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7화 (1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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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맙다.

강찬이 정신을 차려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걱정하는 석강호의 얼굴이었다.

“정신이 좀 드쇼?”

차에서 그에게 기댄 이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빨갛고 투명한 두 개의 비닐 팩이 경쟁하듯 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칼에 베인 자리가 많아서 하마터면 미싱을 돌릴 뻔했소.”

피식.

“물 한 잔 줘.”

“알았소.”

석강호는 먼저 발꿈치 쪽으로 움직여 레버를 돌렸다.

끼익. 끼익. 끼익.

강찬의 상체가 서서히 올라왔다.

한결 자세가 편했다.

그는 석강호가 건네준 물 한 컵을 달게 마셨다.

“몇 시냐?”

“새벽 1시…, 15분이요. 집에는 내가 전화해 놨소. 오늘 우리 집에서 잔다고 했는데 나중에 전화 좀 해달랍디다.”

네 귀퉁이에 침대가 하나씩 있는 사인용 병실이었다.

“뭐 좀 드시겠소?”

석강호의 질문이 끝나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오광택이 들어섰다.

그는 침대 옆의 빈 의자를 끌어다 석강호의 옆에 앉았다.

“담배 하나 줘.”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으나 오광택은 두말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주었다.

“윽!”

왼손을 뻗으려던 강찬은 인상을 버럭 쓰고는 다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찰칵.

“후우.”

오광택이 담뱃갑을 디밀자 석강호도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다예. 커피 한잔 먹자.”

“알았소. 커피?”

오광택은 짧게 고개만 저었다.

석강호는 건너편 침대 옆에서 커피를 준비했다.

“왜?”

강찬이 오광택을 보며 던진 질문이다.

“저분이 선생님이라던데 맞냐?”

강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꼴 보니까 형님 소리 듣기는 다 틀렸구만.”

오광택은 서른 후반으로 보였다.

“설명하자면 길어. 그냥 그러려니 해.”

“앗! 뜨거!”

석강호의 비명에 두 사람이 풀썩 웃었다.

“여깄소.”

강찬은 봉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정말 좋았다.

“덕분에 당분간 강남은 걱정 없게 됐다. 경찰이랑 기자 새끼들한테 약도 적당히 쳐 뒀고.”

강찬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뭐? 내가 해줄 건 없냐?”

“학교에만 껍쩍대지 마.”

오광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 새끼들, 그것 때문에 우리끼리도 말 많았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럼 됐어.”

“후우! 간단해서 좋구나.”

오광택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 바닥에 네 소문이 쫙 돌았거든. 내가 호적이 잘 못 돼서 그렇지 내 친구고 우리 식구라고 떠들긴 했는데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미련한 깡패 새끼들.

어쩌면 핑계를 대도 20년이나 잘못된 호적을 생각해 내는 건지.

말하는 놈이나 그걸 잠자코 듣고 있는 놈이나.

강찬은 내키지 않았으나 이미 흘러버린 일이었다.

“명함은 선생님께 드렸다.”

“오광택.”

강찬이 부르자 그가 시선을 주었는데 제법 날카로웠다.

“사는 모습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내 주변에서 얼쩡대지는 마. 특히 학교는.”

한순간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강찬과 오광택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강찬이라고 했지?”

오광택은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였다.

“내가 호적이 어쩌고 하는 엿 같은 소리를 떠든 건 주민증 떠나서 널 인정했다는 소리야.”

후루룩.

긴장이 서서히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석강호의 커피 마시는 소리가 절묘하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오광택이 저도 모르게 힐끔 시선을 빼앗겼다가는 기가 막힌 모양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졌다. 야! 이 소리, 저 소리, 다 때려치우고 그냥 친구 하자, 씨발 놈아. 그래야 나도 다른 쪽에서 학교에 손대는 걸 막을 명분이 생길 거 아니냐?”

오광택은 아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과목이요?”

“체육.”

“후휴. 그런 거 같았소.”

오광택이 커다란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애들 세워둔 건 그냥 놔둬. 울산 쪽에서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아서 그래.”

“알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애들한테 말하고.”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먹으면 안 돼.”

농담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간다.”

오광택은 맥이 빠진 얼굴로 손을 들어 보이곤 병실을 나갔다.

“저놈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지 않수?”

“그러게.”

사실 지하에서 떼로 달려들었으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들어가.”

“뭔 소리요?”

“집에 가라고. 한 시간씩 일찍 나오라고 해놓고 첫날부터 애들 실망시킬 거야?”

석강호도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아! 아까 한 12시까지 미영이가 미친 듯이 문자 하던데 걔랑 뭔 일 있었소?”

“내가 첫사랑이란다.”

“푸흐흐흐.”

“에이, 더러운 새끼.”

석강호가 입에서 흘러나온 침을 쓱 닦았다.

“단순한 애 같던데 어쩌려고 그랬소?”

“그냥 꼬였어.”

석강호는 숨을 크게 쉬며 진정하는 것 같더니 재차 “푸흐흐흐.”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걔 장래희망이 생각나서 그렇소.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애라 선생들 관심이 대단한 아이 아니오?”

강찬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애 많이 낳는 여자라고 적었습디다. 담임이 설득해서 외교관으로 바꿨지만.”

“그게 뭐가 웃겨?”

“어? 안 우습소?”

석강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에휴!”

강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김미영이나 저런 걸로 웃어대는 석강호나,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가.”

“여기 있다가 새벽에 학교에 바로 갈라우.”

그것까지야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강찬은 그러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 집에 전화해 주쇼.”

“전화기를 집에 놓고 왔는데?”

“내 것으로 하면 되지요.”

“아서라. 혹시 내가 급하게 연락할 일 있으면 꼬이잖아. 그나저나 퇴원은 언제 하라디?”

“한 달 생각합디다.”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겠구나?”

강찬은 가장 먼저 유혜숙을 떠올렸다.

어떤 핑계로 일주일을 견디게 할 것이며, 미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은 또 뭐라 설명할 것인가.

“그러지 말고 집에 교통사고라고 그래.”

“교통사고요?”

“그래. 밖에 있는 놈 중 하나가 가해자라 그러고.”

석강호가 고개를 틀고 무언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뭐라도 핑계를 대야지.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건 그렇소.”

“오광택이한테 연락해서 의사랑 입을 좀 맞춰놓으라고 하고.”

석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다른 건 몰라도 애들은 꼭 챙겨라. 첫날부터 내가 빠지는 것도 그런데 잘못하면 아예 병신 만든 꼴이 된다.”

“알았소.”

석강호가 눈빛을 반짝였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당직 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갔는데 담배 피운 흔적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깡패들과 연결된 병원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중년 의사는 의외로 인상도 좋고, 서글서글했다.

새벽이 되자 석강호가 아쉬운 얼굴로 돌아가고 강찬은 다시 잠이 들었다.

병원, 주사약에 취해 드는 잠.

강찬은 깨어났을 때 아프리카의 전장으로 돌아가 있었으면 싶었다.

***

간호사가 들어와서 링거 줄에 주사약을 삽입하고 체온과 맥박을 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물 한 잔만 줘요.”

“네. 잠깐만요.”

간호사가 도구를 한쪽에 챙길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까만 양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넓적한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냄새가 제법 좋았다.

“쉬셨습니까? 형님. 식사하십시오, 형님.”

그런데 돼먹지 않은 형님 대우에 강찬은 와락 짜증이 솟구쳤다.

그냥 내쫓아 버릴까?

‘아서라.’

그러나 그는 이를 깨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굳이 병원 밥을 가져오라는 것도 어쭙잖은 짓이란 생각에서였다.

녀석은 공손하게 쟁반을 한쪽에 놓고, 레버를 돌려 침대의 머리 쪽을 세운 다음, 옆에 붙은 간이 식탁을 강찬의 앞에 놓아주었다.

간병인 출신인가 싶을 정도로 능숙한 동작이었다.

병신.

분명 학생 때는 일진이라고 설쳤을 텐데 동경하던 깡패가 돼서 밥시중을 들 줄은 몰랐을 거다.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은 녀석이 덮개를 벗겼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녀석이 상체를 푹 꺾으며 하는 인사했다.

스물, 혹은 스물하나?

제 부모 밥상은 이렇게 안 챙겼을 놈이다.

강찬은 입맛이 썼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를 마음은 없었다.

“하아!”

쟁반을 내려다본 강찬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하얀 쌀밥은 좋다.

임산부는 아니지만, 피를 많이 흘렸으니 미역국까지도 이해한다.

그런데 아침부터 갈비와 굴비는 뭐고, 어제 회칼을 휘두르다 입원한 놈 밥상에 예쁘게 뜬 회가 놓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식한 깡패 새끼들.

강찬은 기가 막혀서 앞에 서 있는 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당황한 듯 눈을 껌벅였다.

놔두자. 저놈이 무슨 죄가 있겠냐.

강찬은 버릇처럼 왼손으로 밥그릇을 잡았다.

뜨끔.

뭐지?

석강호가 가기 직전까지 움직이지도 못했던 팔이다.

그런데 무심코 밥그릇을 잡는데 뜨끔하기만 하지 더 큰 통증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저놈이 들어오는 바람에 간호사가 물을 안 주고 그냥 갔다.

“물 한 잔 주라.”

“예? 형님?”

“물 한 잔 달라고!”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 소리가 이렇게 거슬린 적은 처음이었다.

놈은 물을 들고와서 따르기 전에 인사하고 따르고 나서 또 인사했다.

예의가 바른 놈 같지만, 집에서는 절대 저러지 않을 거다.

이런 개새끼가 위치가 높아지면…….

강찬은 물을 마시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시선의 한쪽에서 눈은 갈비에 두고, 침을 꿀꺽 삼키는 놈이 보였다.

에효, 불쌍한 자식아.

그래. 너나 나나 엿 같은 인생.

밥 한 끼 같이 못 할 게 뭐 있겠냐.

“가서 밥 한 그릇 가져와.”

“아닙니다, 형님.”

강찬이 정색을 하며 시선을 들자 녀석이 얼른 달려나갔다.

놈은 거짓말처럼 곧바로 들어왔다.

복도에 밥그릇을 쌓아 놓은 것도 아닐 텐데 재주도 용하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에스프레소 잔을 든 것처럼 보였다.

“앉아.”

“아닙니다, 형님.”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앉아, 이 새끼야.”

“예, 형…….”

“형님 소리하지 말고!”

“예, 형님.”

놈은 또 허리를 굽히고 인사한 후 침대 맞은 편에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앉았다.

“이거, 이거, 이거, 세 개는 다 처먹어. 그 밥하고.”

강찬이 ‘확!’ 하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자 대답하려던 놈이 입을 꽉 다물었다.

“나 깡패 싫어한다. 그러니까 그냥 빨리 처먹어라.”

강찬이 밥을 떠 넣자 놈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놈은 얌전히 먹으려고 애쓰는 모양인데 갈비와 굴비, 그리고 회 접시를 금방 비워냈다.

적당히 식사가 끝났다.

“커피 한 잔 타주고 담배 하나 주라.”

“예…….”

“확!”

형님 소리를 꿀꺽 삼킨 놈이 쟁반을 치운 후, 담배를 건네주고 커피를 타 왔다.

“이름이 뭐냐?”

“장근둡니다, 혀……ㅇ.”

강찬이 번득하고 노려보는 바람에 말끝이 이상했다.

“몇 시쯤 됐냐?”

“8시 10분입니다.”

“장근두.”

“예…….”

장근두가 강찬의 눈치를 살폈다.

“에효! 아니다.”

손목을 그어준다면 모를까, 저런 놈에게 뭐라 말한들 깡패짓을 때려치울 리가 있겠나.

커피를 다 마신 종이컵에 담배를 끄자 장근두가 컵과 쟁반을 들고 나갔다.

강찬은 아무래도 몸 상태가 이상해서 목을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다음은 어깨다.

이상했다.

쇄골 아래를 찔렸을 때 그 끔찍했던 통증은 어디 갔을까?

왼손을 살짝 쥐어보았다.

뻐근하다.

뭘까? 어떻게 된 거지?

강찬은 시선을 돌리다 새것으로 바뀐 링거액을 보았다.

“아!”

간호사가 링거줄에 넣어준 주사액이 생각났다.

진통제 때문이리라.

풀썩.

강찬이 웃을 때였다.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유혜숙이었다.

문에서 멈칫한 유혜숙이 한걸음에 강찬에게로 다가왔다.

“괜찮니?”

눈이 빨갛게 변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죄송해요.”

유혜숙은 붕대를 칭칭 감은 강찬의 몸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뭐래? 얼마나 다친 거래?”

울음과 섞여 나온 질문이다.

“괜찮대요. 일주일이면 나갈 수 있을 거라던데요?”

“이따가 아버지 오시면 선생님을 만나 볼게. 정말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보세요. 괜찮다니까요.”

강찬은 웃는 얼굴로 팔을 돌렸다.

뜨끔뜨끔. 욱신욱신.

몸뚱이가 무슨 짓이냐고 반항을 해댔지만, 강찬은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작전은 실패였다.

왼쪽 어깨부터 팔뚝, 그리고 손을 칭칭 감싼 붕대는 강찬이 보기에도 흉측했다.

“조심했어야지.”

“그러게요.”

유혜숙은 강찬의 움직임을 보며 조금은 안정을 찾은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지난번에 입원했던 병원 알아볼 거야. 가서 이거저거 검사도 받아보자.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대.”

천하의 강찬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회칼을 배달하던 차에 깔렸다고 우길 수도 없고.

“밖에 못되게 생긴 사람들이 잔뜩 있던데 다른 일은 없는 거지?”

“그럼요.”

유혜숙은 차츰 이성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겉옷을 벗어 옷장에 걸며 병실을 수상한 눈으로 살펴보기까지 했다.

“무슨 병원이 담배 냄새가 이렇게 심하지?”

“그러게요.”

“이이는 뭐하는데 안 와? 아들이 다쳤다는데 빨리 병원부터 옮기게 해야지.”

병원을 옮기지 않을 핑계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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