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오브블랙필드-11화 (1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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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난 그런 거 몰라.

“나랑 해야 해! 뽀뽀-오!”

밤새 5층 건물 크기로 변한 김미영을 피해 죽으라 달려야 했던 강찬은 눈을 뜨고 나서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라고 원.”

목이 칼칼했다.

백설공주는 못생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쁘장한 데다 매력적인 눈과 환상적인 가슴을 가졌다.

조숙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또래보다 유치한 수준의 고등어일 뿐이다.

선생님이나 연예인을 따르는 것처럼 한순간의 감정에 빠져든 거다.

그러니 아침마다 삼각 텐트가 쳐진다고, 시멘트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힘을 주체하기 어렵다고 해도 백설공주에게 평생토록 상처가 될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어를 상대하는 것은 범죄다. 범죄.

상쾌한 아침을 성기발랄하게 시작한 바람에 기분이 찜찜했다.

강찬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붕대를 감은 왼손을 높이 쳐들고 오른손으로 하는 샤워다.

아프리카의 사막지대에서 대치가 길어지면 제일 지랄은 물이다. 하루에 1.5리터 생수 3병을 지급하는데 통상 반은 마시고 반은 샤워하는 데 쓰곤 했다. 그래서 덩치가 큰 다예루는 이틀에 한 번씩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거실에 강대경과 유혜숙이 앉아 있었다.

“샤워했니?”

“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어디 가려고?”

“예?”

유혜숙은 혹시나 하는 얼굴이었다.

“이번 주는 쉬는 주야. 몰랐어?”

“토요일이잖아요.”

“그래. 오늘이 두 번째 토요일이잖아.”

강찬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오늘 학교가 쉰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요? 전 또 가는 날인 줄 알았어요.”

“그렇지? 착각한 거지?”

유혜숙과 강찬이 각기 안도하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오후 수업만 없는 줄 알았더니 격주로 하루를 온전히 쉬나 보다.

아침을 먹고 강대경은 출근했다.

강찬은 방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볼까 하고 컴퓨터를 켰다.

웅웅웅.

그때 문자가 왔다.

[뭐하쇼?]

석강호가 분명하리라.

이상하게 강찬은 문자가 불편했다.

“여보세요?”

[“나요.”]

“왜?”

[“오늘 뭐 할 거요?”]

“몰라. 갑자기 쉰다고 해서 좀 당황스럽다.”

[“괜찮으면 나오쇼. 옷도 전해 줘야 하고. 대략 30분이면 아파트 앞에 도착할 거요.”]

이놈이 왜 이러지?

하기야 휴가를 나와서도 늘 붙어 다니긴 했었다.

“알았다. 올 때 담배 좀 몇 갑 사와라. 신분증이 없으니 영 불편하다.”

[“알았소.”]

30분은 여유가 생겼다.

강찬은 컴퓨터를 끄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거실로 나갔다.

유혜숙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그리고 주방. 거실에 연결된 베란다.

강찬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유헤숙의 어깨가 외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얼굴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행복이 그녀의 외로움을 지워 나간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이런 존재인가.

문을 열고 나올 때를 외롭게 기다리다가 고작 얼굴 한번 보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왜? 어디 가?”

“석강호…,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어요.”

“선생님을? 왜?”

“이번 일로 친해져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요. 아파트 지날 길이 있다고 점심 같이 먹재요.”

놀란 것은 풀렸으나 아직 걱정은 남은 얼굴이었다.

“걱정 마세요. 지난번에 벗어놓은 교복도 받아야 하고요.”

“아! 그 선생님!”

유혜숙은 이제야 안심이 되는가 보다.

“엄마가 그 옷 빨아 놨어. 그리고 올라오시라고 해. 인사도 드리게. 아니다. 엄마가 나갈까?”

생각만 해도 뻑뻑한 상황이 연출될 소리다.

“아뇨. 다음에 기회를 만들게요.”

유혜숙은 거실 한쪽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그리고 지갑에서 만 원권 다섯 장을 꺼내주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이젠 조금 적응이 된다. 더구나 외로워 보였던 어깨가 생각나서 짜증도 오르지 않았다.

“에고. 우리 아들.”

유혜숙이 커다랗게 팔을 벌려 강찬의 목을 안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노력하기 위해서, 거부하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강찬은 상체를 숙였을 뿐이다.

그런데 유혜숙이 그를 꼭 안는 순간.

“우리 아들, 고마워. 사랑해.”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토닥여 주는 그 순간에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울컥 솟구쳤다.

툴툴거려도 서운함을 삼키며 버텨준 여자, 병원에서 잘못되면 함께 죽으려 했던 여자. 그리고 고작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방에서 나와 바라보는 눈길 한 번에 행복해하는 여자.

엄마.

“흐흐흑.”

강찬은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무려 20년 만이다.

서울을 떠날 때도. 떠나기 전날 더럽게 불행한 엄마가 얻어맞는 것을 보면서도 터지지 않았던 눈물이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들. 엄마는 세상에서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 누가 뭐래도 엄마가 지켜줄 거야.”

“흐으으. 흐으으으.”

참으려 할수록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지난 20년간 고였던 것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한 번만, 단 한 번만, 지금처럼 안기고 싶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간절하게 엄마의 품을 그렸었다.

사실은 날 사랑한다고.

미운 자식이 아니라 정말은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많이 힘들었구나. 우리 아들.”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눈물로 흥건히 젖었는데도 유혜숙은 계속해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하아!”

커다랗게 숨을 토해내고 나자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유혜숙은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그를 살핀다.

“우리 아들, 괜찮지?”

“예.”

쑥스럽기도 하고, 낯이 간지럽기도 하고.

강찬은 소매로 눈물을 쓱 닦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잘 갔다 와.”

“예.”

아직 ‘엄마’라는 말은 속으로만 나왔다.

누군가와 부딪치는 것이 싫어서 강찬은 계단을 이용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흔들렸던 마음이 현관을 나설 때쯤 단단하게 굳어진 것이다.

강찬은 벤치에 앉아서 붕대를 들여다보았다.

약해지면 안 된다.

“정신 차려, 인마. 널 좋아하는 게 아냐.”

그것이 진실이다.

만약 강대경과 유혜숙이 강찬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줄까.

“어차피 떠날 거잖아.”

억울하게 죽어간 대원들을 이대로 묻어둘 수는 없다.

그 외에도 방학만 기다리는 단순이 백설공주도 피해야 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아들이라 감싸는 강대경과 유혜숙을 위해서도 정답은 프랑스였다.

“쯧.”

자꾸만 남의 부모를 욕심내는 것 같아서 강찬은 불쑥 짜증이 올라왔다.

뛰뛰.

그때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소리하고는.

강찬이 올라타자 차는 바로 출발했다.

“오래 기다리셨소? 어? 눈병 나나 봅니다?”

“바람이 확 지나가더니 그래서 그런 가봐.”

“큰일이요. 전엔 모래바람 속에서도 잘 견디던 양반이. 아프리카는커녕 프랑스에서 탈락하겠소.”

석강호는 강찬이 울었을 거란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에 두 사람은 분명 그렇게 살았다.

다예루의 눈이 빨갛다면 강찬도 눈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디 가?”

출근 시간이 갓 지나서 그런지 차는 제법 잘 빠졌다.

“집에 있어봐야 뭐할 거요? 그냥 교외에 나가서 닭이나 한 마리 삶아 먹고 낮잠 한숨 늘어지게 자고 옵시다.”

“닭을 삶는다구?”

“푸흐흐. 촌스럽게 왜 이러쇼? 돈 3만 원이면 다 삶아 줍니다.”

살면서 다예루에게 촌스럽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았을 때 그는 지금의 모습에 제법 잘 적응한 거 같았다.

“다예.”

강찬이 이전의 음성으로 부르자 석강호가 웃음기를 지우며 그를 보았다.

“너는 지금 모습에 만족하냐?”

석강호가 피식 웃었다.

“올 것이 왔구려.”

“올 것?”

“내가 그랬소. 다른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데 미쳐버릴 것 같습디다. 이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막말로 돌아갈 방법도 없고, 말한다고 믿어줄 것도 아니고.”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석강호는 학교와 집에서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걸 잡아준 게 마누라와 딸이요. 이 몸뚱이는 나이가 있어서 용병으로 가기도 틀렸고, 내가 훌쩍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싶습디다.”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좀 외로움을 타잖수.”

“지랄한다.”

“아무튼, 그냥 우주가 팍 미쳐서 기회를 줬다면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고 잘 살아보자. 뭐 이런 생각을 했소.”

“마누라 때문은 아니고?”

“우리 솔직 합시다. 생긴 거야 프랑스가 훨씬 낫소.”

“그건 그렇지.”

강찬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평범하게 생기긴 했는데 내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달려드니까 점점 예뻐 보입디다. 그래서 마음 잡고 있는데 대장이 불쑥 나타난 거요.”

강찬이 피식 웃었다.

“거 왜 커터칼 건네받을 때 있잖소? 그때 혹시 대장이 몸뚱이를 빌린 건가 싶기는 했었소.”

“그래서 반복된 훈련 어쩌고 그랬구나?”

“에휴! 외롭지 않아서 좋수. 말 통하는 사람 있어서 좋고. 프랑스로 간다니 할 말은 없지만, 솔직히 아쉽소.”

차는 이미 도심을 빠져나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여긴 정말 평화롭지?”

“푸흐흐. 등교한 지 이틀 만에 칼부림을 해놓고 그런 말이 나오쇼?”

“푸흐흐흐흐.”

강찬도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 월요일에 깡패들 만나기로 했다.”

“어디요? 같이 갑시다.”

“아서라. 번거롭다. 참! 수업은 뺐냐?”

“월요일 오전에 결재받으니까 오후부터 빠질 거요.”

“쯧!”

“그렇게 힘드쇼?”

“됐다.”

말해 뭐할까.

강찬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것들이 온전히 내 것이라면.

억울하게 죽어간 대원들이 없다면.

뻥 뚫린 길을 따라 한 시간쯤 달린 석강호는 가평 근처의 계곡에 차를 세웠다.

닭백숙. 사이다 탄 막걸리. 낮잠. 무릎까지 차는 물.

모든 것이 정말 좋았다.

마치 치열한 전투 중에 상상으로 그려내던 휴식을 받은 느낌이었다.

찰칵.

“후우!”

식당에서 내준 평상에 걸터앉아 두 사람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대장은 지금까지 몇이나 죽인 거 같소?”

뜬금없는 질문이다.

강찬이 힐끔 돌아볼 때 석강호는 쓰게 웃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백 명은 넘게 죽였겠지요?”

“그 정도 되지 않겠냐? 이 좋은 분위기에서 그건 또 왜?”

“가지 마쇼.”

“후우! 내 성격 모르냐? 받은 만큼 꼭 돌려주는 거랑…….”

“대원들 챙기기.”

“알면서 그래.”

“쩝. 아쉬워서 그렇수.”

“이게 좋아.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더 좋을 거 아냐. 그때 여기 한 번 더 오자.”

“하아! 그럽시다.”

“고맙다.”

“뭐가요?”

“이런 건 그냥 넘어가, 인마!”

두 사람이 동시에 “푸흐흐흐흐.” 하고 웃었는데 석강호가 침을 흘리는 바람에 “에이, 더러운 새끼.” 하는 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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