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 / 0419 ----------------------------------------------
2-6. 분배.
“저 새끼, 분명 뭔가 있소. 아마 다 나누고 나면 뭔가 튀어나올 거요. 내가 늘 당했거든요. 그러니까 공연히 문제 생겨서 엉뚱한 놈 주둥이에 처넣기 전에 나누자는 거요.”
그런가?
강찬이 스미든을 보았을 때였다.
“못 미더우면 내 몫도 대장이 가지고 있으면 되잖소.”
석강호의 말에 강찬은 퍼뜩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대가를 석강호가 받는 거다. 그걸 강찬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솔직히 죽어간 대원들의 남은 가족에게 전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데다, 죄다 외롭게 큰 놈들이어서 굳이 찾아가 돈을 전해 줄 애틋한 가족이 있는 놈도 없다.
“알았다. 저놈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다른 생각이 없으면 네 말대로 하자.”
강찬은 말을 마치고 스미든을 불렀다.
“스미든. 네 말은 알겠다. 다예의 의견도 들었고. 대신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라.”
스미든이 힐끔 강찬을 보았다.
‘뭔가 있구나.“
“없수. 여기서 더 숨길 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대답은 엉뚱한 게 나왔다.
샤흐란에게도 붙었던 놈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주변에 남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미든.”
“예.”
강찬의 음성이 바뀌자 석강호도 긴장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주식은 없던 일로 한다. 넌 너 알아서 움직여. 그리고 내가 말을 뱉은 거니까 100만 유로는 보내주마. 여기까지.”
남는 돈은 석강호의 몫이라 여겼다.
강찬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확신하지 못해서 말을 못했던 거요. 샤흐란의 뒤에 누군가 있는 거 같았는데 누군지, 정말 있는지도 알지 못해서.”
“그것 때문에 주식을 나누자고 한 거냐?”
“그거야…….”
위험도 같이 나누고 싶었던 눈치였다.
강찬은 석강호에게 스미든이 방금 했던 말을 전했다.
“저, 개새끼.”
스미든이 알아듣는 욕이다.
“대장. 이제는 정말 숨긴 것 없수. 그러니까 공평하게 셋이 가르고 나 끼워주쇼.”
지금의 눈에는 진지함에 솔직함도 담겼다.
“후우. 알았다. 일단 거기까진 믿어주마.”
“고맙소, 대장! 땡큐, 다예루!”
스미든이 움직이려다가 움찔하면서 인상을 버럭 썼다.
“왜?”
“고마워서 환타스틱한 커피나 한잔 타려고 그랬소.”
참, 지랄리스틱한 놈이다.
강찬은 석강호에게 커피를 타라고 하고선 상황을 마무리했다.
잠시 차를 마시며 스미든은 우선 급한 대로 한국어를 가르쳐 줄 개인 선생과 월세라도 좋으니 강찬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하나 구해달라고 했다.
“알았다.”
미쉘의 친구 중에 쎄실이 프리랜서 어쩌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씬디라는 애는 증권사에 다닌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대로 일을 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저 새끼, 다른 방에 보내주면 안 되우? 마누라가 왔을 때도 저러고 있소.”
침대에 기대앉은 스미든이 무슨 뜻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털북숭이가 한쪽 눈과 주둥이만 내놓고 앉아 있는 꼴이 흉하긴 했다.
“오늘만 참아라. 내일까지 대책을 구해볼게.”
“그럽시다.”
강찬은 스미든에게 셋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아프리카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다짐한 뒤, 병실을 나왔다.
***
강찬이 집에 돌아왔을 때, 유혜숙은 편한 복장이었다.
“오늘 저녁 먹으러 안 가요?”
“가야지. 아빠도 금방 도착한다고 하셨어.”
아직 마음고생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았음에도 유혜숙은 행복해 보였다.
“어디로 가요?”
강찬이 묻는 순간에 문이 열리더니 강대경이 들어섰다.
“오셨어요?”
아무래도 집에서 먹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 당신 준비 다 됐어?”
“응. 이대로 나가면 돼.”
그러나 대화를 들어보면 외식하러 가는 게 맞다.
“이럴 거면 내려오라고 하시죠.”
“엄마를 빨리 보고 싶었거든.”
“이이가! 하여간 능글맞기는.”
“어서 갑시다. 왕비님.”
강대경이 유혜숙의 등을 싸 안으며 현관으로 걸었다.
뭔가 있는데?
강찬은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아파트를 빠져나온 강대경은 익숙한 길로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인터뷰와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 등의 이야기를 유혜숙에게 전해주었다.
뒷좌석에 앉은 강찬은 말없이 두 사람을 보았다.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강대경은 뜻밖의 장소에 차를 세웠다.
설마?
강대경과 유혜숙이 동시에 강찬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엄마하고 같이 오자고 했었잖아?”
그렇긴 하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 학교 앞 분식집을 찾을 줄은 몰랐다.
얼결에 내려 함께 분식점에 들어갔고, 돈가스를 시켰다.
“아빠가 엄마한테 약속한 게 하나 있었어.”
강대경을 바라보는 유혜숙의 표정이 특별했다.
“집, 차, 그리고 빚이 없다면 그 이상 버는 돈은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쓰자는 거였다.”
세상엔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건가?
죽어라 번 돈을 남을 위해?
“엄마가 너 처음 안아 본 다음에 아빠에게 부탁했던 일이다. 네가 크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면,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대 욕심부리지 말자고. 사실 지난번에 여기서 돈가스 먹은 걸 자랑하긴 했었는데 오늘 엄마가 여기 오자고 할 줄은 몰랐다.”
그 사이, 돈가스가 나왔다.
강대경은 바쁘게 돈가스를 잘라 유혜숙의 앞에 놓아주고 젓가락도 챙겨주었다.
“실망했니?”
“아니요. 좀 뜻밖이긴 한데 나쁘진 않아요.”
유혜숙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셋이 식사를 시작했다.
“두 분은 언제 만나신 거예요?”
두 사람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강찬은 무심코 내민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분명 전에 들었던 이야기였으리라.
“사고가 난 이후로 가끔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덜컥, 유혜숙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담겼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강대경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빠랑 엄마는 대학교 때 만났지. 집에 보면 사진 다 있다.”
‘나중에 한번 봐야겠구나.’
강찬이 “네에.”하고 답을 한 다음이었다.
“사실 그때 아빠네 집이 정말 가난했었지.”
“여보. 그런 얘길 또 뭐 하려 해?”
유혜숙이 콧소리를 섞어가며 투정처럼 막았으나 강대경은 꿋꿋했다.
“집이 시골이었던 건 아니고. 악착같이 아르바이트해야 책값과 차비 맞출 정도였지. 1학년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MT를 간다는데 아빠는 그런 거 갈 형편은 아니었거든.”
“엄마가 내주셨어요?”
“그렇지! 지금 보면 그때부터 엄마는 아빠한테 푹 빠져 있었던 거지.”
“이이가!”
강대경과 강찬이 함께 웃어대자 유혜숙이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맨날 홀쭉해서 학교에 오는데 얼마나 안쓰럽던지. 그때 아빠 눈이 참 컸거든. 그런데 책을 사야 하거나, 돈을 낼 일만 생기면 겁먹은 것처럼 눈이 더 커지는 거야.”
“그래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니까 MT비를 내 주셨을 거 아니에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여보!”
사람들이 돌아보자 유혜숙이 입을 꼭 다물고 강대경을 째려보았다.
“장난이야, 장난. 얼른 들어.”
유쾌한 식사였다.
기름이 좋지 않아서 괜찮을까 싶은데 유혜숙은 맛있게 돈가스를 먹고 있었다.
“그 뒤로 아빠 점심은 엄마가 다 사줬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군대도 철원에서 나왔는데 한 달에 두 번씩 꼭꼭 찾아와 줬고.”
강대경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유혜숙을 바라보았다.
“한번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눈이 내려서 온종일 눈을 치운 날이 있었거든. 다들 면회 오는 사람 없을 거라 했는데 엄마가 벌벌 떨면서 왔더구나. 부대에 있는 간부들까지 나와서 엄마를 맞았다. 그 덕분에 2박 3일 특별 휴가도 받았고. 지금도 그때 동기들을 만날 때면 그 얘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강찬이 놀랐다는 얼굴로 유혜숙을 보았다.
“아빠가 제대했을 때 엄마는 국비 유학생으로 합격해 놓고도 아빠에게 말도 안 하고 포기한 거였다. 그리고 아빠가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내색 한 번도 안 하고 끝까지 곁을 지켜 주었고.”
강대경이 충분히 잘할 만한 했구나 싶었다.
“외할머니께서 너 낳은 뒤에 슬쩍 말씀해 주시더라. 그런 일 있었다고. 어쩌면 너를 만나서 살아난 건지 모른다고 우시면서.”
외할머니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공연히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강찬은 고개만 끄덕였다.
강찬과 강대경은 다 먹었고, 유혜숙은 절반쯤 남겼다.
“서운하더라도 우리 가족 회식은 이걸로 하자.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다고 엄마가 선택한 메뉴니까. 자린고비처럼 살자는 뜻도 아니다. 지금처럼 일정금액을 떼서 어려운 아이들을 도울 거다.”
“지금도 하고 계셨어요?”
아차차! 이것도 잘못된 질문인가 보다.
강대경이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아빠 월급에서 일정 부분은 계속 기부했지.”
적당하게 식사가 끝났다.
해가 지는 시간에 세 사람은 가까운 한강 변에 차를 세우고 함께 걸었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음 주에 쉬프 발표회가 있을 거다. 스미든 씨가 한국 지사장으로 따로 발령 났더구나. 프랑스 대사도 온다고 하고. 그날은 엄마랑 와 줬으면 싶은데 어떠냐?”
“가야죠.”
강대경이 고맙다는 눈빛을 따로 보낸 후 유헤숙과 이야기를 나눴다. “뭘 입고 가지?”, “지난번에 성희 만날 때 옷이 좋던데?”, “대사도 온다는데, 아 참! 그날 성희 불러도 돼?” 등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들으며 강찬은 무심히 흐르는 강을 보았다.
적응하자.
몸뚱이를 찾을 게 아니라면 굳이 프랑스로 가서 용병을 할 이유도 없었다.
‘받아들일 생각이다. 이해해주라.’
강찬은 어디엔가 있을지 모른 몸뚱이의 주인에게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혼자도 아니고, 석강호까지.
어디엔가 이렇게 살아있는 놈들이 더 있는 건 아닌지도 궁금했다.
오래 걷지 않는 것을 보면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은 유혜숙을 위해 나온 듯한 산책이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강찬은 우선 미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클럽에라도 갔나?”
두 번을 걸었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확인하는 대로 전화가 올 일이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
다음 날, 오전 수업 내내 강찬은 어떻게 하면 차소연과 문기진 같은 아이들이 낙인을 벗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 덕분인지 수업 시간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수업태도를 만족해하는 선생도 있었는데 못 자게 하거나 수업을 제대로 들으라고 한 적은 없다.
점심시간이 돼서 강찬은 다시 김미영과 식당으로 향했다.
“선배님!”
차소연이 식당 앞에 있다가 강찬과 김미영을 반갑게 맞았다.
“기다렸니?”
“예.”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당분간 점심은 꼭 학교에서 먹어야 할 모양이었다.
웅웅웅.
줄을 따라 계단을 내려갈 때 문자가 왔다.
[차니. 새벽에 일이 끝나서 지금 막 일어났어. 무슨 일?]
새벽에 끝날 일이 뭐가 있지?
강찬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차니. 수업 중 아니야?”]
“점심시간.”
[“미안 화보 몇 개 찍는 작업이 오전에 끝나서 전화 못 했어.”]
“괜찮아. 다른 건 아니고, 스미든이라고 공트자동차 한국 지사장이 병원에 있거든. 한국어를 가르쳐줄 개인 선생이 필요하다는데 혹시 씬디가 특별한 일 하는 거 없으면 소개해 주려고.”
[“알았어. 내가 물어보고 전화할게. 다른 건 없어? 오늘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거나 하지는 않고?”]
“끊자.”
강찬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헛소리를 상대하기에는 주변에 학생이 너무 많았다. 가뜩이나 목소리 낮춰서 대화하는 것도 짜증 나는 판에 밥 먹자고 줄 서서 몸뚱이가 뜨겁고 차갑다는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아이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쫄바지를 입은 두 놈과 어제 인사했던 놈들이 줄 끝에 보였다.
놈들은 강찬과 시선이 마주치자 또 돼먹지 않은 깡패 흉내를 내며 인사했다.
강찬이 피식하고 웃자 놈들이 얼른 고개를 떨궜다.
저런 병신 같은 놈들에게 받는 인사는 늘 역겹다.
그것도 식사시간에는 더더욱.
***
이틀밖에 안 됐는데 걸어서 집에 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강찬은 슬쩍 김미영을 보았다.
눈이 뒤집혔을 때 말린 사람이 처음이라면 믿을까?
그런 말을 해주면 틀림없이 묘하게 웃겠지만 사실이다.
아프리카에서 다예루가 말려준 준 적이 한 번 있었다.
앳된 얼굴의 신병이 두 번째 전투에서 피떡이 돼서 죽은 날,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강찬에게 빈정거리던 알제리 놈. 다예루가 팔뚝을 칼에 찔려가며 막아서지 않았다면 분명 놈을 죽였을 거다.
아파트의 상층부가 건물들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갈게. 내일 아침에 봐. 안녕.”
“그래.”
김미영이 기쁜 얼굴로 달려갔다.
내일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집으로 들어간 강찬은 유혜숙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할 때였다.
전화가 걸려와서 보니 미쉘이었다.
“나야.”
[“오늘 시간 어때? 씬디는 방송 일 때문에 힘들대. 대신, 하고 싶다는 친구 하나 있는데 걔가 잠깐 만나서 얘기했으면 싶다는데?”]
강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미쉘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병원으로 오라고 해. 방지 병원, 503호. 한국어를 배울 사람이 거기 있어. 나는 지금 가는 길이고.”
[“오케이, 차니. 방지 병원, 503호.”]
미쉘이 기분 좋은 음성으로 전화를 끊었다. 밝히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가 될 텐데.
병원에 도착한 강찬은 유헌우를 찾아 어깨 상처를 먼저 치료했다.
“실밥이 떨어진 건 관두고, 어깨에 흉터가 잡혔네요. 이 정도면 붕대를 감지 않아도 될 정돈데? 통증은 어때요?”
“오늘은 아프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유헌우는 연신 놀랍다는 얼굴로 상처를 소독하고 거즈를 대주었다.
강찬이 병실에 들어서자 석강호와 스미든 모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그를 반겨주었다.
“무슨 일 있었냐?”
“일은 무슨 일이요? 말도 안 통하는 놈과 하루 종일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그렇수. 커피 드실라우?”
석강호가 커피를 타는 사이 강찬은 스미든을 보았다.
“공트에서 널 한국 지사장으로 임명했단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한국어 가르쳐 줄 사람 올 테니까 한 번 만나봐.”
“여자요?”
강찬이 말없이 바라보자 눈치를 살피던 스미든이, 봉지 커피를 받고는 히죽 웃었다. 맷집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니 오죽하겠나. 저 새낀 지금이라도 삼십 분은 줘 맞을 자신이 있을 놈이다.
잠시 앉아서 수업받느라 미칠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담배 하나를 더 피우고 났을 때 문이 열리고 그저 그렇게 생긴 프랑스 여자애가 들어섰다.
가슴이 더럽게 컸다.
강찬이 일어나 맞이하자 여자애가 자신을 알리스라고 소개했다.
“인사해. 여기는 석강호, 그리고 이쪽은 공트 자동차, 한국지사장 스미든.”
셋이 정신 사납게 인사를 나누었다.
“알리스. 저 사람을 가르쳐야 돼. 해 볼래?”
“잠깐 얘기 좀 나눠 보고.”
그녀가 다가가자 스미든은 하나 남은 눈알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튀어 나갈 듯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석강호와 학교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알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부터 수업할게. 보수는 그때 결정하고. 오케이?”
“그래. 가라.”
“빠이.”
아쉬워하는 스미든을 놔두고 알리스가 병실을 나갔다.
“나 내일부터 다른 방을 쓸랍니다.”
스미든이 진지하게 부탁한 내용이었다.
“한국말 배울 건데 아무래도 다예루 쉬는 데 방해될 것 같아 그렇소. 노우. 차니. 그런 눈빛은 날 의심하는 거요?”
“조용히 해라.”
스미든이 얼른 입을 다물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는 거요?”
“내일부터 병실을 따로 쓰겠단다.”
“개새끼.”
석강호가 강찬이 하고 싶었던 욕을 대신 했다.
간호사를 찾아 개인 병실 하나를 더 부탁한 강찬은 석강호가 눕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굿나잇, 차니.”
스미든의 인사를 강찬은 그냥 맥없는 웃음으로 받았다.
믿음이 안 가지만 어쩐지 애처로운 놈.
오른쪽 눈을 뺏은 사람에게 인사를 할 수밖에 없는 놈의 모습이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라.’
강찬은 속으로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
금요일에도 수업을 마친 후에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엔 석강호 혼자 있었다.
침대에 기대 TV를 보고 있었는데 며칠 병원에만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뭘 매일 와요?”
“스미든은?”
“오전 내내 핸드폰 개통 어떻게 하냐고 병원 직원들에게 지랄을 떨더니 한국어 가르쳐준다는 여자애 온 이후로 꼼짝도 안 합디다.”
“잠깐 갔다 올게.”
강찬은 석강호의 바로 옆 병실에 도착했다.
공연히 못 볼 꼴을 보느니 노크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문을 연 것은 알리스였다.
“차니.”
볼이 붉게 물든 것이 수상했으나 이것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 피곤하다.
“오셨소?”
스미든이 침대에 걸터 앉아 강찬을 맞았다.
“너 공트에 연락 되냐?”
“될 거요.”
“그럼 전화해서 퇴원할 때까지 한국지사에 병원을 알리지 말라고 전화해. 이쪽으로 관계자들 오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진다. 돈 찾는 대로 집 구해줄 테니까 그리고 옮기기로 하고.”
“알았소. 전화기 있소?”
강찬은 전화기를 꺼내주었다.
“가만. 지금 거기가 몇 시지?”
“오전 11시쯤 됐을걸?”
“국제 번호 아쇼?”
“쯧!”
강찬이 폭발하기 직전에 알리스가 나서 아예 번호를 눌러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 같지만, 더 끼어들지는 않았다.
스미든이 충분히 이유를 설명한 후에, 관련 부서 담당 직원과 따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프랑스 본사에 연락할 일은 그 직원을 통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알리스, 잠깐 자리 좀 비워줘.”
“오케이!”
그녀가 흔쾌히 밖으로 나갔다.
“스미든. 샤흐란이 없어졌는데도 프랑스 본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되는 건 뭐야?”
“차니. 프랑스에서 샤흐토 브니므의 영향력은 상상을 뛰어넘어요. 오죽하면 내가 아시아 영업 담당 이사가 됐겠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한국 대사관에도 연락이 갔을 거요.”
“그럼 이번 마약 거래를 본사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거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런데 샤흐란 일이 이렇게 무마되고 내가 순조롭게 지사장이 된 걸 보면 나중에라도 알았단 소릴 거요. 일 커져 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 그냥 덮자는 식이잖소.”
“더러운 새끼들이네.”
스미든이 힐끔 문밖을 보았다.
“다음 주에 공트 자동차 발표회 있단다.”
“알리스 데리고 휠체어 타고 가면 되겠소.”
“그래라. 저녁은 어떻게 할래?”
“둘이 잠깐 나갔다 오렵니다.”
강찬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 나오자 기다란 대기 의자에 있던 알리스가 냉큼 병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한국말을 배우는 것보다 애가 먼저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커피 다 식었소.”
석강호가 투덜거리며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