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2화 (1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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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난 그런 거 몰라.

기분 좋게 돌아왔다.

“우리 아들!”

유혜숙이 환하게 맞아주는 것도 좋았다.

“오늘 뭐 했어?”

“가평 개울에 갔었어요. 백숙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눴고요.”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시네. 어쩜 교복도 이렇게 깔끔하게 세탁해 보내셨어.”

담배를 함께 피우는 걸 보면 어떤 선생님이라 할까?

대충 둘러대고 방에 들어와 보니 백설공주에게서 문자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석강호 선생이랑 가평에 다녀왔어. 나 잔다.]

강찬도 문자로 답을 하고는 실제로도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난 강찬이 거실로 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브런치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들 배고프면 어떡해? 그러니까 얼른 먹어. 엄마는 화장해야 해.”

“나는 아예 안 보이냐?”

“이이는 꼭 애처럼 이래. 배고프면 얼른 먹으면 되잖아!”

유혜숙이 눈을 흘기자 강대경은 얌전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된장국.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콩나물 무침. 정체가 불분명한 볶음.

유혜숙과는 많이 풀어졌지만, 아직 강대경과는 어색했다. 특히나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더 그랬다.

노력하자. 45일.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마음으로.

“자동차 수입하는 일은 잘되세요?”

“글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결과를 봐야지?”

강찬이 콩나물 무침을 한 젓가락 집었을 때였다.

“아! 지난번에 네가 통화해 준거 있잖냐. 그거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들 자랑을 해봤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럴까?”

“예.”

이번에는 강대경이 콩나물 무침을 집었다.

강찬은 좀 더 노력하기로 했다.

“이번에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사람들 통역은 누가 해요?”

“그건 왜?”

“지난번 일이 있어서 그런지 통역을 잘 쓰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주의하마.”

대화가 끊기며 식사도 끝났다.

“여보! 빈 그릇은 씽크대에 넣고, 반찬은 냉장고에 좀 넣어줘.”

“예! 예!”

유혜숙은 귀신같이 식사가 끝난 것을 알았는데 이런 것은 순전히 감각의 영역이라 강찬도 내심 놀랐다.

씻고 얌전한 면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어떡해. 늦었어. 아 참. 여보. 내 옷이랑 빽 어때?”

유혜숙이 강대경을 닦달해서 “환상적이다.”라는 답을 듣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차가 지하주차장에서 나오자 유혜숙은 설레는 표정에 긴장까지 하는 눈치였다.

“아, 참. 그럼 네가 프랑스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 나올래? 네 자랑도 할 겸, 혹시 통역이 잘못하는 건 없는지 봐주기도 할 겸.”

“이이는 애 힘들게! 왜 애를 그런데 데리고 가려고 해?”

“그래? 그런가?”

폭군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대경이 조금은 박력 있으면 싶었다.

강찬은 강대경에게도 추억 하나쯤 선물하고 싶었다.

“갈게요.”

“아휴. 우리 아들 힘들어서 어떡해. 그래도 네가 가주면 아빠 어깨가 훨씬 더 펴질 거야. 그렇죠, 여보?”

“그럼, 생각만 해도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간다.”

일요일 오전이라 길이 한가해서 약속 장소에 바로 도착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택시를 타지. 강대경도 쉬고 싶을 텐데.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아들 자랑 실컷 하고.”

“으응. 여보오. 안녕.”

닭살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강찬은 얼른 강대경에게 인사했다.

식당은 차에서 내린 바로 앞이었다.

마흑땅 류떼흐.

프랑스의 거리 이름을 간판으로 달았다.

우리말로 하면 ‘마산집’이나 ‘전주집’쯤 되려나?

아무렴 어떠냐. 밥 한 끼 먹으면 끝일 식당이다.

강찬이 유혜숙을 따라 들어갔을 때 식당은 제법 붐볐다. 한국인 손님 반, 프랑스인 반.

“여기야.”

안쪽에서 손을 드는 중년 여인이 보였다.

‘지고 싶지 않을만하겠다.’

유혜숙의 친구 성희는 한눈에 봐도 세련된 차림이었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두르고 있었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그래. 찬이야. 오랜만이다. 아프다더니 괜찮아?”

“예. 많이 좋아졌어요.”

“어머! 손은 아직 안 나은 거니?”

“예.”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다.

벽을 타고 놓인 긴 의자 앞에 4인용 탁자가 놓인 형태다.

강찬은 유혜숙을 안쪽에 앉게 하고 자신은 바깥쪽에 앉았다.

바로 옆으로 프랑스와 한국 혼혈로 보이는 아가씨 셋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강찬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섹시한 바비인형? 딱 그랬다.

김성희. 유혜숙의 20년 친구. 남편은 금융인.

그의 아들 방대식. 마르고 안경 썼으며 중키에 신경질적인 남학생. 대산외고 3학년.

강찬은 재빨리 상대의 특징을 파악했다.

“그래서 얘! 요즘은 돼지엄마들이 잡아주는 족집게 과외를 따로 하거든. 내가 한 자리 빼줄 테니까 너도 찬이를 꼭 거기에 넣어.”

김성희는 열등생을 지적하는 부모처럼 검지를 휘저어가면 잘난 척을 해댔다.

“영어 성적은 어때?”

“조금 해.”

“조금? 정신 차려, 얘! 외고도 아닌 일반고라면 전교 탑은 끊어야지. 아휴. 널 보면 정말 내 속이 다 답답해.”

방대식이 허은실처럼 강찬을 깔아 보았다.

걔가 어떻게 됐는지 가르쳐줄까.

강찬은 유혜숙을 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풀이 죽어 어깨를 죽 늘어트린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했다.

실망스럽게도 브런치는 부페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서빙하는 직원들은 죄 한국인이다.

유혜숙이 어떡해서든 강찬의 불어 실력을 뽐내려고 해도 기회가 원천봉쇄된 꼴이 아닌가. 차라리 저녁 만찬이라면 지배인을 불러서 멋들어지게 주문이라도 할 텐데.

“무슈!”

김성희는 빤히 한국인인 종업원을 부를 때도 잘난 체를 있는 대로 떨었다.

“물 좀 더 줘요.”

물 한 잔 주문도 한국어로 할 거면서 말이다.

“우리 애는 외고 다녀서 그런지 벌써 간단한 불어도 해.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자기소개가 가능한 거야. 내가 왜 이런 식당 찾아다니는 줄 아니? 엄마들이 노력한 만큼 애들이 하거든. 너 이거 아주 중요한 거다-아!”

“우리 아들도 불어 해.”

유혜숙이 겨우 한 마디 냈을 때였다.

“어머? 어디 학원 다녔어? 대치동? 청담동? 개인 레슨했어? 어머! 어머! 우린 앤 프랑스 대사관에서 소개받은 프랑스 학생에게 배운 건데. 찬이는 어디서 배운 거야?”

“그게 인터넷으로 혼자…….”

“뭐어?”

김성희와 방대식은 대놓고 피식거리는 웃음을 웃어댔다.

유혜숙이 강찬을 힐끔 보았다.

풀 죽은 눈이다.

분하고, 맥빠지고, 허탈한 눈이었다.

오늘을 참 많이 기다렸는데 상황이 이렇게 풀려버린 것이다.

‘쯧. 차라리 뭐 좀 특별한 걸 주문해볼까?’

너무 유치하다.

그리고 그 정도는 방대식도 할 것만 같다.

강찬이 잠시 고민하고 있으려니 자꾸만 처음 시선을 끌었던 옆자리 대화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김성희의 잘난 척을 안 들으려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같은 혼혈이라도 둘은 프랑스인 외모고 하나는 한국인 외모다.

문제는 그들의 대화였다.

프랑스인은 한국어를 모르고 한국인은 프랑스어에 어둡다.

계집애들은 한국어와 불어를 교묘하게 섞어가며 시종일관 그 짓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께 밤에 만난 애는 겨우 두 번 하더니 힘이 빠져 흐물흐물했다는 둥, 흑인 애 중에 30㎝가 넘는 애를 만났더니 물건이 배를 지나 입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는 둥, 거기에 “그 흑인 지금 어딨니?” 와 “넌 정말 입으로 나올 거야.”까지 거침이 없었다.

계집애 셋은 완전 무아지경이다.

매력적인 금발, 파랗고 깊은 눈, 또렷한 이목구비, 마네킹처럼 똑 떨어지는 몸매. 그런데 대화는 타락한 바비인형 밤 생활 백서 수준이라니.

프랑스가 결혼생활 중에도 섹스파트너가 있을 만큼 개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시궁창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강찬이 하도 기가 막혀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보았을 때였다.

“설마 알아듣는 건 아니지?”

불어.

강찬을 똑바로 보며 바비 인형이 지껄인 말이다.

기가 찬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아들었어?”

“일부러 들은 건 아니고 이쪽 대화가 지루해서 그런지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능숙한 불어에 계집애 셋이 화들짝 놀라며 강찬을 보았다.

그것뿐이랴?

김성희와 방대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강찬과 바비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바비인형은 강찬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불어를 잘하네? 너 여기 살아?”

“그런 건 아니고, 브런치 겸 가족모임 정도?”

바비인형이 유혜숙을 슬쩍 보며 눈짓을 했다.

“여기 옆에 얼간이 하나가 겨우 인사 정도 하고 다른 두 여성 분은 불어를 전혀 못 해. 그러니까 굳이 인사 안 해도 돼.”

유혜숙이 소원하던 불어다.

그것도 눈부신 미모의 프랑스 여자와 능숙하게 주고받는 불어. 그녀는 단박에 “우리 아들, 인터넷으로 불어를 배웠어. 천잰가 봐.”와 “애 아빠가 프랑스에서 전화가 왔는데 있잖아.” 하며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바비인형은 한국말을 알아듣는다.

유혜숙의 자랑에 의미심장한 미소로 강찬을 보았다.

“그냥 아줌마 한 명 기 살려줬다고 생각해라. 나중에 기회 되면 신세 갚을게.”

“좋지. 난 미쉘. 이쪽은 쎄실, 신디.”

“강찬.”

바비 인형의 소개에 강찬은 짤막하게 이름만 댔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한번 도와줄게. 그럼 입장이 확 살 것 같은데? 어때? 얼간이 골려주는 것도 재미있겠고?”

“번거롭다.”

바비인형이 제 입술을 쪽 빨아들인 다음 입을 열었다.

“너 은근히 매력 있다. 오늘 밤 한번 할래?”

곁에 있던 두 친구가 “우오!”하는 탄성을 질렀다.

내용을 알아들었다면 남은 인생 내내 프랑스를 저주했을 유혜숙은 좀 더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됐다.”

“왜 한 번 하자. 응? 너라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원하면 우리 셋, 함께 해도 돼. 우리 자주 그래. 어때?

“쯧!”

이거야 스미든이 환생한 것도 아니고.

우스운 것은 곁에 있는 두 계집애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강찬을 주시하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하자. 우리 셋이 가족 앞에서 화끈하게 체면 세워줄 테니 너는 밤에 불끈 세워줘. 좋지?”

이것들이…….

강찬이 화를 내거나 말릴 겨를도 없이 바비 인형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찬의 의자 뒤로 움직였다. 게다가 친구 둘이 강찬의 좌우에 서자 온 식당의 시선이 단번에 강찬의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정말 멋진 아드님을 두셔서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마치 프랑스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불어가 능란하네요. 인사드릴게요. 저는 미쉘이고요, 여기는 쎄실. 그리고 얘는 신디예요.”

일부러 빠르게 지껄이는 불어다.

그 와중에 미쉘은 강찬의 뒤통수에 가슴을 딱 붙이고 비벼댔다.

김성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방대식을 보았다.

“인사하는 거 같은데요……?”

방대식 역시 당황한 표정은 마찬가지였다.

교활하고 사악한 미쉘은 왜 아무 반응이 없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강찬을 제외한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순진한 척 눈을 껌벅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가슴을 연신 강찬의 뒤통수에 비벼대면서 말이다.

“아들, 뭐래?”

유혜숙이 미쉘을 향해 순진한 웃음으로 답을 하고는 강찬에게 물었다.

“그냥 저랑 이야기가 즐거워서 인사라도 하고 가고 싶다네요. 이쪽부터 미쉘.”

바비인형이 고개를 까닥하며 유혜숙과 인사를 나눴다.

“얘는 쎄실. 그리고 얘가 씬디래요.”

“어머. 그랬구나. 반갑다고 인사해 줄래?”

강찬이 뒤를 돌아보다가 상체를 의자에서 멀리 떼었다. 실크 브라우스 안에 맨 가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어서였다.

“고마웠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으니 인제 그만 가라.”

“에이. 그건 계약 위반이지. 얼른 전화번호 줘. 안 그러면 지금부터 한국말로 떠들어서 망신 줄 거다.”

강찬은 이를 꽉 깨물면서도 억지로 웃어주었다.

“그만하자.”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 달아올랐거든. 빨리 결정해. 안 그러면 너 후회할 거야.”

하마터면 끌고 나갈 뻔했으나 강찬은 초인적인 의지로 견뎌냈다. 오늘은 진 싸움이다. 유혜숙이 볼모로 잡혀 있어서 방법도 없다.

강찬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미쉘은 번호를 스마트폰에 담고 고개를 불쑥 디밀었다.

“촌스럽게 왜 이래? 인사 하자는 거잖아. 귀염둥이씨.”

쪽. 쪽.

미쉘이 양쪽 볼에 소리만 요란한 인사를 마치자 남은 두 계집애도 흐뭇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전화번호 틀리지 않겠지?”

“쯧. 그런 짓은 안 한다.”

“알았어. 갈게. 우리 셋 기대한다!”

계집애 셋이 나가자 다른 테이블의 시선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혜숙아. 찬이가 한 인터넷 강의가 뭐야?”

“글쎄. 우리 아들이 직접 찾은 거라서 난 잘 몰라.”

김성희가 부러움과 시샘 가득한 눈으로 강찬을 보았다.

“그냥 프랑스어 문법책 하나 사서 읽고요, 불어로 된 사이트와 채팅 방 찾아다녔어요.”

김성희는 잡아먹을 것처럼 방대식을 노려보았는데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앞머리에 옮겨붙을 것만 같았다.

“대식이 너! 불어 수업을 좀 더 강하게 짜야겠다.”

방대식은 울기 직전처럼 입술을 말아 넣었다.

브런치가 끝나고 김성희가 방대식을 다그쳐 먼저 출발했다.

“아들! 엄만 너어어-무 행복해. 흐흐흐흐.”

유혜숙이 백설공주를 연상시키는 웃음을 지었는데 강찬은 반응조차 못 했다. 그녀가 강찬의 팔짱을 끼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신의 오른팔에 매달려 의지하는 느낌.

슬쩍 돌아볼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강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괜찮았어요?”

“그럼! 엄만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래도 갈 것 같아.”

유혜숙은 실제로도 껑충거리는 걸음이었다.

좋은 추억이 되었겠지?

그랬으면 싶었다.

하지만 강찬은 오늘 일을 빨리 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강찬의 추억이 아니라 몸뚱이 주인의 것이다.

추억? 강찬이 가진 가족에 대한 추억?

‘난 그런 거 몰라.’

그래. 프랑스로 떠날 강찬에겐 이게 어울린다.

강찬은 행복해하는 유혜숙을 보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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