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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하고만 할게.
그가 옥상에서 내려오자 한쪽에 풀 죽어 있던 김미영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교실에서 기다리랬더니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뭐가 불안했을까?
내려오는 동안 강찬은 주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가능한 한 유혜숙을 편안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약속도 월요일로 미뤘다.
한 달 반 후면, 껍데기뿐인 아들이지만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유혜숙에게 좋은 추억쯤은 남겨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 여긴 탓이다.
이전의 어머니와 나누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파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찬아. 우리 걸어가면 안 돼?”
교문을 나서자 김미영이 어렵게 꺼낸 말이다. 걷자는 말을 허은실이 오늘 시간 내달라는 것보다 더 어렵게 한다.
그래. 조금 더 걷는다고 뭐 달라지는 거 있겠냐?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미영은 기쁜 얼굴로 길을 잡았다.
“있잖아, 남자애들은 그게 그렇게 좋은 거야?”
뭔 소리지?
“야동도 보고 그러잖아. 그거 해주는 여자애가 제일 좋은 거라던데 정말 그래?”
야동은 몰라도 김미영의 말뜻이 뭔지는 알 것 같아서 강찬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은실이는…….”
“야.”
김미영이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누가 보면 오해할 정도로 붉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너는 공부 잘하잖아.”
김미영은 풀이 푹 죽은 채로 걷고 있었다.
“나는 은실이처럼 매력이 없는 거지.”
이게 고 3이 할 소린가.
중학생이 월반했나?
“촌스럽고, 애들이 놀릴 정도로 가슴만 크고.”
강찬은 참외로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붙들었다.
“그것두 하면 할수록 더 잘한대.”
‘젠장!’
강찬은 이를 꽉 깨물었다. 백설공주인 줄 알았더니 유치한 데다 앞 뒤가 꽉 막힌 벽창호다. 한 마디로 경험 없이 덩치만 큰 거다. 왜 이렇게 정신연령이 낮은지 모르겠다.
허은실은 너무 까졌고, 백설공주는 유치원생 같고.
학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그나저나 무식한 놈이 각오를 세우면 정말 무섭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강찬은 퍼뜩 허은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배를 가지러 갈 때 치마를 내리지 않더니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영락없이 스미든이 된 꼴이다.
“너 나 좋아하냐?”
말을 뱉고 보니 성기에까지 닭살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미칠 노릇이다. 질문이 떨어지자 김미영이 볼과 눈이 벌겋게 돼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이 돌탱이가 지금 혹시……?
“내가 첫사랑인 거고?”
“응! 태어나서 처음이야.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소변도 마렵고 해.”
강찬은 그만 허파로 웃고 말았다.
백설공주는 모자랄 정도로 유치한 아이가 맞다.
강찬은 백설공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난 네가 은실이 안 만났으면 해. 혹시 그거 때문이면 나도……. 나도 해 볼게.”
“어후!”
의도하지 않은 한숨이 커다랗게 나온 다음이었다.
“내가 그거 몰라서 그런 거면 다른 애랑…….”
이걸 매몰차게 거절하면 이년도 죽을 거다. 아니면 걸레가 되지 않을까? 그걸 못해서 자길 밀쳐냈다고 평생 강찬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은실아.”
그런데 하필이면 강찬이 이름을 잘못 부르고 말았다.
멈칫한 김미영이 그를 돌아볼 때는 이미 눈물이 흥건히 올라 있었다.
“미안하다. 그런 게 아니라…….”
확 다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강찬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죽이거나 죽지는 말자.’
속으로 엄청나게 다짐했다.
그런데 애들이 왜 이렇게 죄다 극단적일까?
그 지옥 같은 아프리카에서 사는 아이들보다 더.
“은실이와는 아무 일 없어. 어제 싸운 것 때문에 깡패들이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그런 것뿐이야.”
백설공주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흘깃 본 시선 속에서 백설공주는 울고 있었다.
젠장!
정말 이런 건 전공도 아니고 적성도 맞지 않는다.
유혜숙이나 김미영보다는 칼을 들고 달려드는 적들이 훨씬 편안한 느낌이었다.
“내일 뭐 할 거야?”
“괜찮아.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돼. 나 매력 없는 거 나도 알아.”
울음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하지만 바닥을 향한 눈과 음성에 담긴 차가움이 강찬을 자꾸만 자극했다.
“너 내 거 해라.”
김미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앞이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면서 왼손에 붕대를 감은 남학생을 마주 보고 있다.
혀를 차며 지나가는 노인들의 시선에도 강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나랑도 하는 거야?”
얘는 도대체가 몇 살인 거야?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앞에서 한 말이 전부 거짓이 된다. 왜 하필 허은실의 이름이 툭 튀어나와서 이리될까? 천하에 도움이 안 되는 년.
백설공주는 간절한 눈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정말?”
뭔가 역할이 바뀐 것 같았지만,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네 거 되는 거야?”
강찬은 그만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그리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서 그런 거야. 정말 좋아서. 오늘부터 너 내 거. 절대로 다른 남자애들 좋아하면 안 되고, 오로지 나만 봐야 하고.”
“너하고만 할게.”
씨발.
그거 좀 빼고 말하자!
강찬은 백설공주의 별명을 ‘단순이’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까지 걸어오는데 대략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그동안 김미영은 재잘재잘 말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내가 왜 백설공주야?”하는 질문도 있었다.
강찬은 간간이 말을 받아주다가 “그건 비밀이다.” 하면서 넘어갔다.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 앞머리가 촌스러워서 그렇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미영아!”
빼빼하게 마른 아줌마가 날카롭게 김미영을 불렀다.
백설공주가 달려가고 강찬은 느긋하게 걸었다.
“엄마, 찬이. 찬이 알지?”
소개하는데 노려볼 것만은 아니라 강찬은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최소한의 인사만 했다.
“너는 학원 안 가니?”
날이 뾰족하게 선 질문이었다.
강찬이 힐끔 돌아보니 김미영은 학원에 가야 했는데도 거짓말을 하고 걸어온 것이 분명했다.
“사정이 생겼습니다.”
“학생이 무슨 사정? 대학 안 가면 사람 구실 못 한다는 거 몰라? 적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은 가야지. 너 요즘 소문도 안 좋더라.”
난처해하는 김미영 앞에서 모친은 도박하다 월급을 탕진한 남편을 책망하듯 강찬을 몰아붙였다.
그녀의 시선이 강찬의 왼손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저는 그만 들어가 볼게요.”
하고 강찬은 집으로 향했다.
더 서 있다가 괜히 욱하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였다.
“조심해서 들어가!”
김미영의 인사에 강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손만 들어주었다. 뒤에서 “너 저런 애랑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엄마는 그 꼴 못 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신경 쓸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하고 바랐다. 잘하면 혹 하나가 절로 해결될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공연히 벤치에서 얼쩡거리다가는 마주치기 쉽다.
강찬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왔니?”
“예.”
유혜숙이 조심하는 표정으로 강찬을 맞았다.
노력하기로 했던 일이다. 안 되더라도 한다고 다짐했던 일이다. 길어야 한 달 반이면 끝난다.
“뭐 먹을 거 없어요?”
“응? 먹을 거?”
배가 고픈 건 아니다. 그저 말을 걸기 위한 핑계였다.
“어쩌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떡하니?”
그런데 하필이면 질문이 좋질 않았다. 유혜숙이 냉장고를 열었지만, 반찬거리 외에 치즈 한 쪽이 남았을 뿐이었다.
“기다려. 엄마가 얼른 가서 과일 사올게.”
유혜숙은 정말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얼굴이었다.
먹을 것을 찾는 것이 저 여자에겐 저리도 좋을 일이었나 보다.
“같이 갈까요?”
손지갑을 급하게 들고 나오던 유헤숙이 멈칫했다.
당황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짧은 순간에 빨갛게 충혈되고 있었다.
“같이 가요. 들고 오기 무겁잖아요.”
“괜찮겠니?”
“뭐가요?”
강찬은 가방을 놓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녀가 삼킨 말이 ‘나 미워하는 거 아니었니?’ 또는 ‘정말 같이 가도 되겠니?’ 정도 되리라는 짐작에 강찬도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이다.
침묵 속에 담긴 어색함을 지우고 싶었다.
“죄송했어요.”
유혜숙은 엘리베이터 문을 똑바로 본 채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잘해 주시는 거 알면서도 못되게 굴었어요. 이번 일로 충격이 커서 그랬나 봐요. 앞으로 노력할게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작은 공간이라 강찬의 음성이 조금씩 울렸다.
몸뚱이의 주인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엉뚱한 놈에게 잘해주는 유혜숙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강찬은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유혜숙은 코를 훌쩍이며 길게 편 손가락 안쪽으로 눈물을 훔쳤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강찬은 문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알아서 1층을 눌렀다.
유혜숙의 감정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가득해서 강찬은 입을 열지 못했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그동안 유혜숙을 힘들게 했던 서운함이 눈물을 통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중간에 서는 일은 없었다.
현관을 나와 실내와 다른 공기를 맡자 유혜숙이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는 오늘 너무 행복해서 세상에 부러운 게 하나도 없어.”
이렇게 사고 치고 툴툴대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놈이 저리도 좋을까?
“찬아! 우리 아빠한테 저녁 사달라고 할까?”
말을 한 그녀가 아차 하는 표정을 보였다.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죠.”
“정말?”
“예.”
눈을 커다랗게 뜬 유혜숙이 아름다워 보였다.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눈을 볼 순간은 없을 줄 알았다.
“전화해 볼게.”
아파트 단지 앞에서 유혜숙은 “찬이가 나더러 고맙다고 했어”와 “아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하는 유치찬란한 말을 쏟아붓더니 잠시 후에 장소를 정하는 모양이었다.
“아빠 회사 앞으로 오래.”
통화를 끝낸 유혜숙은 그제야 자신이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임을 알아차리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서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영동대교 사거리요.”
유혜숙이 방향을 말하고 나자 숨어있던 어색함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뭐 먹어요?”
강찬은 노력하기로 했다.
45일.
한 사람이 평생 간직할 추억을 만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유혜숙은 원래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잠시 흥분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입을 쉬지 않았다.
그중에서 “병원에 있을 때 결과가 안 좋으면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와 “서운한 눈빛을 보고 나서 사는 맛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강찬도 감정이 울렁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참! 일요일에 어디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거기 갈래? 갈 수 있어?”
“그럼요. 어딘데요?”
“너 성희 이모 알지? 그 이모가 하도 아들 자랑을 해서 프랑스 식당에 갈려고 그랬어. 엄마 유치하지?”
세상에는 이런 엄마도 있구나.
강찬은 유혜숙이 귀여웠고, 그래서 웃었다.
“하나도 안 유치해요.”
“고마워, 우리 아들. 정말 같이 가는 거다?”
“그래요. 가요.”
유혜숙은 별것도 아닌 말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강대경의 회사는 영동대교에서 논현동 쪽으로 가는 방향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니 강대경이 반가운 얼굴로 건물에서 나왔다.
“여보오!”
애교가 잔뜩 담긴 음성에 강찬도 풀썩 웃고 말았다.
“끝났어요?”
“그래! 어디 보자? 야! 우리 아들이 엄마를 옛날로 돌려놨구나.”
강대경은 유쾌하게 웃는 얼굴로 유혜숙과 강찬을 번갈아 보았다.
보기 좋았다. 진심으로 좋아 보였다.
“피이. 이이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래. 그래. 얼른 가자.”
세 사람은 그 길로 해물탕이 유명하다는 유명식당으로 향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강대경은 단골인 모양으로 주인이 꽤 반가운 체를 했다. 이왕 나선 거, 강찬은 얌전하게 인사도 했다.
주인은 마루로 되어 있는 자리에 세 사람을 안내했고, 주문은 강대경이 했다.
“나 소주 한잔 해도 되지? 운전은 당신이 하면 되잖아.”
유혜숙의 변한 모습과 강찬의 노력에 강대경도 말끝마다 웃음을 달았다.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술 한잔 마시는 것에도 동의를 구하는 강대경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좋아 보이기도 했다.
바로 앞에서 유혜숙은 강찬이 일요일에 함께 가주기로 했다는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
유쾌하게 식사를 마치고 정말이지 기분 좋게 들어왔다.
강찬은 대강 씻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혹시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러니 몸뚱이 뺏긴 것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남은 시간 동안 더 노력해 보마.”
강찬은 천장을 향해 혼자 중얼거렸다.
우우웅.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귀찮아서 가지고 가지 않았더니 아직 전원이 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 이제 학원 끝났어. 벤치에서 잠깐 봐도 돼?]
김미영이 보낸 문자였다.
어떻게 하지?
전화기에 찍힌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자?]
문자는 번거롭다.
담배도 하나 피우고 싶고.
강찬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응. 얼마나 걸려?”
[“나 벤치에 있어.”]
강찬이 풀썩 웃고는 기다리라고 한 다음 전화를 껐다.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안방에서 급하게 “응!”하는 소리가 들려서 강찬은 바로 현관을 나섰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모양이다만 뭐 알고 한 것은 아니다.
현관을 나서자 백설공주는 여전히 바닥을 차고 있었다.
“찬아!”
김미영이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금방에라도 안길 것처럼 뛰어온 김미영은 그의 앞에서 촐싹촐싹 뛰었다.
‘에효! 이 모질아.’
“너 들어가야 하지 않아? 어머니가 걱정하실 텐데?”
“학원이 일찍 끝났어. 원래 자습하다가 학원 버스 타고 와야 하는데 내가 그냥 온 거야. 나 30분쯤 시간 있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그런 거 미안해.”
“괜찮아. 어른들이 그럴 수도 있지. 밥은 먹었어?”
“샌드위치. 이따가 집에 가서 뭐 좀 먹으면 돼. 그리고 나 살 뺄 거야.”
“뺄 게 어딨다고 그래. 그냥 보기 좋아.”
“정말? 으흐흐흐흐.”
김미영이 바보처럼 웃었다.
“배고프면 가자. 내가 돈가스 사 줄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강찬은 조금씩 김미영이 편해졌다.
“아니야. 나 살 뺄 거야. 그래서 은실이보다 날씬해질 거야.”
“난 그런 타입 싫어한다. 너처럼 적당한 게 좋지.”
“그래? 정말 그런 거 맞지?”
어디 담배 피울 자리가 없나?
강찬이 여기저기 으슥한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였다.
“우리……, 지하실 갈까?”
김미영의 말에 강찬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백설공주.”
“응!”
“너랑은 깨끗하고 좋은 곳에서 할 거야. 방학하면 어디 1박 2일로 여행 가자. 바닷가로. 그렇게 하자.”
주홍색 불빛에서 김미영의 눈이 촉촉하게 젖은 것과 볼이 붉게 상기된 것이 그대로 보였다.
“대신에…….”
또 뭐가 있지?
“나 네 거라는 거 확인하게 뽀뽀는 그 전에 해줘. 다른 애들은 다 한대.”
이런다고 때리면 안 된다.
‘때리지 말자. 때리지 말자.’
김미영은 강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뽀뽀는 네가 기말고사 전교 1등 하면 할게.”
김미영의 놀란 얼굴을 보며 강찬은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방학이면 프랑스로 사라질 계획이니 참으로 멋진 변명을 찾아낸 것이다.
솔직히 자신의 임기응변에 감탄까지 했다.
“나 지금껏 쭉 1등 했어. 이번에도 꼭 그럴게!”
김미영의 답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