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22화 (2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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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상상하지 못했던 일. 1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묘하게 웃음도 나왔다.

공트 자동차? 부사장? 이사?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거라면 반갑다고, 이런 모습이지만 살아 있다고, 손 붙잡고 어깨 마주쳐 가며 웃으면 그만이다.

자존심을 세우거나 욕심 부릴 생각도 없다.

강대경의 강유모터스가 손해만 보지 않도록 배려해달라 부탁해보고 아니라면 현실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런데 샤흐란과 스미든의 얼굴에는 분명 더러운 흔적이 묻어 있었다.

언젠가 16살 아프리카 소녀를 덮쳤다가 죽도록 얻어맞고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의 얼굴과 눈빛이었다.

스미든 이 개새끼.

다시는 대원들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 일을 단 한 번 들춰본 적 없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 보였던 눈빛을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강찬은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뛰뛰.

시선을 들자 익숙한 차가 눈에 들어왔다.

한번 오른 살기는 쉬 없어지지 않았다.

강찬이 차에 오르자 석강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살폈다.

“어디 마음 놓고 담배 피우며 이야기할 만한 곳으로 가자.”

“누구요?”

강찬이 씨익 하고 웃어주었다.

“어떤 새낀지 몰라도 더럽게 불쌍하우.”

“스미든.”

석강호는 의외로 태연했다.

딱 1초만.

그다음, 그의 얼굴이 천천히 강찬에게 향했다.

“앞에 봐라.”

끼이이익.

큰 도로에 끼어들다 사고가 날 뻔했지만, 강찬은 내내 살벌한 눈빛으로 웃고만 있었다.

“스미든이 살아 있소?”

강찬의 표정을 읽은 다음이다.

석강호는 어디서, 어떻게 확인했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샤흐란과 같이 있더라.”

“허허. 허허허.”

“두 새끼가 같이 나왔어. 공트 자동차 부사장과 이사로.”

“예에?”

“앞에 보라니까!”

“씨발. 딱지 하나 끊었네.”

도로에 설치된 카메라가 휙 하고 머리 위로 지나갔다.

“어딨소?”

“남산 호텔.”

“갑시다.”

강찬이 씨익 웃었다.

“하룻밤 시간을 내기로 했다.”

“그럴 게 뭐 있소” 당장 가서 목을 따버리지.“

“그거보다 그놈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먼저야. 자칫 달려갔다가 죽도 밥도 다 엎은 꼴이 되면 억울하잖아.”

석강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이 죽고 바로 나였으니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새끼들이 자동차 회사 부사장이니 이사가 된 건, 뒈졌다가 바로 일어났다는 것보다 말이 안 되지 않소? 특히, 나보다 무식한 스미든 그 새끼가 말이오?”

솔직히 무식한 걸로는 다예루가 좀 더 앞섰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뭔가 우리가 모르는 게 있겠지?”

“하아! 그냥 갑시다.”

강찬이 고개를 저었다.

“준비가 필요해. 알아봐서 이해할 만하면 이대로 넘어가겠지만, 아니라면 목을 완전히 돌려버릴 테니까.”

석강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다예루의 옛 모습이었다.

20분쯤 달려 도착한 것은 미사리였다.

큰 도로에서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골목을 타고 돌아가자 야외에 탁자를 내놓은 커피숖이 있었다.

가장 바깥쪽 탁자에 앉아 둘 다 강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커피 두 잔!”

직원이 다가오다 곧바로 다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요?”

강찬은 석강호가 건네주는 담배를 받으며 호텔에 도착해서 나올 때까지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싸움은 석강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함께하자고 할 것도 아니고, 빠지라고 내칠 수도 없는, 순전히 다예루 본인이 결정할 싸움이었다.

설명을 마치자 전투 직전의 묘한 설렘이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났다.

“이 씨발 놈들이…….”

“너도 그렇지?”

“말이 되는 소릴 합시다. 스미든 그 무식한 개새끼가 공트 이사면 난 프랑스 장관쯤 해야 맞소.”

석강호는 진심으로 스미든이 자신보다 더 무식하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언제 할 거요?”

“작전을 좀 짜야지. 조용한 장소도 필요하고.”

최소한 사람들 눈을 피할 장소는 준비해야 한다.

석강호가 이를 깨물며 신음을 뱉었다.

어쨌든 저쪽도 죽음의 땅에서 살아왔던 놈들이다.

게다가 이쪽은 고등어에 중년 아저씨 몸뚱이인데 저놈들은 원래 제 몸을 가졌다. 자칫 이쪽의 목이 돌아갈 위험도 각오해야 했다.

“오광택이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소?”

강찬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고 아쉽다고 깡패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차소연이나 문기진 같은 아이들이 당할 때 어떻게 일진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쯧!”

강찬은 마음을 굳혔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우리끼리 하자.”

“알았소. 그럼 적당한 장소를 찾는 게 가장 큰 문제요.”

“일단 알아보고, 정 안 되면 차에 구겨 넣어서 외곽으로 나가지 뭐.”

“푸흐흐흐흐.”

석강호도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어서 누가 보면 살인 계획이라도 짜는 사람들처럼 보기 딱 좋았다.

“일단 화요일로 생각하고 있어.”

석강호가 헤벌쭉 웃었다.

다예루의 미소였다.

전투, 그것도 치열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싸움을 앞에 두었을 때, 단검을 뽑아들 때 보였던 웃음이었다.

“나 설레우.”

“나도 그런다.”

둘이 동시에 바보처럼 웃어댔다.

쓱.

석강호가 소매로 입가를 닦은 다음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강찬의 전화가 울렸다.

미쉘이었다.

“빙고!”

강찬은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알로!”

[“챠니! 집안일이 잘 해결되었나 봐!”]

“아니! 조금 꼬였어.”

[“미안. 목소리가 좋아서 잘 된 줄 알았어.”]

“괜찮아. 내일 어디서 봐?”

[“호텔에서 볼까?”]

“그거 좋다!”

[“너무 적극적이라 묘한데?”]

“함께 나와. 내가 저녁 낼게.”

[“비양! 어느 호텔? 몇 시?”]

“남산. 저녁 7시.”

[“오케이, 챠니! 나 벌써 뜨거워! 내일 봐!”]

전화기를 탁자에 올려놓은 강찬이 넉넉하게 웃었다.

석강호는 당연히 궁금한 얼굴이었다.

이왕 시작한 이야기다.

강찬은 어떻게 미쉘과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석강호에게 있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전에 없던 여복이 이리 다 몰리는 모양이오?”

“부럽냐?”

석강호가 “푸흐흐흐.” 하면서 웃었다.

“내일 호텔에 차 가지고 와.”

“화요일에 한다지 않았소?”

“내일 저녁에 호텔 로비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미셸 쪽 친구 애들이 워낙 눈에 띄니까 보기만 한다면 스미든은 반드시 온다.”

“오!”

석강호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늦게 들어와도 혼자 방에 있을 놈이 아니잖냐? 무조건 클럽을 기웃거리겠지. 그러니까, 내일 여차하면 차 대고 있다가 끌고 가자.”

“알았소.”

“내일 서정모터스에서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우선 화요일 저녁에 약속은 잡아둘게. 대신 내일 스미든이 미끼를 물면 놈을 먼저 족치고, 쯧! 정 안되면 화요일에 한꺼번에 모가지를 비틀어버리지, 뭐.”

“기대되우.”

이놈이 이렇게 잔인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나?

“왜 그러쇼?”

“얼굴 좀 펴라. 누가 보면 당장 모가지 비틀러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대장 눈이나 보고 말하쇼. 검문에 걸리면 수갑부터 채우고 보겠소.”

할 말 없다.

아무리 풀어보려고 해도 번들거리는 눈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이참에 아버님 일도 해결 봅시다.”

“그러면 좋지만, 그 건과 이 건은 전혀 다른 일이야.”

석강호가 새로 꺼낸 담배를 문 채로 강찬을 보았다.

“대원들의 죽음에 담긴 비밀을 푸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 회사 일을 여기에 얹으면 둘 다 흐려진다. 전리품 먼저 보는 놈치고…….”

“살아남은 놈은 없다.”

강찬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지만 전투에서 이기면 전리품은 반드시 따라온다.

“거 눈빛 좀 얼른 푸쇼. 배고파요. 요 앞에 된장 백반 맛있게 하는 집 있으니까 그리 갑시다.”

“네 인상이나 좀 풀어라.”

석강호가 커다랗게 눈을 끔벅였다.

“밥 먹자. 먹다 보면 풀리겠지.”

“그럽시다.”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일이 석강호를 만나는 순간부터 설레는 일로 바뀌었다.

어쩌면 피 튀는 싸움을 만나서 반가운 건가?

강찬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사는 삶을 살면서 늘 어깨에 매달렸던 짐을 풀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강유모터스의 일이 잘 풀릴지 모른다는 기대도 생겼다.

실패? 가난?

그런 건 겁나지 않는다.

강대경이나 유혜숙은 그런 것으로 바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강대경의 일이 제대로 풀렸을 때 유혜숙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저녁을 먹는 내내 화제는 두 놈이었지만, 이야기의 진전은 없었다.

강찬을 내려준 석강호는 집에 가는 대로 좋은 장소를 검색해보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안 돼도 상관없다.

가는 길에 한적한 곳을 택하면 된다.

아무튼, 가능하다면 스미든을 먼저 족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한 놈이다.

혼자 떨어지면 공포를 느끼는 데다, 말을 맞출 틈이 없어진다.

“다녀왔습니다.”

강찬이 들어섰을 때 강대경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주걱으로 무언가를 젓고 있었다.

“엄마가 많이 안 좋다.”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아빠가 함께 가볼 생각이야.”

죽을 끓이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옷 갈아입고 인사드릴게요.”

담배 냄새가 날 거다.

강대경이야 모른 척하겠지만, 유혜숙은 다르다. 거기다 몸까지 안 좋은데 먼지가 가득 묻은 옷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강찬이 안방에 들어갔을 때 강대경은 유혜숙의 앞에 작은 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밥은?‘

기력을 모두 빼앗긴 사람처럼 유혜숙은 힘든 얼굴이었다.

“선생님과 된장 백반 먹었어요.”

안방에 있는 협탁의 의자를 움직여 유헤숙의 침대 옆에 앉았다.

“얼른 먹어봐.”

강대경이 죽과 물, 그리고 마른반찬 하나를 올려주었다.

“미안해.”

“당신이 미안하면 난 어떡하냐?”

“당신이 왜?”

“다 나 때문이잖아. 미안하다. 그러니까 날 봐서라도 좀 먹자. 응?”

유혜숙이 수저를 들고는 강찬을 보았을 때였다.

“그래도 오늘 찬이가 멋지게 시간을 벌어줬어. 임원 둘이 혀를 내두르더라고.”

강대경이 낮의 상황을 완벽하게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이야기를 풀어냈다. 물론 결론은 다르지 않으니까 딱히 거짓말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유혜숙은 더 듣고 싶은 얼굴이었다.

“프랑스 공트 자동차 부사장과 아시아 영업 담당 이사가 나온 거잖아. 우리 전무하고 상무가 통역 통해서 끙끙거리는데 찬이가 유창하게 말을 한 거야.”

죽을 입에 넣으면서도 유혜숙은 강대경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부사장하고 이사가 깜짝 놀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우리 통역이 그걸 전해주느라 바쁘더라고. 전무하고 상무는 연신 혀를 내두르고.”

유혜숙이 흘깃 강찬을 보았다.

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그렇게 좋을까?

강찬이 일주일의 시간을 만들어냈다는 말로 이야기를 끝냈을 때 유혜숙은 기쁨과 걱정이 완벽하게 뒤섞인 표정이었다.

“내일이나 모레, 도와줄 분과 연락이 될지 몰라요.”

강대경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거짓말이면 적당히 하자는 의미였다.

“큰 기대는 마세요. 아무리 늦어도 수요일에는 결과를 알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채팅하던 분 중에 샤흐란과 친분이 정말 두터운 분이 있더라구요. 연락해 주기로 했어요. 수요일까지 결과를 알려주겠대요.”

믿어도 될까?

강대경과 유혜숙의 얼굴에 완벽하게 쓰인 글이었다.

“그냥 해보는 거죠. 이렇게 다 같이 있는 힘껏 해보고 안 되면 또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얼른 기운 내세요. 이러고 계시니까 사는 맛이 하나도 안 나요.”

“미안해, 아들.”

유혜숙이 강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잡아주려는 것이었다.

강찬은 상체를 기울여 유혜숙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병원에 있는 저도 살려내셨잖아요. 세 식구 같이 있으면 되죠.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세요.”

“그래. 그러자. 고마워, 아들.”

강찬은 유혜숙의 등을 다독여 주고 눈물이 맺힌 얼굴을 억지로 들여다보았다.

유혜숙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강찬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들었지? 찬이가 저렇게 버티는데 당신하고 내가 힘 빠져 하면 되겠냐? 미안하다. 그렇지만, 기운 내주라.”

“미안해.”

“뭐가 자꾸만 미안해?”

강대경도 유혜숙을 조심스럽게 안고 다독여주었다.

***

방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켰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요.”]

빨리도 갔다.

“왜?”

[“칼질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았소.”]

에효! 이 무식한 새끼!

강찬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요. 지하까지만 잘 끌고 가서 차에 태우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겠수. 칼은 내가 알아서 준비하겠소.”]

“알았다.”

[“저놈들 상대하는데 그 몸으로 괜찮겠소?”]

듣고 보니 석강호를 욕할 일만은 아니었다.

“어떡해서든 빨리 끝내야 돼. 시간이 길어져서 샤흐란이 경찰에 연락이라도 하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진다.”

[“그놈이 밤에 제 방에 오는 게 이상한 걸 거요.”]

이놈이 정말 스미든보다는 덜 미련한가?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알았소. 그리고 내일 내 카드를 줄 테니 우선 그걸로 쓰쇼.]”

“그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푹 자두쇼.”]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쯧!”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전의 다예루만큼이나 힘이 센 스미든이다.

석강호가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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