐. 그럼 법무팀에서 계좌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스위스에서 넘어온다는 돈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돈이어서 강찬은 조금 더 정성스럽게 사인을 했다.

“차니. 내일 입금되는 돈에서 한 달 분 이자, 회사에 들어가는 수수료하고 경비는 제할 거야. 알지?”

“얼마나 되는데?”

“한 사람당 5천만 원 정도?”

“알았다. 수고했어.”

“실적 올려줘서 고맙지. 대신 다음 주에 내가 술 살게.”

“누가 사면 어때?”

“오케이, 차니. 오늘은 일로 만난 거니까 이만 갈게.”

쎄실이 깔끔하게 병실을 나갔다.

“저러니까 괜찮아 보이기도 하우.”

“그러게. 복장도 깔끔하고.”

길었던 서류 정리가 모두 끝났다.

어떤 면에선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이 정리된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

화요일, 점심시간에 전화기를 켰더니 문자가 두 통 있었다.

[HNC 입금.]

[HNC 입금.]

이 새끼들은 또 왜 나눠서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앞에 문자는 숫자가 많아서 세지도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자를 확인하자 묘하게 가슴이 설렜다.

강찬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차니.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해야 하나 했어.”]

“두 번째 입금 2억 3천 어쩌고는 뭐야?”

[“크리디엣 파리 건. 운용수익 계약을 해놔서 제법 짭짤하던데? 차니, 그런 선택을 해 놨을 줄은 몰랐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강찬도 몰랐다.

잘못되었으면 원금을 홀랑 날릴 뻔한 게 아닌가.

하여간 금융권에 있는 새끼들은 믿으면 안 된다는 확실한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아무튼, 수고해줘서 고맙다. 내게 의미가 있는 거라 더 마음에 든다.”

[“차니는 하여간 희한하네. 환율이 좋아서 스위스 계좌 건도 17억이 넘어. 차니 나이에 현금을 그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 몇 없을 거야. 우리 회사 회계팀이 관리할 거니까, 혹시 국세청이나 다른 곳에서 연락 오면 무조건 나에게 알려줘.”]

“알았다.”

배식을 받기 위해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줄을 새치기하는 놈들이 없어서 모두가 강찬이 식당에 오는 것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거친 척, 주접떠는 놈들 없고, 모두 줄 서서 먹고.

심지어, 강찬과 김미영을 위해 차소연의 맞은편 자리 두 개만 비워 두고 좌우로 아이들이 빽빽하게 앉아서 편안하게 밥을 먹는 일도 생겼다.

강찬의 바로 주변인데도 말이다.

***

수업이 끝나고 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여섯 번이나 와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라 강찬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강찬씨. 한국은행, 신목 지점장, 송기욱입니다. 이번에 예금을 넣어주셔서 인사차 전화했었습니다. 저희 은행의 다른 상품도 좀 이용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시간 되시면 제가 언제고 찾아뵙겠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학생인 걸 알고도 이러는 건가?

“당분간 건드릴 생각 없으니까 그냥 놔두세요.”

뭔가를 떠들려고 하길래 얼른 전화를 꺼버렸다.

“무슨 일이야?”

“잡상인.”

송기욱 지점장이 신세를 한탄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릴 표현이지만 어쩌겠나? 통장에 20억쯤 들었다고 떠드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

스미든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빌라로 옮겼고, 금요일에 석강호도 퇴원해서 드디어 병원에 찾아갈 일이 없어졌다.

학교도 평화롭고, 통장에 용병 생활로 번 진짜 돈도 들었고, 그럭저럭 행복한 한 주였다.

토요일 새벽부터 유혜숙은 아예 전투에 임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준비하는 게 낫겠죠?”

“그게 현명해 보인다.”

강대경이 주방으로 나서는 것을 말린 다음, 강찬이 오믈렛을 만들었다. 잠시 후에 세 식구가 식탁에 앉아 강찬이 만든 오믈렛을 먹었다.

“여보. 나 미용실 다녀올 거야. 당신 몇 시에 나가?”

“나야 12시쯤 나가면 되지.”

“어머, 아들! 정말 맛있다아!”

얼마 만에 들어보는 콧소린지 몰랐다.

저 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다면 강찬도 강대경처럼 유혜숙의 눈치를 보며 살 자신이 있었다.

“우리 아들 오늘 멋질 거야. 내가 고른 양복이 정말 잘 어울려.”

남편과 자식이 빛나는 게 저렇게 행복하고 좋을까?

유혜숙이 방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고맙다. 엄마 저런 모습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다 해 놓으시고 왜 그러세요?”

“아들을 팔아서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강찬이 안방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지자 강대경이 ‘아차’하는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정말 이제 더 위험한 일은 없는 거지?”

“예.”

“아빠가 오늘 진심으로 기뻐해도 되는 거 맞지?”

“그렇다니까요.”

강찬이 풀썩 웃자 강대경이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술 먹어도 좋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건 상관없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아버지, 가끔은 둘이 앉아 속을 터 놓을 수 있는 아버지.

“왜 그러냐?”

“아버지가 멋져 보여서요.”

“이 녀석이!”

강찬이 일어서자 강대경이 싱크대 앞에 섰다.

“놔두세요.”

“같이 하자. 이번 계약 건 함께 했던 것처럼.”

이건 말릴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받는 느낌.

몸뚱이의 주인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잔뜩 긴장한 유혜숙과 함께 택시를 탄 것은 2시 30분이 조금 넘어서였다. 유혜숙이 오늘 들인 정성은 강찬이 이해하기에 너무나도 오묘한 것이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쩌니? 길이 많이 막힌다.”

토요일이라 당연한 일이다. 조금 일찍 나왔으면 싶었으나 유혜숙이 갖고 있던 옷 전부를 갈아입는 노력과 다음으로 팔찌, 목걸이를 전부 교체해보는 노력을 기울이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버렸다.

“엄마 괜찮아? 아빠 부끄럽지 않겠지?”

마지막에 강찬을 풀썩 웃게 한 유혜숙의 질문이었다.

라츠호텔은 언덕에 있어서 밖에서 보면 1층이 호텔 로비에서 보면 지하층으로 된 구조였는데 신차 발표회는 그곳에서 했다.

강찬이 들어섰을 때는 단상에 올라간 강대경이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강유모터스의 비전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아빠 멋있다.”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표정으로 유혜숙이 강대경을 보았다.

강찬은 몸에 꼭 맞는 검정 양복에 흰 셔츠와 얇은 타이를 맸다.

“축하해, 얘!”

두 사람을 발견했는지 김성희가 다가 와 유혜숙의 손을 잡았다.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셨어요?”

“그래. 찬이야. 너도 잘 지냈지? 요새 공부는 좀 어떠니?”

“우리 애, 프랑스 유학 준비 중이야.”

“어머! 잘 됐다. 프랑스어를 그렇게 잘하니까 충분히 그럴만하지.”

눈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일단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니.”

그때 눈치 없는 스미든이 휠체어를 타고 강찬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알리스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언제 왔냐?”

프랑스어라 유혜숙과 김성희가 못 알아 듣는게 다행이었다.

“한 시간 전쯤에 왔소. 다 알리스 덕분이오.”

스미든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알리스를 보았다.

이것들이 만난 지 얼마나 됐지?

강찬은 가능한 온화한 표정으로 유혜숙과 김성희를 소개했다.

“스미든. 이분은 강유모터스 대표 강대경씨의 부인 유혜숙 씨, 이쪽은 친구분인 김성희 씨다. 점잖게 대해라.”

강찬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한국어로 스미든을 소개했다.

“어머니, 한국 지사장, 스미든 씨예요.”

“오! 아름다운 부인들이시군요!”

프랑스어가 연달아 오가자 유혜숙은 만족한 얼굴이고, 김성희는 몹시 불편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조만간 제가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아들, 뭐래?”

“만나서 반갑다네요.”

강찬은 적당히 인사를 끝냈다.

그때 오십쯤 돼 보이는 땅땅한 프랑스인이 수행원 두 명을 대동하고 강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스미든 씨. 이분이 강찬 씨인가요?”

“예, 그렇죠. 대사님. 인사하시지요.”

스미든과 먼저 인사가 있었던 모양으로 대사가 강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찬 씨. 주한 프랑스 대사, 라노크요.”

“강찬입니다.”

라노크는 체격과 키는 작았으나 다부진 체형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져서 한 마디로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공트 한국 지사장이 휠체어를 굴려가며 나타나더니 이번엔 프랑스 대사가 일개 고등학생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유혜숙과 김성희가 똑같이 놀란 눈으로 라노크와 강찬을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강찬도 의외였다.

강찬은 우선 라노크에게 유혜숙과 김성희를 소개했다.

김성희는 아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강찬 씨. 잠시 둘이 얘기할 수 있겠소?”

“저와요?”

프랑스 대사가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뜻밖의 제안이나 대사가 이럴 정도면 무언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놀란 얼굴의 유혜숙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웃어준 뒤에, 라노크를 따라 발표회장의 바깥으로 나왔다.

발표회장을 나오자 넓은 로비에 인도네시아 스타일의 차양이 보였고, 주변으로 탁자와 의자가 멋스럽게 설치되어 있었다.

수행원들이 에스프레소 잔에 커피를 두 잔 주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강찬 씨. 샤흐란의 일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프랑스 대사의 입에서, 그것도 이렇게 단숨에 샤흐란의 이름이 언급될 줄은 몰랐다.

“공트 자동차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요. 본국과 공트 자동차는 절대로 샤흐란이 마약을 거래하려 했던 사실을 몰랐으며, 강찬 씨 덕분에 오명을 쓰지 않게 된 점에 대해 본국을 대표해 대사인 제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말을 참 머리 아프게도 돌려댄다.

아직 남은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강찬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라노크가 형식적인 미소를 지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본국의 정보국에서 샤흐란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이후로 불미스러운 말이 돌지 않도록 협조를 당부하오.”

결국, 한 마디로 입단속 하란 뜻이다.

“샤흐란은 어떻게 처리됐습니까?”

“그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소.”

중국인들이 데려가 잘게 토막 냈을 샤흐란이 어떻게 차에 치이는 기적을 만들어 내겠나. 서류상으로 그렇게 처리되었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본국에서는 강찬 씨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자 합니다. 우선 파리 국영 대학의 전액 장학생 초청, 그리고 강찬 씨가 희망할 경우,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샤흐란의 일치고는 너무 파격적인데요?”

“보너스도 있지요.”

라노크가 처음으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웃었다.

“스위스 송금 건은 프랑스에서 알아서 처리했으니 한국 국세청에서 문제 삼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공트 자동차에서 강찬 씨에게 세금 부담 조건으로 주식을 드릴 예정입니다. 아마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 새끼들이 죄 알고 있었구나.

강찬은 쓴웃음을 먼저 지었다.

“다 끝난 일입니다. 굳이 대사까지 오셔서 이렇게 할 필요가 있나요?”

“후년이 프랑스 대통령 선거요. 유력한 후보가 공트와 친인척으로 묶여 있어서 이번 일이 세상에 알려져 스캔들로 비화하면 선거의 결과는 물론이고, 정국을 걷잡기 어렵소. 강찬 씨가 이해하지 못하는 유럽 내부의 이권도 좀 엉켜 있지요.”

그럼 그렇지.

“안심하세요.”

“고맙소. 혹시 개인적으로 내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여기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됩니다.”

라노크가 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작은 명함을 건네주었다.

강찬은 받은 명함에서 시선을 들어 라노크를 보았다.

“혹시 용병의 교전 기록도 알 수 있습니까?”

라노크는 흥미롭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갸웃한 다음 입을 열었다.

“샤흐란과 관계된 일은 덮어두는 게 좋아요, 강찬 씨.”

“그러죠.”

굳이 상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 일은 없어서 강찬은 순순히 물러났다.

“정보국에서 흥미로운 보고를 보냈더군요. 고등학생인 강찬 씨는 그 어느 곳에서도 프랑스어를 배운 기록이 없던데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요?”

“인터넷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과연 IT 강국답군요.”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던진 답이었다.

라노크가 행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화가 끝났음을 표시했다.

“들어가 보셔야죠.”

“현명한 판단입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만약, 말이 돈다면 정보총국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게 될 거요.”

라노크가 정말 다정한 표정으로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요인 암살과 공작, 파괴 등을 주로 하는 곳이 정보총국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죽일 수 있다는 말을 하는 놈은 처음 봤다.

“마지막 말씀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걸 그랬어요.”

강찬의 대꾸에도 라노크의 형식적인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행사장으로 들어왔을 때 스미든이 단상에서 강유모터스와 공트의 발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유혜숙과 김성희가 얼른 다가왔다.

“아들, 무슨 일이야?”

딱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파리 국립 대학 전액 장학생으로 초대하겠다는데요?”

절대로 자랑질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급하게 대사가 부른 이유에 맞는 답을 하려다 보니 불쑥 튀어나온 거다.

그런데 입술 끝이 부르르 떨리는 김성희를 보자 강찬은 진심으로 그녀와 참석하지도 않은 그의 아들 방대식에게 미안했다.

스미든의 인사말이 끝나고 커다랗게 음악이 울리며 조명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팍!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자동차가 벽을 뚫고 서서히 앞으로 나왔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었는데 조명이 좋아서 정말 벽처럼 보였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플래시가 연달아 번쩍였으며 발표회장 좌측에서 모델 두 명이 올라와 차의 좌우에 섰다.

발표회장의 모든 시선이 자동차로 쏠렸을 때였다.

연달아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미녀가 있었다.

‘미쉘?’

그녀는 손가락으로 카메라맨과 다른 여자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은색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오늘은 분명 속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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